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울부짖는 소리를 들으시는 주님 (시 6:1-10)

  • 잡초 잡초
  • 407
  • 0

첨부 1


“주님, 내게 노하지 마십시오.
  진노하지 마십시오.
  나를 징계하지 마십시오.”
시편 6편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다윗은 무엇인가 구체적으로 표현하고 있지는 않지만, 자신이 지금 엄청난 괴로움을 안고 있음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진노를 살만한 죄를 범했으며, 그로 인한 고통을 호소하고 있습니다. 그 고통은 기력을 쇠하게 하고, 뼈가 떨리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의 육체적인 고통보다도, 그런 고통을 가져오게 한 자신의 죄에 대하여, 그리고 그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6-7절, “나는 탄식만하다가 지치고 말았습니다. 밤마다 짓는 눈물로 침상을 띄우며, 내 잠자리를 적십니다. 사무친 울화로, 내 눈은 시력까지 흐려지고, 대적들 등살에 하도 울어서 눈이 침침합니다.”
여러분!
상상이나 됩니까? 그가 얼마나 괴로워하는지 상상이나 됩니까?
그런데, 그가 왜 이렇게 괴로워하고 있습니까? 몸이 아파서 그렇습니까? 10절에 “내 모든 원수가”라는 표현처럼, 다윗을 괴롭히는 사람들 때문에 괴로워하고 있습니까?
아닙니다. 그는 그가 지은 죄 때문에 이렇게 괴로워하는 겁니다.
골리앗을 비롯한 모든 대적들을 무찌를 용감무쌍한 다윗이지만, 죄가 그의 양심을 찌르고, 하나님의 진노가 그에게 임한 것을 깨달았을 때, 그는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랬습니다. 다윗의 위대함은, 그가 죄 없다는 데 있지 않았습니다. 다윗도 죄를 지은 사람입니다. 본 시편 6편의 배경이 무엇인지는 몰라도, 만약 그가 어떻든 죄에 대해 고통 하는 거라면, 그의 부하 우리야의 아내를 취한 것도 그 하나일 겁니다. 심지어, 그의 부하 우리야를 전쟁터에서 죽게 만들었으니까요.
사무엘하 12장, 여호와께서 나단 선지자를 다윗에게 보냈습니다.
“한 성에 두 사람이 있는데, 하나는 부자고 하나는 가난합니다. 그 부자는 양과 소가 아주 많았습니다. 그러나 가난한 사람에게는 사다가 키우는 어린 암양 한 마리밖에는,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그는 이 어린 양을 자기 집에서 키웠습니다. 그런데 그 부자에게 나그네 한 사람이 찾아 왔습니다. 그 부자는 자기를 찾아온 손님을 대접하는데, 자기의 양떼나 소 떼에서는 한 마리도 잡기가 아까웠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 가난한 사람의 어린 양을 빼앗아다가, 자기를 찾아온 사람에게 대접하였습니다.”
나단이 그렇게 말하자, 다윗이 대답합니다.
“주께서 확실히 살아계심을 두고서 맹세하지만, 그런 일을 한 사람은 죽어야 마땅하다. 또 그가 그런 일을 하면서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전혀 없었으니, 그는 마땅히 그 어린 암양을 네 배로 갚아 주어야 한다.”
그러자 나단이 다윗에게 말합니다.
“임금님이 바로 그 사람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들을 들려주었습니다. 심지어 다윗과 그 집안에서 비참한 일들이 일어나게 될 것이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때, 다윗이 나단에게 자백합니다. “내가 주께 죄를 지었습니다.”(삼하 12:13)
그렇게 다윗은 하나님께 죄 지었다는 사실에 대해 견딜 수 없이 괴로워하고 있는 겁니다.
여러분은 무엇 때문에 괴로워합니까? 죄 때문에 괴로워할 수 있는 심령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사람은 누구나 죄를 지을 수 있습니다. 또, 날마다 우리의 삶이 죄의 반복입니다. 마치 진흙 속에 빠져 있는 사람들이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진흙이 더 묻어나고, 점점 진흙 깊숙이 빠져드는 것과 같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삶입니다. 여기서 예외인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때로 남의 죄를 손가락질 하며, 마치 간음한 여인을 향해 돌을 든 사람같이, 나 자신은 거룩하고, 의로운 것 같아도, 실상, 스스로 깊이 돌아다보면 그 여인이나 나나 다를 바가 없는 겁니다.
살인 안 했다고 죄가 없어요? 간음 안 했다고 죄가 없는가요? “네 이웃을 탐내지 말라”고 했는데 그런 적이 없으세요? 형제를 향해 “나쁜 놈”이라고 한 것도 잘못이라고 예수께서 말씀하셨는데요. 여자를 보고 음탕한 생각만 해도 죄라고 예수께서 말씀하셨는데요.
누가 누가를 정죄할 수 있겠어요?
예수님은 “남을 비판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남을 비판하면 하나님께서도 그 사람을 비판하신답니다. “남을 정죄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남을 정죄하듯 하나님께서 우리를 정죄하실 테니까요. 심지어 예수님은, 남의 눈에 있는 티끌, 제 눈에는 들보가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남을 비판하고, 남을 정죄하는 그 사람은 더 비판 받게 하고, 더 정죄 받아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렇다고, 모든 사람이다 그렇다고, 마냥 죄를 지을 수는 없습니다. “어차피 흙탕물 속인데, 바동거린다고 별 수 있나?” 그러겠어요? “남들도 다 그렇게 사는데 나만 거룩하다고 세상이 달라지나?” 그렇게 살겠어요?
어떤 사람이 신호위반으로 경찰에게 걸렸습니다.
“신호위반 하셨습니다.” “아니, 앞차가 나가기에 그냥 따라 나갔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니까 그 경찰이, “앞차가 지옥으로 가도 그냥 따라가겠습니까?” 하고 말하더랍니다. 앞차가 신호위반하고 나갔다고 뒤차도 그대로 따라갈 수 있느냐는 겁니다.
물론 그럴 수 없지요. 모든 사람이 죄 아래 있어 결국 죽어야 하는데, 남들이 모두 그러니 나도 그런다고 따라 하다가 그들과 같이 죄의 삯인 사망에 이를 수는 없잖아요?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신 말씀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는 말씀입니다. 또, “너희가 거듭나지 아니하면 결단코 하나님 나라에 이를 수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왜 회개하라 하셨습니까? 왜 거듭나야 한다고 하셨습니까? 모두가 다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모두가, 누구든지 회개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자면, 회개하려면, 거듭나려면, 죄에 대해 민감해야 합니다.
1만원 훔치면 가슴이 두근거리는데, 십 원짜리 하나 집어오는 것은 전혀 그렇지 않다면 문제가 있는 겁니다. 1만원 훔치는 거나 십 원 훔치는 거나 훔친다는 것은 똑같기 때문입니다. 죄에 대해 민감하다는 것은, 십 원짜리 훔쳤다는 사실에 괴로워할 줄 알고, 눈물 흘릴 줄 알아야 된다는 겁니다.
이 통회하는 눈물이야말로, 하나님의 자비를 그에게 가져오게 하는, 하나님의 자비를 경험하게 하는 가장 정확하고 지혜로운 비결입니다. “내가 주께 죄를 지었습니다.” 그렇게 울부짖을 수 있어야 합니다.

2절, “여호와여 내가 수척하였사오니 긍휼히 여기소서. 여호와여 나의 뼈가 떨리오니 나를 고치소서.”
다윗은 자기의 죄 때문에 괴로워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냥 마음에서만의 괴로움이 아니라, 삶 그 자체의 괴로움입니다. 죄의 속성은 살을 마르게 하고, 뼈를 병들게 합니다. 그것은 영혼을 죽음으로 몰고 갑니다.
보통 죽음이라 하면 육신의 죽음을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영혼의 죽음도 이야기합니다. 오히려 영혼의 죽음을 더 중요하게 여깁니다. 육신의 죽음, 그것은 곧 육신의 기능이 멈추어진 것이요, 흙에서 지음 받은 사람이 흙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영혼의 죽음은 육신뿐만 아니라 그의 전부가 죽은 것입니다.
4절, “여호와여, 돌아와 나의 영혼을 건지시며, 주의 인자하심을 인하여 나를 구원하소서.” <표준새번역>은 “돌아와 주심시오, 주님. 내 생명을 건져 주십시오. 주의 자비로우심으로 나를 구원하여 주십시오.”
죽음이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생명의 빛이 없는 곳입니다. 복음의 빛이 미치지 못하는 곳입니다. 거기는 어둡고 희망이 없습니다. “죽으면 그만이다.”고 합니다. 때로 힘들고 어려우면 죽음을 생각합니다. 죽고 나면 힘들고 어려운 것은 못 느끼리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5절에 나오는 ‘음부’, 표준새번역은 ‘스올’이라 하였고, 난하주에 보면 ‘무덤’ 또는 ‘죽음’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죽음은 죄로 인해 하나님을 떠난 죽음입니다. 그래서 그곳에서는 주께 감사할 자 아무도 없습니다. 그곳에서는 아무도 주님을 찬양할 수 없습니다.
때문에 죽음은 삶에서의 해방이 아닙니다. 고통도 슬픔도 다 잊게 하는, 그런 것으로부터 자유롭게 하는 것도 아닙니다. 죽음은 해방이 아니라 심판입니다. 그것은 휴식이 아니라 망각이고, 평강이 아니라 공포입니다. 그곳에는 하나님의 진노만이 머물러있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라” 하였을 때, 그 사망, 그 죽음은 단순한 육신의 기능이 멈춘 죽음을 이야기하는 것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떠난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를 영영 놓쳐버린 것입니다.
사도 바울께서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 자체가 곧 은혜입니다. 아직 은혜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직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생명 있는 자에게 주어진 은혜입니다.
그런데 죽음은 이것이 없습니다. 더 이상 은혜 받을 수 없습니다. 더 이상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없습니다. 그곳에서는 하나님께 감사할 수도, 하나님을 찬양할 수도 없습니다.
그것을 너무도 잘 아는 다윗이기에, “주의 인자하심을 인하여 나를 구원하소서.”하고 기도하는 겁니다. 지금 주의 인자하심으로 구원받지 못하면 영영 그 구원을 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여러분!
우리도 죄로 인해 고통당할 때 “주의 인자하심을 인하여 나를 구원하소서.” 그렇게 기도해야 합니다.
누구나 죄 지을 수 있습니다. 누구나 죄로 인해 고통당하고, 죄로 인해 영원한 죽음에 이르게 됩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은혜라고 하는 것은, 그럼에도 하나님의 도우심이 있다는 겁니다.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다는 겁니다.
다윗의 시라고 하는 시편 6편이 성경에 들어온 것은, 글귀가 아름다워서가 아닙니다. 백일장에서 가장 잘 써진 시라고 뽑혀서 들어간 것도 아닙니다. 시편 6편, 그것은 죄로 인해 고통당하는 한 사람이 하나님의 자비를 원하며, 하나님 앞에 나아왔다는 것입니다. 고통의 문제를 해결해 주실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믿음이 있기에, 죄를 용서해 주실 분은 하나님이시라는 믿음이 있기에, 구원은 하나님만 있다는 믿음이 있기에, 이 믿음이 시편 6편에 담겨 있기 때문에 성경에 들어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통당하는 이들이 이 시편을 읽고 하나님께 나아가게 하고, 죄로 인해 죽을 수밖에 없는 자들이 이 시편을 읽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 죄 용서받게 하고, 결국은 하나님의 구원을 받게 하는 것입니다.

고통, 그 자체는 정말 힘듭니다. 그러나 고통은 기도하게 만듭니다. 고통이 없을 때도 그리스도인들은 기도하지만, 그러나 이럴 때 기도는 다소 막연한 감이 있습니다. 두루뭉술합니다. 그러나 고통 중에 기도는 구체적인 호소가 있습니다. 절실함이 있습니다.
보세요. 자신이 지은 죄가 양심의 깊은 곳에 창질을 하고, 하나님의 진노가 자신을 쳐서 기력까지 쇠하게 만들고, 죽음의 그림자가 눈앞에 어른거릴 때, 어찌 절실한 기도를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다윗은 “밤마다 짓는 눈물로 침상을 띠우며, 잠자리를 적십니다. 사무친 울화로 내 눈은 시력까지 흐려지고, 대적들의 등쌀에 하도 울어서 눈이 침침합니다.” 그리 고백합니다.
생각해 보세요. 다윗이 뭐가 부족해서 그렇게 울었겠습니까? 그런데 지금 그가 왜 울고 있습니까? 자기의 죄 때문에 울고 있습니다. 그 지은 죄로 인한 고통 때문에 울고 있는 겁니다. 그렇게 그는 하나님 앞에 바싹 다가서고 있는 겁니다.
고통은 기도의 학교이며, 고통 속에서 사람은 진실한 기도를 배우게 됩니다. 정말 배고플 때, “하나님 먹을 것을 주세요.”하고 울며 기도한 사람은, 정말 먹거리의 소중함과 그것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그것 말고도 문제가 있을 때, 또 다른 고통이 있을 때 하나님만 의지하게 만듭니다. 날마다, 순간마다의 삶이 하나님의 은혜인 줄 알아, 하나님께 감사하고, 하나님을 찬양하게 됩니다. 이것이 생명 있는 그리스도인들의 삶입니다.
죽어서는 생명이 없기에 아무도 주님을 기억하지 못합니다. 죽은 자들은 하나님을 떠난 자들이고, 그들에게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생명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생명이 있는 사람들은 호흡이 있을 때나, 호흡이 끊어진 뒤나 언제나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요한계시록 7:9 이하, 환난 가운데서 나온 이들, 어린양의 피로 그 옷을 씻어 희게 한 사람들, 그들은 이 세상 사람들이 아니지만, 하나님의 보좌와 어린양 앞에서 찬양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주시는 영원한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1) 기도를 통하여 우리의 죄를 고백하고 용서 받을 수 있습니다.
죄를 범한 인생은 죄 사함을 받기까지는 그 심령에 평안이나 기쁨이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복을 받을 수 없습니다.
시편 32:1-2, “복되어라. 지은 죄를 용서받고, 허물을 벗은 그 사람. 주께서 그의 잘못을 따지지 않으시고, 그 마음에 거짓이 없는 사람은 복되고 복되다.” 5절, “드디어 나는 내 죄를 주님께 아뢰며, 내 잘못을 덮어두지 않고 털어놓았습니다. ‘내가 주님께 내 허물을 고백합니다.’ 하였더니, 주께서는 나의 죄를 기꺼이 용서하셨습니다.”
이 얼마나 멋진 신앙고백입니까?
이사야 48:22, “주께서 말씀하십니다. 악인들에게는 평화가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죄를 지었을 때마다 하나님께 회개하고 자복하여 용서함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이사야 1:18-19, “오너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빛과 같다 하여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며, 진홍빛과 같이 붉어도 양털과 같이 희어질 것이다. 너희가 기꺼이 하려는 마음으로 순종하면, 땅에서 나는 가장 좋은 소산을 먹을 것이다.”
2) 기도를 통하여 시련과 시험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 사는 동안 그리스도인들은 여러 모양의 시험과 시련을 당하게 됩니다. 그러나 기도하는 성도들은 그 시험이나 시련을 만나지 않든지, 비록 만난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능력과 은혜로 넉넉하게 이길 수 있습니다.
시편 23편, “주님은 나의 목자시니 내게 아쉬울 것 없어라.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신다.” 그렇게 해 주십니다. 그러나 때로 “내가 비록 죽음의 그늘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주께서 나와 함께 계시며,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로 나를 위로해 주시니, 내게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이 멋진 시낭고백이 여러분과 저의 신앙고백이길 축원합니다.
3) 기도는 성도들의 생활에 능력을 부여합니다.
성경은 성도들의 신앙생활이 악한 영들과 대결해서 선한 싸움을 싸우는 전투의 삶이라고 말씀합니다. 산다고 하는 것이 곧 싸움이라는 겁니다. 어떻든 전쟁은 이겨야 합니다. 더욱이 영적전쟁은 반드시 이겨야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이기려면 뭐가 필요합니까? 힘입니다. 능력입니다. 신령한 영적전쟁에서 이기려면 능력이 있어야 한데, 이러한 능력은 기도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도하는 성도들은 능력이 있고 승리하는 생활을 계속하지만, 기도하지 않는 성도의 신앙, 그리고 그 삶은 무기력해 질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 내게 노하지 마십시오.
  진노하지 마십시오.
  나를 징계하지 마십시오.
  주님, 내 기력이 쇠하였으니,
  내게 은혜를 베풀어 주십시오.
  내 뼈가 떨리니, 주님, 나를 고쳐 주십시오.
  내 마음은 겉잡을 수 없이 떨립니다.
  주께서는 언제까지 지체하시렵니까?
  돌아와 주십시오, 주님.
  내 생명을 건져 주십시오.
  주의 자비로우심으로 나를 구원하여 주십시오.”

이렇게 간절히 기도하던 다윗이 외칩니다.

“악한 일을 하는 자들아, 모두 다 내게서 물러가거라.
  주께서 내 울부짖는 소리를 들어주셨다.
  주께서 내 탄원을 들어주셨다.
  주께서 내 기도를 받아주셨다.
  내 원수가 모두 수치를 당하고 벌벌 떠는구나.
  낙담하며 황급히 물러가는구나.”

어떻습니까? 멋지지 않습니까?
이때의 다윗을 상상해 보십시오. 그 가슴이 쿵쾅거리고 뛰었을 겁니다. 세상에 이보다 신나는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주께서 내 울부짖는 소리를 들어주셨다.
  주께서 내 탄원을 들어주셨다.
  주께서 내 기도를 받아주셨다.”
얼마나 멋있어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신앙은 멋있는 겁니다.
신앙은 신나는 겁니다.
슬픔 중에 있다 하더라도 신앙은 멋있습니다.
고통 중에 있다하더라도 신앙은 신나는 겁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계시니까, 우리의 주님께서 세상 끝날 까지 우리와 함께 계시니까, 우리의 죄로 인해 고통당할 때 기도하게 하시고, 그 기도를 들으사 죄를 사해주시며, 그 고통을 기쁨으로 바꾸어 주시니까. 믿으십니까?

주께서 여러분의 울부짖는 소리를 들으시고, 끝내 좋은 것으로 응답하십니다.
(이 영기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추천인 1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