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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누가와 함께 하는 예수님의 비유연구(8) : 인생역전 드라마 (눅 1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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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역전 드라마

TV 드라마 좋아하는 분들 참 많습니다. 요즈음에 어떤 드라마가 최고 인기입니까? 우리 권사님들은 ‘금순이’를 좋아하던데 예전에도 그 많은 TV 드라마들을 보면 제목은 다 달라도 내용은 거의 비슷비슷합니다. 가난한 주인공이 나중에 성공해서 자신을 괴롭히던 재벌 집 아들에게 통쾌하게 복수를 합니다. 아니면 가난한 주인공이 성공하기 위해 애인을 버리고 부잣집 여자를 택하지만 결국 망하고 맙니다. 모든 드라마가 그게 그거라 뭐 하러 보나 싶다가도 또 그 시간만 되면 TV를 켜곤 합니다. 이렇게 묘한 매력이 있는 까닭은 아마 대부분의 드라마가 극적인 인생역전을 다루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오늘 우리 주님도 한 편의 드라마 같은 비유를 들려주십니다. 이 비유를 듣고 있노라면 마치 한편의 극적인 인생역전 드라마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우선 오늘 예수님이 들려주신 드라마에는 두 명의 완전히 대조적인 주인공이 등장합니다. 한 사람은 땅에서는 부자였지만 하늘에서는 거지가 된 사람이고, 또 한 사람은 땅에서는 거지였지만 하늘에서는 부자가 된 사람입니다. 인생이 역전된 것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두 주인공에 대해 알아볼까요?

<등장인물 1> 직업: 부자/ 이름: 안 나옴/ 상황: 19절, 자색 옷과 고운 베옷(아주 비싼 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로이 연락함(이는 보통 잔치에서의 즐거움을 뜻하므로 ‘호화로이 즐기면서 사는데’라고 번역할 수 있다).

<등장인물 2> 직업: 거지/ 이름: 나사로(‘하나님이 도우시는 자’라는 뜻)/ 상황: 20절에서 ‘헌데’란 종기로 인한 상처를 뜻합니다. 그는 부자의 집 대문 앞에 누워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를 채우려 했습니다. 유대인들은 빵 조각을 식탁 바닥에 흘리면 위생적인 이유로 도로 접시에 담지 않고 식탁 아래로 버렸는데, 이 부스러기를 집안에 있는 개가 먹습니다. 그런데 이 거지는 그 부스러기조차 못 얻어먹고 개들이 와서 그 상처를 핥는 비참한 모습으로 방치됩니다. 바로 여기까지가 이 두 주인공의 살아생전 모습입니다.




사후에 일어난 일

그런데 이 두 주인공이 죽은 후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22절에 “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부자도 죽어 장사되었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성도들이 이 세상에 있을 동안에도 천사를 통해 보호하고 인도해 주시다가 마지막에 세상 떠날 때 이 천사들로 하여금 죽은 성도의 영혼을 받들어 하나님께로 인도한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주님 믿다가 세상 떠날 때 천사들이 우리 영혼을 받들어 저 낙원으로, 하나님의 품으로 인도하는 영광을 얻게 될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한편, 거지 나사로가 죽은 후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갔다고 하는데 이 아브라함의 품이란 무엇을 뜻할까요?  여기서 ‘아브라함의 품’이란 우리 성도들이 죽은 후 가게 될 ‘낙원’(paradise)을 가리킨다고 하겠습니다. 이미 지난 두 주간 수요일 설교시간에도 말씀 드렸지만 이 비유는 우리 성도들이 죽은 후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까지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전문적인 용어로 ‘중간기’라고 부릅니다. 비록 성경이 이 중간기에 대해 일목요연하게 설명하고 있지는 않지만 성경 여러 곳에 나온 내용들을 종합적으로 살펴보면 대략 다음과 같이 정리해 볼 수 있습니다. 우리 인간은 죽은 후에 어떻게 되는가? 우리의 육체는 무덤에서 부패하지만 영혼은 낙원과 음부로 들어갑니다. 신자들의 영혼은 낙원에 들어가 기쁨과 즐거움을 누리고, 불신자들의 영혼은 음부에 들어가 고통을 받다가 예수님 재림하시는 날, 최후의 심판 때 완전하고도 영원한 천국과 지옥에 들어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저도 종종 그런 표현을 씁니다만 성경이나 찬송가조차도 천국과 낙원을 잘 구분하지 않고 “우리가 죽은 후에 천국에 들어간다”는 표현을 자주 씁니다. 하지만 엄밀하게 따지면 우리가 죽은 후 곧바로 천국이나 지옥에 가는 것이 아니고 임시처소라 할 수 있는 낙원이나 음부에 있다가 재림심판 후에 영원히 천국과 지옥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회개한 강도에게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 23:43)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나중에 천국에 갈 것이다”라고 하지 않고 “오늘, 죽는 즉시 낙원에 있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지요. 하지만 낙원에서의 기쁨은 결코 장차 우리가 천국에서 누리게 될 영원한 기쁨과 비교할 수 없으며 음부에서 받는 고통도 장차 지옥에서 받을 고통과 비길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장차 누리게 될 천국에서의 영원하고도 완전한 복락을 사모하며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은 거지 나사로가 들어간 낙원을 ‘아브라함의 품’이라고 부릅니다. 언젠가 우리가 죽어 낙원에 가면 거기에는 모든 성도들이 다 모여 있겠지요? 먼저 세상 떠난 모든 성도들, 내 사랑하는 가족들 뿐 아니라 다윗, 모세, 아브라함, 바울도 다 거기 있을 것입니다. 그 중에 믿음의 대표가 되는 사람이 바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라고 보았기 때문에 성경은 그 낙원을 ‘아브라함의 품’이라고 부른 것입니다. ‘품’이라는 말 속에서 우리는 성도들이 낙원에 들어간 후 거기서 편안하게 안식과 행복을 누리며 살아간다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반면 부자는 음부에서 ‘고통 중에’ 있게 됩니다(23절). 지옥에는 지옥불이 타고 있는데 여기 비할 바는 못 되지만 음부에서도 불신자의 영혼은 계속해서 불꽃 가운데 타게 됩니다(24절). 이 불이 얼마나 뜨겁고 고통스럽겠습니까? 얼마나 목이 타겠습니까? 그래서 부자는 아브라함에게 간청합니다.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고민하나이다.” ‘고민한다’는 말은 고통당한다는 뜻입니다. 얼마나 고통이 심했으면, 얼마나 뜨겁고 목이 탔으면 이렇게라도 해달라고 빌었을까요? ‘손가락 끝에 묻힌 물 한 방울이라도 달라’고 애원하는 부자의 모습은 거지 나사로가 살아생전에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라도 애원했던 모습과 비교가 됩니다. 살아생전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모습이 죽은 이후 완전히 뒤바뀌었음을 보여주는 표현입니다. 드라마틱한 인생역전입니다.




인생역전

이 인생역전을 더 잘 보여주는 부분이 바로 25절에 나온 아브라함의 말입니다. 손가락 끝에 묻힌 물이라도 달라는 부자의 애원을 냉정하게 거절하면서 아브라함은 이렇게 말합니다. “얘 너는 살았을 때에 네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저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민을 받느니라.” 살았을 때 부자는 좋은 것(good)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bad)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제 죽은 후에 나사로는 낙원에서 위로를 받고 부자는 음부에서 고통 받게 된다고 하니 진짜 인생역전입니다. 통쾌한 반전입니다.

그런데 무조건 부자였다는 이유만으로 이렇게 음부에 들어간 것은 아닙니다. 성경은 부자가 호화롭게 살며 제 배만 채우는 데 열중해서 불쌍한 사람을 돌보지 않은 것을 죄로 봅니다. 정당하게 번 돈으로 부자가 된 자체는 문제없지만 이렇게 이기심과 무관심에 빠지기 쉽기 때문에 예수님은 부자가 천국 가는 일이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어렵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눅 18:25). 하지만 이 두 사람의 행위만 가지고 낙원행과 음부행이 결정되었다고 보면 안 됩니다. 믿음으로만 구원 받는 것이지 행위나 공로로 구원 받는 것 아니지요? 그러므로 부자도 가난한 자를 안 돌봤다는 이유만으로 음부에 간 것 아니요 거지도 살아생전 고생했다는 이유만으로 낙원에 간 것 아닙니다. 본문에는 안 나왔지만 부자는 불신자요, 나사로는 신자였다는 뜻입니다. 부자는 세상에서는 성공하고 호화로운 삶을 누렸지만 가난한 자, 소외된 자에게 냉정했으며 결정적으로 하나님을 믿지 않아서 죽은 후에 음부에 떨어진 것입니다. 한 마디로 세상에서는 성공했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철저히 실패한 인생입니다. 반대로 거지 나사로는 가난하고 불행한 삶을 살았지만 오직 하나님을 믿은 그 이유 하나만으로 구원 받고 낙원에 들어간, 세상에서는 실패했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성공한 인생입니다.




부자와 아브라함의 대화

그렇다면 오늘 본문에서 부자가 아브라함에게 부탁한 내용 두 가지는 무엇이며 그 뜻은 무엇일까요?

첫째, 부자는 음부의 고통이 워낙 심하니까 나사로를 보내어 손가락 끝에 물이라도 찍어주게 해달라고 요청하지만 거절당합니다(24절). 음부행이 부자가 살았을 때 한 행동에 따른 당연한 결과이므로 바뀔 수 없다는 것이며 음부나 지옥의 형벌은 너무도 고통스럽지만 그에 대한 조금의 연민이나 위로도 있을 수 없다는, 그만큼 형벌이 무섭고 단호하다는 뜻입니다. 또한 낙원과 음부 사이에 경계가 있는데 그것은 큰 구렁, 즉 깊이 갈라진 틈입니다. 이 구렁 때문에 낙원에서 음부로 갈 수도, 음부에서 낙원으로 갈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구원과 심판은 한번 정해지면 그만이며 그 결과는 절대 변하지 않는다는 어떻게 보면 참 무서운 말씀입니다. 낙원과 음부, 천국과 지옥은 교류나 만남이 불가능하다는 이 말씀은 천주교의 연옥설(영세를 받았으나 공덕이 부족하여 천국에 미치지 못한 자가 가는 곳. 연옥에 간 자들은 소정의 정화기간이 차면 천국으로 옮겨진다. 그러나 유족 혹은 친지의 선행과 기도로 기간이 단축될 수 있다.)이 성립될 수 없다는 성경적 증거가 됩니다.

둘째, 정 그렇다면 나사로를 내 아버지 집에 보내어 형제 다섯에게 이 사실을 알리게 해서 최소한 그들만은 이 고통스러운 음부에 오지 않게 해달라고 부탁합니다. 자신에게 더 이상 어떤 가능성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부자는 최소한 자기 형제들만이라도 똑같은 운명을 당하지 않도록 나사로를 보내달라고 요청한 것이지요. 아마 부자는 아무리 완고하게 복음을 거부하는 형제들이라 할지라도 어느 날 갑자기 죽었던 사람이 되돌아와 하는 말이 “나는 낙원에 가서 편안히 있지만 너희 형제는 지금 음부에서 불에 타고 있다”고 말한다면 안 믿으려야 안 믿을 수 없을 것이라 여긴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마지막 부탁마저도 아브라함은 매몰차게 거절합니다. 그 까닭은 저희에게는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모세와 선지자’란 어떤 인물들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성경’을 뜻하는 말입니다. ‘모세’란 바로 구약의 모세오경을 뜻하고 ‘선지자들’이란 구약의 예언서를 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은 네 형제들에게는 성경이 있으므로 그 성경에서 들으면 충분하다고 대답한 것입니다. 성경에서 뭘 듣는다는 말입니까? 바로 부자가 나사로로 하여금 전하게 해달라고 부탁한 내용, 믿는 자는 낙원에 가서 영원한 복락을 누리며, 안 믿는 자는 음부에 가서 영원한 형벌을 받는다는 내용입니다. 한 마디로 ‘예수천당, 불신지옥’이지요. 그런데 이 사실이 어디에 제일 확실하게 나와 있습니까? 성경입니다. 성경만큼 이 사실을 명확하게 기록한 곳이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만 가지고도 충분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 세상에 사는 성도들은 오직 말씀으로만 회개와 구원의 기회를 얻는다는 뜻입니다. 아브라함이 말씀을 듣고도 믿지 않는 형제들이 행여나 죽은 자가 다시 되돌아온다고 해서 깨닫겠냐고 반문한 이유가 이것입니다(31절). 사랑하는 여러분, 참된 구원의 길은 오직 성경에만 있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낙원과 음부, 천국과 지옥, 구원과 심판에 대한 모든 도리가 오직 이 말씀에만 있으니 분명히 믿으시고 꼭 낙원에 들어가기 바랍니다.




지옥 드라마의 예고편

오늘 이 비유에서 예수님은 장차 성도들이 낙원과 천국에서 누리게 될 기쁨과 복락도 설명하지만 그보다는 불신자들이 장차 음부와 지옥에서 당할 끔찍한 고통을 설명하는 데 더 강조점을 두고 계십니다. 왜 그랬을까요? 겁주려고요? 맞습니다. 겁주기 위해서입니다. 무엇보다 예수님은 그 무서운 음부와 그보다 더 무서운 지옥의 모습을 미리 앞당겨 보여줌으로써 불신자들에게 경고하려 하신 것입니다. 말하자면 이 비유는 음부와 지옥의 예고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요즈음 TV 드라마를 보면 끝날 때 잠깐 맛보기로 다음 편을 예고해 줍니다. 우리는 조금 감질나지만 이 예고편을 통해 “다음 편에는 어떤 내용이 나오겠구나, 재미있겠다, 또 봐야지” 하고 생각합니다. 오늘의 비유도 음부 드라마, 지옥 드라마의 예고편으로 음부가 어떤 곳인지, 지옥이 어떤 곳인지 미리 보여줍니다. 그래서 이 예고편을 보고 이렇게 무섭고 고통스러운 음부나 지옥에 절대 들어가면 안 되겠다는 두려움을 갖도록 한 것입니다. 이 땅에서 지지리도 고생하고 힘들게 살았던 나사로는 예수 믿어 구원 받고 천사들에게 들림 받아 낙원에서 행복을 누립니다. 비천한 거지가 예수 믿어 한 순간에 출세합니다. 이 세상에서 잠시 고생했지만 예수 믿는다는 한 가지 이유만으로 낙원에서, 그리고 앞날에는 천국에서 영원한 복을 누리게 됩니다. 반대로 부자는 세상에서 잘 살고 잘 나갔지만 예수 안 믿었다는 한 가지 이유만으로 음부에서, 그리고 앞날에 지옥에서 엄청난 고통을 당하게 됩니다. 세상에서 실패한 인생이지만 하늘나라에서 성공한 나사로와 세상에서는 성공했지만 하늘나라에서 실패한 부자를 대조적으로 보여주는 역전드라마입니다.

여러분은 오늘 이 역전드라마의 예고편을 보았습니다. 부자자신은 이제 어떤 희망도 없고 영원히 고통 속에 살아야만 합니다. 이제 와서 후회해도 아무 소용없습니다. 하지만 부자의 형제들은 아직도 기회가 있습니다. 어떤 기회입니까? 죽었던 나사로가 벌떡 일어나 말해주는 것이 아니라 바로 성경을 통해 깨닫게 될 기회입니다. 그들 중에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회개하여 예수 믿으면 낙원에 들어갈 것이지만 이 기회를 놓치고 성경을 안 믿으면 형제인 부자와 같은 운명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말씀을 통해 우리를 깨닫게 하려고, 아직도 기회를 못 잡은 불신자들에게 경고를 주려고 이 비유를 들려주신 것입니다. 예고편으로 말이지요. 이 예고편에서 아브라함은 우리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얘야, 너 세상에서는 성공하고 하나님 앞에서 실패한 인생이 될래? 아니면 세상에서는 힘들어도 하나님 앞에서 성공한 인생이 될래?”라고 말입니다. 계속해서 이렇게 묻습니다. “그러면 네 자녀는? 네 형제와 부모, 네 남편과 아내, 네 친구는 어떻게 하겠느냐?”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이 비유를 듣고 해야 할 일은 이것입니다. 먼저 천국은 분명히 있습니다. 낙원도 분명히 있습니다. 또한 지옥도 음부도 분명히 있습니다. 그러므로 먼저 우리가 장차 들어갈 저 낙원과 천국의 소망을 바라보고 위로 받고 힘을 얻고 소망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가 바라볼 곳은 이 세상이 아니라 하늘나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의 삶이 비록 어렵고 또한 하나님 뜻대로, 성경대로 살아가다보면 손해 보고 힘도 들지만 결코 실망하지 않고 꿋꿋하게 신앙을 지키며 살아가야 하는 것이지요. 나아가 많은 기회가 있었지만 아직도 성경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해 불신 상태에 있는 저 영혼들, 자기 앞에 영원한 지옥불의 형벌이 놓여있음을 알지 못하는 저 불쌍한 영혼들을 위해 우리는 부지런히 전도해야 합니다. 나사로는 전도 못 합니다. 낙원에서 이 세상으로 올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나사로도 못하는 전도를 세상에 있는 우리는 할 수 있습니다. 혹시 나중에 우리가 낙원에 가더라도 그 좋은 곳에 나 혼자만 있고 내 남편과 아내, 자녀와 부모형제, 사랑하는 사람들이 없으면 얼마나 후회되겠습니까? 진작 전도할 걸 하고 가슴을 치며 후회해 봐야 그때는 소용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아직 세상에 남아 있을 때 부지런히, 아니 목숨 걸고 그들에게 복음 전하고 경고해야 합니다. 이것이 이 땅에 살아있을 때 우리가 져야 할 가장 중요한 사명입니다. 오늘도 여러분 모두가 저 낙원과 천국의 소망을 바라보며 이 복음전파의 사명 감당하시는 천국백성 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이  하 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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