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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함께하는 사랑 (민 6:2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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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오늘 교회에 잘 오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큰 사랑과 큰 은혜로 우리와 함께 하실 줄로 믿습니다. 우리 다같이 고백해봅시다.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지난번 러시아선교보고대로 러시아에서는 군대에서 예수를 믿으면 제대가 빨라 진다고합니다. 그 이유는 전쟁하고 싸우는 것은 마귀사탄의 짓이니 멈춰야 한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그래서 러시아에서는 군 선교라는 말이 없다고 합니다. 그러나 강태원선교사님이 "아니다 성경에 보면 백부장도 군인이었는데 예수 잘 믿지 않았습니까? 그러니까 군대에서도 예수를 잘 믿을 수 있다"라는 마음으로 러시아에 가셔서 군 선교 활동을 하고 계십니다.

러시아의 가장 큰 교단이 정교회입니다. 강태원선교사님이 그 교단장부터 군 선교 관계자들을 지난 2월에 초청을 했습니다. 한국에 와서는 한국교회의 군 선교 현황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들이 우리 군 선교 현황을 보더니 깜짝 놀라서 러시아에 가서도 해야 겠다고 마음을 먹었다고 합니다. 이번 8월에 개신교의 3개 교단의 총회장들의 부부를 모셔서 한국교회의 군 선교 현황을 보여드리니 이번에도 많은 것을 깨닫고 많은 정보를 가져갔습니다. 이렇게 강태원선교사님이 러시아의 군 선교에 많은 변화를 주었습니다. 이런 성과가 있었던 것은 성도님들의 끊임없는 기도 때문입니다. 앞으로 더 큰 변화를 위해서 성도 여러분이 러시아 군 선교를 위해서 기도하는데 쉬지 않으시기 바랍니다.

지난 시간에는 말로 하는 사랑으로 ‘복을 빌어 주는 사랑’을 하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오늘은 몸으로 하는 사랑으로 ‘함께하는 사랑’을 하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이 말씀을 준비하면서 생각나는 한 구절은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는 말입니다. 남녀도 사랑을 하다보면 결혼을 하듯이 사랑의 결정체는 함께하여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지난 2002년 월드컵에서 우리나라가 결코 축구 선진국이 아닌데도 4강에 들 수 있었던 것은 한마디로 함께하는 사랑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선수와 선수끼리 손발이 맞아 혼연일체가 되었고, 감독과 선수, 선수와 응원하는 국민들이 하나가 되어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하는 힘을 보여 준 결과입니다. 이는 가정에서도 사랑하는 가족일수록 자주 모이고 그렇지 않는 가족일수록 모이는데 힘쓰지 않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지막 때의 비극은 모이기를 폐하는 것이라고 성경에도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처럼 함께 한다는 것은 사랑을 하는 증거일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이 사랑으로 새로운 역사를 창조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함께하는 사랑으로 이 민족이나 교회나 가정 앞에서 새로운 역사를 창조해가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하나님께서 제사장으로 하여금 이스라엘 백성에게 축복하라고 하시는 축복의 선언문입니다. 이 축복하는 내용을 자세히 보면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축복의 말씀을 통해서 "함께 하는 사랑을 어떻게 하느냐?" 는 내용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축복하시고 사랑하시는 것처럼 우리도 어떻게 하면 사랑할 수 있을까? 에 대해 생각을 하면서 오늘 본문을 통해 3가지 축복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려고 합니다.

함께하는 사랑은 첫째 지켜주는 사랑입니다.
24절 말씀을 같이 봅니다.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했는데, '지키다'라는 말은 "가시로 울타리를 친다.“ 는 뜻입니다. 담이 되어 준다는 것입니다. 담이라는 것은 움직이지 않습니다. 그 자리에 있습니다. 그 자리에 있어 주는 것이 바로 함께하는 사랑의 시작입니다.

하나님은 지켜주는 사랑을 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성도 한분이 밤에 잠을 자다가 꿈을 꾸었답니다. 감사하게도 꿈에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바닷가 모래사장을 거닐게 되었는데, 예수님께서 뒤를 돌아보라고 해서 뒤를 보았더니 모래사장에 두 사람의 발자국이 보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자 보거라, 저기 저 발자국이 바로 너와 나의 발자국이다!”

‘그렇구나! 예수님이 세상 끝날까지 항상 함께 있겠다고 하시더니 정말 나와 함께 하시는구나!’ 생각하며 감사했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까 혼자 걸어간 발자국이 있는 것을 보고 어느 때인가를 꼽아 보았더니 자기가 가장 힘들고 어려울 때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질문을 했데요.

“예수님 저기를 보세요. 한사람의 발자국 밖에는 찍혀 있지 않습니다. 그 때는 제가 가장 힘들 때 였는데, 주님은 어디에 가시고 나 혼자만 고난의 길을 걷게 하셨습니까?”
이 질문에 예수님은 빙그레 웃으시면서 하시는 말씀이 “자세히 보거라 그 발자국이 누구의 것인지... 그 발자국은 네 것이 아니라 바로 내 것이다! 나는 한번도 너를 떠나 본적이 없었다. 네가 힘들고 어려울 때는 내가 너를 업고 갔기 때문에 하나의 발자국만이 있는 것이다!” 라고 했다고 합니다.

우리 부모님들도 자식들을 사랑하시니까 업어주시잖아요? 가끔 사랑하는 연인들끼리도 업어달라고 하는 것을 본적이 있습니다. 힘들고 어려우면 "내가 엎어줄게!" 라고들 합니다. 주님은 우리를 절대로 혼자 내버려 두시지 않습니다. 언제나 함께 하시고 우리가 힘이 들거나 어려울 때는 우리를 업어 주시고 그 고난의 길을 대신 가신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함께한다는 것은 그저 ‘같이 산다!’ 는 것이 아니라, 같이 있어서 힘이 되어 주는 것입니다.

다니엘과 세 친구는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왔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자의 굴에서, 풀무불 속에서도 지켜주심으로 사랑하셨습니다. 엘리사가 아람 군대에 의해 포위를 당했을 때도 하나님은 천사들을 보내셔서 지켜주셨습니다. 요셉이 애굽의 노예로 팔려 갔지만 하나님이 지켜주셔서 모든 일이 형통했고 애굽의 총리가 되는 복을 받았습니다.

우리도 마귀의 종노릇을 하고 있었을 때에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로 구원해 주셨습니다. 유월절에 죽음의 천사들이 애굽 전역의 장자들을 죽일 때, 어린양을 잡아 문설주와 문인방에 바른 집은 그냥 넘어갔던 것처럼 하나님의 심판대에서 우리 성도들을 보호하는 것만 아니라 현세에서도 사단의 공격으로부터 우리들을 보호해 주셨습니다. 오늘날에도 우리들을 사탄의 공격에서 보호해 주시고 지켜주심으로 구원을 해 주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성령은 하나님이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을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작열하는 태양으로부터 지켜 주셨고, 밤에는 불기둥으로 사막의 추위로부터 지켜주셨던 것처럼 지금은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우리를 인도하시고 지켜 주시고 계십니다. 이 모두가 하나님이 함께하심으로 주시는 복입니다.
이처럼 지킨다는 것은 그저 같이 있는 것이 아니라 힘이 되어 주는 것뿐만 아니라 새로운 역사로 간다는 것입니다.

오 신실하신 주 오 신실 하신 주
내 너를 떠나지도 않으리라
내 너를 버리지도 않으리라
약속하셨던 주님 그 약속을 지키사.
이후로도 영원토록 나를 지키시리라 확신하네. 할렐루야!

성인이 된다는 것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국가와 민족의 장래를 책임져야 한다는 책임감과 자부심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인이 되는 20세가 되면 군대도 가고, 선거권을 가지고 대통령, 국회의원을 뽑을 수 있는 권한이 생깁니다. 나라를 지키고 가정을 지키고 삶을 지킬 줄 아는 사람이 성인입니다. 우리가 신앙적으로 성숙해 지고 성인이 되는 것은 책임질 수 있는 나이가 됐다는 것입니다. 교회와 교회가 하는 일을 책임져 줄줄 알아야 합니다. 결국 복음사업을 위해서 일하는 주의 종들을 책임져 줄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지켜준다는 것은 '잘하나 못하나 한번 보자!'하면서 감시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요즘 도청사건 때문에 온 국민들이 예민해 있습니다. 혹시 내 통화도 누군가가 감시하듯이 도청하고 있지나 않는가 하는 불안감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들은 감시자가 아닙니다. 지켜주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아메리카 인디안 성인식
그런데 아메리카 인디안 성인식도 이와 같습니다. 아메리카 인디안을 아시지요? 미국의 서부개척시대에 말을 타고 활을 쏘며 자기들의 땅을 지키기 위해 그 용감하게 싸웠던 민족 말입니다. 어떻게 이분들이 용감한지 아시나요? 성인식에 그 비밀이 있습니다.
아메리카 인디언의 성인식은 어두운 밤에 깊은 산속에 혼자 들어가 밤을 새우는 것입니다. 얼마나 무섭겠습니까? 사나운 맹수가 나올 것 같고... 여하튼 아메리카 인디안은 성인으로서 인정을 받기 위해 밤을 지새웁니다. 그런데 이들의 성인의식을 보면 단순하게는 밤을 지새우는 강심장이 되라고 하는 것인데요. 자세히 드려다 보면 그런 것만이 아닙니다.
아메리카 인디언의 자녀들이 성인식을 위해 깜깜한 밤을 지새우고 밤이 지나 새벽이 오면 어렴풋이 보이는 것이 있습니다. 무엇이 보이는가? 하면 아버지의 모습이 보입니다. 아들이 성인식을 위해 깊은 산속에 들어가는데, 아버지는 아들의 뒤에서 지키고 있습니다. 혹시 사나운 맹수가 아들을 해치지 않을까.. 노심초사하며 아들을 지키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나를 지켰다는 사실을 아는 아들은 결코 외롭지 않은 것입니다.

진정한 성인의 의미는 나이를 먹고 밤을 지새우는 담대한 마음, 그리고 튼튼한 몸이나 지식에 있는 것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적어도 자녀라도 관심을 갖고 지켜 줄줄 아는 사람이 비로소 성인임을 아버지가 가르치는 것입니다. 이렇게 지켜주는 범위가 점점 커져 가족에서 지역, 더 나아가 나라를 위해 지키고자 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이 되어야 비로소 성인이 된다는 것입니다.

해병대가 용감한 이유 중에 하나도 단순히 고된 훈련에만 있는 것은 아니라 동료애가 크다는 것에 있다고 합니다. 서로가 책임져 주는 동료애에 있다는 겁니다. 전쟁에 나가 싸우다 전우가 죽으면 그 시체를 동료가 책임을 지고 가져온다고 합니다. 나 혼자 살기도 힘들지만 목숨을 바쳐 동료를 지켜 주는 동료애가 용감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같은 모습을 초대교회의 생활에서 볼 수 있습니다. 초대교회의 성령의 충만을 받은 성도들에게 나타난 첫 번째 나타난 현상은 바로 지켜주는 것으로 많은 핍박 속에서도 두려워하지 않고 순교까지 할 수 있었습니다.
사도행전 2장 8절을 보면 "우리가 우리 각 사람이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되는 것이 어찌 됨이냐"고 했습니다. 서로 말이 통하게 되었고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구원을 받게 다음에는 서로의 삶에 관심을 갖고 가진 것을 나눔으로 지켜 준 것입니다.

말씀을 계속 보게 되면 43절로 47절에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말미암아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초대교회에는 있는 사람이 없는 사람을 보살펴 주었습니다. 그래서 가난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못 박히실 때 어머니를 제자인 요한에게 부탁을 합니다. “네 어머니다”
우리 교회가 대를 이어가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서로를 책임져 주는 것입니다. “네 어머니다! 만이 아니라 네 아들이다! 네 딸이다!” 하면서 책임을 져 주기 위해 대를 이어 가는 교회를 만들자는 것입니다.
우리가 한 가족에 대해서 서로가 서로를 책임져 줄줄 아는 가정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젊은이들은 교회에 계신 어르신들이 다 내 어머니, 아버지라고 생각을 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청년들이, 아이들이 다 내 자식이라고 생각을 하시면서 귀하게 생각을 하시기 바랍니다. 지켜 주는 것, 서로를 책임져 주는 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우리 교회가 이런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한번은 딸아이가 병원에 입원을 했던 적이 있습니다. “힘들지 조금만 참아라!” 하니까 딸은 “아니에요 힘들지 않아요! 견딜 만해요” "수술해서 아프고 힘들었을 텐데 어떻게 힘들지 않니?" 하니까 딸이 환한 얼굴로 대답했습니다.
"엄마, 아빠, 동생 그리고 하나님이 저와 함께 계셨잖아요."
옆에 있던 엄마가 말하기를
"얘 교회도 있어. 널 위해서 얼마나 기도를 하는데"
아이의 얼굴에서 눈물이 나더라구요. 나를 지켜주는 사람이 있다고 하는 것만으로도, 같이 있어 주는 것! 만도 힘이 됩니다. 서로가 서로를 책임져 줌으로서 지켜주는, 함께 하는 아름다운 사랑의 공동체가 우리교회와 사랑하는 성도여러분의 삶 속에 늘 있게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함께하는 사랑은 둘째 은혜를 베풀어주는 사랑입니다.
25절 말씀을 같이 보십니다.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이 세상에 은혜가 필요 없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가 예수님으로 은혜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지금도 그 은혜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죄가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여러분 이 세상에 완벽한 사람은 없습니다. 다 부족합니다. 그래서 은혜가 필요하고 도움을 받아야 살 수 있는 것이 바로 저와 여러분입니다.

얼굴을 비춘다는 말은 밝은 얼굴로 대하신다는 말씀인데, 그 밝은 얼굴로 은혜를 베푸신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살후1:8-9절을 보면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에 복종하지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내리시리니 이런 자들은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을 떠나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으리로다"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떠나는 자들은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다윗도 다윗이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서입니다.
시편 51편9절로 13절을 보게 되면 "주의 얼굴을 내 죄에서 돌이키시고 내 모든 죄악을 지워 주소서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켜 주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 그리하면 내가 범죄자에게 주의 도를 가르치리니 죄인들이 주께 돌아 오리이다"
밧세바와 간음을 하고 우리아를 죽게 하는 살인죄를 범한 후에 그 사실이 발각이 되자, 여호와께 간절하게 호소할 때도 하나님의 얼굴을 돌리지 말아달라고 합니다. 얼굴을 돌리지 말라는 것은 은혜를 베풀어 달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예수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지금도 그 은혜를 받아가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세상에는 죄와 허물이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털면 먼지 안 나는 사람 없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은혜가 필요한 것입니다. 은혜를 받으면 살아 날 수 있습니다.

은혜가 필요한 사람
몇 년 전 탈옥수 신창원이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습니다. 신창원은 어린 시절 어머니가 일찍 세상을 떠났고, 아버지가 키웠습니다. 다른 아이들처럼 신창원이 남의 밭에서 수박 하나 훔쳐 먹었는데 아버지가 아들을 교육을 잘 시키려고 소년원에다 집어넣었습니다. 소년원에 가서 오히려 아이의 성격이 좋아지기는커녕 더 많은 범죄를 배워서 그 후 계속 범죄를 하다가 그 지경까지 이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만약 아버지가 조금만 더 은혜로 자식을 키웠다면 지금처럼 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여러분 이 세상에 은혜가 필요 없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예수 닮는 삶
일본의 가가와 도요이꼬 목사님은 참으로 존경받는 분입니다. 그는 빈민굴 전도를 위해 일생을 바친 사람입니다. 그는 살인자, 도박꾼, 창녀, 알코올 중독자, 마약 중독자 등 사회에서 소외된 사람들을 전도하고 구제하기 위해 갖은 고생을 다했습니다.
한번은 그가 일하는 현장을 보겠다며 가가와 도요이꼬 목사님의 친구 되는 분이 찾아왔습니다. 친구가 와서 보니 그 현실이 너무도 한심한 것이었습니다. 겨우 몇 명 몸을 파는 창녀와 도박꾼을 앉혀 놓고 예배를 드리고 있노라니, 어떤 청년이 와서 예배드리고 있는 창녀를 불러냅니다. 그런가 하면 술 취한 사람이 들어와서는 돌을 던져 얼굴에 상처를 냅니다.
더욱 어처구니없는 일은, 예배가 끝난 후 어떤 사람이, 예배에 참석해 주었으니 그 대가로 돈을 달라고 요구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도박할 돈이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가가와 도요이꼬 선생은 그러면 그렇거니 하고 또 돈을 주어 보냅니다.
이런 광경을 보고 있던 친구는 “자네 쓸데없는 일을 하고 있군, 이건 위선이야! 이것이 도덕적으로 옳은 것이며 사회적으로 옳은 것인가? 도대체 어쩌려고 이 소망 없는 일을 하고 있는 건가? 이건 오히려 악을 조장하고 있는 거잖아!” 하며 안타까운 마음으로 말했습니다. 그 말을 들은 가가와 도요이꼬 목사님은 대답하기를, “다만 예수님께서 하시던 일을 조금 흉내 내서 하고 있을 뿐이지. 그래도 끝까지 사랑하고, 끝까지 믿어 주는 길밖에 도리가 없지 않나?”라고 했답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얼굴을 돌리지 않는 것입니다. 은혜는 끝까지 믿어 주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가정에 은혜가 임해야 합니다.
교회도 은혜를 입어야 합니다.
국가도 은혜를 입어야 합니다.
우리가 속한 단체도 은혜가 임해야 합니다.

은혜를 입는 것은 논에 물을 대는 것과 같습니다. 물 없는 논은 모내기를 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좋은 모종을 심어도 물이 공급되지 않으면 의미가 없습니다. 그렇듯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은혜입니다. 책망이나 비판이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이 강퍅해 지는 이유는 은혜를 받지 못해서 입니다. 유럽의 격언 가운데 “젖소는 물을 마신 후에 그 물로 아름다운 젖을 만든다. 그러나 뱀은 물을 마신 후 그 물로 독을 만든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은 은혜입니다. 은혜를 주는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함께하는 사랑은 셋째로 평화를 주는 사랑입니다.
26절을 같이 봅니다.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지니라 하라”

어떤 남성이 하나님께 기도를 했습니다. “하나님, 하와이를 여행가고 싶은데 다리를 놓아 주십시오.” 그랬더니 하나님이 “야 너무 무리한 요구를 하는구나, 좀 쉬운 것을 요구해 보라” 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이 남자가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나는 도무지 내 아내의 마음을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내 아내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는 지혜를 주십시오. 내 아내의 마음은 종잡을 수가 없습니다. 어느 날은 기분이 좋았다가 어느 날은 똑같은 말을 했는데도 신경질을 부립니다. 어떻게 해줘야 아내를 기쁘게 할 수 있을까요? 지혜를 주세요.”
그랬더니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답니다. “이 사람아, 하와이 가는 길을 4차선으로 해줄까 6차선으로 해줄까.”
미국본토에서 태평양을 넘어 다리를 놓는 것이 여자의 마음을 아는 것보다 쉽다는 말입니다. 그만큼 여성의 심리만 이해하기가 어렵습니까? 사람이 다 그렇습니다. 나도 나를 모르는데 네가 나를 어떻게 알 수 있다는 말입니까? 그냥 그대로 보아 주는 것이 평강하는 길입니다.

본문 26절의 말씀을 한글 개역은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라고 번역을 했고, 표준 새번역은 '너를 고이 보시어서'라고 번역을 했습니다. '고이 보아 준다는 것'은 ‘있는 그대로 보아 준다’는 것입니다.

어제 버스 정류장에서 한 아이가 제 앞을 왔다 갔다 합니다. 한 3살 쯤 되었을까요? 저는 그 아이에게 싱끗 웃어 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엄마는 아이를 안고는 "야! 예쁘지, 아이고 예뻐 죽겠네.." 얼마나 예뻐하는지... 바닥에 있는 짐을 발로 차도 아무렇지도 않은지 그냥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그 아이를 바라봅니다. 그런데 그 아이가 대통령입니까? 부자입니까? 대학교 교수입니까? 뭐가 그리 예쁩니까? 무엇을 해서가 아닙니다. 그냥 예쁩니다.
사랑하는 연인들은 서로 눈을 떼지 못합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바라만 봐도 좋은 것입니다. 이것이 고이 보아 주는 것입니다. 예쁘다고 하는 것, 사랑하는 것, 장난을 치고 말썽을 피워도 예쁜 것이 고이 보아 주는 것입니다. 고이 보아 주는 것은 상대방 그대로를 보아 주는 것입니다. 이런 사랑이야 말로 함께하는 사랑이 되는 법입니다.

어르신들을 보면 '이렇게 하면 더 좋은데.. 저렇게 하면 더 맛있는데 이런 옷을 입으면 더 멋있을 텐데..' 라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됩니다. 노인은 노인의 마음이 있고 아이들은 아이들의 마음이 있고, 젊은이들은 젊은이들의 마음이 있습니다. 하고 싶은 것, 취향이나 입맛이 많이 다른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런데 하도 말을 안드니까 이런 어르신을 보며 "우리 아버지는 내 말을 안들어" 하면서 울기까지 하시는 분이 계시더라구요. 그러더니 하루는 "노인들은 하고 싶은 대로 해주는 것이 최고야"라고 하더라구요.
가끔 예배시간에 모자 쓴 젊은이들을 보게 됩니다. 청년부 담당하시는 목사님께서 "요즘에는 모자가 머리에 쓴 것이 아니라 모자도 옷을 입은 것과 같습니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습니다.

어떻게 우리들이 서로가 다 마음에 들고 보기 좋겠습니까? 맘에 안들더라도 그 사람의 있는 모습 그대로를 보는 것이 고이 보아 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함께 있기를 원하면, 아니 평강 주시기를 원하면 그대로 보아 주는 것입니다.
자동차를 몰고 가다가 갑자기 앞으로 세치기를 하는 분이 있습니다. 기분이 어떻습니까? '왜 저러나?' 하면 그 때부터 내 마음에 평강이 깨집니다. 분노가 생기게 됩니다. ‘가다가 사고나 나라. 가서 부딪쳐 버릴까? 신고를 해 버릴까?’ 분명한 것은 그대로 보지 않고 ‘왜 저러나?’하기 시작하면 평강은 없어집니다. 좋은 차를 타고 있어도 말입니다. 반대로 “그럴 수도 있지. 바쁜가 보다! 나도 그런 적이 있는데..., 비켜 주는 사람을 보면 참 고맙더라!” 하면 마음에 평강이 옵니다.

하나님은 있는 그대로 보아 주시는 분입니다.
아담의 경우를 보세요. 하와를 만들어 주시니 “내 뼈 중에 뼈요 살 중에 살”이라고 하면서 기뻐합니다. 제가 누구에게 선물을 주었습니다. 얼마나 기뻐하는지 좋아합니다. 너무 좋아서 어쩔 줄 몰라합니다. 그런데 선물을 준 사람에게 감사하다는 말을 하지 않아도 됩니까? 그러면 다음에 또 선물을 주고 싶어 할까요? 아닙니다. 감사할 줄도 모른다고 그런 사람에게는 다시는 선물을 안 할지 모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어떠십니까? 아담이 하와를 주었다고 아담이 하나님께 감사했다는 얘기를 들어 본 일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아담을 사랑하시 잖아요. 그래서 함께 살 수가 있는 것입니다. 반대로 선악과를 따먹는 죄를 지었을 때도 당장 내려가서 책망이나 죄를 물으신 적이 없습니다. 그대로 보아 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함께 하려면 그대로 받아 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를 그대로 보시고 사랑을 하십니다.

저는 이런 경험을 많이 합니다. 기도 중에나 묵상 중에 하나님이 고이 보아 주시는 것을 말입니다. 기도 중에, 하나님의 일을 묵상 중에, 하나님은 저를 쳐다보며 웃고 계시는 모습 말입니다. 저 역시 하나님을 쳐다보며 웃고, 감사하고 또 감사하고 평강이 있습니다. “하나님과 서로 바라보고 있노라면 평강이 있고 기도나 묵상의 시간은 금방 지나갑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있는 그대로 부족하면 부족한대로, 죄가 있으면 있는 대로 보아 주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평강이 임하는 법입니다.

지난 주간에 황신권씨의 ‘야생초 편지’를 읽었습니다. 그 중에 선인장을 키우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주인공이 교도소에서 선인장을 키웁니다. 그런데 2년이 되도록 자라는 기미가 안보이는 것입니다. 2년이 지나고 7월이 들어 날이 따뜻해지니까 자라지 않던 선인장이 하루가 다르게 크는 겁니다. 몰라 볼 정도로 큰 다는 것입니다. 이 분의 말씀은 때가 되면 자란다는 것입니다. 아이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때가 되면 자랄 것을 믿고 기다려 주고 보아 주는 것입니다. 아이들만이 아닙니다. 부모님도 , 젊은이들도 다 그 때가 있습니다. 그대로 인정하고 기다려 주세요. 그리고 기도하세요. 내가 변하게 해 달라고.....

우리가 함께 할 수 있는 사랑에 선두 주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내가 먼저 사랑해야 상대방도 변할 수 있습니다." "상대방이 변할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 우리의 자녀들의 눈에 비친 여러분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내가 변하면 자연히 아이들도 변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나를 변화시켜 달라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어거스틴의 어머니 모니카가 아들을 위해 기도 한 것처럼 때가 되면 하나님이 해결해 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기도 할 뿐 입니다. 그러면 평강이 임하는 것입니다.

또 미국가정사역연구소에서 '자녀들이 부모 때문에 교회를 떠나는 10가지이유'를 조사했습니다. 요점은 부모가 모범을 보여야지 자녀들도 신앙생활을 잘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① 주일이나 교회행사를 무시하고 여행을 떠날 때
② 예배시간에 시계를 몇 번씩 쳐다볼 때
③ 자녀 앞에서 목회자의 허물을 이야기할 때
④ 십일조와 헌금을 제대로 하지 않을 때
⑤ 교회에 대해 애착심이 없을 때
⑥ 예배시간에 지각할 때
⑦ 문제가 생길 때만 불규칙하게 기도할 때
⑧ 여러 핑계로 교회봉사를 하지 않을 때
⑨ 자녀들을 교회에 오래 있지 못하게 할 때
⑩ 실천보다는 말만 앞세울 때입니다

내가 변해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함께하기 위해서는 내가 우리의 교회와 가정에 우리의 일터에서 지켜주는 책임져 주는 담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은혜를 줘야 하고 평화를 주기 위해서 있는 그대로 보아 주는 것입니다.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승리케 하시는 놀라운 축복이 있게 될 줄로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여러분의 이웃들에게 지켜 주심으로 책임져 주시고 하나님의 밝은 얼굴을 비춰주시고 은혜를 베푸시고 있는 그대로를 고이 보아 주심으로 평강을 누리는 복을 주시는 것처럼 우리도 서로 함께하는 사랑을 통하여 복을 나누는 삶을 살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 창우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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