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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놀라운 구원을 위해 필요한 자 (욘 3: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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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은 우리 나라의 원수이다. 36년간 강제 점령하지 않았는가? 이처럼 니느웨는 이스라엘의 원수이다. 니느웨는 이스라엘을 무너뜨린 적국이며 유다, 남왕국을 괴롭힌 원수의 나라의 수도이다. 앗수르는 우상의 나라요 히스기야에게 조공을 받아가기도 하였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니느웨 사람들은 망해야 하는 것이 마땅하다. 그런데 하나님은 사람의 생각과 다른 생각을 하신다. 죄의 심판을 받아 멸망하도록 두면 좋은 것같은 원수까지라도 건져내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이방인이 구원되어야 함을 말씀하시는 것도 놀랍지만 우상을 섬기는 니느웨 도성의 사람들의 모습도 놀랍다.

왜 놀라운가? 하나님도 모르고 사는 이방 사람들이 요나 한 사람의 전도를 받아드리고 철저히 자신들을 고침으로 니느웨 성읍이 구원을 받았다는 점이다. 교회에 나오는 나보다 교회에 안나오는 불신자가 더 회개를 잘할 수 있으며 교회에 직분을 받은 나보다 교회를 핍박하던 세상 사람들이 더 하나님의 말씀을 믿을 수 있다는 것은 사실인가? 믿어지지 않아도 사실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편견을 버리고 이방인을 향해 외치는 전도자가 되어야 한다. 가시 노릇하는 이웃도 원수같은 직장 동료도 신앙을 핍박하는 가족도 어느 날 나보다 더 철저히 변화될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요나서 3장을 보라. 요나는 물고기 뱃속에서 다시 구원을 받은 후 니느웨 도성으로 가서 외쳤다. "사십 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 그런데 이 말을 들은 니느웨 성읍 사람들은 어떻게 하였는가? 놀라워서 이럴 수 있을까 할 정도로 말씀을 받아들였다.

첫째, 하나님을 믿었다. (욘3:5)
욘3:5 "니느웨 백성이 하나님을 믿고..." 전도자가 외친 하루 동안의 말씀이 성읍 사람들에게 외쳐질 때 말씀의 씨가 저들의 가슴에 떨어졌다. 단 하루 동안의 전도 앞에 이방인들이 하나님에게로 돌아왔다. 이것이 놀라운 일이다. 데살로니가 교회가 성장하여 마케도냐와 아가야에 소문난 교회가 된 것, 그것은 바울의 3주 동안의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었기 때문이다.(살전2:31) 잠시 지나가면서 전한 3주간의 복음이 싹이 나서 하나님을 믿게 되니 믿음의 역사가 있고 소망의 인내가 있고 사랑의 수고가 있는 교회가 되었다. 전도자가 외친 한마디가 사람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로 들려지는 자에게는 믿음의 역사가 나타난다. 바로 니느웨 도성의 사람들이 요나의 말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듣고 하나님을 믿고 만 것이다.

하나님을 믿게 되는 것은 말씀의 역사다. 누가 전한 말씀이든지 말씀이 떨어지면 "누구든지 하나님을 믿으니"의 열매가 나타난다. 성읍이 크다고 안 믿는 것이 아니다. 공산당 나라라고 강대국의 나라라고 안 믿는 것이 아니다. 왕하19:37 앗수르가 우상의 신, 니스룩을 섬기다고 안 믿는 것이 아니다. 약소국가에서 온 요나의 말을 듣는 순간 그들은 하나님을 믿었다. 오늘 우리는 교회 언저리를 맴돈다. 중학교, 고등하교 과정을 지나며 수 년을 맴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을 믿는 자가 되지 못하고 되는대로 살아갈까? 이방 나라가 니느웨인이 하나님을 믿는다면 교회 안에 있는 우리도 부끄러운 맘을 가져야 한다.

둘째, 금식을 선포했다. (욘3:5中)
욘3:5中 "금식을 선포하고..." 나는 깜짝 놀랐다. 하나님을 믿게 될 때 저들은 금식으로 나아간 것이다. 40일 이후면 죄로 인해 악독이 하나님 앞에 상달되었기에 심판 받는다는 말씀을 받아드린 저들은 먹을 양식을 입에 넣지 않는 결단을 하고 있다. 살려 달라는 기도, 금식만큼 절실한 것이 있겠는가? 금식은 쉬운 것이 아니다. 영성 훈련 중 언제나 무겁고 부담스러운 것이 금식이다. 하루만 금식하려해도 먹어야 하는 욕구와 격렬한 전투를 벌여야 하는 육체 앓이를 해야 한다. 그런데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지 않으려 금식으로 나아갔으니 너무도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말씀을 던진다는 것은 미미해 보이고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지만 이렇게 이방 사람은 금식하도록 바꾸어 놓았으니 말씀은 정말 살아있고 운동력이 있는 좌우에 날선 검이다. 아니 바위와 같은 심령을 깨뜨리는 다이나마이트이다. 경건하게 산다는 목사 자신도 금식을 잘 못하는데 이방인들이 금식을 시작했다는 것은 저들이 멸망 받을 수 없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니느웨 백성들은 단체 금식을 했다. 개인적으로 하는 은밀한 금식도 중요하지만 단체 금식은 특별할 때 하는 것이다. 에스라는 고독으로 돌아오는 귀환길에 금식을 선포한다. (에8:21∼23) 요엘 선지자는 성회를 위해 금식일을 선포한다. (욜2:15∼16) 단체 금식은 하나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있으면 큰 힘을 발휘한다.
우리는 밥에 길들여져 있는 위장의 노예가 되어 살아서는 안된다. 금식 기도의 능력을 믿고 이방인들보다 더 금식을 통해 하나님에게로 나아가자. 일주일에 한번 굶는 금식을 하자. 일주일에 한 끼씩 일곱 번 굶는 금식을 하자. 더 나아가 일주일에 하루 온종일 세 끼 굶는 금식을 하자. 금식은 영이 배부르며 잔치하는 시간이다.

셋째, 회개의 옷을 입었다. (욘3:5下)
욘3:5下 "무론 대소하고 굵은 베옷을 입은지라..." 굵은 베옷은 순종의 상징이다. 상가에서 입는 옷이다. 굵은 베옷은 죄를 지은 이가 죄를 슬퍼하는 회개의 상징이다. 굵은 베옷을 입은 회개가 백성들에게 있게 될 때 이 회개는 위로 올라갔다. 욘3:6 "그 소문이 니느웨 왕에게 들리매 왕이 조복을 입고 굵은 베를 입고 재에 앉으니라." 하였다. 욘3:7을 보면 "왕은 조서를 내려 사람이나 짐승까지도 회개하고 여호와께 부르짖으라." 하였다. 이방 나라에 말씀이 들어가서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회개의 옷을 입는 역사가 철두철미 되어지고 있다. 백성들로 시작된 회개가 왕에게까지 일어났고 짐승들에게도 그 회개의 영이 미쳐졌다. 짐승까지 회개에 동참하는 모습, 나는 다시 읽고 있었다.
우리는 너무도 완악하다. 길가 밭처럼 딱딱하여 말씀이 가슴에 심어지지 않는다. 툭하면 "지도자를 봐라. 지도자도 회개하지 않는데 내가 왜 회개를 하느냐. 지도자도 헌신하지 않고 장로들도 기도하지 않는데 내가 왜 기도하느냐, 내가 왜 건축 헌금을 하느냐!" 하며 핑계 아닌 핑계로 자기의 완악함을 가리우려 한다. 여기 이방 니느웨 백성들은 누가 회개하기에 베옷을 입은 것이 아니다. 말씀을 들은 순서대로 내가 하나님을 믿게 되니 금식하게 되고 회개의 베옷을 입고 부르짖은 것이다. 니느웨 도성의 사람들은 형식적으로 회개한 것이 아니다. 정말 철저히 회개한 것이다.
요3:10을 보라. 하나님이 그들의 행한 것 곧 그 악한 길에서 돌이켜 떠날 것을 감찰하셨다고 한다. 회개는 회개의 옷을 입고 더러움을 정하게 하는 잿더미에 앉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회개는 방향 전환이다. 악한 길로 가던 것에서 유턴하는 것이다. 술과 담배의 악한 습관을 끊어 버리고 교회에 나올 때 날마다 지각의 나쁜 습관 끊어 버리고 거짓말, 우상 숭배, 도박, 방탕, 간음의 악한 것에서 돌아서는 것이다. 이방인들이 이렇게 철저히 왕과 대신과 백성들이 회개하였으니 하나님도 뜻을 돌이켜 재앙의 심판을 멈추셨다.(욘3:10) 회개는 하나님의 계획을 유보시킨다. 운명과 예언을 연기시킨다. 사실 잘 믿는다는 유다 백성들도, 하나님의 율법을 보관하고 지켰다는 유다 백성들도 행하지 못하는 철저한 회개를 이방인들이 하였다. 너무도 놀라운 모습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저들을 살려 주는 것이 마땅하다. 하나님이 뜻을 정하셨어도 욘3:10 말씀처럼 그 심판하려는 뜻을 돌이키는 것이 정상이다. 그래서 니느웨는 백성 전체가 구원을 받았다. 성읍 전체가 150년간 구원을 받았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중단하셨기 때문이다. 내리기로 작정하신 재앙을 내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 놀라운 구원을 위해 정말 필요한 일은 무엇인가?
말씀을 받은 사람이 있어야 한다. 만약에 아밋대의 아들 요나, 그 요나가 전도자가 되지 않았다면 어찌 되었겠는가? 이방인까지도 구원하려는 하나님을 외면하고 사람의 생각으로 원수는 심판을 받아야 된다고 달아나는 요나가 된다면 아무 일도 일어날 수 없다. 정말 전하는 자만 있다면 북한 공산당도 앗수르처럼 회개하고 구원을 얻는다. 이것이 나는 약하니 복음의 능력이다. 나는 미미하나 동반되는 전도의 표적이다.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는 전도가 없다면 개인도, 나라도 구원될 수 없다.

이제 우리는 전도자가 되어 말씀을 전하는 것이 놀라운 변화와 구원을 가져온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9월 25일에 있을 새 생명 축제에 나타날 표적을 위해 기도하자. 내가 전도자가 되어야 한다. 욘1:3을 보라. "요나가 여호와의 낯을 피하려고 일어나 다시스로 도망하려 하니..." 이처럼 도망가는 전도자가 되지 말라. 욘4:5을 보라. "요나가 성에서 나가서 그 성 동편에 앉되..." 주저 앉아 있는 전도자가 되지 말라. 도망가는 전도자, 주저 앉은 전도자는 아무 것도 하지 못하는 무능한 전도자가 될 뿐이다. 욘3:3을 보라. "요나가 여호와의 말씀대로 일어나서 니느웨로 가니라" 이처럼 전하는 전도자가 되라. 전도하기 위해 순종하고 일어나는 전도자가 되라. 가서 말씀대로 전하기만 하면 그때에 그 작은 말씀이 나는 약해도 기적이 되고 표적이 된다.

눅11:30 예수님은 요나를 말씀하신다. "이 세대는 악한 세대라 표적을 구하되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나니..." 요나가 니느웨 사람들에게 표적이 되었다. 전도자가 먼저 회개하고 물고기 뱃 속에서 기도로 고난을 이기는 구원받고 말씀을 따라 다시 사명자가 되어 일어나면 전혀 예상할 수 없는 구원의 기적이 일어난다. 그 외치는 전도자의 말씀은 모든 사람들에게 표적이 된다. 이방인, 악한 원수, 가시 같은 사람에게도 회개와 믿음과 금식하는 경건을 가져오는 표적이 된다.

우리에게는 구원이 필요하다. 이 악할 때에 불신의 세대에도 구원이 필요하다. 교회 안에도 교회 밖에도 재앙을 멈추시는 구원이 필요하다. 일어나 전하는 전도자 요나가 있어야 한다. 달아나지 말고(욘1:3) 주저 앉지 말고(욘4:5) 일어나 전하는 자가 되자. 앗수르만이 아니고 우리 동포인 북한에도, 조선족에도 전하는 자가 되라. 가까운 사람만 말고 모르는 사람에게도 전하는 자 되기를 축원한다. 새 생명 축제에 이러한 영혼으로 가득 채우는 날이 되도록 만들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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