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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의 인도 (합 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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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 안에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고 복된 예배의 자리에 나아오신 사랑하는 이웃 여러분, 그동안 여름휴가 잘 다녀오셨습니까? 더워도 밥 먹는 것, 숨 쉬는 것은 포기할 수 없듯이 하나님 말씀 듣고 예배하는 일은 거를 수 없습니다.

지난 번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듣기를 두 번에 걸쳐 살폈습니다. 두 주간에 걸쳐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여섯 가지 방법을 말씀드렸습니다. 하지만 시간도 지났고 더위도 심해서 모두들 기억이 가물가물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서, 세우신 사역자들을 통해서, 신앙의 친구나 가족을 통해서 말씀하실 뿐 아니라 때로는 느낌을 통해서, 고통을 통해서, 침묵을 통해서도 우리에게 말씀하신다는 것을 살폈습니다.

오늘 우리는 소선지서 가운데 하나인 하박국서를 통해서 하나님의 인도를 받는 방법을 살피려고 합니다. 하나님의 인도를 받기 위해서, 하나님의 대답을 듣기 위해서 우리가 해야 할 여섯 가지 준비 과정을 살펴보겠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두 절 가운데 하나님의 인도를 받는 여섯 가지 방법을 추적할 수 있습니다.

1.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를 소원해야 합니다.

기꺼이 들으려고 해야 한다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고 싶은 소원이 있어야 합니다. 무엇보다 먼저 하나님의 인도를 받고자 하는 거룩한 소원이 있어야 합니다.

“내가 내 파수하는 곳에 서며 망루에 서리라”망루에 서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로 하박국은 결심합니다. 도대체 하나님께서 나에게 무엇이라 말씀하실는지 들어보기로 결심합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려고 소원하기까지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란 불가능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도를 받으려면 들으려는 우리의 소원이 자리해야 합니다.

그 좋은 예를 다윗에게서 볼 수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 여호와의 하실 말씀을 들으리니 . . .”(시85:8상)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다윗은 고백합니다.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의 뜻 행하기를 즐기오니. . .”(시40:8상) 다윗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실천하기를 소원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를 소원하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시면 그것을 실행하기를 소원하십시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뜻이면 무엇이든 순종하기를 소원하십시오. 듣고 나서 결심하는 것이 아니라 듣기 전에 결단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말씀하시길 기뻐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순종하고자 하는 소원이 있습니까? 그리고 그 소원이 얼마나 간절합니까? 음성을 듣고 인도를 받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정도인지, 그의 음성을 듣고 인도를 받아야만 살아갈  수 있다고 믿는지 자신을 살펴보십시오.

혹시 여러분이 지금 결혼을 앞두고 있는 나이입니까? “내가 누구와 결혼하기를 원하십니까? ”라고 물어 보십시오. 은퇴를 앞두고 있다면 “이제 남은 생을 무엇을 하며 살기를 원하십니까?”라고 한번 간절히 호소해 보십시오. 간절히 찾으면 하나님은 반드시 만나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다윗을 향해서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왜 당신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고 했을까요? 완벽했기 때문일까요? 결코 아닙니다. 그는 살인자요 간음자입니다. 결코 완벽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은 다윗을 향해서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고 불렀을까요? 다윗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자 하는 열망을 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에 있어서는 남보다 빼어난 열정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으면 좋겠다가 아니라 들어야만 살겠다는 심정으로 하나님의 뜻을 찾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 하니이다.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생존하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 앞에 뵈올꼬?”

다윗은 그 누구보다도 더 간절히 하나님을 뵙기를 갈망합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그 누구보다도 다윗에게 말씀하시길 기뻐하십니다. 더 간절히 소원할수록 더 자주 말씀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가까이 할수록 우리에게 가까이 다가와 주실 것입니다.

여러분의 생애에 하나님의 인도를 받지 못한다고 하면 그 책임은 다른 누구에게 있지 않습니다. 여러분 각자가 선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인도를 사모하십시오. 날마다 그 음성 듣기를 소원하십시오. 시인은 고백합니다. “주의 규례를 항상 사모함으로 내 마음이 상하나이다.”(시119:20)

삶에서 그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인도받기를 소원하십시오. 신명기서는 약속합니다. “만일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그를 구하면 만나리라”(신4:29하) 하나님의 인도를 받는 첫 걸음은 마음을 다해 소원하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서 일상에서 물러설 필요가 있습니다.

조용한 장소에 홀로 있기로 작정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하박국은 말합니다. “내가 내 파수하는 곳에 서며 망루에 서리라”이 히브리식 표현의 의미는 홀로 조용한 곳에 물러나서 하나님의 응답을 기다리겠다는 것입니다.

시끄러운 소음에 휩싸여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가 쉽지 않다는 것을 여러분은 아실 것입니다. 조용한 곳을 찾는다는 것이 그래서 절실합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정말 조용한 곳을 찾기가 어렵습니다. 영유아를 가진 부모라면 이 사실을 더욱 실감할 것입니다.

하지만 18명의 자녀를 키운 수산나 웨슬리의 이야기를 들으시면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 자녀 가운데 두 아들은 세계의 역사를 바꾼 사람들입니다. 요한 웨슬리는 감리교의 창시자요 찰스 웨슬리는 수백편의 찬송을 지었고 아직도 그 가운데 어떤 것은 우리가 부르고 있습니다.

요한과 찰스, 두 사람 모두 그들의 신앙이 어머니에게서부터 받았다고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그 어머니는 18명의 아이를 키우면서도 매일 기도했습니다. 어떻게 일상에서 벗어나서 기도의 골방을 찾았을까요? 열여덟 명을 키우면서 언제 어떻게 기도의 시간을 발견했을까요?  우리는 한 둘 가지고도 떡을 치고 있는데요.

날마다 오후에 시간을 내어서 기도 했다고 합니다. 일 하다가도 앞치마 둘러쓰고 흔들의자에 앉으면 거기가 바로 기도의 골방이었답니다. 아이들은 모두 앞치마를 둘러쓰고 있는 그 때 엄마를 방해하면 작살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답니다.

어떤 방법이든 우리 모두는 일상에서 물러나야 하는 방법을 터득해야 합니다. 그것은 결코 자동적으로 되진 않습니다. 그리고 사람마다 서로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시간도 다르고 장소도 다르고 방법도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주님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예수는 물러가사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시니라”예수께서는 가끔 물러가서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셨다고 원문에 가깝게 NIV 성경은 번역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음성을 듣기 위해서 가끔 한적한 곳으로 나아갈 필요를 아셨습니다. 사실 예수님보다 더 하나님께 가까이 계셨던 분은 없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주님은 한적한 곳에 가셔서 기도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아셨다면 우리에게는 더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 모두는 정말 소음으로 가득한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조용하면 오히려 불안할 정도로 소음에 찌들려 있습니다. 방안의 시계소리는 애교에 속하고 어디서나 가전제품에서 나오는 소리, 차를 타도 들리는 소음, 길을 걸어도 이어폰에서부터 무언가 소리를 듣지 않으면 불안한 사람들입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집을 향해도 거기서도 소음 소리는 끝나지 않습니다.

이 모든 소음에서 벗어나려면 의도적으로 물러나려고 시도해야 합니다. 조용한 장소에 홀로 머무는 것은 그래서 중요합니다. 아예 휴대폰도 꺼버리고 하나님의 음성만 들으려고 시도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예배드리는 주일 하루라도, 아니 교회 오는 시간만이라도 휴대폰 두고 오는 연습을 합시다. 가지고 와서 제가 설교하는 시간에 반주 넣으시지 마시고 아예 집에 두고 오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북한에 가서 며칠 지내면서 가끔 휴대폰 생각은 났어요. 그러나 거기는 휴대폰 가져가서는 안 되니까 다 비행기에 맡겨 두고 갔습니다. 살아보니까 없이도 살만 하던데요? 아침에 제가 7시 되기 전에 교회로 내려왔습니다. 그 이른 시간에 세 사람이나 휴대폰을 귀에 대고 있는 것을 길에서 봤습니다. 젊은 청년들만 아니라 60대 70대 할머니 할아버지도 길가에 쪼그리고 앉아서 아침 7시부터 무슨 이야기를 저렇게 하시는지 거의 중독 수준인 것 같아요. 주일 하루만은 꺼놓고 안식일을 지킬 때 집에 거하는 손님들, 아니면 가축들 까지도 쉬게 하라고 했는데 휴대폰도 좀 쉬도록 하면 안 될까요?

물러가서 하나님만 접속하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돌보심을 알게 될 것입니다. 삶의 대소사에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살피신다는 것을 알게 되면 일상에서 물러서서 그와 함께 할 수 있는 결단을 내리기가 쉬워질 것입니다.

“무엇을 먹을 것인지 아니면 무엇을 마시고 입을 것인지 염려하지 말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는 너희에게 이런 것들이 필요한 것을 알고 계신다.” 하나님은 우리 삶의 사소한 것을 모두 아십니다. 무엇이든 하나님께 말씀드리십시오. 기쁨도 아뢰고 낙망도 아뢰십시오. 매사를 돌보시는 분이 우리 가까이 계십니다.

3.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 기다리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를 소원하고 조용한 곳으로 물러나서는 기다려야 합니다. 생각을 가다듬고 감정을 가라앉혀야 합니다. 여러분의 내면세계를 다스려야 합니다.

어떤 아이가 아빠가 목공일을 하는데 시계를 가지고 놀다가 톱밥 속에 시계를 떨어뜨렸대요. 찾으면 찾을수록 복잡해지기만 하고 안 되어서 아버지가 모든 것을 끄고 엔진으로 돌아가는 톱도 꺼버리고 조용히 귀를 한번 기울여 볼래? 그러니까 톱밥 속에서 째각째각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고백합니다. “내가 내 파수하는 곳에 서며 성루에 서리라 그가 내게 무엇이라 말씀하실는지 기다리고 바라보며 나의 질문에 대하여 어떻게 대답하실는지 보리라 ”

하박국 선지자는 머물러 기다리기로 작정합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실 때까지는 움직이지 않고 기다리기로 결심합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까지는 자리를 떠나지 않으리라고 결단합니다.

왜 그것이 중요할까요? 서두르는 것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데 있어서 독약과 같습니다. 우리는 너무 서두르기 때문에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를 못합니다. 시간을 드려서 들으려는 사람에게 말씀하십니다. 시간을 드리지 않고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인도를 받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음성을 듣기를 소원하고 주의를 산만하게 하는 곳을 피해 조용한 장소로 물러가서 기다리며 자신을 가라앉히고 들을 수 있는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세상 모든 것들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음성을 듣도록 하는 일을 방해합니다. 특히 우리의 대적은 우리가 기도하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사단은 여러분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을 방해합니다. 그가 사용하는 두 가지 도구가 있습니다.

하나는 우리의 환경입니다. 기도하려고 모처럼 자리 잡고 앉으면 웬 생각들이 그렇게 많이 떠오르는지, 끝내지 못한 일들이 기억납니다. 걸어야 할 전화들이 생각납니다. 잊어서는 안 되는 일들이 머리를 내밉니다. 그러면 하나님께 집중하기가 어려워집니다.

무시하려고 들면 더 크게 소리칩니다. 그럴 땐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노란 메모지를 찾아 기록해 두면 됩니다. 그리고 기도로 돌아가면 됩니다. 기도하는 중에 또 다른 생각이 떠오르면 노란 메모지 위에 기록해 두고 다시 하나님께로 주의를 돌리면 됩니다. 모처럼 QT 하려고 자리 잡고 앉으면 얼마나 해야 될 일들이, 시켜야 일들이, 챙겨야 될 일들이 생각나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 때 전화기를 돌리면 그날 QT는 망치고 맙니다. 써놓고 다시 돌아가야만 합니다.

두 번째 사단의 방법은 무엇인줄 아십니까? 그것은 죄의식으로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으려는 것입니다. 기도하려고 하면 마음속에 죄책감을 들추어냅니다. “네 같은 게 어떻게 기도를 드려, 넌 이런 잘못 저런 실수도 했잖아? 네가 무슨 체면으로 하나님 앞에 나와서 기도해? ”

바깥 환경만이 아니라 마음 속에서 죄책감이 우리를 괴롭히며 부정적인 생각을 갖게 하며 기도하지 못하도록 집요하게 방해합니다.

그러나 그런 감정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음성이 아니라 사단의 속삭임입니다. 기도를 시작할 때 들려오는 그러한 음성은 하나님의 음성이 아닙니다. 죄책감을 조장시키는 것은 하나님의 역사가 아닙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롬8:1)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서 여러분을 위해서 하신 사역을 믿는다면 여러분은 더 이상 죄책감에 시달릴 이유가 없습니다. 예수께서 그 대가를 모두 지불하셨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에게 죄책감을 안겨주는 이 모든 일들은 원수의 사역입니다. 사단은 하나님의 백성을 참소하는 자입니다. 우리의 잘못을 들추고 흠집을 내는 것이 그의 전문사역입니다. 혹시 여러분 가운데서 신앙의 형제자매들의 잘못을 들추어내고 흠집을 내려고 하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의 백성은 그렇게 사는 사람이 아닙니다. 여러분과 제가 이 땅에 사는 날 동안에 우린 아무도 완벽해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찾아보면 그 어떤 사람도 비난받을 만한 부분이 남아 있을지 모릅니다. 그것을 들추어내어서 폭로하고 괴롭히고 하는 것은 성도의 삶이 아닙니다. 내 주위에 있는 사람들의 허물과 잘못에 대해서 들추어내고 그것을 가지고 괴롭힌다고 한다면 여러분은 돌아서야만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용서를 믿는 사람들입니다. 용서 받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나도 다른 사람을 용서하는 자리로 나아가야 합니다. 용서 받아본 사람만이 남을 용서할 수 있습니다. 사랑 받아본 사람만이 남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의 사역을 신뢰한다면 더 이상 사탄의 참소에 괴롭힘을 당할 이유가 없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영원하고 불변하는 사랑을 바라보십시오. “내가 너를 영원한 사랑으로 사랑하였다”“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 8:39)고 선언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결코 우리의 행위에 근거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오직 당신의 성품에 근거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에 우리를 끝까지 사랑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실수와 허물투성이인 자신에게서 눈을 돌려 우리를 무한히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4.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 마음의 눈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가 내게 무엇이라 말씀하실는지 기다리고 바라보며”하나님의 음성은 때로 우리가 귀로 들을 수 있을 뿐 아니라 눈으로 바라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의 마음에 그림으로 당신의 뜻을 나타내실 수 있습니다. 화성에서 보내오는 사진 수신이 가능하듯이 하나님께서도 그림으로 우리 마음에 말씀하실 수 있습니다.

성경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기도하는 가운데서 이상과 환상을 받았습니다. 그림 이미지를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그의 미래를 보여주셨고 이삭과 야곱에게도 보여 주셨습니다. 요셉에게도 보이시고 후에 다윗에게도 보여 주셨습니다.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할 것 없이 선지자들은 많은 경우에 그림 같은 이상을 보았습니다. 다니엘, 호세아, 요엘, 아모스, 오바댜, 요나, 미가, 나훔 할 것 없이 모든 선지자들의 주요 예언이 이런 이상에 근거한 것입니다.

삶의 문제를 밝히 보여주시기 위해서 하나님은 때로 마음으로 보는 그림을 사용하셨습니다. 시편 73편 기자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어찌하면 이를 알까하여 생각한즉 내게 심히 곤란하더니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저희 결국을 깨달았나이다.”

어떻게 해서 하나님 없이 큰 소리 치며 사는 사람들은 잘 살고, 죽을 때도 고통 없이 죽는데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어려움이 왜 그렇게도 많은지 도대체 답이 나오지 않아서 “내가 심히 곤란하더니” 라고 시인은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신앙의 시인은 현실에 있는 대로 직시 해 보았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해서 그날부터 그가 가는 모든 길에 청신호만 켜지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반대의 현상들도 종종 목도하는 것입니다. 도대체 어떻게 해서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는지 괴로워하다가 결국 성전에 들어가서야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야 깨닫게 되었다고 고백합니다.

“성소에 들어가셔야 전체 그림을 보게 되었습니다.”라고 메시지 성경은 번역합니다. 전체 그림을 통해서 하나님은 신앙의 시인에게 바른 관점을 제공해 주었습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갈 때 무엇보다 꼭 필요한 것은 바로 이 전체를 바라볼 수 있는 시각을 가져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우리에게 일어나는 사건 하나하나만 보시면 원인을 찾을 수 없는 일들이 성도의 삶에도 일어난다는 것을 아셔야 됩니다. 그러나 전체 그림을 보는 순간 여러분은 알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미를 찾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갈 때 무엇보다 꼭 필요한 것이 전체적인 관점을 잊어버리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전체를 바라볼 수 있는 눈을 주셨어요.

우리에게 영광스런 미래를 생각해 볼 수 있는 상상력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상상력은 사람에게 주신 놀라운 선물입니다. 짐승은 갖고 있지 않습니다. 짐승들은 사람처럼 원대한 미래의 꿈을 가질 수가 없습니다.

나폴레온은 “상상력이 세계를 지배한다.”고 말했습니다. 어떤 내일을 꿈꾸는지에 따라서 사람은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아인쉬타인은 “상상력은 지력보다 더 중요하다.”고 말했습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만들어진 물건들은 사실은 머릿속에서 누군가가 먼저 만든것입니다. 물컵 하나도 누군가가 머릿속에서 이렇게 만들 것을 디자인 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입고 있는 옷도 마찬가지 입니다. 여러분이 타고 온 차도 누군가가 머릿속에 먼저 디자인 해 보았습니다. 그 결과로 여러분이 입은 옷이, 여러분이 타고 온 차가 만들어 진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예배하는 이 교회당도 지어지기 전에 누군가가 머리 속에서 먼저 만들어 보았습니다. 거기에 따라 설계도를 만들고 이런 건물이 완성되었습니다. 그냥 생겨난 것이 결코 아닙니다. 우리가 만든 모든 것들은 상상력을 통해서 밑그림이 그려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상상력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탁월한 선물의 하나입니다. 그러나 다른 모든 하나님의 선물처럼 이 선물도 오용될 수 있습니다. 잘못된 내일을 꿈꾸기도 하고 상상의 나래를 펼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모든 선한 것을 망쳐버리기를 사탄은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사탄은 결코 창조적이지 못합니다. 모방합니다. 흉내 내고 그것을 망치려고 합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기도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약1:5)

먼저 하나님은 여러분이 도움말을 구하는 것을 원하신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도와달라고 하는 것은 성가시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모든 세세한 일까지 관심을 가지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여러분이 구하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이 구체적으로 구하기를 바라십니다. 구체적인 간구라야 구체적인 응답을 받을 수 있습니다. 구체적인 응답을 받아봐야 우리는 구체적인 감사를 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 나아갈 때는 구체적으로 나아가십시오.

셋째로, 하나님은 우리가 응답을 기대하기를 바라십니다. 정말로 위대한 일을 기대하는 것은 하나님을 위대한 분으로 칭송하는 것과 같습니다. “나는 하나님께서 이처럼 놀라운 일을 하실 분으로 믿습니다. 하나님만이 이 일을 해 내실 것을 나는 믿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께 고합니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난해 목적 40일 훈련을 통해서 역사하신 동일한 하나님께서 이번 하반기 공동체 40일 캠페인을 통해서 더욱 놀랍게 역사하실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구체적인 질문을 던지고 하나님이 하실 구체적인 응답을 기대하십시오. 모든 대답이 포함된 성경말씀을 읽는 여름이 되기를 바랍니다. 더워도 숨 쉬어야 되고 더워도 세끼 밥을 먹어야 되듯이 더워도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십시오. “내 눈을 열어 주의 법의 기이함을 보게 하소서”라고 기도하면서 나아가십시오. 그냥 지나가던 글자가 갑자기 당신에게 말하기 시작할 수 있습니다.

5. 하나님의 음성을 확인하기 위해 여러분이 받은 생각을 기록하십시오.

“여호와께서 내게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는 이 묵시를 기록하여 판에 명백히 새기되 달려가면서도 읽을 수 있게 하라”(2절) 그것을 기록했기에 오늘 우리는 하박국서라는 성경을 읽게 되었습니다.

하박국은 하나님께 질문했고 하나님은 대답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하박국은 그것을 기록했습니다. 기록한다는 것은 사람만이 할 수 있는 특권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기도생활이 무력해질 때 극복할 방안을 마련하십시오. 그 하나가 여러분의 기도를 기록하는 것입니다. 그러며는 기록하다 보면 여러분이 무엇을 기도하는지를 알게 될 것입니다. 보다 인격적인 기도를 드리게 되며 보다 진지한 기도를 하게 될 것입니다.

이전의 신앙의 선배들은 이런 기록을 하기를 좋아했습니다. 기도를 기록하면 여러분의 기도생활은 새로워집니다. 너무 어렵게 생각할 이유가 없습니다. 한 편에는 여러분이 하나님께 아뢴 것을 기록하고 다른 편에는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하신 말씀을 기록하면 됩니다. 질문하는 순간 답을 주실 수도 있습니다. 질문하고 나서 석 달이 걸려야 답이 나올 수도 있습니다. 삼년이 지났는데도 아직 답이 안 올 수도 있습니다. 거기는 비워두시면 됩니다.

기도를 글로써야 되느냐고 하실 분도 있을지 모릅니다. ‘눈 감고 생각 떠오르는 대로 자발적인 기도를 해야 기도 아니냐’ 이렇게 생각하실 분도 있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자기의 기도를 기록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시편을 가질 수 없었을 것입니다. 시편은 다윗의 기도의 기록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모든 기도로 기도하십시오. 그 모든 기도 속에는 여러분이 상상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의 기도가 다 포함되어 있습니다. 어디서 언제나 그리고 어떤 방법으로도 기도하십시오. 당연히 기도를 기록해도 됩니다. 그리고 그것은 영적으로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이 방법은 여러분의 영적인 삶을 유익하게 할 것입니다. 여러분의 생각을 하나님께로 향하게 할 것이고 입술보다 손가락을 통해서 드린 기도는 여러분의 생각을 더욱 주님께로 집중시킬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세월이 지나가도 무엇을 그 때 기록했는지 다시금 알게 될 것입니다.

6.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다음 우리는 경배의 자리로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 우리의 마음은 찬양과 경배로 가득할 것입니다. 하박국은 고백합니다. “내가 주께 대한 소문을 듣고 놀랐나이다.” 달리 번역하면 “주께 대한 소문을 듣고 놀람 가운데 경배하나이다.”로 말할 수 있습니다.

누구든 자기의 질문에 대한 하나님의 구체적인 응답을 듣고 놀람 가운데 경배하게 되는 것은 자연스런 반응일 것입니다. 때로 하나님께서는 침묵을 통해서도 말씀하십니다. 왜 하나님은 종종 침묵하실까요?

몇 가지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네게 말해줄 때가 멀었어.” “넌 아직 들을 준비가 되지 못했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람 사이에도 그렇지 않습니까? 내가 알고 있는 답을 물어 와도 우리는 그 사람이 정말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지 않으면 말하지 않습니다. 말해봤자 사이만 서로 나빠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타이밍이 아니야”하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실 수도 있습니다. “답은 몰라도 믿고 따라와” 그러실 수도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여러분께 말씀드린 것을 여러분이 실천하면 여러분의 기도 생활은 놀랍게 변화될 것입니다. 정말 여러분은 대단한 결단을 하셨습니다. 이 더운 날 하나님 앞에 나와서 예배하기를 결단한 것입니다. 저는 어제 머리 좀 깎아보려고 울산고등학교 앞까지 가야 되는데 너무 더우니까 걸어갈 용기가 나지 않더라고요. 그래서 막 교회를 빠져 나가는 차를 붙들어 타고 거기까지 실어달라고 그랬지요. 더운 날은 꼼짝하기 싫지 않습니까? 움직이기도 싫은데 여기까지 예배하러 나왔는데 예배하러 왔다면 뭔가 삶에 변화와 도움이 있어야 안 되겠습니까?  그렇잖아도 더운 날씨에 앉아서 교회 가서 팔 아프도록 부채만 부치고 온 기억밖에 없어서 되겠습니까? 오늘은  무엇 하나 구체적으로 실천해 볼 수 있을까요? 공책하나 준비하면 됩니다. 그래서 한쪽에는 내가 드리는 기도를 적고 다른 쪽에는 하나님 하시는 응답을 적어보십시오. 놀랍게 여러분의 기도는 낱낱이 응답된다는 것을 어느 날 알게 될 것입니다. 그 기록은 여러분의 자녀들에게 정말 어떤 것과 바꿀 수 없는 귀한 유산이 될 것입니다.

이렇게 실천 해 보면 기도가 독백에서 대화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뭐라고 대답하시는지 관심을 갖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일방통행이 아니라 쌍방 대화로서 바뀔 것입니다. 양방향 대화가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과 대화하시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서 여러분은 하나님을 알아야만 합니다. 알아야만 그분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이 예배의 자리에 나오신 여러분은 하나님을 얼마나 알고 계십니까? 

셋 중 하나일 것입니다. ‘하나님이 계신 것을 믿습니다. 알고 있습니다.’ 그 정도 아는 사람도 있고 ‘하나님요 제가 어렸을 때 도와주신 분이시지요. 만나본적이 있습니다.’ 그 정도 알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어떤 분들은 하나님과 친밀하게 아는 분도 있습니다. ‘나의 숨소리 하나하나까지 알고계시는 그분, 내 마음 내 자신보다 더 잘 알고 있는 분’으로 가까이 느낄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과 친밀한 교제를 나누기를 원하십니다. 눈빛만 보아도 마음을 나누는 사이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분이 여러분을 이 자리로 인도하신 것은 친밀한 교제를 나누기 위해서입니다.

사랑하는 구도자 여러분, 그 아들 예수님을 마음에 모시고 하나님과 교제하는 자리로 나아가십시오. 대화 없이는 깊은 교제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기도 없이는 신앙이 자랄 수 없습니다. 말로 하는 기도도 필요합니다. 글로 쓰는 기도도 유익합니다. 모든 기도로 기도하며 하나님의 인도를 받는 여러분 모두가 되시길 바랍니다. 아멘.
(정 근두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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