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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에 4:5-17 , 눅 19: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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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한 주간동안 26명의 대학청년 공동체들이 필리핀 단기선교를 다녀왔습니다. 결코 적지 않은 회비를 자비량으로 부담하고, 6박7일이라는 긴 시간을 할애하였던 여정이었습니다. 그런데 값진 시간과 땀흘린 댓가로 얻은 물질을 투자하여 간 곳이 열악한 환경이었습니다. 모두가 화장실을 걱정해야 했고, 비오는 가운데 걸어야 했습니다. 이처럼 고생이 훤하게 보이는 길을 왜 주저하지 않고 떠났을까요? 저는 그 이유를 오늘 본문 ‘삭개오’의 모습에서 찾아보려고 합니다.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있는 것처럼, 삭개오는 뽕나무 위에 올라간 사람입니다. 그가 왜 뽕나무에 올라갔습니까? 주님을 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항상 키 작은 것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아야 했던 그는 뽕나무라는 곳에 올라가지 않고서는 도저히 주님을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결코 키가 작았기 때문이라는 단순한 이유만으로는 뽕나무에 올라간 삭개오의 행동을 다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본문 19장 2절에서 삭개오를 ‘세리장’또는 ‘부자’라 칭하는 것을 통해 숨겨진 원인을 알 수 있습니다. 당시 로마로부터 지배를 당하고 있던 이스라엘에서 ‘세리장’이라는 말은 ‘매국노’로 인식되었으며, 식민지배를 받았던 이스라엘 사람이 ‘부자’가 되기 위해서는 얼마나 정복자인 로마에게 충성을 했어야 했는지를 짐작하고도 남습니다. 그러므로 삭개오는 주님을 보고 싶지만, 평소에 자신이 악한 짓을 서슴없이 행했던 사람들을 피해 뽕나무에 올라갔던 것입니다. 설마 누가 뽕나무 위를 쳐다보겠습니까? 주님 보기에도 바쁜데......  아주 안락한 자기만의 공간, 누구도 간섭하지 않고, 신경쓰지 않는 편안함의 자리가 바로 삭개오의 뽕나무였던 겁니다.

그런데 오늘 주님께서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고 말씀하십니다. 어떻게 잡은 자리인데, 얼마나 편안하고 안락함의 자리인데, 누구도 신경쓰지 않고, 그 어떤 사람으로부터도 귀찮은 일을 당하지 않는 자리인데, 그곳에서 내려오라고 하시다니.....

■ 우리 자신도 삭개오의 뽕나무같은 ‘나 중심의 자리’에서 속히 내려와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들은 얼마나 많은 나 중심의 뽕나무를 소유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하나님의 역사보다는 내 감정이 더욱 중요합니다. 하나님 말씀보다는 내 지식과 사고의 판단이 더 우선합니다. 목회자를 비롯한 영적 지도자들의 권면보다 수십년 믿어왔던 자신의 경험이 판단의 기준이 됩니다. 이 땅에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사랑의 역사와 교회 공동체가 아니라, 자신의 영달과 유쾌한 기분입니다. 그 감정을 조금이라도 상하게 하는 그 어떤 것도 용납하지 않습니다. 스스로를 믿음의 구경꾼으로 전락시키고 마는 자리인 뽕나무를 버리지 못해, 그 어떠한 하나님의 역사도 경험하지 못한 체, 그저 바라만 볼 뿐입니다. 사유할 뿐입니다. 지적인 유희와 한순간의 관람으로 대리만족하는 것으로 끝나고 맙니다. 신앙의 힘이 현실을 가로지르는 역사가 아니라 관념적 유희로만 끝나고 있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2장 5~11절에 이르면 높고 높은 존귀한 보좌, 하나님 우편의 그 하늘 보좌를 버리고, 이 땅에 내려오신 분이 주님이심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도 하늘보좌라는 자신의 뽕나무를 과감히 떠나셨습니다. 주님께서 하신 것처럼 우리도 이제는 ‘나 중심의 그 어떠한 뽕나무’도 버리고 속히 내려와야 합니다. 주님께서 부르시기에, 주님께서 몸소 행하셨기에 우리도 그렇게 해야 합니다. 믿는 우리들은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갈 2:20)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각자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기 위해서는 뽕나무 위에 앉아 있으면 안됩니다. 신앙은 결코 사유의 영역이 아니라 삶의 현실입니다. 구경이 아니라, 능력을 행하는 역사이기 때문입니다.

■ 뽕나무를 떠날 때, 우리는 비로소 ‘주님 앞에 서’있는 역사를 경험하게 됩니다.

주님의 말씀대로 뽕나무에서 속히 내려온 삭개오는 생각하지 못했던 크나큰 은혜를 경험하게 됩니다. 주님 앞에 서게 된 것입니다. 주님 앞에 서게 된 그를 주님께서는 ‘아브라함의 자손, 구원이 임한 자녀’(19:9)로 선포하십니다. 생각하지도 못한 은혜요, 이루 말할 수 없는 기쁨입니다. 매국노, 로마의 개로 불리던 삭개오를 하나님의 자녀로 칭하셨으니 말입니다. 이 모든 것이 뽕나무를 떠났을 때 일어난 은혜입니다. 필리핀에 도착한 청년 단기선교사들이 같은 경험을 하였습니다. 시간, 물질, 편안한 휴식, 유쾌한 휴가를 다 떠나 필리핀 고산족 아이타스 아이들 앞에 섰을 때, 청년들 모두는 하나님 앞에 선 경험을 하였던 것입니다. 더럽고, 냄새나는 아이들 한 명 한명을 안고 기도할 때에, 청년들의 눈물의 고백은 하나님 사랑이며, 두렵고 떨리는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나 중심의 자리를 떠났을 때, 우리는 하나님 앞에 서게 되는 경험을 합니다. 그 하나님 앞에서는 감사와 찬양의 고백을 할 수 밖에는 없는 은총을 느끼게 됩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즐기게 되는 것입니다. 먼저 읽은 본문 에스더 4장 5-17절을 묵상해 봅니다. 포로민으로서 왕후의 자리까지 차지한 에스더. 그녀의 뽕나무는 그 어떠한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자리입니다. 안락함이요, 부와 명예와 유익함의 상징이 되는 자리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자리를 떠나 민족을 구원할 길을 떠나라 명하십니다. “네가 왕후의 위를 얻은 것이 이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아느냐”(에 4:14). 삼일을 금식기도한 에스더는 ‘죽으면 죽으리라’는 믿음의 고백과 함께 왕후의 뽕나무를 내려갔고, 그녀를 통해 “부림절”이라는 구원의 역사는, 하나님의 살아계심은 그녀를 비롯한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경험되었습니다. 현실이 되었습니다.

■ 연약한 우리가 뽕나무를 내려갈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주님께서 우리를 부르시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우리 모두가 다 인지하고 있어도 우리 스스로는 뽕나무를 버리기 주저할 때가 많습니다. 두려울 때가 허다합니다. 오늘 삭개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괜시리 내려갔다가 주민들로부터 린치를 당하는 것은 아닌지 얼마나 떨렸는지도 모릅니다. 주님께 그동안 행했던 일로인해서 심한 꾸지람과 심판을 받게 될지도 몰랐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걱정을 떨쳐 버릴 수 있었던 것은 주님의 부르심, 그분의 음성입니다. 모든 사람들은 삭개오를 매국노 세리장, 개같은 부자라 말했지만, 주님만은 “삭개오야, 삭개오야”라고 이름을 불러 주셨던 것입니다. 살인자, 인간사냥꾼이였던 사울을 “사울아, 사울아”(행 9:4) 라고 부르셨기 때문입니다. 배반자, 배신자였던 베드로를 “요한의 아들 시몬아, 시몬아”(요 21:15) 라고 부르셨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들의 삶의 현실속에서 주저하고, 연약할 수 밖에 없는 우리들을 믿음 없는 자라고, 몹쓸 인간이라고, 저주받을 백성이라고 하지 않으시고, 이 모습 이대로 “내 연약한 이름”을 부르시는 주님의 음성이 바로 내 뽕나무를 떠날 수 있는 힘이요, 능력이요, 신뢰의 뿔입니다. 오늘 광복 60주년을 맞아 통일의 역사와 평화의 기적을 갈망하는 이 땅, 한반도에 이같은 주님의 역사가 있어야 하겠습니다. 기득권이라는 각자의 뽕나무, 사상과 이념이라는 갈등의 뽕나무, 가해자와 피해자라는 뽕나무, 고통속에 울부짖었던 미움과 증오의 뽕나무에서 내려와야 하겠습니다. 주님의 부르심의 음성, 그분께서 초청하시는 자리에 우리 자신이 서게 될 때, 용서의 기적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평화의, 통일의 역사를 이루게 될 것입니다.

오늘 이 시간 주님께 간절히 기도합니다. 뽕나무에서 내려온 삭개오가 내 자신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한국교회가 되기를 소망한다고, 분단된 조국이 되게 해 달라고....우리들의 기도 가운데 임하시는 주의 성령을 찬양합니다. 아멘. 
(진 대 흥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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