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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주 예수의 은혜로 받는 구원 (행 15:1 - 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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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부 1


예나 지금이나 사탄은 항상 교회를 흔들고 교회를 무너뜨리려고
온갖 궤계와 방해공작을 합니다.
그 가운데 가장 무서운 것이
교리적 문제를 가지고 구원을 흔들어 놓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단 사상은 상대도 하지 말고
교회에서 쫓아 내버리라고 합니다.
요1서10절 이하에 다른 교훈을 가진 자는
[ 그를 집에 들이지도 말고 인사도 말라
그에게 인사하는 자는 그 악한 일에 참예하는 자임이니라. ]
그만큼 교리적인 문제는 크게, 중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이런 교리적인 문제가 지금 안디옥 교회 안에 일어난 것입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1차 전도여행을 마치고 안디옥 교회로 돌아왔습니다.
그들은 돌아와서 선교보고도 하고 간증도 했습니다.
그리고 쉬며 성도들과 교제도 했습니다.
그런데 모든 사람들이 다 기뻐한 것이 아니라
바울을 반대하고 시기하는 일단의 무리들이 있었습니다.
특히 교리적인 문제로 바울을 비난했습니다.
오늘 교회 안에 이런 교리적인 문제가 있을 때
어떻게 해결했는가를 보여 주는 말씀을 통해 교회생활의 지침이 되시기 바랍니다.

지금 안디옥 교회에 생긴 문제가 무엇입니까?

1절에 보니어떤 사람들이 유대로부터 안디옥에 내려 왔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사람들이 교인들을 가르치는데 가만히 보니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얻지 못한다 하는 겁니다.
이런 그들의 주장은 믿음의 성장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
구원에 관한 문제였기 때문에 아주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 없었습니다. 이에 대하여 바울은 그들의 주장에 반박을 합니다.
그들은 마치 예루살렘 교회에서 공식적으로 파송된 듯한 권위를 가지고
그들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이 일로 바울과 그들과 심한 다툼과 변론이 일어난 것입니다. 유대로부터 온 자들의 주장은 할례를 구원의 필수 조건으로 보았습니다.
할례란 곧 이방인들이 유대교에 입교하는 필수적인 의식에 속해 있습니다. 그것을 복음에도 똑같이 적용시킨 것입니다. <2>
그들은 복음을 율법처럼
유대인들에게만 주신 구원의 특권인줄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이방인들이 복음을 듣고 구원을 받으려면
할례를 받아 먼저&nbsp;유대교인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의 주장은 이신득의 즉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가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믿으면 구원을 얻는다는 것입니다.그러나 이 같은 변론은 안디옥에서 결론이 나올 수 없었습니다.

모든 종교의 위기가 무엇입니까?
형식만 남고 모양만 남는 것입니다.
예배드리는 형식, 교회 나오는 형식, 직분자 되는 형식
그래서 직분자만 되면 신앙이 있는 줄로 착각을 합니다.
이런 것들은 우리를 속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마음을 보시고 중심을 보시기 때문에
우리의 내면에 신앙이 있고, 헌신이 있느냐? 가 중요하지
예수 믿은지 얼마나 되고, 개발과정을 수료했느냐? 직분이 무엇인냐?
그래서 사람들은 종교의 내용은 무시하고
그것을 전통화 하려 하고 형식화, 교리화 시키려고 합니다.
이것은 신앙생활에 가장 무서운 적입니다.

그런데 교회 안에 가만히 보면
법이나 형식을 들고 나오는 사람들이 더 센 것 있지요.
그들의 이론도 강력했으며 바울의 반론에 고개 숙일 그들이 아니었습니다. 드디어 그들은 이 문제의 최종적인 결론을
사도들에 의해 내리고저 바울과 바나바 그리고 그 중에 몇 사람을
예루살렘으로 보내기로 했던 것입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사도들과 장로들이 중심이 되어 관장하고 있었으며
모든 선교의 출발이 이곳에서부터 내려졌기 때문에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는 대단히 중요한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먼저 사도들과 장로들이 바울과 바나바를 환영하며
저들과 함께한 하나님의 행하신 일을 간증할 때
그 자리에 있던 바리새파 중에 속한 자들은 한결같이
[ 이방인에게 할례를 주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라 명하는 것이 마땅하다 ] 고 주장했습니다.

이런 문제 가운데 사도와 장로들이 모여 많은 변론이 일어났습니다.
그 가운데서 베드로가 일어나 말했습니다. <3>
베드로는 자신의 경험담으로부터 들려주었습니다.
베드로는 이방인 고넬료의 경우를 들어 서두를 꺼냈습니다.
그가 약 10년전에 고넬료의 집에 갔을 때에
그들은 이방인이요 아직 유대교에 입교되지 아니한 사람이었으므로
할례도 받은 일이 없고 율법적 생활도 철저히 하지 못했을 그런 시기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베드로를 그에게 보내셔서 복음을 전하게 하시고
성령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이 일을 상기시키면서
이방인들의 마음도 오직 믿음으로 깨끗케 하신다는 사실을 주장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너희가 어찌하여 하나님을 시험하느냐고 책망했습니다.
10절에 [ 지금 너희가 어찌하여 하나님을 시험하여 우리 조상과 우리도
능히 메지 못하던 멍에를 제자들의 목에 두려느냐? ] 고 책망을 합니다.
베드로의 책망은 두 가지입니다.
1) 어찌하여 하나님을 시험하느냐?
하나님을 시험한다는 말은 자신이 하나님이 되어 판단하는 것을 말합니다.
보수신앙을 지킨다는 장로교인들 중에 이런 경향이 많습니다.
교리나 제도의 약점이 어디 있는가? 하면 하나님을 시험하는데 있습니다.
교리가 하나님이 되고 제도가 하나님 대신한다는데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2) 자기도 못 매는 멍에를 씌우지 말라는 것입니다.
너희 조상과 우리도 능히 메지 못하던 멍에를 제자들 목에 두려느냐?
지금 너희들이 주장하는 할례를 받아야 한다는 율법
너희 조상들도 못 지켰고 우리도 못 지켰다
그런데 왜? 남에게 그것을 지키라고 하느냐?
이것은 놀랍고 충격적인 메시지입니다.
누가 율법을 피해갈 수 있습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 율법의 잣대로 사람들을 판단하면
아무도 흠이 없는 사람이 없는 것입니다.
은혜의 잣대로 사람을 판단하시기 바랍니다. - 그럴 수도 있겠다.
내일 가족 여러분 ~!
절대로 남을 고치려고 하지 마세요.
특히 남편 고칠 생각하지 마세요, 아내 고칠 생각 하지 마세요.
잔소리로만 들려지고 잔소리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은혜를 받아야 변화됩니다.
즉 감동을 주어야 마음이 움직인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율법적인 교인 되지 마시고
복음적이고 은혜적인 교인이 되시기 바랍니다.
베드로의 변증의 결론은 <4>
11절 [ 우리가 저희와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 받는 줄을 믿노라 ]
고 합니다.
이런 베드로의 말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한명도 없었습니다.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구원의 교리는 무너뜨릴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받는 구원,
하나님의 은혜가 뭡니까? 바로 예수님입니다.
그래서 주 예수의 은혜로 받는 구원 - 믿습니까?
그런데 교인들이 가만히 보면 주 예수의 은혜에 의지하지 아니하고
형식과 제도에 매여 교회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이단에 빠진 사람들 권면해 달라는 요청을 가끔 받습니다.
그런데 이단에 빠진 사람들 대부분은 교회에 다니던 사람들입니다.
그것도 직분자들입니다.
그런데 한결같이 저들이 하는 말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 나도 과거에 기성교회 열심히 다녔다
십일조 성수주일도 지켰고 새벽기도회도 참석하고 집사도 했다
하지만 내 마음에 기쁨이 없고 자유가 없었다
그런데 여기에 와서 비로소 예수님 만나서
구원의 확신을 가졌고 이제야 신앙생활이 무엇인지 알겠다 ]
기가 막힌 말 아닙니까?
10년 20년 교회생활 해도 예수 믿는 맛을 몰랐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을 받고
주 예수의 은혜를 의지하지 아니했다는 것입니다.
율법과 제도에 매여 신앙생활 하다 보니
정작 그 속에는 예수 생명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다면
주 예수의 은혜로 신앙생활 교회생활 하고
주 예수의 은혜에 의지하여 감격이 있는 신앙생활 하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베드로가 등단하여
[ 우리가 저희와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받는 줄을 믿노라 ]고 말하므로 토의의 방향을 올바로 잡았으며
다음에 야고보가 이 모든 토론의 결론을 내리게 됩니다.

이 야고보는 사도 야고보가 아니라 예수님의 형제 야고보를 말합니다.
그가 어떻게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적 위치에 있었는가에 대해서는
성경에 밝혀진 바가 없습니다.
그러나 야고보가 예수님의 동생이란 사실과 <5>
그의 존경 받을 만한 성품, 탁월한 능력과 지도적인 영향력에 대해서
아무도 의의를 제기하는 사람이 없었다는 것으로 보아
그가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적 위치에 있었던 것은 당연한 일로 여겨집니다.

야고보 장로는 베드로의 말과 선지자의 말씀이 합당하다고 합니다.
베드로가 말한바
이방인들 중, 하나님이 그의 백성들을 부르셔서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을 받게 하신 것은
선지자들로 예언하신 말씀과 일치된다는 사실을
아모스의 예언을 인용하여 증거합니다.
16절 [ 이 후에 내가 돌아와서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다시 지으며
또 그 퇴락한 것을 다시 지어 일으키리니 ]
하나님이 왜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다시 세우시고
그 퇴락한 것을 다시 지어 일어키겠습니까?하나님의 목적은 간단합니다.]
다윗의 자손에서 메시야를 나오게 해서 그 메시야를 통해
선택된 유대인들뿐만이 아니라 모든 이방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아모스 선지자는 오래 전에 이 사실을 예언으로 남겨두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야고보 장로는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이방인들을 괴롭게 말라고 했습니다.
야고보 장로는 예루살렘 교회의 최고 지도자적인 입장에서
그의 결론적인 의견을 개진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만으로 구원을 받아야 할 이방인들에게
할례를 받게 하거나 율법을 지키는 일을 구원에 결부시킨다면
이런 일은 하나님의 말씀에도 어긋나거니와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이방인들을&nbsp;괴롭히는 일이다 라는 것입니다.
다만 '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 하라 ’ 고
편지하는 것이 가하다'고 했습니다.
야고보가 이곳에서 자신의 견해로 지적한 네 가지 금기 사항은
구원에 따르는 조건인 것은 아닙니다. 다만 야고보가 제시한 그의 견해는
하나님의 교회에서 이방인들과 유대인들간의 원만한 교통을 위한
건덕상 규정이라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야고보 장로가 말한 네 가지 금기 사항이 뭡니까? <6>
1) 우상의 더러운 것을 금하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우상의 제물을 먹지 말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방인들은 우상의 제물과 접촉할 기회가 많이 있습니다.
우상의 제물은 율법의 금기 사항이기 이전에
하나님을 섬기는 백성들에게는 신앙적인 양심에 관한 문제인 것입니다.
바울은 우상의 제물에 대해서 고전8:8-9절에 이렇게 말합니다.
[ 식물은 우리를 하나님 앞에 세우지 못하나니
우리가 먹지 아니하여도 부족함이 없고 먹어도 풍성함이 없으리라 그런즉 너희 자유함이 약한 자들에게 거치는 것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 ]
하면서 바울 자신은 믿음이 연약한 자들에게 시험이 된다면
나는 우상의 제물을 먹지 않겠다고 합니다.
2) 음행을 금하라고 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음행에 대하여 율법적인 엄격한 규제를 받고 있지만
이방인 사회에서는 음행이 널리 성행되고 있었습니다. (3) 목메어 죽인 것을 멀리하라고 했습니다.
짐승을 목메어 죽이는 일은 이방인들 간에 일반화된 방법이었습니다.
4) 피를 멀리하라고 합니다.
이 같은 일을 금하라고 한 이유는 창9:4절에 노아 시대에
[ 고기를 그 생명 되는 피채 먹지 말라 ] 고 합니다.
< 이상구 박사 >의 글에 보면
목매어 죽인 짐승은 독성이 가득찬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피 속에는 모든 독성이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건강을 위하여서도 피는 안 먹는 것이 좋다고 합니다.

이러한 금기 사항은 유대인들에게는
예로부터 각 성에서 모세의 율법을 전하는 자가 있어
안식일에 회당에서 그 글을 읽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하는 것이 잘 알려져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유대인들이
예수를 믿게 되어도 그것을 지키고 있는 것인데 반하여
이방인들이 예수를 믿고 한 공동체가 되었지만
그들은 우상의 더러운 것에 참여하는 것과 음행과
피 채 고기를 먹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문제만 금하도록 하자고 하는 것입니다. &nbsp;
그러므로 이러한 금령은 율법적인 것이 아닙니다.
이런 것을 지켜야 구원에 이른다는 말씀이 아니라
서로 배려하는 차원에서 말씀하는 것입니다.
이제 예루살렘 교회의 사도들과 장로들의 결정이 22절 이하에 나옵니다.<7>

예루살렘 교회는 이 같은 결정 사항을
속히 안디옥 교회를 비롯한 여러 이방인들의 교회에 보내기 위하여
바울과 바나바와 함께 예루살렘 교회 지도자 중
바사바라고 하는 유다와 실라를 택하여 함께 보내기로 했습니다.

예루살렘 총회가 이방인 교회에 보내는 이 편지의 서두는
1) 이방인 형제들에 대한 문안으로 시작되었습니다.
23절 [ 사도와 장로된 형제들은
안디옥과 수리아와 길리기아에 있는 이방인 형제들에게 문안하노라 ] 예루살렘 교회의 사도와 장로들은
이들 이방인 교인들에게 '형제들’이라고 불렀습니다.
이것은 예루살렘 유대인뿐만이 아니라
안디옥 수리아 길리기아의 이방인 교회도
예수 안에서 한 형제 즉 같은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입니다.
2) 교회에서 시킨 일도 없는 일꾼들이 일을 저질렀다고 했습니다.
24절 [ 들은즉 우리 가운데서 어떤 사람들이 우리의 시킨&nbsp;것도 없이 나가서 말로 너희를 괴롭게 하고 마음을 혹하게 한다 하기로 ] 라고 한 말에서 사도들과 장로들은 교회에서&nbsp;시킨 일이 없는 자들의
단독적인 처사에 대하여 위험신호를 보냈습니다.
이방인 교회에 찾아가서 모세의 율법을 지켜야 구원을 받는다고 주장한 무리들은 어떤 이단적인 단체에서 파송된 무리였던 것이 아니라
[ 우리 가운데서 어떤 사람들이 저지른 일 ] 이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이 아닌 예루살렘 교회의 중진들이었습니다.
교인들은 교회에서 시킨 일도 없는 일을 자의로 행함으로
교회를 어지럽히는 일을 해서는 안 됩니다.
3) 바울과 바나바의 신임을 알려 주고 있습니다. 사도들은 그들에게 바나바와 바울에 대한 신임과
그들이 전한 복음이 참된 복음이었음을 알려 줄 필요가 있었습니다.
이에 대하여 사도와 장로들은 26절에
[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는 자인
우리의 사랑하는 바나바와 바울 ] 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바나바와 바울은 사도들과 장로들에게 인정 받은 주의 일꾼이 된 것입니다. 사람이 아무리 열심을 내어도 바른 복음이 아니면
그 일이 사탄의 일이 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분명한 성령의 계시를 받았습니다. <8> 바른 복음을 전하는 일꾼만이 하나님과 교회의 인정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한 가지 유의해야할 말이 있는데
26절에 [ 우리의 사랑하는 바나바와 바울과 함께
너희에게 보내기를 일치가결하였노라 ]
일치가결했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 뒤에는 회의 결과에 대하여
모두 승복했다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습니다.
끝난 결과에 대해서는 말하지 말아야 합니다.
4) 이 편지의 마지막은 교회의 결의 사항을 전하는 일이었습니다.
28-29절에
[ 성령과 우리는 이 요긴한 것들 외에
아무 짐도 너희에게 지우게 아니하는 것이 가한 줄 알았다 ] 고 했습니다. 요긴한 것들이란
예루살렘 교회에서 결의한 네 가지 금기 사항을 가리킵니다.
29절에
[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멀리 할찌니라
이에 스스로 삼가면 잘 되리라 평안함을 원하노라 ] 고 결론을 내립니다.

바울과 바나바 그리고 바사바와 실리가 사도들로부터 편지를 갖고
안디옥 교회에 도착을 했습니다.

장로와 사도들이 안디옥 교회에 보낸 편지는
안디옥 교회에 말할 수 없는 위로와 기쁨을 주었습니다.
바울과 일행들이 안디옥에 도착하여 편지를 전하니
안디옥 교인들이 그 편지를 읽고는
31절에 [ 읽고 그 위로한 말을 기뻐하더라 ] 합니다.
위로는 그 사람에게 소망을 주고 새 힘을 주며 기쁨을 줍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위로가 됩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의 위로를 받고자 할 때
하나님은 그의 말씀으로 위로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하지 않거나
그 말씀을 모르는 자는 위로를 받을 길이 없는 것입니다. 시119:49-50절
[ 주의 종에게 하신 말씀을 기억하소서 주께서 나로 소망이 있게 하였나이다 이 말씀은 나의 곤란 중에 위로라 주의 말씀이 나를 살리셨음이니이다 ]
- 김 성덕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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