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내게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2) “모험심과 담력” (히 11:1,2, 요 16..

  • 잡초 잡초
  • 271
  • 0

첨부 1


  하나님께서 저에게 베주신 은혜 중 또 하나는 저에게 모험적인 기질을 주신 것입니다. 무엇이든지 새로운 것을 해 보고 싶은 호기심을 주셨고, 위험을 무릅쓰면서도 그것을 꼭 하고야 마는 모험심과 담력을 주셨습니다. 그것은 선천적인 기질인 동시에 후천적인 기질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열한 살 때 평양을 떠났는데 어머니가 저에게 당부한 말씀이 ‘위험한 일을 하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아마 제가 어릴 때부터 모험적인 일들을 많이 했던 것 같습니다. 사실 저는 한 평생 모험적인 일들을 즐기면서 살아오고 있습니다. 금년에도 홍천에 가서 하루 종일 40번이나 스키를 탔고, 제주도 바다에 뛰어들어가서 이틀 동안 6시간이나 수영을 했습니다. 저는 한평생 하늘을 날아가는 꿈을 꾸고 있는데 최근에는 나무 판자가 없이도 하늘을 더 잘 납니다. 꿈 속에서 뿐 아니라 실제로 중국 소련 북한 아프가니스탄 아프리카 방글라데시 브라질 등지를 돌아다니면서 사랑의 손길을 펴기도 합니다. 교파와 종교를 초월해서 연합운동과 평화운동을 힘쓰기도 합니다. 그래서 저를 잘 아는 박범룡 목사님은 저를 보고 날개와 몸통을 버려두고 프로펠러만 앞으로 날아가는 것 같다는 말을 했습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저에게 모험적인 기질을 주신 것을 참으로 감사합니다. 두려워하지 않는 담력을 주신 것도 감사하고, 근심이나 염려대신 마음에 평안과 여유를 주신 것도 감사합니다. 그래서 저는 다윗처럼 이렇게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내가 주께 감사하옴은 나를 지으심이 신묘막측하심이라"(시139:14). “하나님, 나를 요 모양 요 모습으로 멋지게 지어주신 것을 참으로 감사합니다.”

  모험심과 담력은 믿음의 하나의 색깔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브라함이 갈 바를 알지 못하고 앞으로 나아갔다고 했는데 그것이 바로 모험심과 담력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모세가 지팡이를 들고 손을 내밀어 홍해를 갈랐다고 했는데 그것이 바로 모험심과 담력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여호수아가 아무런 무기도 가지지 않고 난공불락의 여리고 성을 일곱 번 돌았다고 했는데 그것이 바로 모험심과 담력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모험심과 담력은 믿음의 하나의 색깔입니다. 하나님의 손을 믿고 하나님을 의지하기 때문에 무슨 일이든지 할 수 있다는 모험심과 담력이 생깁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부족한 저에게 모험심과 담력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그것이 선천적으로는 저의 아버지의 모험적인 믿음의 삶에서 왔다고도 생각하고, 후천적으로는 순교적 신앙을 가르쳐 주신 신앙의 스승들에게서 왔다고도 생각하고, 한 평생 광야와 같은 고난과 슬픔과 기쁨의 길을 걸어오면서 받은 훈련에서 온 것이라고도 생각합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저에게 주신 모험심과 담력으로 제가 한 일들 중에서 세 가지만 골라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새 신자들을 제외한 대부분의 강변교회의 성도들은 다 아는 일이지만 다시 한 번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첫째 혼자서 38선을 넘은 일입니다.

  제가 11살 때 혼자서 38선을 넘은 일을 생각하면 그것은 대단한 모험과 담력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어떻게 열한 살 소년이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무조건 남쪽을 향해서 달려갈 수가 있었을까요? 지금 생각해 보아도 그 일이 기특하기도 하고 대단하기도 합니다. 단 한 가지 이유와 목적 때문에, 하나님을 바로 믿고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기 위한 단 한 가지 이유와 목적 때문에, 사랑하는 어머니와 동생들과 감옥에 계시는 아버지를 북에 남겨두고, 고향과 아비 집을 떠나 혼자서 남쪽을 향해 달려갈 수 있었던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대단한 모험과 담력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아도 슬픔과 아픔이 가슴 가득하게 미어지는 숨 막히는 일이었습니다. 1948년 8월 캄캄한 어느날 밤 38선을 넘을 때 우리는 모두 북한 경비 군인들에게 붙잡혔습니다. 서지 않으면 총을 쏜다고 위협했습니다. 어른들은 모두 섰습니다. 그러나 저는 설 수가 없었습니다. 남쪽으로 가는 분명한 이유와 목적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아이는 저 혼자였는데 저는 서지 않고 그대로 남쪽을 향해서 어둠 속으로 힘을 다해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조금도 무섭지가 않았습니다. 약간의 스릴도 느꼈습니다. 언덕을 한참 달리다가 파 밭을 지나고 허리에 차는 강을 건너며 3,40분 동안 달려서 남쪽에 도착했습니다.

  어느 초가집에 들어갔습니다. 그곳에서 청년 한 사람을 만났습니다. 내가 서울로 간다고 하니까 그 청년이 나를 기차에 태워서 서울까지 데려다 주었습니다. 나는 그 청년을 천사라고 생각합니다. 서울에서는 수년 전에 먼저 와 계시던 이모님을 만났습니다. 이모님 댁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밤에는 어머니가 보고 싶어서 남 몰래 눈물을 흘렸지만,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며 영락교회에서 신앙생활을 마음껏 할 수 있어서 얼마나 좋았는지 모릅니다. 방산국민하교 5학년에 입학했는데 운동도 잘 하고 공부도 잘해서 선생님의 칭찬을 받았고 친구들의 부러움을 샀습니다. 한번은 학교 건물 뒷편에 학생들이 많이 모인 곳에서 저 하고 다른 친구하나 하고 싸움을 하게 되었습니다. 친구들이 모두 둘러서서 보는 가운데 우리 둘이서 한 참 치고 받고 싸움을 했는데 제가 이겼습니다. 그래서 친구들이 저를 더 인정하고 더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공부를 잘해서 그때 학교에서 몇 명만 가던 서울중학교에 입학하게 되었습니다.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요 모두가 하나님의 도우심이었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을 믿고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면서 모험심과 담력으로 고향과 부모를 떠나온 믿음의 소년을 하나님께서 기특하게 보시고 사랑하시고 축복하신 것 같습니다.

  둘째 돈 100불을 가지고 미국으로 간 일입니다.

  제가 서울 중 고등학교와 서울대학을 졸업한 후 1년 동안 총신에서 공부한 다음 1962년 8월 돈 100불을 가지고 미국으로 갔습니다. 신학을 공부하여 훌륭한 목사가 되기 위해서 였습니다. 저는 그때 교수 될 생각은 별로 하지 않았습니다.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가슴에 지녔던 소원은 공부를 열심히 해서 훌륭한 목사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누군가가 저에게 미국 필라델피아에 있는 훼이스 신학교에 가서 공부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는 말을 했습니다. 저는 남의 말을 잘 듣는 터라 그 학교가 어디에 있는지 어떤 학교인지도 모르고 그 학교에 지원을 했고 그래서 입학이 허락되었습니다. 장학금이 있는지 학비가 얼마인지 아무 것도 모르고 무조건 미국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한미재단의 주선으로 104불을 내고 인천에서 아주 큰 미국 군함을 타고 두 주 이상 걸려서 미국 샌프랜시스코에 가게 되었습니다. 배를 타니까 전부 미국 군인들과 그의 가족들이었고 한국 사람이라고는 한국유학생 다섯 명뿐이었는데 전부 서울문리대 졸업생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배를 타고 일본과 하와이를 거쳐서 샌프랜시스코에 도착했을 때 저를 제외한 한국 학생들 네 명은 모두 심한 배 멀미로 녹초가 되어 거의 죽게 된 형편이었습니다. 저는 배 멀미라고는 한 번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음식도 제대로 먹지 못했는데 저는 처음 먹어보는 양식이 너무너무 맛이 있어서 얼마나 많이 먹었는지 모릅니다. 하와이에 도착했을 때 학생들은 모두 녹초가 되었는데 저는 그들을 데리고 와이키키 해변에 가서 파인애플도 사 먹고 저 혼자서 수영도 하고 설프 보드까지 탔습니다.

  배가 샌프랜시스코에 도착하자 마자 저는 그 길로 달려가서 그레이하운드 버스를 타고 3일 동안 달린 후 필라델피아에 있는 훼이스 신학교에 도착했습니다. 도착한 다음 날부터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100불을 가지고 갔지만 버스 비를 지불하고 성경책과 조그만 타이프라이터를 사니까 돈이 거의 다 없어졌습니다. 그러나 공부를 시작하자 마자 저는 교장 매크레이 박사님의 마음에 들게 되었고 교내 출판사 책임자의 마음에 들게 되어서 많은 도움과 혜택을 누리면서 마음껏 공부를 하게 되었습니다. 내가 원하는 시간에 출판사에 가서 마음대로 일하면서 돈을 벌 수가 있었고 일하기를 원하는 다른 외국인 학생들에게 내가 일거리를 주기도 했습니다.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요 모두가 하나님의 도우심이었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을 믿고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면서 모험심과 담력으로 돈 100불을 가지고 훌륭한 목사가 되기 위해서 배를 타고 미국으로 온 믿음의 청년을 하나님께서 기특하게 보시고 사랑하시고 축복하신 것 같습니다.

  12년 동안의 유학생활의 재미 있는 이야기를 다 할 수가 없습니다. 훼이스 신학교와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와 예일대학교 신학대학에서 공부하여 세 개의 학위를 얻은 후 박사 학위를 취득하기 위해서 아이오와 대학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세 학교에서 공부하는 동안 부족한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모두 장학금을 받으면서 마음껏 공부를 했습니다. 예일 대학을 졸업할 때는 에드워드 흄 휄로우십이라는 상금까지 받았습니다. 그런데 아이오와 대학 박사과정에 입학이 되었지만 장학금을 받지 못했습니다. 장학금이 하나 남아 있는데 이런 저런 조건이 붙어 있기 때문에 저는 그 장학금을 받을 수 없다는 편지를 받았습니다. 많이 생각을 하다가 아주 낡은 저의 자동차에 짐을 다 싸 가지고 미국 동부에서 미국 중부 아이오와까지 달려 갔습니다. 대단히 먼 길이었습니다. 중간에 차가 고장 나면 오도 가도 못하는 먼 길이었지만 낡은 차를 타고 무사히 아이오와에 도착했습니다. 아이오와 대학의 종교학과 주임 교수인 포렐 교수님을 찾아갔습니다. 입학을 허락해주어서 감사하다는 말을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 남은 장학금을 저에게 줄줄 알고 이렇게 먼 길을 달려 왔다고 말했습니다. 포렐 교수님은 아주  난감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한참 생각하더니 그 하나 남은 장학금을 저에게 주겠다고 말했습니다. 모험심과 담력이 통하는 순간이었습니다. 포렐 교수님은 저에게 질문을 하나 했습니다. 어디에서 살겠냐고 물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아직 살 곳을 정하지 못했다고 말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자리에서 전화를 걸었습니다. 동물병원을 하는 동물병원 원장 집사님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외국 학생이 하나 왔는데 혹 있을 곳이 있겠느냐는 것이었습니다. 동물병원에 방이 하나 있는데 밤에 전화를 잘 받으면 무료로 있게 해 주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즉시 그 동물병원으로 달려갔습니다. 그곳에서 몇 년 동안 편안하게 살면서 공부를 마음껏 할 수가 있었습니다.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요 모두가 하나님의 도우심이었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을 믿고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면서 모험심과 담력으로 훌륭한 목사가 되기 위해서 장학금도 없이 낡은 차를 타고 먼 길을 달려온 믿음의 청년을 하나님께서 기특하게 보시고 사랑하시고 축복하신 것 같습니다.

  셋째 중앙정보부에 붙잡혀 가서 심문을 받으면서 설교준비를 한 일입니다.

  주일 성수는 저에게 있어서 생명과 같은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12년 동안 미국에서 공부하고 1974년 가을에 귀국했는데 주일성수문제에 부딪혔습니다. 1975년 말경 주민등록 갱신을 주일에 하라는 통보가 시달되었습니다. 저는 그와 같은 정부 방침에 반대하면서 다음과 같은 글을 크리스챤신문 11월 29일 호에 실었습니다. 그 글의 일부를 여기 옮깁니다. “나는 주민등록 갱신을 일요일에 하도록 배정되었다는 통보를 받았다. 이것이 많은 사람들에게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겠지만 나에게는 그렇지가 않았다. 교회의 교육 목사요 신학대학의 강사이기 때문에 보다는 나 개인의 과거때문이라고 생각되어진다…(중략)…벌금 낼 각오를 하고 주민등록 갱신을 일요일에 하지 않기로 마음 먹었다. 물론 주민등록 갱신을 일요일에 하도록 한 것이 북한에서와 같이 신앙을 침해하고 억압하려는 고의적인 정책으로 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앞으로는 이와 같은 일들 (또는 일요일에 입학시험 실시 등)이 일요일에 실시되지 않도록 행정부 책임자들이 고려해 주기를 부탁한다.”

  그런데 박정희 군사 정부는 교회를 장악하려는 나머지 주일에 국가고시는 물론 학도군사훈련까지 실시했습니다. 총신의 일부 교수는 비상시에는 주일에 학도군사훈련을 실시하는 것이 괜찮다는 입장까지 표명했습니다. 저는 정부정책을 비판하면서 1977년 11월 14일과 24일 한국교회의 지도적 인물 46명에게 주일성수에 대한 앙게이트를 보낸 일이 있었습니다. 대부분의 응답은 정부정책에 반대하는 내용이었습니다. 그 일부를 소개합니다. “신앙 원리상 절대 교단적으로 교회적으로 반대해야 합니다. 이는 제 4계명에 저촉되며 국민의 신앙자유를 침해하기 때문에 반대해야 합니다.”(합동 박목사). “…등을 주일날 함에 대해서 본인은 절대 반대합니다.”(기장 김목사). “신교자유를 규정한 국헌에 위배됨을 주장하여 바로 잡아야 하겠습니다. 이북에서 공산당과 싸우던 기억이 생생합니다.”(합동 박목사). “이 문제는 온 교회가 순교적 정신으로 강력하게 시정토록 추진하여야 할 것입니다.”(합동 박목사).

  결국 저는 정부의 미움을 사게 되었고 1977년 11월 20일경 어느날 아침 남산에 붙잡혀 가서 밤새 심문을 받게 되었습니다. (“영 몰라 통 몰라” 에는 9월로 되어있는데 11월이 맞습니다.) 전화는 물론 모든 편지와 모든 행적이 도청 되고 추적되고 있던 때였습니다. 아침에 신반포 집에서 나와서 총신대학으로 가려고 버스정류장으로 걸어가는데 집 근처에 검은 차 한 대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공손히 나에게 인사를 하면서 잠시 자문 받을 일이 있는데 잠간 동안 자기 회사에 같이 갈 수 있느냐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본래 남의 말을 잘 듣는 터라 아무 의심 없이 그 차를 타고 그들의 회사로 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나를 데리고 간 곳은 그 당시 사람들이 가장 무서워하던 중앙정보부의 남산 지하실이었습니다. 아침부터 밤새도록 심문을 받았지만 저는 단 한 번도 불안하거나 두려워한 일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심문하는 두 사람을 책망하기도 했고 충고하기도 하고 권면하기도 했습니다. 주일 성수를 침해하는 것은 너무너무 어리석은 일이라고 충고했습니다. 김형욱 같은 사람이 이 회사를 운영하니 회사가 제대로 되겠느냐고 질책을 하기도 했습니다. 반공을 제대로 하려면 하나님을 바로 믿어야 한다고 충고하기도 했습니다. 심문하던 한 사람은 너무 기가 막혀서 스스로 화를 내기도 했습니다. 잠시 쉬는 동안 내가 글을 쓰고 있으니까 무슨 글을 쓰냐고 물었습니다. 다음 주일 설교를 준비한다고 했더니 한 사람이 기가 막힌 듯이 “당신, 도대체 정신이 있는 거요?” 라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여기 한 번 들어오면 언제 나갈지 모르는데 다음 주일 설교 준비를 한다니 말이 되는 것이냐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정중하게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내가 나가고 안 나가는 것은 당신들의 소관이 아니니 걱정할 필요가 없고 당신들은 다음 주일 후암교회에 와서 내 설교를 들어야 합니다.” 심문하던 한 사람이 자기도 위태로운 경우에는 하나님을 찾는다고 말했습니다. 나는 그것도 나쁘지는 않지만 그 정도에 그치면 안되고 하나님을 정식으로 믿어야 한다고 말하면서 주일에 꼭 교회에 나와서 내 설교를 들으라고 권면했습니다. 그날 밤 자정이 훨씬 지나서야 잠을 잘 수가 있었습니다. 책상 두개만 있는 유리창도 없는 지하실 방이었습니다. 저는 책상을 간이 침대로 삼고 그 위에서 잠을 잤습니다. 언제나 그렇듯 그 날 밤도 나무 책상 위에서 이불도 없었지만 단잠을 잤습니다.

  아침이 되었을 때 집으로 가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데려올 때 차를 태워주었으면 가라고 할 때도 차를 태워줘야 하지 않느냐고 말을 했습니다. 결국 한 사람이 나가서 지나가는 차를 하나 세우고 나에게 그 차를 타고 가라고 했습니다. 아주 유익하고 재미 있는 경험이었습니다. 모험심과 담력으로 재미 있게 지낸 하루 밤이었습니다.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요 모두가 하나님의 도우심이었습니다. 오직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는 믿음의 사람을 하나님께서 기특하게 보시고 사랑하시고 축복하신 것 같습니다. 저는 그 후 10여년 이상 안기부 직원들의 자문을 받았고 나중에는 안기부장 또는 안기부 차장의 초청을 받아 식사도 같이 하고 의논도 같이 했는데 그 때마다 저는 “언제는 나를 붙잡아 가더니 이제는 이렇게 대접도 하고 의논도 하느냐?”고 농담을 했습니다.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하나님께서 저에게 주신 모험심과 담력으로 제가 한 일들 중에서 세 가지만 골라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저의 간증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저는 여러분들도 한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근심이나 염려나 불안이나 두려움에 사로잡히지 말고 하나님만 바라보고 하나님만 믿고 의지하면서 모험심과 담력을 가지고 어떤 일을 당해도 여유 있고 당당하게 그리고 재미있고 즐겁게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본문 말씀을 다시 읽습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겼노라.”  (김  명 혁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