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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다윗의 용서 (삼하 19:16-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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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살아가는 동안 정말 많은 종류의 사람들을 만나며 살아갑니다. 때로는 사람을 잘 만나 사업이나 사회생활에서 큰 힘을 얻거나 혹은 사람을 잘 만나지 못함으로 인하여 큰 어려움에 직면한 이들도 있습니다. 목회를 하는 저로서도 사역을 하는 동안 좋은 성도들을 만난다는 것이 얼마나 큰 하나님의 은혜인지를, 때때로 피곤하고 고단케 하는 사람들로 인하여 목회가 피곤하고 힘겨울 때 마다 더욱 실감하게 됩니다.

이렇듯 우리는 어떤 사람들을 만나느냐 하는 이 만남의 문제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살아가면서 더욱 실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사물의 문제가 아니라 사람의 문제입니다. 오늘 우리는 본문말씀을 통하여 다윗이 만난 세 종류의 사람을 바라보면서 만남의 중요성과 사람의 중요성을 다시한번 되새겨 보기를 바랍니다. 시므이와 시바 , 그리고 므비보셋의 모습을 통하여 새로운 깨달음과 도전의 기회로 삼으시기를 바랍니다.

다윗은 아들 압살롬의 반란으로 인하여 혼란스러웠던 정국을 그의 죽음으로 반란이 진압되어 다시금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려고 하는 참이었습니다. 그 때에 베냐민 사람 시므이가 제일 먼저 다윗 왕을 찾아와 그동안의 안부를 물으며 자신이 가장먼저 왕을 찾은 신하임을 강조했습니다. 사실 시므이는 다윗 왕이 압살롬의 반란으로 황급히 피난을 갈 때에 왕의 일행을 보고 "피 흘린 자여 가거라. 가거라. 여호와께서 이 나라를 압살롬에게 붙이셨도다....."하며 저주를 퍼붓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시므이가 오늘 압살롬이 죽고 반역의 무리들이 정리되자 다른 사람에 앞서서 다윗 왕을 찾아와 엎드려 절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왕이여, 모든 사람 가운데 내가 제일 먼저 왕을 찾아와서 이렇게 환영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 마치 우리는 시므이를 보면서 동전의 양면을 보는 것 같이 간사한 인간의 모습을 보고 있습니다. 자기에게 주어진 상황에 맞추어 갈 뿐만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 하나님의 뜻을 자의적으로 해석하며 적용해가는 능수능란한 사람의 모습을 우리는 보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이런 시므이 같은 모습으로 자신도 모르게 빠질 수 있음을 경계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흔히 교회를 처음 오셔서 등록하실 때 이런 이야기를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제가 기도해 보니까 하나님께서 이 교회로 가라고하셔서 왔습니다..." 혹은 "목사님의 설교가 너무나 은혜롭고 능력이 있어서 왔습니다.." 이런 류의 이야기들은 듣는 이들에겐 기분 좋은 이야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그 다음입니다.

대개 그런 식으로 이야기 하고 오는 사람들이 교회를 떠나갈 때도 그런 식으로 이야기 합니다. "기도해 보니까 하나님께서 가라고 해서 갑니다..." 이런 이야기들은 사실상 귀를 기울일 만한 가치가 없는 것들입니다. 차라리 그냥 솔직하게 "다른대로 가고 싶어서 갑니다"라든지 "이 교회가 내 욕구에 맞지 않아서 떠납니다"라고 하면 더 좋을 것 같아요. 거기에 거룩하신 하나님의 뜻을 갖다 붙이면서 자기의 생각을 합리화하는 죄를 범하는 것은 영적으로나 윤리적으로 부도덕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두 번째 사람은 시바입니다. 이 사람은 사울 왕 당시 사람으로 후에 므비보셋을 계속하여 섬겼던 종이었습니다. 사울 왕의 죽음 이후 온 가족이 복수를 두려워하여 숨어지내는 상황에서 다윗 왕은 므비보셋의 가족들을 수소문하여 자신과 함께 왕궁에서 살도록 배려할 때 함께 들어논 시바였습니다. 다윗 왕이 반란으로 황급하게 궁을 떠나 먹을 것, 입을 것 제대로 챙기지 못하여 불편함이 말할 수 없이 컸을 당시, 시바가 나귀에 많은 음식을 싣고 찾아가 극진히 대접을 하였습니다.

시바는 주인의 재산인 떡 200덩어리, 건포도 100송이, 여름실과 100개, 포도주 한 포대를 나귀에 싣고 와서 마치 자신의 것으로 대접을 하는 것처럼 행동했습니다. 허기에 차 있는 왕과 신하들에게는 천사의 손길같은 은혜였습니다. ‘이게 웬일이냐?’ ‘제가 왕에게 은혜를 입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지금 그 은혜를 조금이라도 갚으려고 이렇게 위험을 무릅쓰고 준비했습니다...’ 왕은 크게 감동을 받았습니다. 오히려 생명의 은인이랄 수 있는 자신을 찾아야 할 므비보셋은 보이지도 않는데, 그 종이 자신을 섬기는 모습에 그만 분별력을 잃고 말았습니다. "므비보셋에게 있는 것이 다 네 것이니라..." (삼하 16:4) 그에게 내렸던 땅과 재산을 빼앗아 시바에게 하사한 것입니다.

세 번째 사람은 므비보셋입니다. 오늘 24절 마지막 부분에 보니까 사울의 손자 므비보셋이 내려와 왕을 맞이하는데 몰골이 말이 아니었습니다. 자초지종을 묻자 므비보셋이 대답합니다. "저는 왕께서 궁을 떠난 날부터 평안히 돌아오시는 이 날까지 발에 맵시를 내지 아니하며, 수염을 깎지 아니하며 옷을 빨지 아니하였습니다" 이게 웬일입니까? 그는 왕이 피난의 어려움을 겪고 있는 동안, 자신를 위하여 어떠한 치장도 하지 않고 불편함을 기꺼이 감수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알고보니 사실은 그의 종 시바의 간계로 므비보셍의 음식을 가져다가 왕을 섬기면서 은혜를 가로챘다는 것을 다윗 왕은 알게 되었습니다. 신학자들은 시바가 치밀한 계획을 가지고 왕을 그렇게 섬겼다고 보고 있습니다. 그의 간계에 다윗이 속아넘어간 것입니다. 그에게 므비보셋의 모든 재산을 다 주겠다고 하는 약속까지 한 뒤였습니다. 그것이 문제였습니다. 때론 우리가 분별력을 잃고 눈 앞에 보이는 것만 가지고 판단하는 다윗 왕 처럼 어리석음을 범할 때가 있음을 고백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주변에 시므이나 시바 같은 이로 인하여 고통을 받은 경우는 없습니까? 아니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우리 자신이 지금 시므이나 시바와 같은 인생을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기회만 엿보면서, 이해관계에 따라 카멜레온 같이 변하는 삶을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는 지금 세 사람의 인물들을 통하여 우리가 인생에서 풀어야 할 숙제들을 지금 여기서 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삼상 16장에서 다윗이 만났던 사람들과 오늘 본문에서 다시 만나게 된 그들과 너무나 큰 차이가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시므이를 생각할 때 얼마나 괘씸하겠습니까? 옆에서 요압의 동생 아비새 장군이 말합니다. 왕이여, 이런 인간은 여호와의 기름부은 자를 저주한 이런 인간은 죽어야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칼을 뽑아듭니다. 당연히 죽어야지요. 열 번 죽어도 시원치 않지요. 어떻게 자기 주인의 어려움의 도움이 되지 못할망정 야비하게 그렇게 약삭 빠르게 왕을 저주 하면서 이제는 압살롬이 왕이 되었는데,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까?

므비보셋 그는 자신이 모든 것을 다해서 사랑을 베풀었는데, 생명의 은인인데, 어찌 그럴 수 있을까? 하고 오해했었는데, 괘씸하게 여겼었는데, 알고보니까 그의 본심이 아니었어요. 너무나도 자기를 생각하고, 염려하면서 자신의 고통을 감수했던 그의 삶을 나중에 들어보면서 얼마나 감동을 받았는지 모릅니다. 들어나지는 않았지만 이렇게 나를 염려하고, 나를 생각하며 함께 고난의 자리를 함께 했던 므비보셋 얼마나 신뢰가 갔겠습니까? 그런가 하면 눈 앞에서 자신에게 모든 사랑과 은혜를 다 베푸는 것 같았지만 사실은 남의 것을 가로채서 교묘하게 자기의 계산을 따라서 행동했던 시바가 얼마나 꽤씸했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런 장면에서 아비새 장군이 이 시므이를 죽여야 마땅하다고 건의하고 있습니다. 아마 모든 사람들의 생각일 것입니다. 아마 이 말씀을 듣는 여러분의 생각도 그와 같은 생각을 가졌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정상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23절에서 다윗왕은 시므이에게 선언합니다. 네가 죽지 아니하리라. 살려주겠다 그 말입니다. 용서하겠다 그 말입니다. 우리는 사랑하고 살아가는 줄 믿습니다. 우리는 용서하면서 사는 줄 믿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기다리면서 사는 줄 믿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용서하거나 사랑하거나 기다리는 것이 우리가 스스로 정해 놓은 범위 안에서 용서하고, 그 범위 안에서 사랑하고, 그 범위 안에서 그만큼만 기다린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다 사랑하고, 다 용서하고 있지요. 그 범위가 우리가 정한 내 한계만큼이라는데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더 이상은 못 기다립니다. 난 더 이상은 용서하지 못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을 사랑할 때 그것이 큰 사랑인 줄 믿습니다.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을 용서할 때 그것이 주님의 용서인 줄 믿습니다. 다윗이 선언합니다. 내가 너를 죽이지 않겠노라. 다윗도 사람입니다. 얼마나 꽤씸하겠습니까? 아마 다윗이 저주를 받으면서 돌멩이를 맞으면서 떠나면서 언젠가 내가 돌아갈 기회가 주어진다면 내가 제일 먼저 너를 죽이리라. 능지처참하리라 하는 그런 마음, 신하들도 떠나면서 이를 갈면서 떠났을 거예요.

어쩌면 저렇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왕에게 충성을 다했던 저 인간이 저렇게 돌변할 수 있을까? 하지만 다윗은 큰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그에게 용서를 선언하고 있습니다. 내가 너에게 긍휼을 베풀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윗을 가리켜서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 주님이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주님의 사랑은 우리가 정해놓은 것만큼 이만큼까지 기다리고 그런 한계를 스스로 정해놓은 그 범위를 깨뜨려 보라고 하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내가 사랑하는 것 같이... 주님의 사랑 어떤 것이었어요? 당신의 몸을 십자가에 대속의 제물을 내어 놓는 것 같이 생명을 다해서 사랑한 것 같이, 너도 사랑할 때 스스로 정하지 않았어요. 내 생명 다하는 날까지 사랑해라. 지금 이 시므이가 이 왕 앞에 엎드려서 왕이여, 내가 범죄한 줄을 아옵는고로 왕 앞에 먼저 왔습니다. 하지만 왕은 그 범죄를 이야기 하지 않았습니다. 너 내가 어려울 때, 너 내가 피난갈 때 돌멩이 던졌지? 저주했지? 압살롬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했지?

그러면서 왕은 이야기 하지 않았습니다. 너 죽지 않아. 두려워하지 마. 다시 한 번 너에게 기회를 줄게. 옆의 참모들이 죽여야 한다고, 마땅히 죽어야 한다고 하는 다윗은 그를 용서하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가 정한 만큼 사랑한다고 하면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모습은 나타날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용서할 만큼만 용서한다면 우리에게서 그리스도의 사랑과 용서는 증거되지 못할 것입니다. 주님, 오늘 우리에게 주님의 사랑이 나타나게 하옵소서. 오늘 우리에게 주님의 긍휼하심이 나타나게 하옵소서. 용서할 수 있는 믿음을 주시옵소서. 이 큰 사랑이, 이 큰 용서가, 이 다윗의 용서가 오늘 우리들의 용서의 모습이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다양한 사람들, 이해관계가 다른 사람들을 지도자의 고뇌를 우리는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자신을 저주하고 돌을 던지며 하나님의 뜻까지 작의적으로 적용하며 압살롬에게 붙었던 시므이를 용서하고 있습니다. 인간적인 계산에 따라서 자기를 사랑했던 시바를 용서하고 있습니다. 자기의 잘못된 판단에 의해서 오해하고 원망했던 므비보셋을 오히려 축복하고 있습니다. 용서의 주님, 우리를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사랑의 주님, 우리가 주님이 생명을 다해 사랑하신 그 생명을 힘입어 우리도 주님의 사랑하신 그 사랑처럼 우리도 사랑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용서로 세상을 밝히며, 세상에서 주님을 증거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황  요 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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