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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인생은 출장중 입니다 (히 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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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사람이 살면서 반드시 한번은 던져야 할 질문은, “나는 왜 이 땅에 존재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죽기 전에 누구라도 이 질문을 해야 하고 그 대답을 들어야 합니다. 그 질문에 대한 대답 없이 인생을 끝마치는 것보다 더 허무한 일은 없습니다. 우찌무라 간조는 인생에서 돌이킬 수 없는 최대의 실수는 인생의 목적을 잘못 잡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어떤 시인은 “왜 사느냐고 물으면? 그냥 웃지요” 라고 대답했고, 어떤 유행가에는 “인생은 나그네길,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지 구름이 흘러가듯 정처 없이 떠돈다” 고 했습니다. 이것은 인생의 답은 어차피 네도 모르고 나도 모르는데 그런 바보 같은 질문일랑 묻지 말고 그저 물처럼, 바람처럼 운명에 맡기고 사는 것 그 자체가 인생이 아니냐 하는 말일 것입니다.

이 땅에서 우리의 삶이 하숙생이라는 것 까지는 성경적 발상입니다. 그런데 하룻밤 인생인데 삶의 목적이 뭐가 있어? 라고 말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사실 설움 받는 하숙생도 청운의 꿈이 있기 때문에 참는 것이고, 잠깐 지나가는 나그네도 무엇인가 여행의 목적이 있고 종착지가 있기 때문에 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문제는 인생의 목적이 있기는 한데,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스스로 만들고 찾아낸 목적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잘못 된 인생의 목적은 그 인생을 불행하게 만듭니다. 모든 물건은 만든 사람의 목적에 따라 정확하게 사용될 때 안전합니다. 문제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사람도 만든 목적에 따라 바르게 사용될 때 행복합니다. 문제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내가 어디에 쓰이려고 존재하는지, 아무리 알려고 발버둥 쳐도 모릅니다. 사람은 내가 왜 이 땅에 존재하는지,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에 대답할 자격이 없습니다. 어떤 발명품이 어디에 쓰이는 지 알아내는 가장 쉬운 방법은 그것을 <만든 사람>에게 물어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왜 이 땅에 존재하느냐? 에 대한 질문에는 오직 나를 만드신 하나님만이 대답할 자격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내가 이 질문을 생각하기 훨씬 전부터 나에 대해 생각해 오셨고 또 내가 그것을 알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어떤 사람도 실수로 태어났거나 잘못 쏜 오발탄처럼 목적 없이 세상에 나온 사람은 없습니다. 일에 실수가 없으신 하나님, 계획에 완전하신 하나님이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이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당신은 하나님이 두고 보시기에도 아까운 존재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인생은 나그네 <길손>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정처 없이 떠도는 나그네가 아니라 분명한 볼일이 있고 가야할 목적지가 있는 나그네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저는 성도의 삶은 회사에서 출장 나온 사람과 같다고 생각해 봤습니다.

회사 다니시는 분들은 한두 번의 출장 경험은 다 있을 줄 압니다. 출장 다니는 사람은 자기 볼일로 다니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해야 할 일을 받고 나온 사람입니다. 그래서 우왕좌왕하지 않고 자기가 무엇을 해야 할지를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밥을 먹고 차를 타고 사람을 만나면서도 자기 할 일을 한시도 잊어버리지 않습니다. 그리고 출장 다니는 사람은 짐이 가볍습니다. 살림살이를 트럭에 싣고 다니지 않습니다. 어떤 회사원이 며칠 있으면 떠날 여관방을 리모델링 하고 가재도구를 사들이는데 돈을 쓴다면 정신 나간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출장 중에 있는 사람은 일급 호텔방에서 자더라도 사랑하는 가족들과 함께 살던 고향집을 잊지 못하며, 일류 요리사가 만든 음식을 먹으면서도 사랑하는 아내가 만들어준 그 음식 맛을 그리워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 로라 증거 하였으니” 라고 했습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비롯한 모든 믿음의 선진들은 이 땅에서의 삶을 나그네와 외국인처럼 살았습니다. 그들은 돌아갈 본향을 늘 그리워하며 이 땅은 잠시 머무르다 갈 곳이라는 것을 잊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을 칭찬하시고 자랑스러워 하셨습니다. 그러면 인생을 출장 나온 사람처럼 사는 것은 어떻게 사는 것을 말할까요?

첫째 하나님이 보내셨다고 믿는 것입니다.
출장 가는 사람은 자신이 가고 싶다고 아무 때나 가는 것이 아닙니다. 회사에서 필요가 있어 보내주어야만 갑니다. 인생을 출장 나온 사람처럼 살려면 하나님이 나를 이 세상에 보내셨다는 사실을 의식하며 살아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불우한 가정환경이나 신체적 장애를 비관하면서 자신의 출생은 신이 저지른 최대의 실수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결코 아닙니다. 참새 한 마리가 땅에 떨어지는 것도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될 수 없다고 했는데 참새와 비교할 수 없이 존귀한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사람이 어찌 하나님도 모르는 가운데 태어나고 죽을 수 있겠습니까?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하나님 아버지는 우리의 머리털까지 다 세신바 되셨다고 말씀하지 않습니까?

예레미야 1:5에는 “내가 너를 복중에 짓기 전에 알았고 네가 태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구별하였고, 너를 열방의 선지자로 세웠노라” 고 말씀 하셨습니다.

어찌 예레미야뿐이겠습니까? 하나님의 자녀들은 모두가 부름 받았고 보냄 받은 존재로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 속에 보내졌다면 어느 시대에, 어느 가정에, 어떤 부모 밑에 태어나는 것도 하나님이 선택하셨다고 믿어야 합니다. 우리를 꼭 필요로 하는 시대에 우리를 필요로 하는 환경 가운데, 적절한 부모 밑에서 태어나도록 하셨다고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여기로 보내신 일을 우리가 알 수 없고 이해할 수 없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완전한 지혜이며 섭리임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내게 주신 것도 선물이지만, 주시지 않은 것도 선물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께 받은 것을 통해서도 자라지만, 하나님이 주시지 않은 결핍으로 인해서도 자라기 때문입니다.

둘째 사명을 위해 살아야 합니다.
출장과 관광은 분명히 차이가 있습니다. 출장은 회사로부터 완수할 사명을 받아서 가는 것이지만 관광은 즐기기 위해 선택해서 가는 것입니다. 관광의 목적은 정해진 기간 동안 최대한 즐기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인생을 관광으로 생각하며 삽니다. 그래서 “노세 노세 젊어서 노세 늙어지면 못 노나니” 라고 노래합니다.

그러나 인생은 관광이 아니라 출장입니다. 출장은 일할 사명을 받았기 때문에 목적이 분명합니다. 문제는 그 사명이 무엇인지 미리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세상에 보내실 때, “너는 목사가 되고 너는 의사가 되라” 는 식으로 처음부터 사명을 알려 주시지 않습니다. 사명을 주시되 미리 주시는 것이 아니라 현장에서 주십니다. 현실에서는 당장 해야 할 일만을 보여 주십니다. 그것을 완수하면 다음 것을 보여 주시고 그것을 완수하면 또 다음 것을 보여 주시면서 우리가 차근차근 사명을 완수해 가도록 이끌어 주십니다.

자신의 사명이 무엇인지 발견하지 못해 안타까워하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런 분들은 혹시 내가 지금 해야 할 사명을 무시하고 있지는 않은지 곰곰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작은 사명을 무시하는 사람에게 더 큰 사명을 보여주지 않으십니다. 오늘 맡은 작은 일에서 내일의 사명을 위한 자세와 힘을 키워내지 못하면 결코 내일의 일은 우리에게 맡겨지지 않을 것입니다.

또 어떤 분들은 다른 사람이 받은 사명과 자신의 것을 비교하면서 하나님에 대한 섭섭한 마음을 가지기도 합니다. 누가 어떤 사명을 받고 어떤 일에 사용되든지 그 결정은 하나님께 달려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경륜을 다 이해할 수도 없거니와 전부 이해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것은 천국에 가서나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마태복음 25장에 나오는 달란트의 비유에서 우리가 깨달은 사실은 각자가 맡은 임무가 무엇이든지 간에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은 똑같이 귀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남긴 것이 많든 작든 하나님의 상은 그것과 전혀 상관이 없고 맡은 일에 얼마나 충성하였나, 최선을 다하였나에 따라 상이 결정된다는 사실입니다.

“남의 연장을 사용하면 네 몸을 상할 것이다.” 라는 말이 있습니다. 다윗에게는 물맷돌이 삼손에게는 나귀의 턱뼈가 삼갈에게는 막대기 하나면 족한 것입니다. 내게 주신 것을 귀하게 생각하고 최선을 다해 충성하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바랍니다.

셋째 인생을 출장 나온 사람은 소박하게 삽니다.
출장 갈 때 짐차를 빌려서 냉장고를 싣고 소파를 싣고 가는 사람은 없습니다. 될 수 있으면 짐을 가볍게 쌉니다.

1977년 부산에서 실제 있었던 사건이라고 합니다.
일찍 남편을 잃고 4남매를 홀로 키우며 고생고생하며 살던 어머니가 중병에 걸려 임종이 가까워오자 흩어졌던 4남매가 다 모였습니다. 그 때 어머니가 “나는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다. 그런데 평생에 다이아 반지 한번 껴보지 못하고 죽는 것이 원통 하구나” 하셨습니다. 이 말을 들은 자녀들이 어머니의 마지막 소원인데 자식 된 도리로 안들어 드릴 수 없지 않느냐? 하면서 조금씩 돈을 내서 다이야 반지를 사 드리기로 했습니다. 이때 맏며느리가 한 가지 제안을 했습니다. 최근에 옆집 아주머니가 다이야 반지를 샀는데 그것을 빌려다가 끼워 드리고 어차피 돌아가실 어른이니까 나중에 빼서 되돌려 주면 어떻겠느냐고 했습니다. 모두들 생각해 보니 그것도 좋을 것 같아서 옆집 아주머니의 반지를 빌려다가 고급상자에 넣은 다음 누워계신 어머니께 가지고 갔습니다. 반지를 받은 어머니는 어린애처럼 반지를 손가락에 끼고는 불빛에 비쳐보고 얼굴에 비비시며 한참 좋아하시더니 물 한그릇을 가져오라고 하셨습니다. 자녀들이 물을 갔다 드렸더니 어머니는 반지를 빼내 입에 털어 넣고는 꿀꺽 하고 물을 마셨습니다. 그리고 만족 한 듯 자리에 누우시면서, “나희들이 선물한 반지 애미가 극락까지 가지고 갈란다” 하시고는 숨을 거두셨습니다. 자녀들 사이에 다이야 반지를 어떻게 찾아 돌려주어야 할지 논쟁이 벌어졌습니다. 아들들이 어머니의 배를 갈라 반지를 찾아야 한다고 주장하니까 딸들은 그렇게 하는 것은 어머니를 두 번 죽이는 것이라고 반대했습니다. 결국 화장을 시켜 드리고 잿더미 속에서 반지를 찾았는데 너무 손상이 되어 버려 도저히 돌려 줄 수 없게 되었습니다. 할 수 없이 4남매가 돈을 모아 새 반지를 사서 주인에게 돌려주었습니다.

이 어머니는 반지를 삼켜 뱃속에 넣으면 저 세상에 가지고 갈 수 있는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을 마치는 날, 이 땅에서 소유한 것 중 실오라기 하나라도 가지고 떠날 수 없을 것입니다. 그 날 우리는 모든 것을 주신 하나님께 반납하고 빈손으로 떠나야 합니다. 그때 비로소 내 생명과 재물의 주인이 내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나그네로서 이 땅에서 모은 재물을 어떻게 하면 가장 잘 사용하는 것일까요? 우리는 재물을 가져갈 수는 없지만 미리 보낼 수는 있습니다.

미국 남북전쟁 말기에 북부사람으로 남부에 살면서 큰돈을 번 부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전쟁이 끝나면 고향인 북부로 이사 갈 예정이었습니다. 그런데 엄청난 비밀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전쟁이 곧 북군의 승리로 끝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이 사람은 쌓아놓은 수많은 남부 돈을 어떻게 해야 할까요? 답은 하나뿐입니다. 즉각 가지고 있는 남부 돈을 전쟁이 끝난 후 통용 될 수 있는 북부 돈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남부 통화는 당장 필요한 만큼만 두고서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떠날 때 가져갈 수 없는 쓸모없는 남부 돈 다발에 매달려서는 안됩니다. 주께서 다시 오실 때 우리에게 남아 있는 모든 돈과 소유는 나무와 풀과 짚처럼 타버릴 것입니다. 하늘나라의 금과 은과 보석으로 바뀔 수도 있었던 돈이, 굶주린 자들을 먹이고 영혼 구원하여 제자 삼으라는 주님의 지상명령을 완수하는데 사용할 수 있었던 돈이 한낱 연기로 사그라지고 말 것입니다. 아직 가치가 있을 때 우리는 속히 이 지상의 통화를 천국의 통화로 환전해야 합니다. 우리가 죽는 날, 또는 주님이 다시 오실 때, 수많은 남부 돈을 움켜쥐고 죽는 자신을 보는 것보다 더 큰 비극은 없을 것입니다.

누가복음 16장에 나오는 불의한 청지기 비유에서 주님은 불의한 그 종을 칭찬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그가 주인에게 쫓겨 날 때가 얼마 남지 않은 것을 알고 그 짧은 기간 동안 자신의 모든 것을 쫓겨난 이후의 삶을 준비하는데 사용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불의한 세상의 자녀들도 그렇게 하는데 빛의 자녀들은 영원한 천국을 위해 아무 것도 준비하지 않고 있는 것을 보시고 주님은 한탄하셨습니다. 여러분은 이 땅에서의 삶을 어떻게 살고 계십니까? 쏜살같이 지나는 이 땅에서의 삶을 가장 잘 사는 것은 천국의 삶을 준비하는데 온전히 사용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어떤 분들은 그리스도인들은 너무 내세지향주의자라고 몰아 부칩니다.
저는 그것을 부끄럽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고 믿습니다. 여러분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어디일까요? 보통 뉴질랜드를 세계의 공원이라고 합니다. 어떤 사람이 12월에 뉴질랜드로 이민을 간다고 합시다. 이 사람이 한국에서 살날은 불과 4개월뿐입니다. 그러나 뉴질랜드에서는 죽을 때까지 살 것입니다. 이 사람이 남은 4개월을 어떻게 보낼까요? 한국에다 땅을 사고 집을 사겠습니까? 아니요, 모든 부동산을 정리하고 돈 될 만한 것은 처분하고 그리고 뉴질랜드에서 사는데 필요한 언어를 배우고 직업을 얻기 위해 준비하며 지낼 것입니다. 그렇게 사는 것이 내세지향주의입니까? 아닙니다. 그 사람이야말로 지극히 현실주의자 이며 가장 현재를 잘 사는 사람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세상을 떠나는 날 천국에서 영원히 살 것을 확신하십니까? 조금도 의심 없이 믿고 계십니까? 그런데도 우리가 사는 모습을 보면 마치 천국은 없고 이 세상만 전부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습니다. 정말 천국이 있다는 것을 믿는 사람은 천국을 준비하는 사람입니다. 그는 이 땅에서는 최소한의 경비만 지출하고 자신의 전부를 천국의 삶을 위해 투자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오늘 밤에라도 갑자기 주님이 부르시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부모 사후에 유산문제로 피를 나눈 형제들이 재판정에 서고 마침내 남남으로 갈라지는 예를 보지 않습니까?
지금이라도 중요한 것은 유언장으로 미리 남기고 가족들에게 몇 가지만 부탁하고 떠날 수 있도록 정리하며 살아야 합니다. 소유만 아니라 시신이나 장기 까지도 어떻게 처리할지 기증을 하든지 화장을 하든지 미리 부탁해 놓아야 합니다. 감정도 정리해 두어야 합니다. 오늘 세상을 떠나도 가족이나 주위 사람들에게 감정의 찌끼를 남기지 않고 갈 수 있도록 하고 용서하고 화해해야 할 일을 임종의 자리까지 가지고 가서는 안 될 것입니다.

넷째 인생을 출장 나온 것처럼 살려면 불편을 감수하며 살아야 합니다.
우리의 고향은 천국이고 이 세상은 우리가 잠시 출장 나온 곳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불편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당연합니다. 이 세상은 페어하지 못하고 아무리 노력해도 부패와 부정은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 때문에 분노하고 좌절하는 것은 이 세상이 인생의 전부라고 생각하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인생을 출장처럼 사는 사람은 세상의 부조리 때문에 놀랄 것도 없고 지나치게 반응할 것도 없습니다. 그렇다고 이 세상에 대해 무관심 하라는 말은 아닙니다. 이 땅에 있는 동안 하나님의 정의와 공평을 이루기 위해 애써야 하지만 그러나 이루어지지 않더라도 절망하지 않습니다. 조금이라도 나아진다면 그것으로 기뻐하면 족한 것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는 의인이 모인 곳이 아닙니다. 용서받은 죄인들이 모인 곳입니다. 용서는 받아 분명히 하나님의 자녀는 되었지만 여전히 죄 된 성품이 남아 있습니다. 우리 교회도 고칠 데 없는 완전한 사람들이 모인 곳이 아니라 이기적이고 교만하고 독선적이며 형편없는 성격의 사람들이 성령의 능력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으로 고쳐가기 위해 모인 곳입니다. 그러므로 지상의 교회는 종합병원과도 같습니다. 당연히 문제가 일어나고 실망과 아픔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런 교회 생활에서 모두가 꼭 지켜야 할 룰이 있습니다.

첫째 내 자신이 용서받은 죄인임을 알고 예수님을 닮지 못한 다른 사람들을 수용하는 넉넉함이 있어야 합니다. 개구리는 올챙이 적 시절을 잊어버리기 쉽습니다. 그 사람에게서 과거의 내 모습을 발견했다면 그 시절 내 모습을 기억하면서 내가 받았던 은혜로 덮어 주십시오. 그렇지 않다면 그로인해 내 안에도 있을지 모를 허물을 찾아내는 기회로 삼으십시오.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인들이게 이렇게 당부합니다.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엡4:32)

둘째 자신이 완전하지 못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완전한척 하거나 허물을 덮으려고 애쓸 필요가 없습니다. 성도는 병원에 있는 환자와도 같습니다. 병에 대해 정직해야 살지 병을 속이면 죽습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제 탓입니다.” 이 말은 세상을 떠나기 전 까지 우리 공동체 안에서 항상 사용해야 할 말임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죄인이 회개하는 그 정직한 마음을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죄를 미워하지 죄인을 미워하지 않습니다.

마지막으로 인생을 출장처럼 사는 사람은 천국의 상을 위해 삽니다.
회사에서 출장을 보냈을 때 소기의 성과를 거두고 돌아온다면 보너스를 받든지 승진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사명을 주어 세상에 보내셨고 사명을 잘 완수하면 이를 보상해 주십니다. 산상수훈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이 상주시는 분이심을 끊임없이 말씀하고 계십니다.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받을 상이 큼이라(마5:12, 눅6:23)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마10:41, 막9:41)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상을 이미 받았느니라(마6:2, 5, 16)

사도 바울도 상에 대해 말합니다.
각각 자기의 일하는 대로 자기의 상을 받으리라.(고전3:8)
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력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고전3:14)

사도요한도 상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또 무론대소하고 주의 이름을 경외하는 자들에게 상주시며 (계11:18))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대로 갚아 주리라.
(계22:12)

이처럼 성경에는 우리가 받을 상을 약속하고 있는데 실제 천국의 상을 기대하는 성도들은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먼저 이단 집단에 대한 경계심 때문입니다. 이단 집단은 현재의 희생을 강요하고 착취하기 위해서 사탕발림으로 천국의 상을 내세웁니다. 그래서 목회자들이 천국의 상을 말하면 본능적으로 거부감을 가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또 다른 이유는 상을 바라며 신앙생활 하는 것은 유치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해서 기쁨으로 해야 순수하고 차원 높은 신앙이지 상을 바라고 하는 것은 수준 낮은 신앙이라는 것입니다. 과연 그럴까요?

먼저 오해하고 있는 것은 상은 우리가 요구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이라는 점입니다. 예를 들어 아들이 아버지 말씀대로 열심히 방청소도 하고 동생도 잘 데리고 놀았습니다. 아버지가 마음이 너무 기뻐서 상을 주어야겠다 생각하고 자전거를 사주었습니다. 그런데 아들이, “아버지, 저를 뭘로 보시는 거에요. 아들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인데 상이 웬 말입니까. 제가 상 받으려고 한줄 아십니까? 그것은 저에 대한 모독입니다.” 그러면 아버지가 뭐라고 하실까요? “야, 이 녀석아, 네가 도리어 나를 모독하고 있구나.” 그러시지 않겠어요?

상을 통해서 아버지는 아버지로서 줄 수 있는 기쁨과 기뻐하는 아들을 보며 더 큰 기쁨을 맛보시고, 아들은 아버지가 자기 마음을 알아주었다는 것과 당연한 일임에도 상주시는 아버지의 사랑을 맛보면서 더 열심히 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버지가 상을 주시겠다고 하면 아들은 감사함으로 받고 기쁨으로 누리면 될 것입니다.
여러분, 주기도문 하나 달랑 외워서 천국 가는 사람과, 하나님과 그 나라를 위해 아들을 바치고, 남편을 바치고, 전 재산을 바친 사람과 천국에서 그 두 사람이 누리는 삶이 똑같을 까요?

어머니 뱃속에서 열 달을 어떻게 지내느냐가 세상에 태어나서 살게 될 한 평생을 좌우합니다. 뱃속에서 열 달과 태어나서 한평생은 하나로 이어져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이 땅에서 하루하루 사는 우리의 삶이, 이다음 천국에서 어떻게 살지를 결정짓습니다. 그렇다면 이 땅에서 사는 삶이 다 다른데 어떻게 천국에서의 삶이 다 같아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여기와 천국은 결코 분리되어 있지 않습니다.

“목사님 나는 지옥의 고통을 피하고 천국 가는 것만으로도 행복합니다. 더 바랄 것이 없습니다.” 그런 분들 있으시죠?

어떤 사람이 냇가를 건너는데 펑하고 연기 속에서 한 사람이 나타나더니 하는 말이, “자갈돌을 할 수 있는 대로 주머니에 많이 넣어 가시오. 그러면 시내를 건넌 후에 크게 기뻐할 일과 크게 후회할 일이 생길 것이요.” 라고 했습니다. 나그네가 그 말을 듣고 믿을까 말까 생각하다가 믿져야 본전이지 하고는 자갈돌 한 개를 골라 주머니에 넣었습니다. 시냇물을 건넌 후에 그 사람의 말이 생각나서 주머니를 꺼내보니 자갈돌이 금덩이로 바뀌어 있었습니다. 얼마나 기쁜지 소리를 지르고 춤을 추다가 가만히 생각하더니 대성통곡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아이구 내 금덩이, 내 금덩이.

이 사람처럼 천국에 들어가면 우리도 크게 기뻐하다가 크게 통곡할 일을 만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의 이름으로 행한 물 한 그릇의 헌신이라도 결코 잊지 않고 갚아주시겠다고 약속하신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눈치만 보며 성도로서 야단맞지 않을 만큼만 헌신하고 할 수 있으면 하지 않으려 하고 있지 않습니까?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이 땅에서 성도의 삶은 마치 군인이 제대 날짜를 손꼽아 기다리는 것과 같습니다. 참된 성도들은 낯선 이국땅에서의 삶을 어서 끝내고 영원한 고향집으로 돌아갈 날만 손꼽아 기다립니다. 고향집으로 돌아가는 그 날, 천군천사의 합창과 팡파레가 울러 퍼지는 가운데 수많은 믿음의 선진들과 먼저 가신 사랑하는 사람들이 손을 흔들며 우리를 반길 것입니다. 그리고 수많은 무리 한 가운데서 그토록 사모하던 주님이 두 손에 선명한 못 자국을 지닌 두 팔을 벌리고 달려 나오시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 때 우리는 주님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한 없이 울 것입니다. “주님 모든 것을 다 아시죠. 주님 모든 것을 다 아시죠.” “그래 내가 안다. 내가 다 알고 있다. 수고했다. 네가 자랑스럽구나. 너는 내 아들이다. 이제 너를 위해 큰 잔치가 예비 되어 있구나. 일어나 함께 가자” 주님의 그 음성을 들으며 주님의 품에 안겨있을 때 세상에서 당한 모든 상처와 고통은 눈 녹듯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인생은 이 세상으로 다 끝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지금 여기에서 받는 복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아직 우리에게 최고의 시상식은 오지 않았습니다. 그 날 그 상급을 바라보며 고단하고 지난한 이국땅에서의 삶을 잘 마치는 하늘 백성 되시기를 바랍니다.  (권 영 국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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