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목표를 향하여 좇아가라!(빌 3:12~16)

  • 잡초 잡초
  • 291
  • 0

첨부 1


시작하는말

어떤 야구 선수가 정규 시리즈에서 평생 처음으로 안타를 쳤습니다. 이 선수가 너무 흥분하여 1루로 뛰어 간다는 게 3루 쪽으로 뛰어가다가 아웃 되었다고 합니다. 또 다른 야구 선수가 평생에 처음으로 만루 홈런을 쳤습니다. 너무 흥분하여 홈에 들어 올 때에 홈을 밟지 않았습니다. 상대편에서 항의하는 바람에 아웃되어 3루타로 인정만 받고 홈런은 취소되었습니다.

사람이 너무 흥분하면 목표가 흐려지게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운동선수는 물론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죽도록 애쓰고도 엉뚱한 결과를 얻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 사도는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벧전4:7)고 권면했습니다. 

모 야구단에서 일어난 재미있는 이야기입니다. 꽤 잘 던지는 투수를 구원 등판시켰습니다. 그 투수가 올라가자마자 안타 두 개를 맞았습니다. 놀란 감독이 전격적으로 교채를 했습니다.  이 선수는 감정을 폭발시켜 그로브를 땅바닥에 팽개쳤습니다. 감독에 대한 항의였습니다. 다음날 감독은 그 선수를 2군으로 내려 보냈습니다. 아직도 불러올리지 않고 있습니다. 감독의 생각은 자기 통제를 못하는 자는 팀의 분위기를 해치고, 나아가서는 모든 선수들에게 좋은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는 겁니다.

1. 분명한 목표가 있어야 합니다.

만사에 분명한 목표가 있어야 합니다만 특히 신앙생활에는 더욱 그러합니다. 목표를 다른 말로 바꾸면 비전(Vision)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9:26절에서 “그러므로 내가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같이 아니하여”라고 말씀했습니다.  바울 사도는 신앙생활을 목표 없이 벌로 해서는 안 된다는 말씀이었습니다. 분명한 목표가 있어야 한다는 말씀이었습니다. 신앙의 비전, 신앙의 목표가 뚜렷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빌립보서 3:14절에서 바울 사도는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고 말씀했습니다.  히브리서 12:2절에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스데반 집사는 사도행전 7:54-56절에서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저를 향하여 이를 갈거늘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고 말했습니다. 스데반을 죽이려는 자들은 옆에서 이를 갈고 있었지만 스데반은 성령이 충만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우편에 서신 것을 바라보았습니다.  다른 사람들이야 무엇을 보든지 말든지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분명한 목표인 하늘 보좌우편에 서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뚜렷한 목표와 비전으로 확정시켜 놓아야 합니다.

2. 뒤엣것을 잊어 버려야 합니다.

운동선수가 과거에 얽매이면 훌륭한 선수가 될 수 없습니다. 특히 국제 경기에서 금메달을 획득한 선수가 나중에 비실거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한 메달리스트들은 과거의 영광에 얽매이기 때문입니다.  신문에 대서특필되고, TV에 출연하고, CF를 촬영하여 돈을 벌면서 정신없이 세월을 보내다 보면은 본업이 부업이 되고, 부업이 본업이 되어 결국은 망신을 당하게 됩니다. 메달리스트들이 망신을 당하지 않으려면 과거의 영광을 잊어버릴 줄 알아야 합니다.

많은 경비를 들여 국가 대표 선수가 되기를 바라고 초등학교 시절부터 운동을 하다가 중도에서 여러 가지 이유로 탈락하는 자들이 많습니다. 10중 8-9는 그렇게 됩니다. 원치 않는 좌절감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지난날의 좌절을 훌훌 털어버려야 합니다. 뒤엣것을 잊어버려야 합니다.

고관대작이 되겠다고 각종 고시 준비를 오래하다가 중도에서 포기하는 자들이 엄청 많습니다. 이런 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좌절감에 오래 사로잡혀 있으면 아무것도 안됩니다. 자칫 잘못하면 “반거충이, 반거들충이”가 되기 쉽습니다.

신앙생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영욕의 과거지사에서 빨리 벗어나야 합니다. 영광스러웠던 과거에서, 치욕스러웠던 과거에서 속히 벗어나야 합니다. 과거를 과감하게 털어 버릴 수 있는 자만이 앞을 향하여 전진할 수 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빌립보서 3:13절에서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라고 말씀했습니다. 바울 사도는 그가 오로지 하여야 할 유일한 이은 “뒤엣것을 잊어버리는 것”이었습니다.  뒤엣것을 잊어버리는 것은 신앙생활 중에 가장 큰 일 중의 하나입니다.  바울 사도는 뒤엣것을 잊어버리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했습니다. 그는 주님을 만난 후 “또 나보다 먼저 사도 된 자들을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 가지 아니하고 오직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갔노라”(갈1:17)고 말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남의 일이건, 자기의 일이건 뒤엣것은 속히 잊어버려야 합니다. 그것이 신앙생활에 유익을 줍니다. 과거에, 뒤엣것에 얽매이면 절대 앞으로 전진 못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누가복음 7:31-32절에서 “그 날에 만일 사람이 지붕 위에 있고 그 세간이 집 안에 있으면 그것을 가지러 내려오지 말 것이요 밭에 있는 자도 이와 같이 뒤로 돌이키지 말 것이니라 롯의 처를 생각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롯의 처는 뒤를 돌아보다가 소금기둥이 되었습니다. 뒤엣것을 잊어버리지 못하는 자들은 가족들에게, 이웃에게, 교우들에게, 교회에, 하나님께, 주님께 소금 기둥이 될  수박에 없습니다.

캄보디아의 크메르 루즈의 지도자 폴 포트는 중국을 방문, 모택동을 만났을 때 공산화된 중국이 왜 아직 지상낙원이 되지 않았느냐며 자신은 캄보디아(당시는 크메르)를 해방시켜 지상낙원으로 만들겠다고 장담했다고 합니다.  그가 지상낙원으로 어떤 상황을 상상하고 있었는지 알 수 없지만 문명 자체를 파괴하려 했던 것으로 보아 문명을 사악시했던 것만은 분명해 보입니다.

1975년 4월17일 아침, 프놈펜 시민들은 “평화가 왔다!”며 만세를 불렀습니다. 5년 동안의 내란  끝에 “론놀” 정부가 무너지고, 크메르 루즈군이 수도 프놈펜에 진격해 들어왔던 것입니다. 시민들은 꼭 크메르 루즈군을 환영한 것은 아니었지만 무능하고 부패한 론놀 정권이 무너졌다는 사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오랜 내전이 끝났다는 사실만으로 환호했던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환호는 순간으로 끝나버렸습니다. 약탈과 함께 무자비한 살육이 크메르 루즈군 병사들에 의해 자행되었던 것이었습니다. 론놀 정권을 전복시키고 들어선 폴 포트 정권은 비록 약탈을 금한다고 했지만 그들의 군대가 자행하는 약탈을 막으려는 기색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대학 교수는 물론 중고등학교 교사, 의사, 엔지니어 등 사회의 유지 발전에 꼭 필요한 지식인들을 모조리 처형시키려 했던 것은 문명 자체를 사악시했다는 걸 말해줍니다. 크메르 루즈군의 지도자 폴포트의 실제 이름은 “살로트 사르”였습니다. 그런데 당시 살로트 사르는 베일에 가려진 인물이었던 모양입니다.  美 정보기관들은 그에 관해 보고서를 쓸 때 이름을 알지 못해 “폴리티컬 퍼텐셜(political potential, 정치적 배후세력)”을 줄여 폴 포트(pol pot)라 썼는데, 그것이 그대로 그의 이름으로 굳혀졌다고 합니다. 그래서 당시 “크메르 루즈 정권” 또는 “살로트 정권”이라 하지 않고 “폴 포트 정권”이라고  했던 것 같습니다.

캄보디아의 킬링필드(Killing Field) 위령탑 안에는 당시 크메르루즈 군들의 잔학한 행동이 그대로 남아 있었습니다. 위령탑 안에는 수천 개의 해골들이 전시돼 있었습니다.  지금은 범죄(학살)박물관(museum of crime)으로 또 다른 관광자원이 된 “트루슬랭 감옥”을 가보았습니다. 본래 이곳은 “행복의 나무”라는 뜻을 지닌 “쫄스베이프레이” 고등학교였는데, 프놈펜을 접수한 크메르루즈가 “반동분자”로 몰아세워 수감하여 고문 등 온갖 만행을 저지른 감옥으로 개조했던 것입니다. 널빤지나, 철 침대에 철골로 한 사람씩 손발과 목에 족쇄를 채워서 살아 있는 그대로 손톱과 발톱을 뽑아 죽이던 그 현장이 그대로 보관되어 있었습니다.  밤에 잠을 잘 때는 단체로 10명씩, 15명씩 족쇄를 채워 잠을 재우던 철골들이 보관되어 있었습니다. 거짓자백을 하면 자백했다고 죽이고, 자백을 하지 않으면 지독하다고 굶겨 죽이기도 했다고 합니다. 지상 낙원을 이루리라고 장담했던 “폴포트 정권”이 캄보디아에서 200만 명 이상의 인민을 학살했다고 합니다. 폴포트 정권은 킴보디아를 과거의 족쇄에 붙들어 매놓고 있습니다.

사탄은 오늘도 사람들에게 족쇄를 채워서 과거에 얽매이게 합니다. 꼼짝 달싹 못하게 합니다. 지상 낙원을 만들어 주겠다고 합니다. 그러나 다 거짓말 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가복음 9:62절에서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 될 자격을 말씀하실 때에 “뒤를 돌아보지 않는자, 뒤엣것에 얽매이지 않는자, 세상에 묶이지 않는 자”를 강조하셨습니다.

신앙생활은 쟁기를 잡고 밭을 갈고, 논을 가는 것과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쟁기를 잡고 밭갈이를 할 때에 뒤를 돌아보면은 제대로 밭갈이가 되지 않습니다. 현대적인 용어로 말을 하면 운전을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운전을 하면서 핸드폰을 들고 한다든지, 뒤를 돌아본다든지 하면은 운전이 제대로 되리가 없는 것과 같습니다. 달리기 하는 자들 중 습관적으로 뒤를 돌아보는 자들이 있습니다. 한번 뒤돌아보는데 0.01초 정도 늦어질 수 있습니다. 그래도 뒤돌아보는 것은 습관입니다.

3. 목표를 향해 좇아가야 합니다.

축구 중계를 보면은 가끔 볼 점유율 몇 % 라고 자막이 나옵니다. 볼 점유율이 70-80%를 넘는다고 하여도 골(goal)을 넣지 못하면 아무 소용없습니다. 선수들은 골이라는 목표를 향해 계속 전진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신앙생활도 목표를 향해 전진하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이제 우리의 목표인 정서적인 안정, 정신적인 평안, 마음의 위로, 감정의 너그러움 , 인격적인 숙련, 영적인 평안, 평화로운 질서, 영혼의 구원, 내세의 영광, 영생복락, 하나님의 영광, 삼위일체 하나님을 향해 계속 전진하여야 합니다.

세계에서 가장 잘 사는 나라 스위스의 자살 율이 세계 제1위라는 사실은  우리들의 목표가 세상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을 여실히 보여 주고 있습니다. 세상적인 것은 가변적이요, 영원하지 못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영원하며, 참 생명이 됩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그리스도만을 향하여 달음질함으로 모두 승리하는 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런 면에서 스데반 집사는 우리의 모범입니다. 사도행전 7:59-60절에 “저희가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가로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가로되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고 말씀했습니다.

4. 상급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경주하는 자가 상급을 바라지 않을 수 없듯이 바울도 하나님이 주시는 상급을 바라보았습니다. 신앙의 경주를 성공적으로 마친 성도는 주안에서 예비된 놀라운 상급을 받는데, 그것은 바로 하늘나라를 유업으로 받는 것을 말합니다.  바울 사도는 디모데후서 4:8절에서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 에게니라”고 말씀했습니다.

5. 우리 모두가 동참해야 합니다.

신앙의 경주는 혼자만 하는 경주가 아닙니다. 중생한 그리스도인 모두가 하는 경주입니다.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그리스도인이 된 자는 목표를 가지고 경주를 하는 자입니다.  그 목표는 바로 그리스도 예수의 성품까지 닮아가는 것입니다(빌 4:13). 물론 신앙의 경주를 하는 사람들의 출발점은 다를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목표는 같아야 합니다. 또한 경주하는 방식이 다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신앙의 경주자들은 서로 도우며, 격려하면서 결승점에 도달할 때까지 최선의 노력으로 선의의 경쟁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다른 이들에게 도중에 신앙의 경주를 포기하지 말고 “우리가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그대로 행할 것이라”(16 )고 권면했습니다.

끝내는 말

바울 사도는 빌립보서 3:20-21절에서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그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고 말씀했습니다.(신 삼철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