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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전없는 성전 (사 44:1~5, 롬 11:25~29, 눅 19:45~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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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의 말씀: 이사야서 44:1 ~ 5
  "그러나 나의 종 야곱아, 내가 택한 이스라엘아, 이제 너는 들어라." 너를 지으신 분 네가 태어날 때부터 '내가 너를 도와주마' 하신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나의 종, 야곱아, 내가 택한 여수룬아, 두려워하지 말아라. 내가 메마른 땅에 물을 주고 마른 땅에 시내가 흐르게 하듯이, 네 자손에게 내 영을 부어 주고, 네 후손에게 나의 복을 내리겠다. 그들은 마치 시냇물 가의 버들처럼, 풀처럼 무성하게 자랄 것이다. 그 때에는 '나는 주님의 것이다' 하고 말하는 사람도 있고, '야곱'의 이름을 써서 그의 자손임을 자칭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며, 팔에다가 '나는 주님의 것'이라고 쓰는 사람도 있을 것이며, '이스라엘 사람'이라고 불리는 것을 영광으로 여기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아멘.
 
서신서의 말씀: 로마서 11:25 ~ 29
  형제자매 여러분, 나는 여러분이 이 신비한 비밀을 알기를 바랍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스스로 현명하다고 생각하는 일이 없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 비밀은 이러합니다. 이방 사람의 수가 다 찰 때까지 이스라엘 사람들 가운데서 일부가 완고해진 대로 있으리라는 것과,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는 바와 같습니다. "구원하시는 분이 시온에서 오실 것이니, 야곱에게서 경건하지 못함을 제거하실 것이다. 이것은 그들과 나 사이의 언약이니, 내가 그들의 죄를 없앨 때에 이루어질 것이다." 복음의 관점에서 판단하면, 이스라엘 사람들은 여러분이 잘 되라고 하나님의 원수가 되었지만, 택하심을 받았다는 관점에서 판단하면, 그들은 조상 덕분에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고마운 선물과 부르심은 철회되지 않습니다.  아멘.

복음서의 말씀: 누가복음서 19:45~ 48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셔서, 장사하는 사람들을 내쫓으시며,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성경에 기록하기를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 될 것이다' 하였다. 그런데 너희는 그것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 예수께서 날마다 성전에서 가르치셨다.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과 백성의 우두머리들이 예수를 없애버리려고 꾀하고 있었으나, 어찌해야 할지 방도를 알지 못하였다. 백성이 모두 그의 말씀을 열심히 듣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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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에서 가장 잘 지었다던 두 건물이 있습니다. 솔로몬이 지었던 예루살렘 성전과 솔로몬의 왕궁이 그것입니다. 구약성경을 읽어보면 이 두 건물은 이스라엘의 아름다운 얼과 지혜, 마음이 담긴 곳이라고 묘사되어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성전은,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늘 현존하시는 곳이었습니다. 그곳에 가면 하나님을 뵐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가슴으로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성전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장 중요한 존재였습니다. 또한 기본적으로 성전 속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지켜주는 법궤가 안치되어 있었습니다. 모세의 율법과 하나님의 말씀이 보관되어 있었습니다. 그 말씀이 없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이제 이것을 생각하시고 이스라엘 성전에 관한 이야기를 들으시면 됩니다.

모든 나라에는 역사에서 중요한 해가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에서는 분단되었던 해가 그에 해당됩니다. 여러분은 예루살렘에 있는 통곡의 벽을 아실 것입니다. 왜 통곡했는 줄 아십니까? 이스라엘이 분단되었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이방 종교와 함께 분단되어 버렸습니다. 그리하여 모든 백성이 조상부터 후손까지 대대로 통곡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이스라엘이 분단되었던 해가 기원전 586년입니다. 이 때에 이방나라 바빌론이 이스라엘을 침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의 소중한 성전을 제일 먼저 부숴 버렸습니다. 식민통치를 위해서 이스라엘의 얼과 정신을 빼 버리려고 한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시편 74편에서는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성소에 불질러 땅을 뒤엎고 주님의 이름을 모시는 곳을 더럽혔습니다. 땅이 그늘진 곳마다 구석구석 폭력배의 소굴입니다. 바빌론에서 온 폭력배들이 우리를 억압하며 성전에 돌 하나까지 다 무너뜨렸습니다. 우리는 그들의 소굴에서 좌절과 분노를 맛보며 살아갑니다. 기도합니다. 하나님, 어찌하여 우리를 이렇게 오랫동안 버리십니까. 탄식과 좌절과 분노의 시입니다. 

그리고 이제 70년이 지나 이스라엘의 통치자가 바뀝니다. 현재의 이란에 해당하는 페르시아가 다시 침략하여 바빌론을 물리치고 예루살렘을 점령하게 됩니다. 그런데 같은 침략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빌론과 달리 페르시아에 대해서는 호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이스라엘을 점령했던 페르시아의 고레스 왕 때문입니다. 그는 바빌론이 데려왔던 이스라엘의 지도자와 백성들을 다시 고국으로 보내주면서, 파괴된 성전을 예루살렘에 재건하도록 허락하고 재정적인 지원까지 했습니다. 그리하여 이사야서 55장을 보면 고난받는 종은 예수님인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고레스 왕이 우리들을 구원하러 온 고난받은 종이라고 믿을 정도로 그를 칭송하며 고마워했습니다.

이렇게 하여 두 번째의 성전 건축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렇게 시작된 성전 건축은 4-500년 동안 지속되어 오다가, 이제 페르시아의 지배도 끝나고 로마의 지배 하에 있을 때에 헤롯 왕에 의해서 증축됩니다. 새 성전은 제 1차 성전과 모형을 맞추어 증축되었습니다. 산꼭대기에 지은 성전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있고 각 계단마다 뜰 하나가 만들어져 있습니다. 제일 밑의 계단에 있는 뜰의 이름은 ‘이방인들의 뜰’입니다. 누구나 거쳐 갈 수 있는 뜰입니다. 그리고 층계를 올라가면 두 번째에는 어린이와 여성들의 뜰이 있습니다. 또 한 계단을 올라가면 소위 선택받은 이스라엘 남성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이 있는 뜰이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성전 문을 열고 들어가기 직전의 뜰은 제사장들의 뜰입니다. 이렇게 단계별로 뜰이 규격화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 곳을 예수님께서 방문하십니다. 이 장면이 바로 오늘 함께 읽으신 성경의 배경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이방인들의 뜰에서 강도들의 소굴을 보셨습니다. 먼저, 전국적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유월절 한 달 전에 성전세를 바치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성전세를 바치지 못한 사람들은 유월절 일주일 전부터 성전에 와서 예배드릴 때 세금을 바쳤습니다. 그런데 이 헌금은 로마시대에 쓰던 돈이 아니라 성전에서 바칠 때만 쓰도록 성전에서 따로 만든 돈입니다. 이 돈은 로마시대에 통용되던 돈과 바꾸게 되는데, 여기서 몇 대 일로 바꾸느냐 하는 것은 로마가 아닌 성전에서 결정하며, 결국 성전에서 이득을 먹게 됩니다. 그러니 성전의 재정 상황이 약하면 환율을 올리고 괜찮으면 좀 내리고 하게 되었습니다. 말하자면 성전 화폐는 완전히 이익을 추구하기 위한 도구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첫 번째의 강도짓입니다.

그리고 성전에 예배를 드리러 올 때에는 헌금만이 아니라 산 짐승의 피를 번제물로 바쳐야 됩니다. 이 때문에 이방인의 뜰에서는 비둘기같이 작고 싼 짐승부터, 소나 양처럼 크고 비싼 짐승까지 여러 가지를 팔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이방인의 뜰에서 판매하는 비둘기의 값이 시중에서 파는 비둘기의 값보다 최소 10배가 비쌌다고 합니다. 이것이 두 번째 강도짓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언제부터 이 땅의 성전이 이렇게 강도들의 소굴로 변했느냐. 예수님께서는 이미 성전에 오시기전에 산등성이에 올라서서 예루살렘 시내를 내려다 보셨습니다. 그런데 시내를 보았더니 너무나 많은 강도들이 우글거리고 있었습니다. 성경말씀에서는 산꼭대기에서 예루살렘을 보고 예수는 우셨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예루살렘 당시의 부패와 타락이 얼마나 심했는가를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계신 성전도 역시 강도들의 소굴로 바뀌어 버렸습니다.

그렇다면 강도들의 소굴로 바뀌어버린 성전에 하나님께서는 계십니까. 어떻게 하나님이 계시겠습니까. 성전이 아니라 속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요즘 말로 표현하자면 이렇게 말씀 하셨을 겁니다. 하나님을 찾으러 예루살렘 성전에 왔더니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 이 곳에 하나님은 없다. 타락한 곳에 하나님은 계시지 않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셨습니다. 아버지가 계시지 않은 곳에 어떻게 기도하러 오겠습니까.

건물 얘기가 나왔으니 제가 보았던 건물 이야기를 하나 해 드리려고 합니다. 갑작스럽게 평화 포럼에서 가을에 북한과 국제회의 하나를 마련하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그저께 협의차 급하게 금강산을 다녀왔습니다. 제가 몇 년 전에 금강산에 갔을 때 묵었던 금강산 호텔에서 하룻밤을 묵었습니다. 그런데 깜짝 놀랐습니다. 몇 년 전에 갔을 때에는 엘리베이터가 멈추기도 하고, 창문은 철사로 매여져 있는 등 별로 좋지 않았는데 이제는 서울의 호텔 같았습니다. 현대 아산에서 모든 시설을 바꾸어서 칫솔 치약까지 전부 남한의 물건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북한 것은 무엇이 있을까 하고 찾아보다가, 금강산 샘물이라는 물을 발견했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것조차 남한의 회사가 개발한 샘물이었습니다. 텔레비전조차도 NHK하고 CNN 외에는 전부 남한 프로그램만 나왔고 북한 프로그램은 나오지도 않았습니다. 완전히 북한 속의 남한이었습니다. 함께 회의를 했던 북한 대표들조차도 금강산 이야기가 나오자 이 곳은 남한 땅이지 우리 땅이 아닌 것 같다고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분명히 북한 땅인데 저희가 주인이고 그 분들이 손님인 것 같은 상황이 참 신기했습니다.

과거에는 북한식으로 지었던 호텔을 이제는 남한 식으로 고쳐서 운영을 하게 되었습니다. 아마 여기에서 북한도 많은 것을 배웠을 것입니다. 경영은 어떻게 하는지, 호텔은 어떻게 짓는지, 직원은 어떻게 교육시키는지에 대하여 여러모로 배웠을 것입니다. 이렇게 호텔에서는 호텔업이 중요합니다. 이데올로기가 필요한 것이 아니고, 정치가 필요한 것이 아니고, 호텔업이 존재하면 됩니다. 마찬가지로 성전에는 다른 것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성전에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과 영이 필요합니다.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성전다워야 하는데 장사들의 소굴로 바뀌어 버렸습니다. 그런데 이런 모습은 2000년이 지난 오늘의 교회에서도 계속 보여지고 있습니다. 다른 교회를 비방하자고 말씀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교회 내에서 갈등이 생겨서 집단별로 예배를 드리고, 그것도 모자라서 경찰이나 사설 경호대를 동원하는 모습, 한 파가 예배를 드리고 나면 그 장소에서 다른 파가 예배를 드리는 모습은 아름다운 모습이 아닐 것입니다.

두세 명이 모이면 내가 그 곳에 있다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경호대를 동원해서 예배를 드려야 하는 성전이라면, 2000년 전 강도들의 소굴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그런 곳에 하나님께서는 계시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이지 않았다면 열 사람이든 백 사람이든 천 사람이든 그 곳은 집회 공간일 뿐 성전이 될 수 없습니다. 집이 있더라도 그 집은 빈 집과도 같습니다. 이 성전을 헐고 3일 만에 다시 짓겠다고 하신 예수님께서는 이미 이 타락한 성전과 모든 인간들의 죄를 다 끌어안고 돌아가셨다가 부활하심으로 새롭게 만들겠다고 생각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사실 우리 모두는 각 가정마다 성전을 가지고 있습니다. 성경에서의 가정은 작은 성전입니다. 두세 사람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모였다면 그 가정 또한 성전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모신 가정이 가정답지 못하면 안됩니다. 그것 또한 성전이 성전답지 못한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또한 에베소서에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살아있는 성전입니다. 여기 앉아서 예배를 드리고 계시는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의 마음 깊은 곳에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여러분의 예배를 받으시며, 받으신 예배에 대해서 축복을 주십니다. 오늘 하나님은 여러분 마음속에서 말씀을 통해서 여러분과 대화를 하고 계십니다. 하지만 저희가 하나님과 대화할 수 없을 정도로 타락하게 되면 하나님께서는 저희를 떠나십니다. 하나님이 계신 성전인 여러분. 오늘 여러분 마음속에는 하나님의 성전이 지어져 가고 있습니다. 성전은 성전다워야 합니다. 이 말씀에 도전을 받으십시오.

하나님의 영이 있는 성전에서는 어떤 일이 생길까요. 고린도후서에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습니다. 정말 중요한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자유란 무엇입니까. 억압이 없고 해방이 있는 것이라는 정의는 상식적인 의미의 자유입니다. 진실된 오늘의 자유란, 진실을 덮는 허울을 벗어 버리고 투명하게 주님을 뵐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겉뿐만이 아니라 속까지 다 바라보시는 하나님 앞에서 내가 부자유함도, 부자연스러움도, 불편함도 없이 투명하게 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자유합니다. 여러분은 하나님 앞에서 자유하십니까. 하나님 앞에서 다 벗을 수 있으시겠습니다. 벗고 있는 그대로 투명하게 대화할 수 있으시겠습니까. 그렇게 되면 여러분은 하나님 안에서 자유한 사람의 집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여러분은 자유한 사람이 아니고 속박에 사는 사람입니다.

오네프라 이름하는 젊은 신학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 당시에는 히틀러를 칭찬하는 타락한 교회를 염두에 두고 했던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을 찾읍시다. 가슴 속에 하나님을 모시지 않은 채로 하나님 이름을 걸지 말고, 진정한 하나님을 찾읍시다. 여러분이 말하는 하나님 중에 많은 부분이 허울에 싸인 가짜입니다. 가짜 종교, 가짜 신앙 모두 다 버리고 있는 모습 그대로 하나님 앞에 나아갑시다. 투명하게 나아갑시다. 이것이 우리가 자유가 성전에 나아올 수 있는 자격입니다.

성전이면 성전다워라. 오늘 예수께서 우리한테 이 말씀을 하시면서 두 가지의 약속을 주셨습니다. 첫 번째는 이것입니다. 죄를 지은 모든 사람들이라면 강도나 폭력배나 누구든지 다 오라. 내가 그대들의 죄를 세탁할 수 있고 씻을 수 있는 내 보혈의 피를 주겠노라. 두 번째는 이것입니다. 이 보혈 속에서 진실된 자유를 얻은 사람들은 부활이라는 새로운 생명을 주겠노라. 그것으로 인하여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나라.

예수의 부활의 보혈이 있는 곳. 그 곳이 바로 자유인을 만드시는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우리는 오늘 예수의 피 공로로 죄사함을 받고 거듭날 수 있습니다. 또한 자유함과 사랑이 넘치는 공동체로 거듭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곳이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예수의 보혈을 받으심으로 새롭게 태어나십시오. (박 종 화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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