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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령으로 사는 자유 (갈 5:2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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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리스도인은 형이하학적 인간의 삶의 고통에서 구원 받은 자들이다.

사람들은 말, 행동, 몸짓 등으로 자신의 내면을 표현합니다. 이 표현이 그의 진실일 수도 있고 거짓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은 그의 진실과 관계없이 그가 표현하는 말과 행동과 육체적인 활동들을 통해 그의 인물됨을 평가합니다. 또한 그렇게 다른 사람들을 이해하고 받아들입니다. 이러한 방식은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쉬운 방법이고, 가장 익숙한 방식이기 때문에 언제나 사람들이 취하는 인간관계의 주요 방법론입니다.

그런데 인간 사회의 대다수의 문제는 이러한 관계와 활동들 속에서 발생합니다. 이러한 인간관계로 구성된 공동체 속의 사람들은 진정한 자유와 평강을 누리지 못합니다. 인간의 내면세계에 자리 잡은 진실에 근거하지 않고, 눈에 보이는 외적인 영역을 근거로 이루어지는 삶이 곤고하다는 것은 철학적인 역사적 평가입니다. 역사는 경험적인 것을 중심으로 사는 형이하학적 인간의 세계에는 혼돈이 있고, 초경험적 세상을 중심으로 사는 형이상학적 인간의 세계에는 질서가 존재한다고 평가합니다.

물질 중심으로 살아가는 세상에는 늘 변하는 혼돈이 있고, 정신 중심으로 살아가는 세상에는 불변하는 질서가 있다고 합니다. 보이는 세계, 변하는 세계에 기초한 인생은 그 세계의 변화에 끌려 다니며 자유를 잃습니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세계, 변하지 않는 세계에 기초한 인생은 누구의 영향도 받지 않는 자유를 누립니다. 갈라디아서는 이러한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서는 처음부터 “그리스도인의 자유”라는 하나의 큰 주제를 다룹니다. 그리스도인의 진정한 자유가 보이는 세상에서 오는지, 보이지 않는 세상에서 오는지에 대한 논증을 다룹니다.

그리스도인의 자유가 눈에 보이는 율법을 통해서 주어지지 않고, 눈에 보이지 않는 믿음을 통해서 주어진다고 논증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눈에 보이며, 수시로 변하는 육체를 따라서 오는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으며, 언제나 변화가 없는 성령을 따라서 온다고 논증합니다. 형이하학적 인간처럼 눈에 보이는 육체를 따라 율법으로 살 때는 참된 자유를 누리지 못하지만, 형이상학적 인간처럼 눈에 보이지 않는 성령을 따라 믿음으로 살 때는 그 자유를 누린다고 논증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참된 자유는 그리스도인이 누리는 모든 은혜와 평강의 기본적인 환경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형이하학적 인간의 삶의 고통에서 구원하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 주셨고, 십자가에 달리게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 우리를 혼돈에 빠트렸던 눈에 보이는 육적인 세상도 십자가에 함께 못 박혔습니다. 그래서 갈 5:24는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았느니라”라고 선언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비밀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에게는 율법을 따라 살아가는 눈에 보이는 외적인 영역들이 이미 죽은 존재들입니다. 첫째로, 우리의 “육체”가 영원히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롬 6:4는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라고 알려주십니다. 우리의 “육체”는 이미 죄에 대하여 죽은 존재로 더 이상 죄의 지배 아래 있지 않습니다.

둘째로,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은 인간적인 “정”이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여기서의 정은 “감정”이며 특히 “육체적인 감정들”입니다. “인간적이며 세상적인 감정들”입니다. 눈에 보이는 인간의 외적인 표현과 행동들에 의해 나타나는 모든 감정들이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언제나 우리로 하여금 죄와 허물에 빠지도록 유혹하며 이끄는 율법적인 감정들이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더 이상 감정의 지배를 받지 않습니다. 오직 성령의 소욕을 따른 성령의 감동의 지배를 받습니다.

셋째로,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은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욕심은 “정욕, 욕망, 탐욕”들입니다. “감정”을 일으키는 구체적인 탐심들입니다. 롬 7:5는 “우리가 육신에 있을 때에는 율법으로 말미암는 죄의 정욕이 우리 지체 중에 역사하여 우리로 사망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였더니”라고 알려줍니다. 그러나 그 정욕이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죽었습니다. 눈에 보이는 욕망을 추구하는 욕심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으므로 성령의 지배를 받는 그리스도인에게는 무기력한 존재입니다.

2. 그리스도인은 성령을 따라 성령에 의해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누린다.

우리의 자유를 빼앗아 갔던 육체, 감정, 욕심들이 이미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행위 중심으로 판단하며 살아가려는 육체, 늘 변하는 감정, 소유욕과 비교의식에 매어있는 욕심들이 이미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이것들이 이미 죄에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우리의 자유를 빼앗아 가며 우리의 삶을 혼돈으로 이끌어 가는 죄의 세력들이 더 이상 우리의 육체와 감정과 욕심을 지배하지 못합니다. 이것이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 들어 온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의 근본적인 모습입니다.

그래서 롬 6:11은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라고 권면합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죄에 대하여 죽은 자들입니다. 오직 하나님을 대하여만 산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더 이상 죄의 지배를 받는 육체의 요구를 따라가지 말아야 합니다. 죄의 지배를 받는 감정을 따라가지도 말아야 합니다. 죄의 지배를 받는 욕심들도 따라가지 말아야 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지배만을 받는 자가 되었음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지배를 받는 자는 성령을 따라 살아갑니다. 갈 5:25는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라고 권고합니다. “성령으로 살면”이라는 말은 곧 성령에 의하여 사는 것이며, 성령을 통하여 사는 것이고, 성령을 위하여 사는 것입니다. 성령이 우리 인생의 주관자가 되시고, 우리 인생의 운영자가 되시며, 우리 인생의 평가자가 되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은 그의 육체와 감정과 욕심이 더 이상 죄의 세력의 지배를 받지 않고 성령의 지배를 받아야 합니다.

성부 하나님은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령 하나님을 모든 믿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그대로 보내 주셨습니다. 행 2:38에서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라고 하신 그대로 모든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에게 성령님이 함께하십니다. 고전 6:19은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라고 확인해 주십니다.

그래서 갈 5:25는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라고 우리에게 강력하게 권고합니다. 여기서 “행할지니”라는 단어는 군대가 발걸음을 맞추어 “행진하다”라는 의미의 단어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으로 행할지니”라는 권고는 “우리가 성령으로 살아갑시다, 우리가 성령에 의하여 살아갑시다. 우리가 성령을 통하여 살아갑시다. 우리가 성령을 위하여 살아갑시다”라는 강한 권고입니다. 즉 함께 성령을 따라 인생의 길을 행진해 나가자는 권고입니다.

성령을 따라 진행해 나가는 인생의 길은 혼돈이 없습니다. 성령을 따른 마음과 믿음의 규례를 따라가는 인생에 자유와 평강이 있습니다. 성령을 통하여 배우며 따라가는 인생에 행복이 있습니다. 성령께서 주시는 인생의 질서를 따라가며, 성령의 인도하심에 순종하고, 성령께서 함께하시는 인생을 사는 것이 성령의 열매를 누리며 살아가는 행복한 인생입니다. 성령께서 인도하시는 “육체와 정과 욕심”은 더 이상 우리의 인생을 어려움으로 몰아가지 못합니다. 육체와 정과 욕심에 의해 나타나는 결과들에 매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참된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과거에 나의 육체가 범죄와 타락과 부패의 도구였을지라도 예수님께서 나의 그 육체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그 누구도 나의 육체를 근거로 나를 공격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 모든 육체가 죄에 대하여 죽고 부활의 주님과 함께 하나님을 향하여 산 자로서 성령의 지배 아래 있기 때문입니다. 나의 육체가 성령을 따라 살아가는 한 이미 지나간 과거의 육체에 의한 모든 인생은 지금의 우리에게 어떤 영향력도 행사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참된 자유입니다.

또한 과거에 나의 감정이 폭발하여 나 자신과 이웃과 공동체를 파괴하며 힘들게 하였을지라도 예수님께서 나의 그 감정을 대신하여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그 누구도 나의 감정을 근거로 나를 공격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지금 나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환경과 관계들 속에 나의 감정의 부산물들이 가득할지라도 그 상한 감정의 결과물들이 다시 나를 공격할 수 없습니다. 비록 나를 공격한다 하여도 내가 성령을 따라 살아가는 한 더 이상 나를 공격하지 못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자유입니다.

그리고 과거에 나의 욕심이 나의 인생의 방향을 이끌며 나와 관련된 모든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파괴해 놓았을지라도 예수님께서 나의 욕심을 대신하여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그 누구도 나의 욕심을 근거로 나를 공격할 수 없습니다. 내가 성령을 따라 살아가는 한 나의 욕심이 파괴했던 그 모든 관계들이나 그 욕심의 죄악 된 결과들이 더 이상 나를 공격하지 못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참된 자유입니다.

3. 성령으로 사는 자는 세 가지의 헛된 길에서 벗어나는 자유를 누린다.

죄의 세력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참된 자유를 위하여 성령을 통하여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우리가 성령께 순종할 때 우리 안에 상주하시며 우리를 인도하시는 성령께서 우리의 육체와 정과 욕심을 친히 다스려 주십니다. 그래서 갈 5:26은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격동하고 서로 투기하지 말지니라”라고 우리에게 권고합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이 성령과 함께할 때 분명히 이루어갈 수 있는 세 가지 영역을 약속하시며 권고하시는 것입니다.

첫째는 “헛된 영광을 구하여”로서 “우리가 헛된 영광을 구하는 자들이 되지 맙시다”라는 권고입니다. 여기서 “헛된 영광(케노독소스)”이란 “이유 없이 뽐내는, 자만하는, 헛되이 자랑하는, 공허한 영광을 갈구하는”이라는 뜻입니다. 즉 “잘난 체 하는 자들이 되지 말자”는 권고입니다. 우리의 육체는 잘난 체 하기 위하여 살아왔습니다. 말과 행동과 몸짓 등을 통하여 자신을 표현하며 자신의 잘난 모습을 나타내기 위해서 살아왔습니다. 또한 그것을 중심으로 모든 관계와 환경을 구성하며 살아왔습니다.

이러한 헛된 영광은 우리의 자유와 평강을 빼앗아 갔던 육체적인 삶입니다. 눈에 보이는 삶, 외모 중심의 삶, 율법적인 삶입니다. 눈에 보이는 세상을 통한 잘난 체는 죄의 세력의 지배를 받는 우리 육체의 대표적인 속성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밖에 있는 사람들은 이러한 헛된 영광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은 헛된 영광을 구하던 육체가 이미 십자가에 죽었습니다. 그러므로 성령을 따라 사는 한 헛된 영광을 구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성령으로 사는 자의 자유입니다.

둘째는 “서로 격동하고”로서 “우리가 서로 싸움을 거는 사람들이 되지 맙시다.”라는 권고입니다. 우리의 육체적인 감정들은 죄의 세력의 지배를 받아 서로를 자극합니다. 서로 성나게 합니다. 서로 분노하게 합니다. 서로 싸움이나 경쟁에 도전하게 합니다. 이것이 “격동(프로칼레오마이)”입니다. 우리의 인간적이며 세상적인 감정들은 서로를 격동합니다. 타인의 마음이나 진실이나 심리를 사랑하며 배려하지 않는 자기중심의 감정은 서로 싸움을 거는 사람들처럼 그 마음을 화나게 합니다.

이러한 “격동”은 우리의 자유와 평강을 빼앗아 갔던 감정적인 삶입니다. 눈에 보이는 대로 감정을 처리하며 서로 격동함으로써 서로의 마음에 상처를 남기고, 서로 원수 되며, 서로 분노의 감정으로 대하게 만드는 삶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밖에 있는 사람들은 자신의 감정을 죄의 세력의 지배로부터 보호받을 수 없습니다. 보이는 것들이, 그리고 죄의 세력들이 흔드는 대로 격동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이미 그 감정이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그러므로 성령을 따라 사는 한 서로 격동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성령으로 사는 자의 자유입니다.

셋째는, “서로 투기하지”로서 “우리가 서로에게 질투하는 자들이 되지 맙시다.”라는 권고입니다. 소유의식과 비교의식에 사로잡힌 우리의 “욕심”은 죄의 세력의 지배를 받아 서로를 질투합니다. 서로가 함께 사랑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누릴 대상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서로가 경쟁자로서 투기의 대상일 뿐입니다. 욕심은 서로를 사랑과 섬김의 대상으로 보지 못하게 합니다. 서로를 비교의 대상, 질투의 대상으로 보게 합니다. “투기(프흐도네오)”란 악한 의도로 질투하며 시기하는 것입니다.

투기는 우리의 자유와 평강을 빼앗아 갔던 욕심에 이끌린 삶의 모습입니다. 모든 인간관계와 환경을 소유 중심의 질투와 시기의 대상으로 만든 불행한 삶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밖에 있는 사람들은 그 욕심을 죄의 세력으로부터 방어할 수 없습니다. 죄의 세력이 부추기는 대로 이웃과 환경을 질투의 대상으로 맞이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이미 그 욕심이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그러므로 성령을 따라 사는 한 서로 투기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성령으로 사는 자의 자유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의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이 된 성도들은 “헛된 영광”을 추구하는 “육체”가 십자가에 달려 죽었습니다. “서로 격동”하게 하는 “정”이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서로 투기”하게 하는 “욕심”이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달렸습니다. 그러므로 눈에 보이는 형이하학적 세상의 율법을 중심으로 살지 않고, 눈에 보이지 않는 형이상학적 세상의 믿음을 중심으로 성령을 따라 살아갈 때 성령으로 행하는 자유자의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성령으로 사는 자유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속에서 성령으로 사는 자의 자유를 누리도록 은혜 가운데 부름 받았습니다. 더 이상 죄의 세력에 매여 율법적인 삶을 사는 자가 아닙니다. 육체도, 정도, 욕심도 성령 안에 사는 우리들을 지배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제 더 이상 그 세력에 끌려 다니지 말아야 합니다. 성령께서 주시는 능력으로 헛된 영광과 격동과 투기의 세 가지 금지요구를 준행하며 성령으로 사는 자의 자유를 회복해야 합니다. (김 종 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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