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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뛰어난 자(1) (대상 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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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가 성경을 보면서 ‘왜’라는 질문을 던질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성경을 의심하거나 흠을 잡기 위해서가 아니라 말씀을 보다 분명하게 이해하기 위함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오늘 한번 질문을 던져보며 시작하려고 합니다.

  출애굽기와 그 다음의 성경들을 보면 하나님이 모세와 백성에게 나타나신 내용이 종종 나오는데, 거기에서 하나님을 “나는 너의 조상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시니라”고 하신 소개가 나옵니다. 창세기에 유력한 4명의 족장이 나오는데 마지막에 언급된 요셉은 앞의 3명 못지 않고 중요한 인물입니다. 모세에게 말씀하시려는 배경으로만 보면 요셉을 반드시 언급해야 하는 상황일 때가 많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거기서 요셉은 빼고 말씀하시는가 하는 것입니다. 요셉까지 넣으면 구색도 맞고 좋을 텐데 그렇게 말하지 않고 있습니다. 과연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한가지 더 중요한 질문은 이것입니다. 창세기에 나오는 4명의 족장들의 이야기를 보면 우리는 당연히 성경의 흐름과 메시야의 족보가 아브라함, 이삭, 야곱, 그리고 요셉으로 이어질 것으로 생각하는데 그렇지가 않습니다. 요셉이 아니라 유다로 이어집니다. 성경의 기록으로 보나, 요셉의 삶으로 보나, 당연히 요셉이어야 하는데 그렇지가 않습니다. 메시야의 족보는 야곱 이후에 유다요, 다윗으로 이어집니다. 왜 요셉으로 이어지지 않았을까요?

  사실 이 부분에 대해 명확한 대답을 준 사람이 없고, 해결을 제시한 책을 아직까지 찾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 부분을 연구하면서 나름대로 해답을 갖고 있습니다. 분명 요셉으로 족보가 이어지지 않은 이유가 있음을 저는 발견했습니다. 그 이유를 여기에서 언급하지 않겠습니다. 기회가 되면 왜 요셉이 아닌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중요한 것은 요셉이 아니라면 왜 유다일까요? 야곱의 넷째 아들인 유다로 이어진 과연 이유가 무엇일까요?

  본문을 보면, 이 부분에 대한 중요한 힌트를 하나 찾습니다. 본문은 야곱의 아들 가운데 장남인 르우벤의 후손을 소개한 말씀입니다. 여기에서 르우벤이 장자이면서도 장자의 명분을 받지 못한 이유를 설명합니다. 그래서 그 명분이 요셉에게 돌아간 것을 알려줍니다. 그리고 2절에서는 유다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요셉이 아니라면 왜 유다였을까 하는 분명한 이유를 밝히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이렇게 말합니다. “유다는 형제보다 뛰어나고 주권자가 유다로 말미암아 났다”고 강조합니다. 이것을 현대인의 성경은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유다는 이스라엘에서 강력하고 영향력 있기 때문에 다스리는 자가 유다 지파에서 나오게 된 것이다...”

  유다는 강력하고 뛰어난 사람이었고, 당대는 물론 후대까지 영향력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당대에 누구보다도 돋보이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예수님의 족보의 맥을 잇고, 성경의 흐름을 이루어 가고 있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우리는 ‘유다’하면 우선적으로 가룟유다를 생각합니다. 그에게서 보여지는 부정적인 이미지 때문에 성경의 다른 유다가 적잖은 피해를 봅니다. 그러나 가룟유다를 제외한 다른 유다는 모두 좋은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유다가 뛰어난 사람이라고 말하기 때문에 그의 돋보이는 내용이 무엇인지를 찾아야 합니다. 그것을 찾기 위해 우리는 창세기로 돌아가야 합니다. 물론 창세기가 요셉이 중심이기 때문에 잘 보이지는 않지만 그 가운데에서도 유다의 뛰어난 면을 우리는 몇 가지로 찾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앞으로 몇 주 동안 그의 뛰어난 면을 찾으려고 합니다. 그를 보면서 우리도 유다처럼 뛰어난 자의 삶을 배우려고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행복 자요, 존귀한 자인 우리가 이제 뛰어난 자가 되어야 합니다. 과연 유다의 뛰어난 면은 무엇일까요? 우선, 창세기 37장 25-27절을 보겠습니다.

  “유다가 자기 형제에게 이르되 우리가 우리 동생을 죽이고 그의 피를 은닉한들 무엇이 유익할까 자 그를 이스마엘 사람에게 팔고 우리 손을 그에게 대지 말자 그는 우리의 동생이요 우리의 골육이니라 하매 형제들이 청종하였더라”

  이 말씀의 배경은 이렇습니다. 17세의 소년 요셉이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하며 자라다가 어느 날 꿈을 꿉니다. 그 꿈의 내용을 형들에게 이야기함으로서 더욱 미움을 받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형들은 요셉을 죽이려는 음모를 꾸밉니다. 미움이 변하여 살인까지 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요셉은 꼼짝없이 죽게 되었습니다. 자기를 끔찍이 사랑하는 아버지는 그 자리에 없었고, 힘으로 대항해도 도저히 빠져 나올 수 없었습니다.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쓸쓸히 죽어야하는 위기의 상황이 이 말씀의 배경입니다.

  이런 긴박한 상황을 보면서 우리는 요셉의 형들 모두가 요셉을 죽이려 했던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지가 않았습니다. 당시 요셉을 살리려 했던 두 사람이 있었습니다. 한사람은 르우벤이고, 다른 사람은 유다였습니다. 그런데 르우벤은 요셉을 살리려 했지만 장자라는 책임의식이 더 강했던 것을 봅니다. 그래서 죽이지 말고 구덩이에 넣자고 제안합니다. 그러나 구덩이에 넣는 것이나 죽이는 것은 별 차이가 없었습니다. 구덩이는 빈 것이요, 그 속에 물이 없었더라고 성경은 암담한 당시 상황을 설명합니다. 물이 귀한 곳에서 구덩이에 넣는 순간 요셉은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말입니다. 르우벤은 직접 죽이지 말자는 의도에서 이런 제안을 했고, 또한 장남이었기에 책임을 회피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된 행동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유다는 달랐습니다. 유다는 끝까지 살리려고 힘썼습니다. 결국 유다의 강력한 설득으로 형제들은 그의 말에 감동을 받았고, 요셉은 구덩이에서 나와 애굽으로 팔려갑니다. 요셉이 애굽으로 내려갔기에 바로 거기에서부터 하나님의 새로운 역사가 시작됩니다. 요셉에 내려갔기에 후에 이스라엘이 기근을 피할 수 있었고, 구약역사의 획을 긋는 출애굽이란 사건이 이루지게 됩니다. 그리고 백성들이 홍해를 건너 광야를 지나 가나안으로 다시 옵니다. 이 놀라운 역사의 출발에 바로 유다가 있었습니다. 유다가 아니었다면 요셉이 살수 있었을까요? 만약 그때 요셉이 죽었다면 이후의 이런 엄청난 일들이 이루어질 수 있었을까요? 유다는 이처럼 뛰어난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이 사건에서 보여주는 유다의 뛰어난 모습이 구체적으로 무엇일까요? 우리는 그것을 이 말씀을 근거로 몇 가지로 찾을 수 있습니다.

  우선, 이성을 잃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지금 다른 형제들이 보여준 모습이 무엇입니까? 한마디로 흥분하여 이성을 잃은 모습입니다. 미움의 감정이 싹트고, 이제 살인까지 가게 된 것입니다. 사람이 이성을 잃으면 이런 현상이 나오게 됩니다. 사람을 죽이려고 죽이는 것이 아닙니다. 감정이 격하고, 흥분하다보면, 말도 거칠고, 행동도 거칠고, 사람도 죽이게 됩니다. 계획해서 죽이는 경우는 극히 드뭅니다. 순간에 이성을 잃어버려 사고를 치는 것입니다. 흥분하면 사람으로서 할 수 없는 행동들이 나오는 것입니다.

  어떤 과학자가 실험을 통해 이 무서움을 깨닫게 해주었습니다. 사람이 몹시 분노하며 흥분할 때 그 입에서 나오는 침을 쥐에게 투입했더니 쥐가 맥없이 죽더라는 것입니다. 속에서부터 절제하지 못하고 치밀어 오르는 흥분된 감정이 이처럼 무서운 것입니다. 침으로 생명을 살해하는데, 그 흥분으로 무엇을 못하겠습니까? 이성을 잃는다는 것이 이처럼 무서운 일입니다.

  지금 야곱의 형제들이 모두 그런 상황입니다. 모두가 감정을 조절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럴 때 오직 유다만이 흥분하지 않고, 침착하며, 이성을 잃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그의 영향력이요, 뛰어난 모습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이 세상을 뛰어난 사람으로 산다는 것은 결코 거창한 것이 아닙니다. 여기 유다처럼 감정을 조절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이성을 잃지 않는 것이요, 침착하게 행동하는 것입니다. 한순간의 실수로 후회할 일을 만들지 않는 것입니다. 사람이 이성으로 생각하고, 상식으로만 살아도 세상은 얼마든지 달라집니다. 우리 주변에 돌아가는 모든 사건을 보십시오. 모두가 감정조절에서 실패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시대의 비극이요, 모두의 아픔입니다. 이제 우리라도 침착해야 하고 이성을 되찾아야 합니다. 흥분하지 말아야 합니다. 어떤 경우에도 이성을 잃지 마시고, 감정을 조절하여 가라앉히십시오. 그런 뛰어난 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둘째는 어려운 자를 도우려는 자세입니다. 유다에게서 이것이 또한 돋보이지 않습니까? 지금 한 사람이 어려움을 당하고 있습니다. 너무도 힘들고 괴로운 상황입니다. 어린 요셉의 생애 커다란 죽음의 위기입니다. 이런 때에 그에게는 누군가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아직 나이도 어리고, 힘도 없고, 연약한 그를 누군가가 도와야 합니다. 돕지 않으면 요셉은 끝나고 마는 것입니다. 이런 때 아무도 도와주는 자가 없습니다. 오직 유다만이 그를 도왔다는 것입니다. 유다는 강한 자가 아니라 연약한 자의 편에 섰습니다. 그래서 요셉을 어떻게 해서든 구하려고 애를 쓴 것입니다.

  결국 유다의 이런 이해와 도움이 요셉의 인생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만약 그 순간에 유다가 돕지 않았다면 요셉은 그의 인생의 꽃을 피워보지 못했을 것입니다. 유다가 돕지 않았으면 애굽의 총리가 되지 못했습니다. 유다가 돕지 않았으면 부귀와 영예를 얻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결정적인 순간에 유다가 그를 도와주었습니다. 그래서 요셉은 유다를 평생 잊지 못합니다. 나중에 요셉은 다른 형들의 말은 듣지 않아도 유다의 말은 듣습니다. 그리고 요셉도 결국 자기가 도울 수 있는 위치에 설 때, 유다처럼 어렵고 약한 자를 도와주는 사람으로 변합니다. 어디에서 이런 인격이 나왔습니까? 바로 유다에게서 배운 것입니다. 어려울 때 도운 그를 잊지 않고 결국 자기도 어려운 자를 돕게 된 것입니다. 이만큼 유다는 요셉에게 영향을 준 것입니다.

  여러분, 그리스도인은 남을 도와주는 자로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우리는 나만을 위해 사는 자가 아닙니다. 우리는 시선과 방향을 주위로 돌려서 끊임없이 어렵고 힘든 자를 도와야 하는 자로 이 땅에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일을 하지 않으면 더 이상 그리스도인이라 부를 수 없습니다. 이것이 우리 주님이 세상에서 보여주었던 모습입니다. 주님은 강한 자가 아니라 약한 자의 편에 섰습니다. 가진 자가 아니라 없는 자를 생각했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약한 자에게 힘을 주고, 실의에 빠진 자에게 용기를 주고, 넘어진 자를 세우고, 어려운 자에게 도움을 주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그 사람도 나중에 또 어려운 사람을 도울 수 있는 자리까지 가게 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가야 할 길이요, 주님이 원하시는 삶입니다. 결국 이런 자가 뛰어난 사람입니다. 이제 주위를 돌아보시면서 사람들에게 힘과 용기를 주는 사람, 격려와 위로를 주는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셋째, 올바른 판단력입니다. 지금 모두가 이성을 잃고 감정에 치우쳐 있을 때에, 그래서 약한 자를 더 곤경에 빠트리며, 제대로 판단을 할 수 없는 때에 유다가 보여준 모습은 올바른 판단력입니다. 한번 당시의 상황을 상상해 보십시오. 얼마나 긴박한 순간입니까? 한 생명이 위기에 처하고, 역사의 기로에 선 상황입니다. 한 순간의 결정으로 어떻게 달라질지 모르는 순간입니다. 형제들은 현실만 생각하고 앞을 보지 못합니다. 그들은 인간적인 생각만 하고 하나님의 뜻을 찾지 못합니다. 이런 때 유다는 바른 판단을 내린 것입니다. 유다의 판단이 사람을 살리고, 하나님의 뜻을 이룬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인생은 한마디로 판단의 연속입니다. 우리는 살면서 크고 작은 판단을 하고 삽니다. 지금까지 많은 판단을 해왔고, 앞으로도 판단을 내려야 하는 순간이 많을 것입니다. 그럴 때마다 바른 판단을 해야 하고 후회 없는 결정을 해야 합니다. 그래야 자기도 잘되고, 다른 사람도 복을 받는 것입니다. 인간의 역사를 보면 올바르게 판단한 사람들의 모습을 통해 잘 된 것이 나타나고, 바르지 못한 판단 때문에 후대가 어려움을 겪은 역사가 동시에 있는 것을 봅니다. 한 순간의 판단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역사는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 인물을 통해 끊임없는 바른 판단을 강조합니다. 결국 잘 판단하는 자가 뛰어난 사람입니다.

  성경은 우리 믿는 자를 향하여 ‘지혜롭게 살라’고 권면합니다. 지혜가 무엇입니까? 성경적인 지혜는 판단력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그것을 솔로몬을 통해 배웁니다. 솔로몬을 가리켜 지혜의 거장이라고 부릅니다. 그의 지혜는 곧 바른 판결에 있었습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잘 판단합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바르게 판단하지 못합니다. 이 차이가 너무도 크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지혜가 중요한데 그렇다면 지혜는 어디서 오는 것입니까? 그것은 내 힘이나 노력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야고보 사도는 이렇게 강조합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러면 주시리라” 우리가 기도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기도하면 지혜를 얻습니다. 그 지혜로 바른 판단을 합니다. 그래서 우리도 뛰어난 자의 길을 걸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하기 전에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기도하기 전에 말하지도 말아야 합니다. 기도하고 판단을 해야 합니다. 확신이 서지 않으면 계속해서 구해야 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이제 지혜를 달라고 구하십시오. 그래서 바른 판단력으로 돋보이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유다는 어떤 사람인가, 그는 뛰어난 자입니다. 이성을 잃지 않는 모습에서, 어려운 자를 도우려는 자세에서, 결정적인 순간에 올바른 판단에서, 우리는 그의 뛰어난 모습을 찾습니다. 이제 나의 작은 신음에도 응답하시는 하나님의 크고 놀라운 사랑을 듬뿍 받으면서, 여기 유다처럼 강력하고 뛰어난 사람으로서 한 주간을 문을 여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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