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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 앞에 서는 신앙 (행 5: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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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도행전 1-4장을 요약해봅시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 부활, 승천, 오순절 성령 강림, 그 성령의 역사로 온전히 하나 되는 공동체가 됩니다. 자기의 재산과 소유를 팔아 나누는 삶과 담대한 사도들의 증언으로 교회에는 5천명, 3천명 씩 회개하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그러나 이런 성령의 역사에 반대하는 세력이 나타나는데 바로사탄의 세력입니다. 사탄은 복음의 확장을 일으키지 못하도록 베드로와 요한을 결박, 투옥합니다. 이것은 교회의 외부로부터 오는 시험이었지만 이 시험은 서로 더 견고한 믿음을 붙잡아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5장에서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사건이 나옵니다. 이것은 교회 내부로부터 오는 시험과 우리 밖에서 오는 환난보다 우리 안에 숨겨진 내적인 죄가 얼마나 더 무서운가를 보여줍니다.

  우리는 의문을 가집니다.  ‘아나니아 삽비라 부부의 죄가 뭐 그리 큰 죄인가?’

‘자기 것 꽉 붙잡고 다른 사람에게 내 놓지 않은 것에 비하면 얼마나 선한가?’

‘이것이 콱 쓰러져 죽을 만큼 심각한 죄인가?’

  그러나 성경의 대답을 보십시오. (행 5:3) “베드로가 이르되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탄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성경은 이들 부부가 땅값의 일부를 감춘 것은 사람이 아니라 성령(하나님)을 속인 것이라고 합니다. 왜일까요? 초대 교회 안에 이런 유무상통의 제도가 생긴 것은 사람의 제안에서 생긴 것이 아니라 성령의 역사임을 말해줍니다. (31-32; 34-34) : 이 본문은 성령께서 역사하셔서 교회의 일치를 가져왔고, 성령의 역사를 통해서 그 은혜를 받은 사람들에 의해서 이것이 시작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자기의 소유를 팔아서 가난한 자를 구제하고, 내 것 네 것이 없이 하나가 된 것은 성령님께서 하신 일입니다. 그런데 아나니아가 지금 자기의 소유를 팔아서 (그것이 비록 일부라고 할지라도)숨긴 것은 성령의 감동을 통해서 온전한 하나가 되는 것을 방해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령님을 속인 것이요, 그 사역을 방해한 것입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의 죄는 위선과 거짓의 죄였습니다. 그들의 죄는 전부를 바쳐야 하는데 일부만을 바친 죄가 아니라, 일부만을 바치고도 전부를 바쳤다고 하나님 앞에서 거짓말하는 위선과 거짓의 죄였습니다.

  위선과 거짓은 우리의 안에서 아주 미묘하고 조용하게 움직이는 죄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쉽게 감지하지 못합니다. 사람들은 이것을 큰 죄악으로 인식하지 못하고 심각성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죄악은 자랍니다. 우리 안에 숨겨진 죄악이 무서운 것은 우리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그 죄가 우리를 점령하기 때문입니다. (약 1:15)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 즉 사망을 낳느니라.” 사망을 출산하는 그 죄는 맨 처음 우리 안에서 다른 사람에게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작은 것으로 잉태되었다는 것에 주의해야 합니다.

  오늘 여러분 안에 머물고 있는 작은 죄가 있습니까? 이것은 별것 아니라고 하는 생각이 드는 죄가 혹시 있습니까? 그것은 나의 영혼에는 작은 마이크로 크기만큼 작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이 우리를 감찰하시는 그 현미경으로 얼마나 큰지 아십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늘 속여도 왜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 것일까요? 만약 우리에게도 아나니아와 삽비라 같은 일이 일어난다면 어떻게 될까요? 아마 아무도 살아남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 사건을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의도를 알아야합니다. 오래 참으시고 용서하시는 하나님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도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삽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그런 하나님의 은혜를 악용하지 말고, 회개하기 원하십니다.

  좋은 자녀는 참아주는 부모에 대해서 두려워할 줄 아는 자녀이듯 좋은 신자는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아는 신자입니다.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와 용서를 받아들이고 누리지만, 그 인자하신 하나님을 사랑하고 공경함으로 두려워하고 경외하는 신자입니다. 하나님이 나에 대해서 오래 참으시는 것은 그 분이 죽으셨기 때문이 아니라, 그 분이 우리를 심판할 수 있는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다만 우리에 대하여 오래 참으시고 우리가 회개하고 주님 앞에서 돌아서기를 원하시기 때문임을 알고, 그 하나님을 두려움으로서가 아니라 사랑으로 경외해야 합니다.

  오늘 우리에게 이런 일이 실제로 일어나고 있지 않지만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교훈받아야 합니다. 성경은 두 번에 걸쳐서 “이 사건을 통해서 사람들이 크게 두려워했다”고 말합니다. (5, 11절)

  우리 시대에 이런 하나님의 즉각적인 심판이 일어나는 것을 보지 못합니다. 성경의 저자이신 성령님은 시대를 초월하여 우리가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간접적으로 체험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더 생생하게 하나님의 심판과 살아계심을 체험해야 합니다. 

  오늘 성경은 우리에게 아주 단순한 메시지를 줍니다.

“우리가 비록 다른 사람을 속일 수는 있어도 성령님을 속일 수 없고 하나님을 속일수 없다.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는 것은 거짓이다.” 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외식을 가장 싫어하셨습니다. 외식하는 바리새인들을 향해서 무섭게 질책했습니다. 외식은 겉과 속이 다른 것입니다. 겉과 속을 다른 것으로 꾸미는 것입니다. 속에는 썩어가는 것들로 가득 차 있지만 겉에는 가장 향기로운 향수를 뿌리는 것입니다. 속에는 다른 사람을 미워하고 죽일 만큼의 분노를 가지면서도 겉으로는 천사의 얼굴을 하는 것입니다. 속은 거짓이 가득 차 있지만 겉에는 가장 진실하고 거룩한 척하는 것입니다. 겉으로는 죽을 죄인이라고 하면서도 나는 다른 사람보다 낫지 않느냐고 교만한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많은 것으로 위장하고, 꾸미고, 속이고, 숨긴다고 해도 결코 하나님은 속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결코 만홀히 여김을 받는 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에게 이 죄악이 있다면 회개해야 합니다. 우리도 아나니아와 삽비라와 같은 잘못에 빠질 수 있습니다. 문제는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회개할 기회를 상실했다는 데에 있습니다. 우리도 이런 거짓과 위선의 잘못에 빠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우리가 그런 죄가 있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알면서도 회개하지 않는 것에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초대교회는 아나니아의 죽음을 삽비라에게 알리지 않았을까요? 결국 이것 때문에 아나니아의 아내 삽비라도 죽지 않았습니까?

  유대의 장례는 우리와는 다르게 보통 1일 장을 한다. 그런데 죽은 사람가운데서 자살자, 국가반역자, 출교된자, 배도자 같은 사람은 하나님의 심판으로 간주했기 때문에 적절한 장례절차를 거치지 않고 시신을 지체 없이 매장했습니다. 이것은 예루살렘 교회가 아나니아의 죽음을 하나님의 즉각적인 심판으로 이해했음을 보여줍니다. 과연 하나님의 즉각적인 개입하심으로 인해 죽임을 당한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과연 지옥에 떨어 졌을까요? 명확하게 대답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이들 부부가 성령을 속이고 시험했다는 것은 그들 속에 성령이 내주하고 있었다는 것을 전제합니다. 사도행전이 계속 증언하고 있는 것처럼 그들은 회개하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받은 구원받은 신자였기 때문에 천국에 갔을 가능성을 제시합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은 이런 심판을 하셨을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백성과 교회의 순수성과 순결을 위해, 하나님은 하나님의 권위와 교회의 순결을 지키기 위해서, 이것을 통해 사람들에게 경계를 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들은 왜 이런 죄에 빠졌을까요? 그들이 소유를 팔고 가져 온 이유는 무엇일까요? (행 4:37)과 (행5:1)을 연결해서 보면 이들 부부는 가난한 자들을 구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들이 명성과 명예를 위해서였습니다. 즉 그들의 관심은 과연 사람들이 나에 대해서 무엇이라고 평가해 주는가? 오직 사람 앞에서 어떻게 보일 것인가가 중요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 앞에 있음을 망각하고 거짓에 빠졌습니다. 그들은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에 집착했습니다. 하나님 앞에 있음을 망각했습니다. 만약 그들이 하나님 앞에 있었으면 육신의 정욕대신에 성령의 소욕을, 안목의 정욕대신에 중심에 관심을 가졌고, 이생의 자랑 대신에 하나님 나라를 자랑했을 것입니다.

여러분! 나의 삶과 신앙을 되돌아보십시오. 내 삶과 신앙은 사람 앞에 있는 것인지 하나님 앞에 있는 것인지. 내 삶과 신앙이 사람 앞에 있으면 우리는 변화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있는 사람은 늘 새롭게 변화될 것입니다. 그의 관심은 사람에게가 아니라, 나를 지금도 보고 계시는 하나님께 그의 관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 것도 숨길 수 없기에, 그 하나님 앞에서는 자신의 죄와 약함을 발견하기에 그는 늘 새로워지기를 소원합니다.

  헨리 나우웬은 하버드 대학교수직을 포기하고 “데이 브레이크 커뮤니티 공동체”에서 6명의 뇌성마비 아이들과 함께 생활합니다. 그는 친구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 6명 가운데 아담이라는 청연이 있는데 그는 깨끗한 영혼을 가졌다. 나는 그의 영혼과 부딪치면서 나의 영혼을 치료한다. 나에게 붙어있던 찌꺼기, 거짓된 위선, 가면 이런 것들이 찢겨나가도록 그 영혼은 나를 치료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이 세상에서 늘 하나님 앞에서 살기를 원했던 시인이 있었습니다. 윤동주는 그의 시 서시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나뭇잎이 바람에 흔들리는 모습을 보면서 시인은 저 작은 잎새는 작은 바람에도 저렇게 괴로워하고 있는데 나는 그동안 모든 사건, 모든 말씀을 통해서 얼마나 내 곁에 폭풍과 같은 바람이 있었던가? 작은 바람에도 부르르 떠는 작은 잎새를 바라보면서 그는 그것을 생각했을 것입니다. 또 어쩌면 나의 말과 행동으로 인해 저 나뭇잎과 같이 상처받은 사람은 없는지, 바람에 떠는 저 나뭇잎처럼 내가 준 상처로 인해서 떨고 있는 영혼은 없는지... 그것을 보면서도 괴로워하는 시인은 분명 하나님 앞에 있었던 참된 신앙인이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 하나님 앞에 나와서 기도하고, 하나님께 찬송하고, 하나님을 위해서 봉사한다고...  모든 것에 하나님을 말하는 성도여!

  우리는 정말로 하나님 앞에 서 있습니까? 아니면 사람 앞에서 살아갑니까? 
(이 양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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