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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살아있는 기도 (삼하 12:11~14, 엡 2:4~10, 눅 18: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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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의 말씀: 사무엘기하 12:11 ~ 14
  주님께서 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의 집안에 재앙을 일으키고, 네가 보는 앞에서 내가 너의 아내들도 빼앗아 너와 가까운 사람에게 주어서, 그가 대낮에 너의 아내들을 욕보이게 하겠다. 너는 비록 몰래 그러한 일을 하였지만, 나는 대낮에 온 이스라엘이 바라보는 앞에서 이 일을 하겠다.'" 그 때에 다윗이 나단에게 자백하였다. "내가 주님께 죄를 지었습니다." 나단이 다윗에게 말하였다. "주님께서 임금님의 죄를 용서해 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임금님은 죽지는 않으실 것입니다. 그러나 임금님은 이번 일로 주님의 원수들에게 우리를 비방할 빌미를 주셨으므로, 밧세바와 임금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은 죽을 것입니다."  아멘.
 
서신서의 말씀: 에베소서 2:4 ~ 10
  그러나 하나님은 자비가 넘치는 분이셔서,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크신 사랑으로 말미암아 범죄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려 주셨습니다. 여러분은 은혜로 구원을 얻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그분과 함께 살리시고, 하늘에 함께 앉게 하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로 베풀어주신 그 은혜가 얼마나 풍성한지를 장차 올 모든 세대에게 드러내 보이시기 위함입니다. 여러분은 믿음을 통하여 은혜로 구원을 얻었습니다. 이것은 여러분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아무도 자랑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선한 일을 하게 하시려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만드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미리 준비하신 것은, 우리가 선한 일을 하며 살아가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아멘.

복음서의 말씀: 누가복음서 18:9~ 14
  스스로 의롭다고 확신하고 남을 멸시하는 몇몇 사람에게 예수께서는 이 비유를 말씀하셨다.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갔다. 한 사람은 바리새파 사람이고, 다른 한 사람은 세리였다. 바리새파 사람은 서서, 혼자 말로 이렇게 기도하였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나는, 남의 것을 빼앗는 자나, 불의한 자나, 간음하는 자와 같은 다른 사람들과 같지 않으며, 더구나 이 세리와는 같지 않습니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내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바칩니다.' 그런데 세리는 멀찍이 서서, 하늘을 우러러볼 엄두도 못 내고, 가슴을 치며 '아, 하나님, 이 죄인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의롭다는 인정을 받고서 자기 집으로 내려간 사람은, 저 바리새파 사람이 아니라 이 세리다.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사람은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사람은 높아질 것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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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누가복음 말씀에는 기도하는 두 사람의 모습이 그려져 있습니다. 한 사람은 바리새파 사람이고 다른 한 사람은 새리입니다. 우선 바리새파 사람은 보통 시민들보다 율법을 확실하게 지키는 등 훨씬 모범적입니다. 아마 경제적으로도 어려움이 없었을 것입니다. 반면 그와 정반대의 사람이 바로 새리입니다. 바리새파 사람이 사회적으로 존경을 받는 부류에 속한다면, 새리는 사회적으로 아주 멸시당하는 부류에 속합니다. 바리새파 사람이 율법을 확실히 지키면서 일을 하는 사람이라면, 새리는 세금을 걷어다가 로마황제에게 바치고 나머지는 자신이 횡령하던 탈세자였습니다.

두 사람이 하나님 앞에 섰습니다. 그리고 기도를 합니다. 바리새인은 이렇게 기도합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남의 것 빼앗은 일도 없고 남에게 나쁜 일도 하지 않았으며 간음도 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십일조를 바쳤으며 율법에 규정된 대로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도 했습니다. 그러나 새리는 멀리 떨어져서 감히 하늘도 우러러보지 못하고 가슴을 치며 기도합니다. 저는 죄인입니다. 자비를 베푸소서. 저는 할 말이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바리새파 사람은 그냥 돌려보내시고 새리에게는 의롭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먼저 된 자가 나중되고 나중된 자가 먼저 된다.

이에 대해서 많은 해석이 가능하지만 저는 오늘 여러분께 한 가지만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왜 바리새인의 기도는 받지 않으셨을까요. 성경을 보시면 바리새파 사람은 서서 “혼잣말로” 기도하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리새파 사람은 성전에 하나님을 뵈려고 왔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앞에 놓고 혼자 말합니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대화이지 혼잣말이 아닙니다. 기도는 하나님과 내가 말을 주고받는 대화이므로 일방통행이 아닌 쌍방 통행입니다. 그런데 바리새파 사람은 대화 없이 혼잣말을 했습니다. 하나님이 들으시던지 말던지 하나님 감사합니다, 내 얘기 홀로 하겠습니다. 나는 하나님이 하라는 일 다 지켰습니다 하며 기도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혼자 이야기하면서 기도하러 왔다는 사람을 싫어하셨습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항상 누군가와 만나면 대화를 해야 합니다. 그런데 잘 살펴보면 대화가 가득한데도 불구하고 이 사회는 시끄럽기 그지없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대화가 아닌 혼잣말 때문입니다. 혼잣말 하는 것을 들어주지 않는다고 소리치기 때문입니다. 나의 혼잣말을 밖에서 수용해주지 않는다고 소리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혼잣말만 하면서 대화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의 가장 기본적인 특징이 하나 있습니다. 스스로 의롭다고 하는 사람입니다. 바리새파 사람도 그러하였습니다.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다른 사람은 죄인이라고 멸시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혼잣말로 호소하였습니다. 기도는 혼잣말이 아닌 대화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여야 대화가 트일 수 있겠습니까. 의롭다 하는 것을 하나님께 전적으로 맡기십시오. 의롭다 함을 주는 것은 하나님께서 하실 일이지 내가 판단할 일이 아닙니다. 내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하며 혼잣말 하시려면 하나님이 필요 없습니다. 성전에도 올 필요가 없습니다. 스스로 혼자 의롭다는데, 혼잣말 하고 살면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새리를 통해서 대화의 통로를 만드는 방법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사실 새리가 멀찍이 서서 감히 하늘도 우러러 보지 못한 것은 하나님께 죄송한 마음을 가졌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나온 행동입니다. 그러나 새리는 가슴을 치며 기도했습니다. 가슴을 치며 마음을 열었더니 이런 고백이 나왔습니다. 저한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Kyrie eleison(키리에 엘레이손), 주여, 자비를 베푸소서. 이렇게 자비를 구하는 가슴침이 없이는 대화의 통로가 트이지 않습니다. 바리새인도 가슴을 쳤던들 혼잣말을 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리새인은 가슴을 칠 필요가 없었습니다. 스스로 의로웠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법정에 나가서 재판을 받을 때, 검사나 변호사를 통해서 자기변호를 하게 됩니다. 그러나 재판에서 승리하는 것은 나의 결단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판사의 전권에 달려 있습니다. 판사가 무죄라고 판결을 내려야 법적으로 의롭다 함을 인정받을 수 있지, 제가 주장한다고 해서 의롭다 함을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의로움 또한 하나님께서 판단해주셔야만 인정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리새파 사람은 하나님께 나아와서 내가 의로우니 나의 판결을 들으시라고 혼잣말 했습니다. 그것은 옳은 기도가 아닙니다. 가슴을 열어 하나님께 호소하고, 그 다음에는 하나님의 판결을 기다리셔야 합니다.

지금 우리는 아침부터 밤까지 자기 삶의 분야에서 주어진 업무를 완수하고, 그에 따른 실적들을 만들어 내야 합니다. 그리고 자기가 능력을 발휘한 이런 실적들을 가지고 와서 가족에게, 친구에게, 사람들에게 알립니다. 그러면서 자신도 인정받고 다른 사람들의 실적을 보며 인정해줍니다. 실적과 업적 중심의 사회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업적을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삶의 중심에는 가장 소중한 인간이 있습니다. 얼마나 잘났으며 얼마나 큰 일을 하고 살았는지는 그 사람 자체를 말해주는 것이 아닙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은 누구이며 나는 누구인지를 아는 것입니다. 새리는 자신의 업적이 아니라 부족한 자신의 인간에 대하여 고백했습니다. 저의 인간은 형편없다고 고백했습니다. 저라는 인간은 죄인이니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가슴을 치며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바리새파 사람은 자신의 인간에 관한 기도를 드리지 않았습니다. 단지 자신의 실적만을 말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 나아올 때 자신을 비운 채로 와야 하나님께서 빈 곳을 채워주십니다. 자신의 실적들로 가득 채워가지고 오면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채워줄 필요를 느끼지 못하십니다. 그렇게 스스로 채운 채로 하나님께 기도하면 하나님은 듣지 않으십니다. 빈 그릇을 가지고 가십시오. 빈 그릇을 가지고 가셔서 하나님께서 이 곳에 사죄의 은총과 심판의 은총과 축복들로 가득 채워주소서 하고 가슴을 치며 기도하십시오. 하나님이 누구시며 나는 누구인가에 대하여 묻고 기도하십시오. 그래야만 하나님께서 채워주십니다.

요즘 아스팔트를 지나가 보셨는지요. 뜨거운 여름에 얼마나 걷기가 힘듭니까. 발도 아프거니와 뜨겁게 내리쬐었던 태양빛은 아스팔트에 반사되어서 다시 올라옵니다. 게다가 그냥 걸어가기도 힘든데, 많은 자동차들이 다니면서 경적을 울려대고 사람들이 시끄럽게 소리질러댑니다. 귀도 아프고, 발도 아프고, 자동차 배기가스 때문에 눈도 아프고, 숨도 찹니다. 이렇게 시끌벅적한 하루를 지내고 집에 돌아옵니다. 여러분은 집에 돌아오시면 무엇을 하십니까. 공원 앞을 지나시게 되면 잠시 의자에 앉아 보십시오. 매점이 있다면 핫도그 또는 도넛 하나와 함께 차 한 잔도 주문해서 드십시오. 그리고 나서 분수도, 하늘도, 옆에 있는 나무도 바라보시면서 나는 누구이며 하나님께서는 누구신지 잔잔히 생각해 보십시오. 한 순간의 여유와 한 잔의 차. 그리고 도넛 하나와 함께 인생이 무엇인지에 대해 잠시만 생각해 보십시다. 우리는 항상 거대 담론을 하면서도 이런 작은 순간들은 즐기지 못합니다.

사는 것 자체가 기도라고 말합니다. 물론 맞는 말입니다. 아침부터 일어나서 밤까지 사는 것이 기도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살려면 너무 힘이 듭니다. 세수할 때에도 기도하고 밥 먹을 때도 기도하고, 그렇게 살면 저의 삶은 무엇입니까.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한테 여유를 주셨습니다. 공원에서 1분만, 그림을 감상하면서 1분만, 차 한 잔 마시면서 1분만 나와 대화하자. 24시간을 묶어놓는 하나님이 아니라 한 잔의 차와 함께 대화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 일주일을 수고하지만 주일날의 한 시간만 와서 대화하기를 원하시는 우리의 하나님. 참 감사한 일입니다. 여러분, 지금 이 순간만이라도 하나님께 여유롭게 기도해보십시다. 거대 담론 속의 작고 짧은 여유. 저는 이 시간이 자신과 세계를 변화시킬 수 있는 시간이라고 생각합니다.

1993년 5월의 일입니다. 국내외의 대표들과 체코 프라하에 들렀는데, 당시 유명한 시인이자 문학가이며 대통령이었던 바츨라프 하벨 대통령의 궁을 방문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대통령 집무실에서 파이프를 물고 담배를 피우면서 우리들을 맞이하는 하벨 대통령의 모습이 마치 시골 할아버지 같았습니다.

대통령과 둘러앉아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와중에 저희가 하벨 대통령께서는 뭐가 제일 힘드십니까 하고 물었더니, 대통령이 웃으면서 하는 말이 이러했습니다. 내가 경호원들을 힘들게 하지요. 그래서 그게 무슨 뜻입니까 물었더니 그 옆에 있던 비서실장이 대답해 주었습니다. 대통령께서는 어디 잠시 누구 좀 만나고 오겠다고 하시고는 싹 사라지십니다. 그리고 그렇게 사라지면 아무도 어디 가셨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수소문해서 나중에 겨우 찾아내고 보면, 해변가 또는 강가, 작은 주막집 등에서 시인 친구들과 만나서 술 한 잔을 기울이거나 파이프 담배를 피면서 음악과 미술과 하늘을 논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저희가 힘이 듭니다. 이렇게 말하면서 웃었습니다.

그 때 대통령이 이런 얘기를 하셨습니다. 사실 체코는 영적이며 창조적인 잠재력이 무궁한 나라였는데, 그 동안 이것이 완전히 도적질 당해 왔습니다. 이제 우리 체코가 다시 살아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인간적인 사랑과 시민들끼리의 우정입니다. 어려울 때 서로 도와주고 끈끈히 연대할 수 있는 인간됨입니다. 이것들이 우리가 가진 유일한 가치인데, 지나간 공산주의 집권 동안 외형적인 생산적 가치관을 지휘하며 강요하느라고 그 속에서 사람을 찾지 못했습니다. 단순하지만 아주 깊은 인간됨의 가치를 수 십 년 동안 잃고 살았습니다. 바로 이런 이유들 때문에 우리 체코는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세계적으로 유명하던 체코의 교육학이 현재는 세계 72위로 떨어진 것도 그러한 이유입니다. 오염된 도덕과 정신이 오늘 체코를 멍들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경제적 위기와 정치적 부자유의 탓도 있겠지만, 사실은 사람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육적 에너지가 아닌 영적 에너지가 바탕이 되어야 합니다.

경제학자 겸 신학자인 루이스 하이드라는 사람은 최근에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인간의 노동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고 합니다. 한 종류의 노동은 시장을 중심으로 생산하고 소비하며, 시장에 맞게 노동력이 돌아가는 시장 노동, market labor입니다. 또 하나의 노동은 노동을 지배하고 즐기는 주인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은총의 노동, gift labor입니다. 보통 남성들은 이 두 가지 중에서 생산성, 상품성, 이윤, 투자 등을 생각하는 market labor의 주인이며 여성들은 세상을 사랑하고 경외하며 나와 하나님의 의미를 생각할 줄 아는 gift labor의 주인입니다. 온 세상의 위기란 market labor가 아닌, gift labor의 위기입니다. 인간의 존재는 묻지 않으면서 인간이 만드는 상품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상품은 범람하는데 사람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이야기하는데 하나님이 보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제가 배고플 때 양식을 가져다주시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제가 시험에 합격해야 되는데 답을 몰라서 기도한다고 가르쳐주시는 하나님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컨설팅 회사의 회장이 아닙니다. 또한 카운슬링 회사의 사장님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자기 스스로 돕고자 하는 사람에게 도움을 주는 분입니다. 가슴을 연 사람에게 의롭다 함의 선포를 주면서 살 수 있는 지혜와 생각할 수 있는 능력 등 인간의 기본을 주시는 분이시지, 실제로 물건을 만들어서 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을 오해하고 있습니다. 광야에 계신 예수에게 와서 마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떡을 만들어봐라. 그럼 하나님의 아들임을 증명하겠다. 예수의 말씀입니다. 그건 네가 만들어라. 나는 떡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이자 지혜의 근본이려고 한다, 나는 인간의 근본이려고 한다.

다윗의 이야기로 설교를 마치겠습니다. 위대한 왕 다윗이 잘못을 범했습니다. 자기가 사랑하는 여성을 아내로 취하기 위하여 그의 남편인 우리야 장군을 전투지에 보내어 죽게 만듭니다. 그러고 나서 그녀를 자신의 아내로 삼았습니다. 그리고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러자 나단 선지자가 그 아들은 불법이요 불륜이므로 죽을 수밖에 없다고 선포합니다. 결국 아들은 죽었고, 다윗은 크게 뉘우쳐 회개하면서 하나님께 매달렸습니다. 그렇게 회개하고 용서받은 다음에 밧세바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 바로 유명한 솔로몬 왕입니다.

다윗과 똑같이 하면 솔로몬 왕 같은 후손을 얻는다는 말이 아닙니다. 이 이야기는 의롭다함과 용서의 은총을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극악한 왕 다윗이 회개할 때에 그에게 솔로몬이라는 위대한 왕도 주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절대적인 은총입니다. 오늘 세상을 살아가면서 악한 일을 하셨다면 회개하고 가십시오. 비록 하나님의 얼굴을 직접 뵐 수 없고 그 말씀을 직접 들을 수는 없으나 그 아들의 십자가를 통해 우리는 기도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를 바라보고 가슴을 치며 회개하실 때에 그 뒤에는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부활과 새 생명의 은총이 있을 것입니다. 십자가를 통한 하나님과의 대화가 여러분의 삶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박 종 화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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