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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우리의 자랑 십자가 (갈 6: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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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곤고하고 힘든 상황의 비신앙적 해결은 문제를 더욱 어렵게 만든다.

인간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수많은 역경을 만납니다. 그 역경의 수준은 사소한 수준으로부터 태산같이 거대한 수준에 이르기까지 다양합니다. 그러나 역경을 만나는 개인의 입장에서는 그 수준에 관계없이 “역경”이라는 사실 하나로 인해 거의 동일한 수준의 곤고함을 경험합니다. 역경이라는 객관적인 사실의 수준의 문제가 아니라 그 역경을 대하는 사람의 반응 수준의 문제입니다. 하나의 공동체 속에서 전체를 바라보는 위치에 서 있는 사람의 안목 속에는 그러한 모습이 수없이 목격됩니다.

제3자의 입장에서 역경을 당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지켜보면, 어떤 사람은 태산 같은 역경도 감사함으로 감당하고, 또 어떤 사람은 사소한 역경도 태산 같은 거대한 세력에 압도된 마음으로 감당하는 모습을 목격합니다. 만일 이것을 목격한 제3자가 그들을 자신의 생명처럼 귀하게 여기며 사랑한다면 그러한 모습을 바라보며 답답해하고, 안타까워 할 것입니다. 역경의 실제를 그보다 더 확대해석하여 스스로 곤고함 속에 빠져 허덕이는 성도들의 모습만큼 안타까운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현실 속에는 이러한 모습보다도 더욱 더 안타까운 모습들이 자주 발생합니다. 극히 사소한 역경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대처하는 신앙적인 능력이 없어서 비신앙적으로 대처하다가 사소한 역경을 태산 같은 역경으로 만들어 가는 사람들의 악한 모습입니다. 사소한 역경 속에 담긴 하나님의 선한 손길을 깨닫지 못하고, 감사치도 않으며, 오히려 그 손길을 물리치고 자신의 육체적인 판단만 의지하는 비신앙적인 방식으로 처리하다가 하나님 앞에 불신앙의 행위로 나타나는 모습입니다.

성경은 그러한 예들을 수없이 보여줍니다. 그 대표적인 예 중의 하나가 역대하 28장에 나오는 유다 왕 “아하스”입니다. 대하 28:1-2는 아하스 왕이 역경을 만난 이유가 “다윗과 같지 않은 길, 정직하지 않은 길, 이스라엘 열왕의 길”로 행하여 우상을 섬기며 하나님을 버렸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하나님은 그로 하여금 깨닫도록 비교적 약소국인 에돔, 블레셋, 북 이스라엘 등의 침입을 받게 하셨습니다. 이것은 은혜였습니다.

하나님은 북 이스라엘에게 끌려가는 이십만 명의 포로까지도 마지막 순간에 호의적으로 석방되어 유다로 되돌아오도록 긍휼을 베푸셨습니다. 그런데 아하스는 하나님의 손길과 배려를 깨닫지 못하고, 당대 최고의 강대국인 앗수르를 의지하며 유다를 지키려고 최선을 다했습니다. 하지만 그 방식은 비신앙적 행위였습니다. 하나님을 버리고 앗수르의 군사력을 의지하고 다메섹과 아람 열왕의 신들을 의지하는 반신앙적 행위였습니다. 아하스의 비신앙적 열심은 오히려 유다로 하여금 앗수르의 속국으로 전락하여 핍박을 받게 했고, 멸망의 길로 향하게 했습니다.

대하 27:22는 이러한 아하스의 모습을, “이 아하스 왕이 곤고할 때에 더욱 여호와께 범죄하여”라고 설명합니다. 즉 사소한 역경을 비신앙적인 열심으로 해결하려다가 더욱 큰 역경 속에서 멸망으로 향하는 모습입니다. 이러한 유다를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마음은 안타까울 것입니다. 갈라디아서에 등장하는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을 바라보는 사도 바울의 마음도 이러한 마음이었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그 마음을 갈 6:11에서, “내 손으로 너희에게 이렇게 큰 글자로 쓴 것을 보라”라고 외칩니다.

갈리디아 성도들이 믿음을 버리고 율법을 따라가려는 것은 작은 역경을 피하기 위해서 믿음을 포기하는 비신앙적 행위였습니다. 당대의 그리스도인들은 십자가로 인하여 핍박을 받는 시대였습니다. 이들은 믿음 대신 율법을 따르기만 하면 핍박을 면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믿음을 버리고 율법을 따르며 잠시 잠간의 핍박의 역경을 벗어날 때 다가올 종말론적인 거대한 역경을 몰랐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큰 글자로 복음의 진리를 담아 가르치며, 안타까운 마음속에서 “보라”라고 외칩니다.

2. 육체의 모양은 십자가의 핍박을 피하려는 자들의 잘못된 선택이다.

원문에는 갈 6:11부터 시작되는 새로운 문맥의 첫 단어가 “보라”로 강조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큰 글자의 모양”은 갈라디아교회 성도들이 율법주의자들의 유혹과 압력을 받고 있는 “육체의 모양”에 대한 강력한 경고입니다. 오직 외적인 율법만을 지키도록 요구하는 율법주의자들은 할례와 같은 육체의 모양을 요구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결코 갈라디아 성도들에게 “육체의 모양”을 요구하지 않으셨습니다. 오직 믿음을 요구하셨습니다. 성령께 이끌리는 삶을 요구하셨습니다.

“육체의 모양”을 위한 압력에 굴복하는 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신 평안과 자유를 누릴 수 없습니다. 육체의 모양은 하나님과 우리와 세상의 관계를 이어줄 수 없습니다. 오직 믿음과 성령만이 하나님과 우리와 세상을 이어주며 참된 평안과 자유를 누리게 합니다. 그런데 “육체의 모양”은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들에게 다가오는 유혹이며 압력입니다. 세상은 우리에게 육체의 모양을 요구합니다. 부모님들까지도 육체의 모양을 요구합니다. 심지어 교회까지도 육체의 모양을 요구합니다.

학벌, 외모, 능력, 지식, 가정, 물질 등 모든 육체의 모양은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중심에 놓여질 수 없습니다. 또한 세상을 향한 우리의 중심에도 놓여질 수 없습니다. 이 모든 육체의 모양은 믿음과 성령 이후에 하나님께서 우리의 필요에 따라 채워주실 부수적인 것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심에 놓여져야 할 것을 포기하고 “육체의 모양”을 위해 살아가게 하려는 율법주의자들의 근본적인 이유 두 가지가 있습니다. 입으로 표현하지 않지만 그들의 심령 가운데 숨겨진 두 가지 이유입니다.

첫째는 “율법주의자들 자신이 핍박을 피하기 위해서”입니다. 갈 6:12은 “무릇 육체의 모양을 내려 하는 자들이 억지로 너희로 할례 받게 함은 저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인하여 핍박을 면하려 함뿐이라”라고 말씀하십니다. 당시에 유대인들은 안식일과 할례와 같은 육체의 모양을 포기하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따를 때 다가올 핍박과 박해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갈라디아 성도들은 이미 그러한 영역에서 자유로운 자들입니다.

그런데 율법주의자들은 자신들이 당할 핍박을 피하면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공동체 안에 들어오기 위해서 갈라디아 성도들에게 압력을 가하였습니다. 기독교가 유대인들이 최고로 여기는 율법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공동체처럼 보이게 하여 유대인 공동체의 핍박을 피하고자 하는 거짓된 타협을 위한 압력입니다. 여기에는 어느 한 부분도 갈라디아 성도들을 위한 것이 없습니다. 오직 자신들이 당할 핍박을 피하기 위한 것입니다.

육체의 모양을 따라가기만 하면 어떤 믿음이든 상관없이 핍박을 면할 수 있습니다. 자유와 평강이 사라져도 핍박은 면할 수 있습니다. 다른 복음으로 인하여 멸망으로 향하여도 핍박은 면할 수 있습니다. “육체의 모양”만 갖추면 불행한 삶 속에서도 핍박을 면할 수 있습니다. 육체의 모양은 자유와 평강을 보장하지 못합니다. 오직 현재의 핍박을 피하게 할 뿐입니다. 우리에게 가해지는 “육체의 모양”의 압력은 우리를 위한 것이 아닙니다. 압력을 가하는 그들 자신들이 당할 핍박을 피하기 위함입니다.

오늘날 많은 기독교인들이 현재의 핍박을 피하기 위해 육체의 모양을 따라 살아갑니다. 성령을 따라 믿음으로 살기보다 육체의 모양을 따라 살아가기를 원합니다. 이러한 유혹과 압력에 쉽게 굴복합니다. 그 굴복이 핍박을 피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더 나아가 그러한 거짓 진리를 동원하여 참된 복음을 따라 핍박을 감사함으로 받으며 자유와 평강을 누리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압력을 가합니다. 오직 자신들이 당하는 핍박을 피하기 위한 것입니다. 학문, 술, 결혼, 직업 등 모든 영역에서 나타납니다.

둘째는 “율법주의자들 자신의 육체를 자랑하기 위해서”입니다. 갈 6:13은 “할례 받은 저희라도 스스로 율법은 지키지 아니하고 너희로 할례 받게 하려 하는 것은 너희의 육체로 자랑하려 함이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율법주의자들은 자신들도 율법을 온전히 지키지 못합니다. 그럼에도 갈라디아 성도들에게는 율법을 지키도록 강요합니다. 이것 역시 갈라디아 성도들을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직 자신들이 갈라디아 사람들을 유대인의 율법 공동체 안에 들어오게 했다는 “자신들의 자랑”을 위한 것입니다. 율법주의자들 자신의 “육체의 자랑”을 위한 교묘한 압력입니다.

지금 우리들 가까이에도 자신의 “육체의 자랑”을 위한 교묘한 압력이 끊이지 않습니다. 자신의 율법주의를 자랑하기 위한 압력입니다. 자신의 인간적인 공로를 자랑하기 위함입니다. 성령과 믿음에 따른 요구가 아닙니다. 성령과 믿음을 떠난 사람들의 대다수의 압력 속에는 이러한 이유가 숨겨있습니다. 자녀를 위한 부모의 요구 속에도 숨겨있습니다. 심지어 성도들을 향한 목회자의 요구 속에도 숨겨있습니다. 율법주의자들도 겉보기에는 기독교인입니다. 하지만 자신의 “육체의 자랑”을 위해서 참된 그리스도인들에게 복음을 떠나도록 유혹하는 압력을 가하는 것입니다.

3. 십자가의 자랑으로 문제를 맞이하는 성도들에게 평강과 긍휼이 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율법주의자들의 숨겨진 두 가지 이유와는 전혀 다른 것을 바라보며 자랑합니다. 바울은 갈 6:14에서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바울은 갈라디아 성도들 앞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을 자랑합니다. 바울의 육체의 모양도 자랑거리가 아닙니다. 바울의 유대주의의 열심과 공로도 자랑거리가 아닙니다.

바울이 십자가를 자랑하는 이유는 단 한 가지입니다. 십자가가 바울을 세상의 영원한 멸망으로부터 구원하여 주셨기 때문에 자랑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바울을 세상으로부터 구해 주셨습니다. 바울은 세상 세력의 정죄로부터 구원받았습니다. 세상 세력의 권세로부터 구원받았습니다. 세상 세력의 모든 영향으로부터 구원받았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박히고”라고 말합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바울이 과거에 자랑하며 살았던 “육체의 모양”을 버릴 수 있게 하였습니다. 그 모든 “육체의 자랑”을 배설물처럼 여길 수 있게 하였습니다. 바울의 진정한 자유와 평강을 빼앗아 가던 “육체의 자랑”으로부터 자유할 수 있게 하였습니다. 그래서 갈 6:14의 마지막 부분에서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라고 말합니다. 즉 십자가를 통해서 세상이 바울에 대해서 죽었습니다. 또한 십자가를 통해서 바울이 세상에 대해서 죽었습니다. 십자가는 바울로 하여금 하나님을 향하여만 살아가는 참된 자유인이 되게 하였습니다. 이것이 자랑입니다.

바울이 갈라디아 성도들에게 보여주기 원하는 것이나 요구하는 것은 육체의 자랑을 위한 육체의 모양이 아닙니다. 자신의 핍박을 피하기 위한 육체의 모양도 아닙니다. 오직 십자가의 은혜로 세상의 모든 육체의 자랑을 위한 육체의 모양으로부터 자유함을 회복한 새로운 피조물의 모습입니다. 갈 5:15는 그것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은 자뿐이니라”

할례나 무할례와 같은 육체의 모양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할례도 우리의 자랑거리가 아니며 무할례도 우리의 부족한 모습이 아닙니다.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은 새로운 피조물이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믿음의 사람인가 아닌가가 가장 중요한 것이며, 전부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다른 모든 것보다 새로 지으심을 받은 새로운 피조물로서의 존재가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자랑은 우리들을 새로운 피조물로 지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뿐입니다.

우리의 자랑은 십자가입니다. 우리를 새로운 피조물로 만들어 주시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믿음으로 살게 하신 십자가만이 우리의 자랑입니다. 세상은 여전히 육체의 모양을 따라 육체의 자랑을 위하여 살아갑니다. 육체와 정과 욕심의 노예로서 자유와 평강을 상실당한 채 그들의 핍박을 피하기 위하여 거짓 진리와 타협하며 우리에게 따라오도록 강요하며 압력을 가할지라도 따라가지 말아야 합니다. 자신들의 육체의 자랑을 위해서 가하는 모든 육체의 모양에 따른 압력을 거부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새롭게 출생한 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한 지체입니다. 율법이 아닌 성령 안에서 사는 자입니다. 사도 바울이 기록한 “큰 글자”를 바라보며 “육체의 모양”을 따라 “육체의 자랑”을 위하여 살던 우리의 율법주의적인 삶을 버려야 합니다. 또한 그러한 율법주의의 삶으로 우리에게 강요되는 모든 압력을 거부해야 합니다.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다”는 바울의 선언은 모든 그리스도인의 선언이 되어야 합니다.

십자가만을 자랑하는 삶은 세상이 막을 수 없는 자유자로서 “평강”을 누립니다. 하나님은 십자가만을 자랑하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며 그의 인생을 책임져 주십니다. 평강은 하나님의 긍휼히 여기심이 우리에게 임한 결과입니다. 육체의 모양이 온전하지 못한 우리를 긍휼히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결과가 평강입니다. 육체의 자랑이 될만한 율법적인 능력이 부족한 우리를 용서하시고 받아주시는 긍휼의 결과가 자유와 평강입니다. 하나님은 십자가만을 자랑하는 성도와 공동체를 인도하십니다.

갈 6:16은 “무릇 이 규례를 행하는 자에게와 하나님의 이스라엘에게 평강과 긍휼이 있을찌어다”라고 축복합니다. “이 규례”란 육체의 모양을 버리고, 십자가만을 자랑하는 규례입니다. 이들에게 평강과 긍휼이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이스라엘”은 “십자가를 최고의 자랑으로 여기는 교회 공동체”로서 평강과 긍휼을 누리는 공동체입니다. 세상은 우리를 위하는 것처럼 위장한 이유로 우리에게 육체의 모양을 따르도록 압력을 가합니다. 그것은 자신이 받을 핍박을 피하고자 하는 것이며, 자신의 자랑을 위한 것입니다. 우리는 핍박에도 십자가만을 자랑하며 따라야 합니다.
(김 종 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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