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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사람 (눅 9:57~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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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에 보면,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는 세 사람이 나옵니다. 이들은 하나같이 주님의 제자가 되고 싶은 열망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한 사람은 거절을 당하였고, 두 사람은 책망을 들었습니다. 이 세 사람과 같은 유형의 사람들은 예수님 당시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고 오늘날에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 시간 저는 이 세 사람이 예수님과 주고받은 대화를 통해서 성도님들과 함께 신앙생활에 유익한 가르침을 얻고자 합니다.

첫째로, 맨 먼저 예수님께 나왔던 사람에 대하여 말씀해 드리겠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하나같이 주님의 부르심을 받고 제자가 되었는데, 이 사람은 자원해서 예수님의 제자가 되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는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좇으리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 속에는 그의 굳은 결의가 잘 나타나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 사람을 칭찬하기는커녕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라는 말씀으로 그의 청을 거절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이 사람이 무슨 의도로 주님을 좇겠다고 하는지를 환히 알고 계셨던 것입니다.

이 사람은 예수님의 행하시는 기적과 큰 무리가 열광적으로 주님을 따르는 것을 보고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고 싶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것을 사회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는 것쯤으로 생각했습니다. 예로부터 위대한 인물 주위에는 따르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모시는 사람이 정권을 잡거나 높은 벼슬에 오르면 덩달아서 출세를 하고 영광을 얻게 될 것을 꿈꾸고 열심히 따라 다닙니다. 이 사람 역시 이 같은 생각을 갖고 예수님의 제자가 되겠다고 자청하고 나섰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은 그 동기가 올발라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주님을 믿고 따르는 목적을 성경적으로 올바로 알고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이 넘는 사람들을 먹이신 이적을 행하셨을 때 사람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습니다. 그들은 서로 말하기를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하고, 예수님을 억지로 잡아 자기들의 임금으로 삼으려고 하였습니다.

이튿날 그들은 아침 일찍 예수님을 찾아 왔습니다. “랍비여, 어느 때에 여기 오셨나이까?”하고 인사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찾아온 의도를 아시고 말씀하시기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고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오늘날도 열심히 주님을 믿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이 무리와 같이 육신의 필요를 위해 주님을 따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한국 교회가 당면한 심각한 문제 중 하나는 기독교 신앙이 점점 무속적 기복 신앙화 되어 간다는 사실입니다. 언제부턴가 교회에서 현세적이고 물질적인 축복을 소리 높이 선포하게 되었습니다. 옛날에는 부흥사를 모시고 집회를 하면서 “부흥 사경회”라고 해서 낮에는 주로 강사가 신자들에게 성경을 가르쳤고, 밤 시간에는 부흥 집회를 했습니다.

그러나 요즘은 사경회란 말을 찾아보기 어렵고, 대부분 “축복”이란 말을 앞에 붙여서 “축복 부흥회”라고 합니다. 성도들의 신앙성장을 위해서가 아니라 현세적인 축복을 받기 위한 목적으로 부흥회를 여는 것입니다.

물론, 기독교 신앙 안에는 기복적인 요소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경외하는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사랑하셔서 복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만드신 후에 맨 처음 하신 일이 “그들에게 복을 주신 것”이었습니다.

창세기 1장 27절로 28절에 보면 “27)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28)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복의 원천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에 순종하는 사람은 복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이 세상에 종교 경전 가운데서 성경만큼 복에 관해서 많이 언급하고 있는 경전도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명하시기를 “23)아론과 그 아들들에게 고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이렇게 축복하여 이르되 24)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25)여호와는 그 얼굴로 네게 비취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26)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찌니라 하라 27)그들은 이같이 내 이름으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축복할찌니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리라”(민 6:)고 하셨습니다.

신명기 28장을 읽어보십시오. 매 구절마다 복이 선포되어 있음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께 복을 구하는 것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고 오히려 적극적으로 권장해야 할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둘 점은 복 받는 그 자체가 하나님을 믿는 목적이 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복을 받는 것이지, 복을 받기 위해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곧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말과 같습니다. 그러나 복 받기 위해 하나님을 믿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이 없이도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바로 이런 신앙행태를 가리켜서 무속적 기복 신앙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보다 복 받는 것을 우선시하는 신앙자세를 말합니다. 성경의 가르침은 우리에게 먼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명령을 순종하라고 명하십니다. 복 받는 것은 그 다음 순서입니다.

신명기 28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선민에게 복을 받기 위한 조건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1)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 2)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미치리니 3)성읍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을 것이며 4)네 몸의 소생과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짐승의 새끼와 우양의 새끼가 복을 받을 것이며 5)네 광주리와 떡반죽 그릇이 복을 받을 것이며 6)네가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을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순종하는 것이 먼저이고, 복 받는 것은 그 다음입니다. 그러나 무속적 기복 신앙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명령을 지키는 데는 관심이 없고 오직 복 받는 데만 집착합니다. 그들이 말하는 복은 하나부터 열까지 현세적인 복을 말합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현세적인 복을 강조하기 보다는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을 강조합니다. 이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산상수훈에서 여덟 가지의 복에 관하여 말씀하셨는데, 여기에 선포된 복이야말로 기독교가 추구하는 복의 원형입니다.

“①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②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③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④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⑤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⑥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⑦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⑧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현세적인 복을 받는 것이 하나님을 믿는 본래의 목적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성도들에게 베풀어 주시는 복 가운데는 현세적인 복이 포함되어 있지만 그것이 일차적인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고 그 말씀을 순종하는 성도들은 산상수훈에서 말씀하신 여덟 가지의 복을 확실하게 받아 누리게 됩니다.

무속적 기복신앙을 가진 사람은 자기 뜻대로 일이 잘 되는 동안은 하나님을 잘 섬기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을 믿어보았자 아무 소용이 없다”고 하면서 주저앉고 맙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믿는 목적이 애당초 잘못되었기 때문에 생기는 결과입니다.

여러분, 현세적인 복을 받는 것이 목적이라면 구태여 기독교를 믿을 것도 없습니다. 우리 사회에는 기독교인이 아니면서도 성공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우리 사회의 각 분야에서 성공한 불신자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나는 무엇을 위하여 주님을 믿고 따르는가?”하는 질문에 진실한 답을 해보시기 바랍니다. 떡을 얻어먹기 위해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내 살을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하시자 많은 사람이 주님을 비방하면서 떠나갔습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열 두 제자를 보시고 “너희도 가려느냐?”고 하시니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기를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 우리는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신 줄 믿고 알았삽나이다.”(요 6:68,69)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믿고 따르는 목적은 단순합니다. 그것은 영생이 주님께 있기 때문입니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행 4:12)하신 대로, 예수 그리스도 한 분만이 우리의 구주가 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다른 종교의 창시자와 같은 분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석가나 공자나 마호메트나 소크라테스와 같은 부류의 성인이 아니십니다. 예수님은 참 사람이시며 동시에 참 하나님이십니다. 성자 하나님께서 인간들을 구원하시려고 사람이 되셔서 이 땅에 오신 분이 곧 예수님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구원을 받고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을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진심으로 주님을 따르는 제자가 되기를 원하시면 “아멘” 하십시다. 오직 주님만을 바라보고 여러분 자신을 부인하고 희생과 봉사와 고통을 감수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받는 제자로 인정받으시기 바랍니다.

둘째로, "나를 따르라."는 주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에 대하여 말씀해 드리겠습니다.

제자가 되기를 자원한 첫 번째 사람은 주님으로부터 거절을 당하였는데, 이 사람은 “나를 따르라”는 주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이 사실은 매우 귀한 것입니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요 15:16)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셨듯이, 우리가 주님을 믿게 된 것은 우리가 주님을 택했기 때문이 아니고, 주님께서 우리를 택하신 결과입니다.

기독교는 죄인이 하나님을 찾아가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죄인을 찾아오시는 종교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고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벌거벗은 것을 알고는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었을 때 먼저 그들을 찾아가신 분은 하나님이셨습니다. 범죄한 인간은 제 스스로의 능력으로 하나님을 찾지 못합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숨으려 합니다.

명절이 되면 오랜만에 친척들을 만나 반가워합니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야기꽃을 피웁니다. 그런데 하나님에 대하여 말을 꺼내면 그만 분위기가 설렁해 집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에 대하여 듣기를 싫어합니다.

이렇게 볼 때, 우리가 하나님을 믿게 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특별한 은혜를 주셔서 우리 마음을 열어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범죄하여 하나님과 원수 된 우리를 사랑하셔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셨으며,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원을 위한 만반의 준비를 해 놓으신 다음, 죄인들을 향하여 이 구원의 잔치에 참여하라고 부르고 계십니다.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너희가 어찌하여 양식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주며 배부르게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 나를 청종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좋은 것을 먹을 것이며 너희 마음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으리라.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내게 나아와 들으라 그리하면 너희 영혼이 살리라.”(사 55:1-3)

본문에 보니, 주님의 부르심을 받은 그 사람은 선뜻 응하지 않고 한 가지 핑계를 댔습니다. 그는 말하기를 “나로 먼저 가서 내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라고 했습니다. 부친이 죽었으면 자식 된 도리로 장사를 지내야 합니다. 그렇다면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은 너무나 가혹하게 들립니다.

그러나 알고 보면 그런 뜻이 아닙니다. 지금 그 사람의 부친은 죽은 것이 아닙니다. 중병에 걸린 것도 아닙니다. “나로 먼저 가서 내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라고 한 말은 자기 부친이 살아 있을 동안에는 주님을 따르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주님을 좇는 시기를 나중으로 미루겠다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그는 자기의 부친을 핑계거리로 삼은 것이지요.

오늘날도 전도하면 “나도 예수님을 믿고 싶지만 부모님이 살아계셔서 지금은 곤란합니다. 나중에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믿겠습니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을 쉽게 만나볼 수 있습니다.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라”는 주님의 말씀은 바로 그러한 사람들에게 주신 것입니다. 여기서 죽은 자들은 영적으로 죽은 자들을 말합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다 영이 죽은 자들입니다. 부모 공경은 반드시 해야 할 일이지만, 그것을 핑계로 삼아 주님을 섬기지 못하겠다고 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부모 공경뿐 아니라, 그 어떠한 일도 주님을 섬기지 못하는 이유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 주위에는 일이 바쁘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을 시간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죽은 자 때문에 영생을 포기하는 것과 같습니다.

한편,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는 말씀은, 우리에게 주님을 섬기는 것이 얼마나 긴급한 일인가를 말해 줍니다. 이 세상에 예수 믿는 것보다 더 시급한 일은 달리 없습니다. 이것은 내일로 미룰 일이 아닌 것이 우리의 살고 죽는 것이 달린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기왕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은 주님을 섬기는 데 열심 내지 못하는 것을 부모나 가족 때문이라고 핑계 대면 안 됩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 가족을 사랑하는 것보다 못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마 10:37-39)고 하셨습니다. 이는 부모나 자식보다, 더 나아가서 자기 목숨보다 주님을 더 사랑할 것을 우리에게 요구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주님의 말씀이 의도하신 바를 올바로 이해해야 합니다. 그것은 부모 공경이나 가족 사랑을 훼방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부모 공경은 하나님께서 명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부모 공경을 강조하셨습니다. 십자가에 달려 고통을 당하시는 순간에도 제자 요한에게 모친 마리아를 편히 모실 것을 당부하신 주님이십니다. 그러나 아무리 나를 낳아주신 부모님이라도 주님 보다 더 사랑하면 안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여러분은 이미 구원을 위한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한 분들입니다. 이제 여러분에게는 헌신과 봉사를 위한 주님의 부르심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나를 따르라”는 주님의 부르심이 있거든 절대로 핑계를 대고 피하려는 유혹에 빠지지 마시고 기쁨으로 응답하심으로 주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성도님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로 주님께 나왔던 사람에 대하여 말씀해 드리겠습니다.

이 사람은 말하기를 “주여, 내가 주를 좇겠나이다마는 나로 먼저 내 가족을 작별케 허락하옵소서.”라고 구하였습니다. 이제 주님의 제자로 나서는 마당에 가족과 작별하는 것을 못하게 할 이유가 없습니다. 마태는 주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 자기 집에 주님과 제자들과 동료 세리들을 초대하여 고별잔치를 열었습니다.  엘리사는 엘리야의 부름을 받았을 때 엘리야의 허락을 받고 자기 집에 가서 소 두 마리를 잡아서 잔치를 열고 가족과 마을 사람들과 작별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이 사람이 그의 가족을 작별하게 허락해 달라고 요청한 것 자체는 잘못이라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니라”고 하셨습니다. 밭을 갈기 위해서 쟁기를 잡은 사람은 똑바로 앞만 쳐다보고 소를 몰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뒤를 돌아보면서 갈면 이랑이 비뚤비뚤해 질 수밖에 없습니다.

왜 주님께서 이 사람에게 이 같은 말씀을 하셨을까요? 그것은 예수님께서 그의 마음의 생각을 이미 다 알고 계셨음을 말해 줍니다. 곧 그 사람은 말로는 “주여, 내가 주를 좇겠습니다”라고 하였지만 마음속으로는 가족들을 만나서 의논해 보고 결정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가족들이 만류하면  결심을 번복할 생각을 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같은 그의 생각을 아셨기 때문에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니라”고 하신 것입니다.

영적으로 볼 때,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것은, 성도들이 세상에 대한 미련이 남아 있어 신앙생활에 힘쓰지 못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롯의 아내는 불타 멸망하는 소돔 성을 빠져나왔으나 소돔 생활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뒤를 돌아보았다가 그만 소금 기둥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데마는 한 때 사도 바울의 동역자로서 열심히 헌신하였으나 세상을 사랑하여 사도 바울을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가고 말았습니다. 이 역시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본 결과였습니다.

우리의 주인은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만 사랑해야지 세상을 사랑하면 안 됩니다. 그런가하면 주님과 세상을 동시에 사랑할 수도 없습니다. 사람이란 어느 한편을 사랑하면  다른 한편은 미워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은 주님을 올바로 사랑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 시대는 우리가 주님을 올바로 섬기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것들이 한 둘이 아닙니다. 앞만 바라보고 쟁기를 갈지 못하도록 온갖 유혹이 역사합니다. 그럴 때 여러분께서는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니라”는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심으로 세상의 유혹을 물리치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이 시간 우리는 주님께 나온 세 사람의 신앙 상태를 살펴보았습니다. 이들은 우리의 모습을 비추어주는 거울과 같습니다. 거울을 보는 것은 우리 자신의 모습을 비추어보고 잘못된 것을 교정하기 위함입니다.

저와 성도님들은 하나님의 특별하신 은혜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이 세상에 수많은 사람 가운데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러 구원하신 것은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런즉, 현세적인 축복을 위해 주님을 섬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에 감복해서 기쁨으로 주님을 섬기며 충성하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오늘 이 설교를 경청하신 성도님들은 한 분도 빠짐없이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한 사람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김 양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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