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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다시 주시는 기회 (렘 15:19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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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 미국 서부 개척시대에 어떤 상인이 금캐는 사람들을 상대로 "이동 레스토랑"을 차릴 것을 계획했다. 그리고 전 재산을 들여서 마차 10대 분의 천막을 구입했다. 그런데 정보 교류가 활발하지 못해 현장에 도착해 보니 이미 다른 상인들이 조직을 구성하고 대규모로 식당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는 대량의 천막을 쓰레기로 버릴 수 밖에 없는 처지에 놓여있었다. 보물처럼 천막이 한 순간에 흉물스러운 것이 되었다. 그 자리에 앉아 절망하고 있을 때에 지나가던 사람들이 "금을 캐다 보니 바지가 금방 닳아 못 입게 되었네. 무슨 방법이 없을까?" "맞아, 조금 질긴 재료로 된 바지가 있었으면 좋을 텐데." 이 상인은 그 때 무릎을 쳤다. "그래, 저 못 쓰게 된 천막으로 바지를 만들자." 이렇게 해서 지금까지 유명세를 타고 있는 청바지가 탄생했다.

이동 레스토랑할 수 있는 기회를 놓쳤을 때에 이 사람은 실패하고 절망한 것 같았지만 그 천막으로 오히려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으니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기회를 잡으면 성공하고, 기회를 놓치면 실패하는 것 같다. 축구 경기를 보라. 기회가 왔을 때에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골로 연결시키는 선수가 유명한 선수이다. 나는 박주영 선수의 팬이다. 박주영의 발에 거쳐 가기만 하면 그는 골을 넣기에 좋은 조건으로 바뀐다. 경기에서 승리하려 해도 주어진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잡으면 된다. 그러나 기회를 놓쳐서 잘못 처리하면 많은 관중들로부터 야유를 받기도 한다.

이것은 우리의 인생도 마찬가지이다. 기회를 잡은 사람은 성공했다고 박수를 쳐주지만, 기회를 놓치면 아픈 마음을 쓸어 내릴 때가 생긴다. 우리 동네가 많이 발전되었다. 오래 사신분들이 이렇게 말한다. 그 때만 해도 여기는 쓰레기장이고, 공동묘지이고, 논과 밭이었는데 그 때 땅을 사두었으면 내가 지금 이렇게 살지 않을 텐데.... 왜 그런가? 기회를 놓쳤기 때문에 하는 말이다.

사랑하는 성도여! 기회를 놓쳤다고 한탄하고, 후회할 때가 있는가?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기쁜 소식이다. 우리에게 주시는 복음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다시 기회를 주신다는 점이다.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쫓겨났다. 그들의 벗은 모습이 부끄럽게 여겨졌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해서 가죽 옷을 입혀 주셨다. 다시 살아갈 수 있는 기회를 주셨다.

요나를 보라. 요나가 다시스로 도망간다. 하나님께서 주신 기회를 놓쳤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에게 큰 물고기를 준비하셔서 다른 방향으로 갔지만 니느웨 성에서 말씀을 전할 수 있는 새로운 기회를 주셨다.
예수님을 보라. 예수님은 십자가 상에서 피 한방울 남기지 않고 숨을 거두셨다. 비참하게 돌아가셨다. 그러나 예수님은 장사한지 사흘 만에 부활하셨다. 예수님은 다시 사셨다. 예수님 때문에 우리에게는 새로운 기회가 다시 주어진다는 소망이 있다. 경기 중에 한번 지면 다시 올라갈 기회를 잃어버린다. 그런데 패자부활전이 있다. 진 사람들에게 다시 올라갈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는 점이다. 예수님의 부활은 바로 패자부활전에서 올라가 승리하신 것이다.
베다니에 살던 나사로가 죽었다. 마리아와 마르다가 몹시 절망하고 있었다. 주님이 그 때에 계셨으면 오라버니가 죽지 않았을 텐데 않 계셔서 죽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들은 절망하지 않고, 그러나 이제라도 예수님 때문에 우리 오라버니가 살아날 수 있다고 고백한다. 예수님은 다시 기회를 주신다고 믿었다.

맞는 말씀이다. 세상에서는 주어진 바로 그 기회를 놓치면 실패자가 되기 쉽다. 다시 일어나기 어렵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에게 새로운 기회를 주신다. 다시 기회를 주신다. 그 기회의 내용이 무엇인가? 얼마나 소중한 말씀인지 모른다. “내가 너를 다시 이끌어 내 앞에 세울 것이라.” 기회를 잃어버려서 세상에서 넘어진 자가 있는가? 하나님은 우리에게 다시 기회를 주신다. “하나님 앞에서 세워지는 기회를 주신다.”

세상에서 세워지는 것도 소중하다. 감사한 일이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세워지지 않고, 하나님을 떠나서 이루어진 성공은 결국에 먼지처럼, 티끌처럼 허무하게 무너지고 말 것이다. 하나님을 떠나서 이룬 성공을 부러워하지 말라. 하나님을 떠나서 얻은 권력을 부러워하지 말라. 전도서의 말씀을 읽어보라.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 하나님을 떠나 이루어진 성공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무신론자이었던 프로이드는 칠십대에 쓴 <문명과 불만>이라는 책을 썼다. 프로이트는 지극히 비관적인 결론을 내린다. “인생이 힘들고 기쁨이 없다면, 게다가 너무나 비참하여 죽음만이 우리를 구해 주기를 바랄 수 밖에 없다면 오래 사는 게 뭐가 좋겠는가?” 이 사람은 세상에서 많은 사람들 앞에 세워졌던 사람이다. 그러나 하나님에 세워지지 않았으니 인생의 마지막이 이렇게 비참했다. 하나님 앞에서 세워지는 인생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본문의 말씀을 보라. “내가 너를 다시 이끌어 내 앞에 세울 것이라.” 하나님 앞에 세워진 사람이 복있는 사람이다. 하나님 앞에 세워진 사람이 성공한 사람이다. 다윗이 아름다운 집을 잘 지었다.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를 드린다. “이제 청하건대 종의 집에 복을 주사 주 앞에 영원히 있게 하옵소서. 주 여호와께서 말씀 하셨사오니 주의 종의 집이 영원히 복을 받게 하옵소서.” 다윗이 우리의 가정에 복을 달라고 말한다. 그 복의 내용이 바로 “주 앞에 영원히 있게 하옵소서.” 여호와를 떠나지 않은 복을 요청한다. 주님을 떠나지 않는 복을 요청한다.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을 떠나지 않고 하나님 앞에 세워지는 사람이 바로 복된 사람이라는 고백이다.

사도바울을 보라. 그는 자랑할 것이 많은 사람이었다.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은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으로는 흠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바울이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 앞에서 세워지고 보니 자기의 배경이 보잘 것 없는 배설물처럼 여기게 되었다. 바울에게는 주님 앞에 세워진 것이 너무나도 소중했기 때문이다. 바울은 복음을 전하다가 목이 잘려 죽는다. 그러나 그는 그의 삶을 이렇게 고백한다.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주님 앞에 세워지는 삶이 너무나도 소중했다. 순교를 당하면서도 그에게는 하나님 앞에 세워지는 것이 더욱 소중한 가치이었다.
이것이 얼마나 소중한 가치인가? 의과대학을 다니는 어느 학생의 글이다.

새 학기가 시작되고 해부학 첫 실험 시간에 해부실로 들어갔다. 해부도구와 수술용 고무장갑 그리고 비닐로 된 앞치마에 흰 실험복까지 갖춰 입고 실험실의 문을 여니, 거기에는 실험대마다 한 구씩 모두 32구의 시체가 놓여 있었다. 시체의 피부를 벗기는 것이 첫 해부학 실험 시간의 과제였는데. 그 작업을 하는 동안 그것이 단지 시체일 뿐 사람이라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다. 아주 정교하게 만들어진 인공 모형 배를 가르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런 착각과 함께 나의 뇌리를 스치며 지나가는 생각이 있었다.

그래, 이 사람들도 살아 있었을 때에는 모두 자기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잘났다고 생각하며 살았겠지. 돈도 있었고, 명예도 있었고, 사랑도 있었고, 또 죄를 짓고자 하는 사악한 마음도 있었겠지. 그런데 이제 그들은 자신의 머리털조차 다 깎인 채 실험대에 누워 있다. 부끄러움도 없이 발가벗긴 채로 말이다. 이제는 옷이 아니라 피부가 벗겨지고, 근육이 잘리고, 내장이 도려내지고, 뼈가 추려지고 있다. 그것도 이제 막 공부를 시작한 신출내기 의사지망생에 의해서 말이다. 이 아주머니의 얼굴에 평생 동안 발라졌던 화장품은 얼마어치나 되었을까? 저 아저씨는 저 손으로 얼마나 많은 돈을 만졌으며 그것으로부터 얼마만큼의 만족을 얻었을까?
그 순간 갑자기 이런 질문이 떠올랐다. 지금의 나 자신과 이 시체들 사이에는 도대체 무슨 차이가 있는가? 그것은 참으로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이었다. 굳이 차이점을 찾는다면 그들은 죽었고 나는 살아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지금 대체 무엇을 위해 살고 있단 말인가?

우리는 많은 시간을 우리의 몸을 위해서 산다. 그러나 숨이 멈추는 그 때에 우리의 몸을 위해서 살았던 지난 시간들이 얼마나 허무할까? 우리에게 소중한 가치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하나님 앞에 세워지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세상에서는 우리가 기회를 놓치면 일어서기 어렵지만 하나님은 우리에게 다시 기회를 주신다. 다시 일어설 수 있게 하신다. 주님 앞에 다시 설 수 있게 하신다.

그러면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세워질 수 있겠는가?” 그 대답은 정말로 정확하다. “네가 만일 돌아오면 내가 너를 다시 이끌어 내 앞에 세울 것이라. 네가 만일 헛된 것을 버리고 귀한 것을 말한다면 너는 나의 입이 될 것이라.” 하나님 앞에 세워질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이 있다. 헛된 것을 버리고 돌아오라는 것이다. 그리하면 너를 다시 이끌어 내 앞에 세울 것이라.

하나님은 공부 많이 한 사람을 하나님 앞에 세우는 것도 아니다. 유명한 연예인을 하나님 앞에 세우는 것도 아니다. 돈이 많은 부자를 하나님 앞에 세우는 것도 아니다. 어떤 사람이든지 헛된 것을 버리고 주께로 돌아오면 하나님께서 그를 세워주신다. 송명희라는 뇌성마비에 걸린 시인을 잘 알 것이다. 이 사람은 깊은 골방에서 빛을 보지 못하고 인생을 살 수 밖에 없는 사람이다. 그러나 그의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돌아오니 하나님은 그를 세우셨다. 송명희씨가 건강해서 그런가? 예뻐서 그런가? 아니다. 단 한 가지 이유. 하나님께로 돌아왔기 때문이다.

이화여자대학교 다니다가 화상을 입고 죽을 고비를 넘긴 이지선 양을 잘 안다. 얼굴이 흉측하게 변했다. 사람들 앞에 설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이 양은 이러한 기회를 통해서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돌아왔다. “내가 너를 다시 이끌어 내 앞에 세울 것이며.” 이 말씀데로 이루어졌다.

사랑하는 성도여! 세상에서는 기회를 놓치면 실패했다고 말한다. 기회를 놓치면 후회할 일들이 많이 생긴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분명히 말씀하신다. 헛된 것을 버리고 주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내가 너를 주 앞에 세우리라. 얼마나 분명하고도 기쁜 소식인가? 세상에서 사람들 앞에 자신있게 서는 것보다 주님 앞에 세워지는 모습이 더욱 아름답다.

세상에서 기회를 놓쳤다고 후회하고 절망하지 말라. “네가 만일 돌아오면 내가 너를 다시 이끌어 내 앞에 세울 것이라.” 하나님 앞에 세워지는 새로운 기회가 우리에게 주어질 줄로 믿는다. (곽  주 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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