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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씨앗의 운명 (마 13: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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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은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복음의 주제가 ‘하나님 나라’였다고 말합니다(마 4:17, 막 1:15, 행 1:3). 복음서에는 ‘하나님 나라’ 혹은 ‘하늘나라’라는 표현이 113번 나타납니다. 그 중에 72번을 예수님께서 직접 사용하셨습니다. 복음서를 벗어나면 이 표현이 29번 밖에 나타나지 않지만 사도들의 가르침 역시 ‘하나님 나라’가 중심 주제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 하나님 나라의 속성들은 주로 비유를 통해 말씀하셨습니다.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님의 교훈 1/3이 비유 형식입니다. 마태복음은 전체 분량의 1/4정도를 비유가 차지합니다. 그리고 마태복음에 등장하는 약 50개 정도의 비유들은 분명하게 혹은 암시적으로 ‘하나님 나라’를 그 주제로 하고 있습니다. 비유는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시기 위한 예수님의 독창적인 교훈 방식이었던 셈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하늘나라’ 혹은 ‘천국’으로도 표현됩니다. 마태복음에는 ‘하나님 나라’라는 표현은 4번만 나타나고, 주로 ‘하늘나라’로 표현되었습니다. 하나님의 호칭을 함부로 사용하는 것을 꺼렸던 유대인 독자들을 생각해서 마태가 완곡하게 표현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표현은 달라도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의 같은 구절과 비교해보면 분명 같은 뜻입니다. ‘천국’은 ‘하늘나라’를 한문으로 표현한 것에 불과합니다. 그럼에도 이 용어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오해합니다.

‘천국’이라고 하면 ‘구원받은 사람들이 죽은 뒤에 가는 장소’를 떠올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대체로 두 가지 오해 때문입니다. 한 가지는 마태복음의 ‘하늘’이라는 표현이 ‘하나님’의 완곡한 표현임을 인식하지 못하고 문자 그대로의 물리적 하늘(sky)로 오해했기 때문입니다. 또 한 가지는 ‘나라’라는 말을 ‘영토’ 개념으로 오해했기 때문입니다. ‘나라’로 번역된 히브리어 단어 ‘말쿠트’는 매우 제한적으로 ‘영토’의 개념을 포함하고 있기는 하지만, 하나님과 관련되어 사용되면 언제나 ‘권위’나 ‘통치’의 의미를 가졌습니다. ‘나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단어 ‘바실레이아’도 유대 문헌에서 언제나 ‘통치’나 ‘왕권’의 의미였습니다.

물론 완성된 천국이 공간적인 개념을 전혀 포함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성경에 사용된 이 단어들은 한결같이 ‘하나님의 통치’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천국에 간다’고 하지 않고 ‘천국이 온다’고 표현했습니다. 예수님의 초림과 함께 천국(하나님의 통치)은 이미 시작되었고 예수님의 재림과 함께 완성될 것입니다. 우리가 천국을 소망하며 산다고 할 때도, ‘죽은 뒤에 갈 어느 곳’을 소망한다는 의미보다는 ‘하나님의 온전한 다스림’을 사모한다는 뜻입니다. 이미 우리를 다스리고 계시지만 완전하게 다스려주실 것을 소망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 ‘하늘나라’, ‘천국’이라는 용어들을 만날 때마다 즉시 ‘하나님의 통치하심’ ‘하나님의 다스림’으로 바꾸어 이해해야만 성경의 가르침을 바르게 깨달을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은 13장에는 하나님 나라에 관한 비유 8개가 나타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시의 무리들에게는 너무나 익숙한 여러 가지 삶의 모습들에 견주어서 하나님 나라의 다양한 속성들을 인상적으로 제시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각각의 비유들은 ‘하나의 주된 요점’(one main point)이 있습니다. 오직 하나의 의미만 있다는 말이 아니라 하나의 중심 주제를 가지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비유에 등장하는 요소들마다 의미를 붙여서 해석하려 하기보다는 비유 전체를 통해 말씀하시고자 하는 요지를 깨닫는데 초점을 두고, 그 초점과 같은 방향에서 적용되어야 합니다.

‘씨 뿌리는 자의 비유’로 알려진 오늘 말씀의 초점은, 씨 뿌리는 자나 다양한 종류의 밭에 있지 않고, ‘씨앗의 운명’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즉, 말씀의 씨를 뿌릴 때의 자세나 말씀의 씨를 받아들이는 자세를 교훈하려고 예수님께서 이 비유를 드신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어떻게 하면 열매 맺는 밭이 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길가 밭과 돌밭과 가시떨기 밭을 옥토로 개간할 수 있을까?’를 가르치는 것이 이 비유의 목적이 아닙니다.

유대인들의 농사법은 밭 갈고 나서 씨 뿌리는 우리와 달랐습니다. 씨를 먼저 뿌린 후에 밭을 갈았기 때문에 어떤 씨는 길가에 그대로 있고, 어떤 씨는 돌밭에 어떤 씨는 가시떨기 위에, 어떤 씨는 좋은 땅에 떨어졌습니다(4-8). 씨앗은 땅의 상태에 따라 각기 다른 운명에 처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너무나 흔히 볼 수 있는 유대인 농사 광경을 말씀하신 후에 “귀 있는 자는 들으라”(9)하시고 말씀을 끝내셨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오늘은 다 아는 농사짓는 가볍게 이야기만 아시고 끝내시는 구나’하고 생각할 수 없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 나아와서 왜 무리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시는 지 물었습니다(10). 예수님께서는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저희에게는 아니 되었나니 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되 무릇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그러므로 내가 저희에게 비유로 말하기는 저희가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함이니라”(11-13)고 대답하셨습니다. 예수님은 11절에서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허락된 “너희”와 허락되지 않은 “저희”를 구별하셨습니다. 12절에서는 “너희”는 “있는 자”로, 저희는 “없는 자”로 다시 한 번 구별하셨습니다. “너희”는 무엇인가가 있기 때문에 깨달아서 천국의 비밀을 알지만, 저희는 무엇인가가 없기 때문에 깨닫지 못하고 천국의 비밀도 모릅니다. 14-15절에서는 “저희” 마음이 완악한 것은 이사야의 예언의 성취라 지적하시고, 반면에 16-17절에서는 제자들이 복이 있는데, 그 이유는 많은 선지자들과 의인들이 보기 원했고 듣기 원했던 것을 그들은 누리고 있기 때문이라 하셨습니다.

그러면 제자들에게는 있고, 무리들에게는 없는 것이 무엇일까요? 구약의 선지자들과 의인들이 그토록 보고자 했으나 보지 못하고 듣고자 했으나 듣지 못했던 반면에, 제자들은 보고 듣는 그것이 무엇일까요? 저희(무리들)에게는 없지만, 너희(제자들)에게는 있는 것이 무엇일까요? ‘예수님’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예수님을 통한 ‘하나님의 통치’ 곧 ‘하나님 나라’, ‘하늘나라’, ‘천국’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의 다스림을 직접 받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구약의 모든 성도들이 그토록 갈망했던 바였습니다. 제자들은 하나님의 다스리심으로 인해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깨닫는 것이 허락되었습니다. 반면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받지 못한 완악한 무리들은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아도 알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다스림이 없는 저희는 예수님을 직접 눈으로 보고 그 말씀을 직접 들으면서도 도무지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은혜 받을 수 있는 최상의 환경 속에서도 완악했으며 은혜 받지 못했습니다.

오늘날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통치하심이 있는 사람은 말씀을 보고 설교를 들을수록 점점 더 깨닫습니다. 비유를 통해서 더 풍성한 하나님 나라 비밀을 알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다스림이 없는 사람은 아무리 성경을 보아도 천국 비밀을 알 수 없고, 아무리 좋은 설교를 들어도 깨달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보고 은혜를 받는 다는 것, 설교를 들으며 깨닫는 다는 것 자체가 놀라운 은혜입니다.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신 이유는 이중적입니다. 있는 자는 비유를 통해서 더 풍성하게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깨닫게 하시려는 것이 한 가지이고, 듣고 보면서도 알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는 자들에게는 그 비밀이 가려진채 제시하심으로 궁금증을 유발하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런즉 씨 뿌리는 비유는 이러한 현상들을 비유하신 것입니다(18). “아무나 천국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할 때는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리는 것을 빼앗나니 이는 곧 길가에 뿌리운 자요 돌밭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되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시 견디다가 말씀을 인하여 환난이나 핍박이 일어나는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 가시떨기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치 못하는 자요 좋은 땅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니 결실하여 혹 백 배, 혹 육십 배, 혹 삼십 배가 되느니라 하시더라”(19-23)

당시 예수님의 사역에 대해 다양한 반응들이 있었습니다. 어떤 이는 단번에 거절했고, 어떤 이는 열광적인 환영을 했으나 결국 배척하고 떠났습니다. 이것이 어떤 점에서는 제자들에게 실망감과 낙심을 주었을 수 있습니다. 왜 예수님의 역사가 불길같이 확 일어나지 않을까? 그들의 마음은 조급해지고 답답했을 수 있습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예수님의 비유는 적절한 답변이 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결실하지 못하는 것은 뿌리는 사람이나, 씨에 잘못이 있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과 예수님의 말씀 자체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단지 받아들이는 사람의 태도들의 다양성 때문에 말씀은 각기 다른 운명에 처하게 되는 것입니다. 비유는 3:1 정도의 비율로 결실치 못하는 밭이 많음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밭아 들이는 밭에 의한 결실이 혹 100배, 혹 60배, 혹 30배나 된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오늘날도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될 때에, 설교하거나 전도할 때, 다양한 반응들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냉혹하게 배척합니다. 어떤 사람은 처음에는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지만 말씀대로 살기 위해 희생을 각오해야 할 때 배반해버립니다. 또 어떤 사람은 신앙생활은 하지만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에 늘 시달려 말씀이 결실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소수의 사람들이 그 말씀을 받아들이고 100배, 60배, 30배의 결실을 맺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결코 망하지 않습니다. 3/4의 밭이 결실하지 못해도 남은 1/4의 밭에 의해 중단 없이 열매를 맺어갑니다. 많은 씨들이 그냥 사라져 버리는 것 같아 보여도, 반드시 그 중에는 받아들이는 사람이 있어 그들을 통해 놀라운 결실을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런 방법으로 중단 없이 확장되어 갑니다. 제자들만이 받아들였던 그 복음이 오늘날 세계 각국에 퍼져 있는 것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오늘 비유를 통해 초라한 사역의 현실로 인해 낙심하기 쉬웠던 제자들에게 하나님의 나라가 어떤 방식으로 풍성한 결실을 맺어가는 지 가르쳐 주셨습니다. 또한 진정한 제자는 처음의 긍정적인 반응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환난과 핍박을 견디고 염려와 재리의 유혹을 물리치고 끝까지 결실하는 자라는 사실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
(최 동 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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