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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조금 남겨 두셨다! (사 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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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1:1 / (읽기) / 여기 보니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가 유다와 예루살렘에 대하여 본 이상!>이라 하는군요. 그렇습니다. 이사야서는 선지자 이사야가 남 왕국 유다와 예루살렘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이상을 적어 놓은 예언서입니다. 오늘 우리의 현실에 대입하자면, 남북한 중에 남한 곧 대한민국과 특별히 서울을 향하여 선포하시는 말씀이라 하겠습니다. 그만큼 우리에게 소중한 말씀입니다.

선지자 이사야는 아들 둘을 두었는데, 그 중 첫째의 이름을 <스알야숩>이라 지었습니다. 흥미로운 사실은, 선지자 자신의 이름 뜻과 자기 아들의 이름 뜻 속에 이미 이사야서의 핵심 주제가 담겨 있다는 점입니다. 이사야, <하나님은 구원이시다!>이란 뜻이요, 스알야숩, <남은 자가 돌아올 것이다!>라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이사야서의 핵심 주제는 이렇습니다. 첫째 여호와 하나님이 인간 역사의 주인이 되신다는 것이요, 둘째 하나님은 인류 구원의 역사를 남은 자를 통해 이루어 가신다는 겁니다. 종합하면 우리 남은 자들이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 가운데 서 있다는 거지요.

이 점에서 하나님은 분명한 신앙 고백을 요청하십니다. 우리 역사의 주관자는 여호와 하나님이시라는 고백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의 역사는 곧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이 역사를 주관하십니다. 그러므로 역사를 끌고 가는 힘이 하나님 아닌 다른 곳에 있다고 가르치는 것, 잘못된 일입니다. 인간의 모든 역사는 하나님의 구원사 속에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선민인 이스라엘조차 이 기본적인 믿음을 지키지 못하고, 하나님 보다 강대국의 힘을 의지하고, 이방신 바알에게 절하며, 하나님을 배신했던 것입니다. 결국 저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되는데요,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은 이스라엘의 역사가, 거기서 벌써 끝이 났어야 마땅한데도, 그 후로 계속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물의 심판, 불의 심판을 위시해서, 온갖 종류의 심판을 다 당하고도 어찌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

이 점에서 선지자 이사야의 답은 간단합니다. 하나님께서 조금 남겨 두셨기 때문입니다. 그랬습니다.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저들을 남겨두신 덕분입니다. 패역한 전 세대에게 내려진 홍수의 심판 속에서도 하나님은 노아를 남겨 두셨습니다. 소돔과 고모라에 내린 유황불의 심판 속에서도 롯의 가족을 남겨 두셨습니다. 자포자기하려는 선지자 엘리야를 위해서는 바알에게 절하지 않은 7천명을 남겨 두셨습니다. 그랬습니다. 하나님은 저들 가운데 조금을 남겨 다시 구원의 역사를 이어가게 하셨던 것입니다.

해서 선지자 이사야는 그의 예언서를 시작하자마자 이렇게 고백합니다. / 1:9 / (읽기) / 선지자 이사야의 고백은 확실합니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남겨 두셨다는 겁니다. 누구를 위하여? 우리를 위하여! 중요한 대목입니다. 하나님을 위하여 남겨두신 것 아닙니다. 오직 우리를 위하여,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조금 남겨두셨던 겁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그 조금이라도 남겨 두지 아니하셨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9절의 후반부, <우리가 소돔 같고 고모라 같았을 것이라!> 심판의 불로 완전히 다 망했을 것이라, 신분고하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다 불에 타 죽었을 것이라! 정말 그렇습니다. 그 때 하나님이 우리를 살려 남겨 두지 않으셨다면, 예루살렘도 서울도, 유다도 대한민국도, 소돔이나 고모라처럼 완전히 망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남겨 주시지 않으면,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남겨 주심>은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남겨 주심>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런데요, 9절 중간에 보니, <조금>이란 단어가 있군요.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조금 남겨 두셨다!>는 건데요, 그러나 불행히도 현대인들은 <조금>이란 단어를 좋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조금 남았다고 말하면 대개는 시시하다고 생각합니다. 조금 남겨 준다고 말하면, 대개 나를 무시하는 거냐고 버럭 화를 냅니다. 오로지 <많음>이 미덕이요, <조금 밖에 없음>은 죄악입니다.

그러고는 지금 당장 죽여 없애도 할 말 없는 죄인 주제에, 나는 왜 여기에 이 모양으로 남겨 두시느냐고 불평합니다. 나의 모든 것 다 거두어 가셔도 할 말 없는 주제에, 왜 이만큼만 남겨 두시느냐고 늘 원망합니다. 아니오, 조금이라도 남겨 두심에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아직 이 죄인 살려두시고, 여기에 이렇게 남게 하심에 먼저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몽땅 다 쓸어 없애버려야 할 것들 가운데 조금이라도 남겨 주심은 은혜요 축복이기 때문입니다.

더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남겨진 사람은 항상 소수라는 점입니다. 남겨진 것들은 항상 조금이라는 사실입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남겨지는 쪽은 항상 소수입니다. 남겨 두는 쪽은 항상 조금입니다. 씨감자를 예로 들어볼까요? 그 해 수확한 감자의 총량에 비해 씨감자로 남겨 두는 양은 아주 조금입니다. 종마를 생각해 볼까요? 수많은 말들 가운데 씨받이 종마는 아주 조금입니다.

그러나 이 때 <조금>은 그 어떤 <많음> 보다 더 귀한 <조금>입니다. 이 때 <소수>는 <다수>보다 더 소중한 소수입니다. 이들이 없이는 생명의 역사가 계속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기 남겨진 우리는, 조금 남겨 주심에 불평할 것이 아니라, 가장 먼저 감사해야 합니다. 새 역사를 위하여, 구원의 내 날을 위하여, 나를, 우리를 여기 남겨 두셨다는 사실에 감격하고 감사하면 됩니다.

혹시 내 주변에 하나님이 남겨 두신 자가 하나도 없어 보이십니까? 내 인생에 더 이상 남은 희망이 없어 보이십니까? 어찌하여 이런 속에 나를 남겨 두시느냐고 하늘 향해 원망하십니까? 아니오, 없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남겨 두셨습니다. 내 눈엔 없는 것 같아도, 내 눈엔 없어 보여도, 아니오, 분명히 하나님은, 나를 위해 그 누군가를 남겨 두셨습니다. 우리를 위해 조금 남겨 두셨습니다.

그럼요, 우리의 생명이 살아 있는 한, 여기가 끝이 아닙니다. 우리의 역사가 계속되는 한, 여기가 종말이 아닙니다. 아니, 이제 새로운 시작입니다. 이 믿음으로, 오직 구원의 역사를 책임질 남겨진 소수가 되시기 바랍니다. 넓은 문 같지만 종국엔 지옥으로 떨어지는 생각 없는 다수의 행렬을 따라가지 마시고, 좁은 문 같지만 그 끝은 천국으로 이어지는 남겨진 소수의 행렬에 참여하시기 바랍니다.

# 2
그러면 어찌하여 하나님의 선민 이스라엘이, <조금> 곧 소수를 제외하고 모두 유황불의 심판을 받아야만 했던 것일까? 노아를 제외하고 모두 다 홍수의 심판을 받았던 이유는 무엇인가? 롯을 제외하고 소돔과 고모라의 모든 사람이 유황불의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이 점에 대해 선지자 이사야는 아주 분명하게 말합니다. 직접 들어봅니다.

1장 2절을 보실까요? 먼저 우리 여호와 하나님께서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다!>고 하십니다. 이스라엘을 가리켜 내 자식이라 하십니다. 그런데 사랑으로 양육한 자식이 어버이를 거역하는 죄를 범했던 것입니다.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 배은망덕한 자식들이지요.

3절을 보니, 저들의 배은망덕이 끝을 모릅니다. 그런 저들을 보시고 우리 하나님, 너무 화가 나셔서 하시는 말씀, <소도 임자를 알고, 나귀도 주인을 알건마는, 내 자식, 내 백성 이스라엘은 나를 알지 못하는구나!> 입니다. 

그랬습니다. 저들 이스라엘은, 4절에 기록된 대로, <범죄 한 나라>요 <허물 진 백성>이요, <행악의 종자>요, <부패한 자식>이었습니다. 입에 올리기조차 민망한 표현이지만, 이런 말 말고는 저들을 표현할 길이 없었던 것이지요. 그만큼 저들의 죄가 심각했다는 반증이지요.

결국 저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며, 하나님을 버리고, 제 멋대로 저 멀리 도망가 버립니다. 자식이 어버이를 버린 셈인데요, 문제는 아무리 타이르고 또 타일러도 저들이 말을 듣지 않자, 하나님께서 매를 드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렇지요, 말로 해서 듣지 않으면 매를 들게 되지요.

그런 이스라엘을 보면서 선지자 이사야가 하는 말, 5절인데요, <너희가 어찌하여 매를 더 맞으려고 더욱 더욱 패역 하느냐?> 그만큼 맞았으면, 이제 정신 차려야지, 얼마나 더 맞아야 돌아오겠느냐? 어찌하여 자꾸 매만 버느냐?

그러면서 선지자 이사야는 유다와 예루살렘의 적나라한 모습을 폭로합니다. 만신창이가 되어버린 이스라엘인데요, 5절 후반부, 온 머리가 병들었다고 하는군요. 온 마음이 피곤하다고 하는군요. 6절, 발바닥에서 머리끝까지 성한 곳이 없군요. 어찌나 맞았는지 온 몸이 상하고 터진 데뿐이군요. 그래도 정신을 못 차리니, 새로 맞고 또 맞고, 그래서 상처위로 흐르는 선혈이 낭자하군요. 뿐만 아닙니다. 7절을 보니 성읍들은 불에 타고, 땅은 이방인들에게 다 빼앗겼고, 온 유다가 황무지가 되었다고 하는군요. 이제 구제 불능의 상태가 된 거지요.

그런데 딱 하나, 그런 가운데 남아 있는 것이 있으니, 8절의 첫 단어, <딸 시온>입니다. 딸이라는 단어에 동그라미, 별표 다섯 개, 무슨 뜻인가? 그 잘난 아들들이 아니라, 이 딸을 통해 구원의 역사를 이어가신다는 거지요. 할렐루야! 아멘!

여기서 딸 시온은 예루살렘 성과 그 성전을 상징하는데요, 사랑하는 여러분, 저는 우리 동광교회가 여기 남은 딸 시온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하나님을 거역해 온 이 민족을 구원하는 마지막 보루가 되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이 역사의 주인이심을 알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하는 이 백성, 범죄가 판을 치고, 행악의 종자들과 부패한 자식들이 활보하는 이 나라, 날이 갈수록 여호와를 멀리하고 자꾸만 패역의 길로 가면서 끊임없이 매만 맞는 불쌍한 사람들, 이 땅의 사람들에게 새 역사의 희망을 선물하는 남은 자 공동체, 곧 딸 시온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이것이 내년이면 창립 25주년을 맞이하는 우리 교회에게 주시는 오늘의 소명인 줄 믿습니다. 우린 이 민족의 새 역사를 위해 하나님 친히 남겨 두신 딸 시온입니다.

# 3
그렇다면 남은 자에게 주시는 소명은 무엇일까? 어떤 사람이 새로운 역사를 책임지게 될까? 하나님께서 남겨 두시는 자 속에 포함되려면 난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가? 이런 질문들에 대한 답을 말씀 속에서 찾아 정리하며 말씀 마당을 닫겠습니다.

1.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케 하라!

1:16-17 / (읽기) / 하나님이 구원의 역사를 위해 남겨 두신 자가 해야 할 첫 번째 일, 그것은 거룩한 상태를 유지하는 일입니다. 해서 스스로 씻고, 스스로 깨끗케 하라 하십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스스로 깨끗할 수 있나? 악업을 버리라 하십니다. 악행을 그치라 하십니다. 악한 생각, 악한 마음, 악한 언행, 악한 일, 그 무엇이든 악한 것과는 짝하지 말라는 거지요.

그 대신 할 일이 있습니다. 17절, 선행을 배우라 하십니다. 공의를 구하라 하십니다. 학대받는 자를 도와주며, 고아를 신원하고, 과부를 변호하라 하십니다. 이 가운데 모르는 말은 하나도 없습니다. 신학적 설명도 필요 없습니다. 가서 그대로 실천하기만 하면 됩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우리 동광을 세우시고, 오늘 이 역사 속에 남겨두신 뜻이 바로 이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제 스물다섯의 청년이 되는 동광, 선행 공동체로 우뚝 서기를 원합니다. 공의를 추구하는 공동체, 학대받는 자를 도와주는 공동체, 고아를 신원하고 과부를 변호하는 공동체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이 일을 위해 우리를 여기 남겨 두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이 일에 적극 참여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2.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1:18 / (읽기) / 거기 오라는 단어에 표시하십니다. 남은 자에게 주시는 두 번째 명령, 그것은 오라는 겁니다. 남은 자가 해야 할 일, 여호와께 늘 돌아오는 일입니다. 여러분, 성전 멀리가지 마시기 바랍니다. 늘 아버지께 돌아올 수 있는 거리에 계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돌아오는 시간엔 꼭 돌아오시기 바랍니다.

그런데요, 놀라운 점은 하나님께 오라 하시고는 그 다음에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고 말씀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아니 말이야 바른 말이지, 그동안의 행실로 보면, 이미 죽어 마땅한 죄인인데, 해서 더 이상 변론이 필요 없는 죄인인데, 이제 사형 집행만 남은 사형수인데, 그런데 변론하시자고 하시다니, 무슨 뜻일까?

하나님께서 변론하자고 제안하시는 궁극적 목적은, 우리의 죄를 드러내어 벌을 주시려는 것이 아니라, 그 변론을 통하여, 우리가 스스로 죄를 깨닫고 회개하여 구원에 이르게 하시려는 겁니다. 지극한 사랑이요, 끝까지 참아주시는 사랑이지요.

그래서 변론한 결과가 어떻게 되는가? 18절, 주홍 같은 죄가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은 죄가 양털 같이 될 것이라! 할렐루야! 아멘!

여러분, 우린 남은 자입니다. 아니 하나님께서 여기 나를 남겨 두셨습니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예배 시간엔 예배하시기 바랍니다. 기도시간엔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구원의 길이 다른 곳에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과의 만남 속에 구원이 있습니다. 남은 자가 해야 할 일, 하나님께 돌아오는 일입니다.

3. 즐겨 순종하라!

1:20-21 / (읽기) / 이 대목에선 긴 말씀을 드리지 않겠습니다. 즐겁게 순종하라 하십니다. 순종, 그것은 억지로 하는 것 아닙니다. 순종, 대가를 바라고 하는 것 아닙니다. 누가 볼 때만 하는 것도 아닙니다.

오직 즐거운 마음으로 순종하라 하십니다. 왜? 죽어 마땅한 죄인을 살려 주시고, 오늘 여기에 남겨 주시고, 새 역사를 이어갈 대권을 허락하셨기 때문입니다. 구원의 역사에 참여할 특권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즐겨 순종하여 이 땅의 소산을 복으로 받아 누리는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순종치 아니하는 자, 곧 배반자에게 돌아올 칼의 심판은 받지 않게 되시기 바랍니다.

# 4
존경하는 여러분, 오늘 여기 남은 자 공동체에 함께 하심을 축하드립니다. 우리 민족의 유구한 역사 속에, 오늘 우리를 여기 남겨 주셨습니다. 길지 않은 한국 교회의 역사 속에, 오늘 우리 동광을 여기 남겨 주셨습니다. 동광의 25년 역사 속에 오늘 나를 여기 남겨 주셨습니다.

그동안 왔다 사라져 간 사람들에 비하면, 물론 여기 남은 우리는 아주 적은 소수입니다. 너무나 작아, 우리가 무슨 일을 할 수 있을까? 걱정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분명 조금 남겨 두신 소수를 통해 새 역사를 이끌어 가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고, 남은 자의 소명을 완수하는 일에 함께 충성하시기 바랍니다. 동광 25주년을 넘어, 희년을 향해 새롭게 출발하는 우리 남은 자들에게 주 성령께서 동행해 주실 줄 믿습니다. 아멘! (장 빈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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