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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춤추는 임금님 (삼하 6: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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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하 6:6) 저희가 나곤의 타작 마당에 이르러서는 소들이 뛰므로 웃사가 손을 들어 하나님의 궤를 붙들었더니
(삼하 6:7) 여호와 하나님이 웃사의 잘못함을 인하여 진노하사 저를 그 곳에서 치시니 저가 거기 하나님의 궤 곁에서 죽으니라
(삼하 6:8) 여호와께서 웃사를 충돌하시므로 다윗이 분하여 그 곳을 베레스웃사라 칭하니 그 이름이 오늘까지 이르니라
(삼하 6:9) 다윗이 그 날에 여호와를 두려워하여 가로되 여호와의 궤가 어찌 내게로 오리요 하고
(삼하 6:10) 여호와의 궤를 옮겨 다윗 성 자기에게로 메어 가기를 즐겨하지 아니하고 치우쳐 가드 사람 오벧에돔의 집으로 메어 간지라
(삼하 6:11) 여호와의 궤가 가드 사람 오벧에돔의 집에 석 달을 있었는데 여호와께서 오벧에돔과 그 온 집에 복을 주시니라
(삼하 6:12) 혹이 다윗 왕에게 고하여 가로되 여호와께서 하나님의 궤를 인하여 오벧에돔의 집과 그 모든 소유에 복을 주셨다 한지라 다윗이 가서 하나님의 궤를 기쁨으로 메고 오벧에돔의 집에서 다윗 성으로 올라갈새

1911년 남극 정복의 비전을 가진 두 사람이 있었습니다. 한 사람은 노르웨이의 탐험가 아문센이라는 사람과 또 다른 사람은 영국 해군 장교 출신 스콧경이었습니다. 두 탐험대가 다 남극 정복의 비전을 가지고 출발하였습니다. 아문센은 출발하기 전에 에스키모인들의 여행하는 방법을 철저하게 분석하고 익혔습니다. 모든 장비와 물품을 에스키모 개들이 끌도록 했고 탐험 장비는 개가 끄는 눈썰매를 이용했습니다. 탐험하면서 개와 사람이 다 충분한 휴식을 취하게 하였고 물건과 복장 ,장비 등은 최대한 가볍게 하여 작은 것까지 준비하였습니다. 그는 하루에 6시간 이동한 후 반드시 휴식을 취했고 중간 캠프에 물품을 저장했습니다. 복장과 장비는 최대한 가볍게 하고 남극점을 향해 갔습니다. 결국 개 썰매로 남극점을 향해 출발한 지 55일 만인 1911년 12월 14일 인류사상 최초로 남극점 도달에 성공하였습니다. 그들은 대원 하나가 썩은 충치를 뺀 것 이외에 상처 하나 없었습니다.

그런데 같은 시기에 그와 남극 탐험에 있어서 경쟁자로 나선 영국의 스콧경은 달랐습니다. 그는 남극 탐험을 위해 모터와 망아지를 준비하였습니다. 그러나 모터 앤진은 5일 만에 추위에 고장이 나고 망아지는 동상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짐을 지고 가야 했습니다. 한 사람이 200파운드(100kg)의 무개를 짊어지고 가야 했고 중간 중간에 묻어 두었던 물품은 잘 표시를 하지 않아 반도 못 찾아 음식물과 물자 부족으로 고난을 당하였습니다. 모두 동상에 걸려 신발을 신는데만 1-2시간씩 걸렸다고 합니다. 겨우 극지에 도착했지만 이미 35일 전에 아문센이 이미 기를 꽂았습니다. 그리고 스콧에게 건투를 빈다는 쪽지가 남겨져 있었습니다. 그래도 스콧은 대원들에게 연구를 위해 화석을 짊어지고 가자고 했습니다. 30파운드 정도 되었다고 합니다. 결국 그들은 다 죽고 말았습니다. 스콧도 마지막 죽어가면서 "우리는 신사와 같이 죽겠다. "라는 글을 남겼다고 합니다.

두 사람은 똑같은 비전을 품었고 같은 시기에 극지를 향해 출발하였습니다. 한 사람은 단 한 사람의 희생자 없이 비전을 성취하였고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반면 다른 사람은 별 명예도 얻지 못한채 자신과 따르는 모든 사람을 죽음으로 몰아넣었습니다. 왜 이렇게 엄청난 차이가 났습니까? 같은 문제라도 어떤 방식으로 접근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 신앙도 보면 똑같은 비전을 품고 같은 신앙의 대상인 그리스도를 섬기며 나아가는 것 같지만 어떤 사람은 아문센처럼 목표를 이루며 축복을 풍성히 받아 성공적으로 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스코트처럼 실패하고 저주에 머무는 비극적인 삶을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겉으로 보면 비슷한데 왜 이런 정반대의 결과가 나올까요? 자세히 들여다보면 작은 것 같지만 중요한 차이가 분명히 존재합니다.

이 세상에는 꼭 같은 것이 복이 되기도 하고, 저주가 되기도 하는 일이 많습니다. 오늘 함께 살펴보려고 하는 법궤도 마찬가지입니다. 법궤란 한마디로 말해서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입니다. 그 법궤 안에는 아론의 싹난 지팡이와, 모세의 십계명 돌비석과, 광야에서 백성들이 먹었던 만나 항아리가 들어 있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법궤가 바로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한다는 점입니다. 다시 말하면 구약시대에 법궤를 모시고 있다는 말은 바로 하나님을 모시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법궤가 중요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다윗은 하나님의 궤를 그의 왕궁안으로 모셔옴으로 하나님을 가까이에서 더 잘 섬기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궤를 모셔오는 웅장한 예식을 벌였습니다. 그런데 오늘의 본문에 보면 법궤를 모셔오는 과정에 법궤가 웃사에게는 저주가 되었고, 오벧에돔에게는 큰 복이 되었다는 흥미로운 대목이 있습니다. 오늘은 본문을 통해 하나님의 궤를 옮겨오면서 일어난 일을 살펴보면서 함께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1.웃사에게는 저주가 된 하나님의 궤

웃사의 죽음은 그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었으며 또 다윗과 그의 사람들에 대한 경고이기도 했습니다. 7절에 '여호와 하나님이 웃사가 잘못함으로 말미암아 진노하사 그를 그곳에서 치시니 그가 거기 하나님의 궤 곁에서 죽으니라' 기록되었습니다. 웃사의 잘못이 구체적으로 무엇입니까? 첫째로 법궤를 옮기는 과정에서 하나님의 궤를 수레에 실은 것이 잘못입니다. 이것은 이방인들이 신상을 옮길 때 사용하는 방법을 모방했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15:13에 "우리가 규례대로 저들에게 구하지 아니하였음이니라" 제사장들은 자기의 위치를 지키지 않았고 레위인들이 언약궤를 옮기지 않았습니다. 이들 대신 황소가 언약궤를 운반하였습니다. 레위기에 보면 반드시 레위인들이 메고 운반하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또한 그들의 예배는 영적이지도 않았고 더군다나 가장 중요한 희생 제물도 없었습니다. 희생제사 없이는 여호와께 예배를 드릴 수 없게 되었음에도 말입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느 누구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를 힘입지 않고는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습니다.

둘째로 민수기 4:15절의 "그러나 성물은 만지지 말찌니 죽을까 하노라"는 경고의 말씀을 무시했습니다. 선한 일일수록 방법도 선해야 하고,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해야 합니다. 웃사는 부주의 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은 철저하게 지키고 순종해야지 대강대강 해서는 안된다는 교훈을 배울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경고를 무시하는 사람은 그 말로가 웃사와 같을수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모로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는 옛 말처럼 대충 적당히 모양만 갖추어 하나님을 섬기면 무조건 잘 될 것이라는 생각을 하는데 위험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믿고 잘 섬기는 방법을 성경을 통해 나타내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성품,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방식을 명확하게 나타내 주셨습니다. 그것은 아무렇게나 이방의 우상을 섬기듯이 적당히 사람보기에 화려한 방법을 따르지 말고 너는 규례대로 즉 하나님이 말씀하신대로 하나님의 방식대로 섬기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에 하나님의 궤를 주신 것은 하나님이 그들중에 거하심을 잊지말고 거룩하게 살라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언제나 하나님앞에 나와 묻고 순종하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하나님의 궤를 모셔가는 과정에 알만한 사람이 순종하지 않고 제멋대로 하였습니다. 법궤 운반을 아무렇게나 하였습니다. 사람이 직접 운반하지 않고 소들에게 마겼습니다. 그러자 놀라 갑자기 뛰기 시작했습니다. 법궤가 뒤집어지고 수레에서 떨어질지도 모르는 상황이 갑자기 웃사의 눈앞에 전개되었습니다. 본능적으로 손을 내밀어 겁없이 함부로 법궤를 들었는데 하나님이 진노하시고 치셔서 그 자리에서 죽었습니다.

신약에도 비슷한 사건이 나옵니다. 바로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그 주인공들입니다. 이들은 하나님께 땅을 팔아 헌금하고 죽었습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발생할 수 있습니까? 그들은 하나님과 교회를 속였습니다. 가장 축복되고 은혜를 크게 받아야 할 자리에서 이 부부는 죽음을 당했습니다. 그것도 하나님의 손에 의해서 말입니다. 다른 이들은 헌금하고 복과 은혜를 많이 받고 존귀한 명예까지 얻어지만 이들은 축복을 받기는 커녕 저주를 받은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예배나 헌금이나 봉사나 기도나 온갖 거룩한 일에 하나님을 맘속으로부터 진심으로 경외하고 하나님의 방식대로 하므로 축복을 놓치지 말아야겠습니다. 저주의 그림자가 얼씬도 못하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2.오벧에돔에게 축복의 근원이 된 하나님의 궤

11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오벧에돔의 집에 복을 주셨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오벧에돔에게 복을 주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첫째로 오벧에돔은 기쁨으로 법궤를 영접하였기 때문입니다. 웃사가 법궤를 불경건하게 다루다가 죽자 다윗은 두려워서 여호와의 궤를 옮겨 다윗성 자기에게로 메어 가기를 즐겨하지 아니하였습니다.(10절) 그러나 오벧에돔은 기쁨으로 법궤를 영접하였던 것입니다. 둘째로 오벧에돔은 그의 이름처럼 법궤를 충성스럽게 섬겼기 때문에 복을 받았습니다. 웃사는 무지와 인간적으로 생각하여 하나님의 말씀(민 4:20,삼상6:19)을 소흘히 하였기 때문에 죽음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오벧에돔은 가장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진실과 사랑으로 최선을 다해 모셨습니다. 우리가 참으로 저주대신 복을 받기를 원한다면 우리안에 주님을 향한 경외심과 사랑이 넘치게 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과 규례를 소홀히 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벧에돔이 받은 축복은 무엇입니까? 첫째로 법궤는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석달동안 오벧에돔의 집에 함께 거하시면서 그와 동행하시고,그의 사랑을 베풀어주셨던 것입니다. 둘째로 하나님으로부터 물질적인 복을 받았습니다. 11절에 "오벧에돔과 온 집에 복을 주시니라"는 말은 그의 가족과 가축과 밭의 소산에 풍성한 복을 주셨다는 뜻입니다. 셋째로 오벧에돔은 역사에 남는 유명한 인물이 되었습니다. 오벱에돔은 고핫자손이며 후에 예루살렘성의 문지기였다고 했습니다.(대상 15;18,26:1-4) 그런데 이제는 제사장도 할 수 없는 법궤를 모시는 큰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오벧에돔이 이처럼 역사에 남는 인물이 된 이유는 기회가 왔을 때에 그 기회를 잃지 않고 잘 선용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할 때에 기회를 선용할 수 있습니까? 그 방법은 평소에 작은 일에도 충성하면서 섬기는 훈련을 많이 해야 합니다. 작은 넷째로 오벧에돔은 존경과 영광의 소유자가 되었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영광의 상징인 법궤가 석달 동안 오벧에돔의 집에 머물렀음은 대단한 영광입니다. 또 개인 집에서 왕을 모실 수 있는 특권을 누렸습니다. 12절에 보면 오벧에돔이 하나님의 궤를 인하여 복을 받는 것을 보고 다윗왕 자신이 직접 오벧에돔의 집에 와서 법궤를 메고, 예루살렘으로 옮기었다고 했습니다. 오벧에돔은 법궤를 석달동안 보관하였다가 다윗에게 넘겨주는 축복의 도구가 된 것입니다. 이 말씀속에는 모든 성도들의 사명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다 세상 사람들에게 복을 전달해주는 도구가 되어야 합니다.

사람들은 누가 저주를 받았다고 하면 정확한 것은 알아보려고도 하지 않고 기피합니다. 하나님의 궤때문에 웃사가 죽었습니까? 본질적인 이유는 자신안에 있습니다. 다윗조차도 근본적인 문제를 직시하려고 하지않고 도중에 거룩한 계획의 추진을 중단하고 취소해 버렸습니다. 그러나 오벧에돔을 웃사가 법궤의 운반도중에 죽었다는 것을 알고서도 겉만보고 겁을 먹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궤 자체가 저주와 불행의 씨앗이 아니라는 확신을 갖고 기쁨이 충만하여 오로지 하나님의 궤를 잘 모시는 일에 전념했습니다. 그래서 석달만에 왕의 귀에까지 소문이 날정도로 풍성한 복을 받았습니다. 여러분도 하나님이 주신 것은 무엇이나 큰 복이 됨을 의심치 말고 거부하지 말고 잘 감당하기를 축원합니다.

3. 다윗에게 기쁨이 된 하나님의 궤

다윗은 왜 하나님의 궤를 다윗성으로 모셔오려고 했습니까? 첫째는 영적 이유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였고, 하나님과 동행하였고, 하나님께 충성을 다하였고, 그 하나님이 계신 성전중심의 생활을 하였습니다. 이러한 그가 법궤를 옮기려고 한 것은 바로 하나님을 사랑하였기 때문이고, 사랑하는 하나님과 동행하기를 원하는 뜨거운 열심 때문이었습니다. 다윗이 하나님에게 큰 축복을 받은 것은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그의 뜨거운 열정 때문이었습니다. 둘째는 정치적 이유입니다.그것은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나라를 하나로 단결하게 하고, 하나님 중심의 정치를 하기를 원하였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정치감각이 뛰어나고, 훌륭한 사람이었습니다. 나라를 다스리는데는 나라를 하나로 묶는 힘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 다윗이 법궤를 옮기는 과정에서 범한 실수는 무엇이었습니까? 다윗은 법궤를 사랑하여 그것을 예루살렘으로 옮기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실수를 하였습니다. 13절에 보면 다윗이 궤를 옮겨 오벧에돔의 집으로 옮긴 것은 차선책이기는 하지만 최선책은 아니었습니다. 웃사가 급사한 후라도 다시 본래의 목적대로, 하나님의 원리와 법대로 법궤를 다윗성으로 옮겼어야 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하지만 그러나 그렇다고 하나님을 두려워만해서도 안됩니다. 두려워 하며 사랑해야 합니다. 이렇게 해서 법궤를 오벧에돔의 집으로 옮긴 결과로 오벧에돔은 축복을 받게되었습니다.오벧에돔은 하나님의 법궤를 자기의 집에 모셨습니다. 기쁨으로 모셨습니다. 충성스럽게 모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가 하나님 앞에서 축복을 받은 이유입니다. 그리하여 오벧에돔은 석달 동안 함께 하시는 복을 받았습니다. 물질적으로 가족과 가축과 밭의 소산들이 복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존경과 영광의 소유자가 되었습니다. 법궤를 석달간 잘 보관하였다가 다윗에게로 전달해주는 축복의 근원이 되었습니다.

다윗은 뒤늦게라도 자신이 취소한 결정이 잘못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속히 하나님의 궤를 모셔오는 일을 다시 추진했습니다. 이번에는 사람들 즉 레위인들이 직접 궤를 어깨에 메고 모셨습니다. 그렇게하여 이번에는 아무도 죽지 않고 성공적으로 다윗성에 하나님의 궤를 모실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다윗은 너무나 기쁘고 감격하여 백성들이 보는 것을 아랑곳하지 않고 춤을 추엇습니다. 하나님을 기뻐하며 왕의 체면과 권위를 다 내려놓고 감사와 기쁨을 표현한 것입니다. 겸손과 드거운 사람이 담긴 춤입니다.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그런데 그것을 이해하지 못한 미갈왕비는 겉모습만 보고 판단하여 왕을 업신 여겼습니다. 그리고 왕의 처신을 비난했습니다. 하나님은 다윗의 손을 들어주셨습니다. 미갈은 평생 자식을 낳지 못하고 쓸쓸하게 살았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하나님이 더 이상 높아질 수 없을 정도로 높여주시고 지켜주시고 복을 주셨습니다. 아직까지도 이스라엘의 역대에 가장 위대하고 존경받는 지도자로 모든 사람에게 기억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합니까?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두려워하되 사랑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다음은 내게 복을 받을 기회가 왔을 때 야곱처럼 생명을 내걸고 하나님앞에서 받아야 합니다. 다른 것은 다 양보해도 하나님의 축복은 양보하면 안됩니다. 은혜받을 기회를 양보하면 안됩니다. 거룩한 욕심이 많은 사람이 더 많은 축복을 받습니다. 야곱이 바로 그런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선한 일에 선한 열심을 갖는 것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오늘의 법궤인 교회를 중심으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교회를 통한 하나님의 축복이 저와 여러분들에게 넘치도록 임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이제 설교를 마치려고 합니다. 법궤가 웃사에게는 저주가 되었고, 오벧에돔에게는 큰 축복이 되었습니다. 다윗에게는 큰 기쁨이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들에게도 하나님이 주신 많은 것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만남이 이루어지는 예배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교회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내주하심을 나타내는 성령님도 있습니다. 이런 영적인 선물을 여러분은 어떻게 대하십니까? 혹 웃사처럼 아무렇게나 특히 세상적인 방법으로 잘못 대하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의 규례를 잘 알고 하나님의 방법대로 이 모든 것들을 통해서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고자 힘쓰십니까? 오벧에돔처럼 하나님을 모시고 섬길 기회를 잘 붙잡아 큰 복을 받아 누리기 바랍니다. 존귀하게 되고 영화롭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더 나아가 다윗처럼 큰 기쁨을 드러내고 춤을 추며 맞이하기를 축원합니다. 소중히 여기고 잘 받들어 하나님의 능력과 보호와 귀히 쓰임받기를 바랍니다. 크신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며 다윗이 받은 모든 축복을 다 받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문 기 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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