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용서의 축복 (마 18:23-35)

  • 잡초 잡초
  • 563
  • 0

첨부 1


  야구선수 박찬호와 골프선수 박세리와 영국 여왕의 공통점 세 가지가 있다고 합니다. 첫째는 공주 출신이라는 것입니다. 둘째는 모자를 썼다는 것입니다. 셋째는 공을 다루며 산다는 것입니다. 영국 여왕은 그의 남편 필립 공을 다루며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서로 다른 점을 찾으며 살기보다는 공통점이 무엇인가를 찾으며 살아야 합니다. 다른 것 때문에 등을 지거나 다투거나 싸우며 사는 전투적인 인생이 아니라 이해하고 용납하고 용서하며 사는 화해적인 인생을 살아야 합니다. 화해는 모두가 살고 행복해지는 첩경입니다.

  오늘 본문에 용서에 대한 크고 새로운 교훈이 있습니다. 랍비들은 이웃의 범죄는 3회까지만 용서하고 그 이상은 금하라고 가르쳤습니다. 예수께서는 유대인들의 전통적 행습이나 랍비들의 가르침이나 일곱 번까지 용서하겠다는 베드로의 제안까지도 거부하시고 당신의 초월적인 권위로 용서에 대한 새 지평을 여셨습니다. 고대 이스라엘인들에게 있어서 보복과 형벌이 끝이 없는 것이라고 한다면 성도에게 있어서 자비와 용서도 더 한층 끝이 없는 것이어야 합니다. 진정 예수 그리스도의 이 새로운 용서의 법은 인간의 추악한 본성이 지닌 무제한적인 복수심을 무제한적인 사랑과 용서로 승리하게 하셨습니다. 용서받고 용서하는 것은 특별한 은혜와 축복입니다. 오늘 용서의 축복이 여러분과 가정과 교회와 사회에 충만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1. 나는 용서받을 수 없었던 죄인입니다

  본문 23-24절"이러므로 천국은 그 종들과 회계하려 하던 어떤 임금과 같으니 회계할 때에 일만 달란트 빚진 자 하나를 데려오매"

  임금에게 일만 달란트 빚진 자가 있었습니다. 임금은 그 몸과 처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갚으라고 하였으나 빚진 자는 갚을 것이 없었습니다. 달란트는 예수 당시의 유대와 로마 사회에서 통용되던 화폐 단위 중 가장 큰 것으로서 순금 약 34Kg에 해당됩니다. 1달란트는 노동자 한 사람의 일일 품삯인 1데나리온의 약 6,000배에 상당하는 것이었습니다. 일만 달란트를 오늘날의 통화로는 10억 달러, 약 한화 1조에 해당하는 천문학적인 액수입니다. 더욱이 유대사가 요세푸스(Josephus)의 증언에 따르면 유대 전역에서 각출된 1년 세금이 고작 800달란트에 불과했다고 하니 일만 달란트의 가치가 얼마나 했는가를 가히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액수는 결코 하나님께 대하여 인간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갚을 수 없는 정도로 큰 죄악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인간 스스로는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용서가 없이는 영원한 죄인이며 지옥의 운명이라는 뜻입니다.

  형제가 여행을 갔다가 돌아왔습니다. 둘은 큰 여행 가방을 메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사는 건물에 도착했을 때 엘리베이터가 고장난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들은 그 건물 80층에 살고 있었습니다.
  "얘야, 엘리베이터가 고장났으니 계단으로 걸어서 올라가자."
  그들은 함께 계단을 올라갔습니다. 아주 힘들었습니다. 20층까지 올랐을 때 형이 다시 동생에게 말했습니다.
  "가방이 너무 무겁구나. 여기에 내려놓고 가자. 일단 집에 올라갔다가 내일 내려와서 다시 가져가자."
  동생도 그러는 게 좋겠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여행 가방을 20층에 놓고 계속 위로 올라갔습니다. 40층에 도착했을 때, 동생은 형을 원망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둘은 티격태격 싸우면서 60층까지 올라갔습니다. 지친 형이 동생에게 말했습니다.
  "20층밖에 안 남았으니 이제 그만 싸우고 조용히 올라가자."
  마침내 80층, 그들 집 문 앞에 도착했습니다. 한숨 돌린 형이 거드름을 피우며 말했습니다.
  "얘야, 문을 열어라."
  그러자 동생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했습니다.
  "장난하지마. 열쇠는 형한테 있잖아."
  열쇠는 그들이 20층에 놓아둔 가방 안에 있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의 인생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스무 살 전에는 가족과 선생님의 기대 속에 스트레스를 받으며 살아갑니다. 스무 살이 지난 후에는 뜨거운 혈기로 자신의 꿈을 실현시켜 나가기 위한 준비를 합니다. 하지만 20년 동안 일하고 난 후, 나이가 마흔쯤 되면 세상사가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절감합니다. 그래서 사장과 회사, 더 나아가 사회를 원망하기도 합니다. 회한과 상심 속에서 20년이 훌쩍 지나갔습니다. 60세가 되면 원망할 대상이 없어집니다. 그저 묵묵히 자신의 남은 생을 걸어갑니다. 그리하여 80세가 되고, 삶이 끝날 때가 되면 비로소 깨닫게 됩니다. '무언가 미처 완성하지 못한 일이 있는데…'라고 말입니다. 그러고는 한참 동안 생각한 끝에 스무 살 시절의 꿈을 이루지 못했음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답답한 우리 자신의 모습입니다. 세월 속에서 나이는 들었는데 제대로 이룬 것은 별로 없습니다. 다시 과거로 돌아갈 수도 없습니다. 실수와 후회를 끝없이 반복하다가 끝나는 것이 인생입니다. 인간은 전적으로 타락하였기 때문에 스스로 죄의 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없습니다. 인간의 지혜, 물질, 선행, 고행, 의지로 벗어나려고 몸부림을 치지만 일만 달란트의 죄의 문제를 결코 해결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모든 인간은 죄인입니다. 특별히 내가 죄인입니다. 죄인 중에 괴수입니다.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는, 용서받을 수 없는 죄된 존재였습니다. 날마다 겸손하게 하나님의 용서를 사모하며 살아가는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2. 나는 용서받은 의인입니다

  본문 26-27절"그 종이 엎드리어 절하며 가로되 내게 참으소서 다 갚으리이다 하거늘 그 종의 주인이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그 빚을 탕감하여 주었더니"

  '탕감'이란 진 빚을 없는 것으로 해 주는 것입니다. 빚진 자가 임금에게 엎드리어 절하며 가로되 "내게 참으소서 다 갚으리이다"라고 했을 때 임금은 불쌍히 여겨 모든 빚을 탕감하여 주었습니다. 임금은 빚진 자가 간구한 것 이상의 것을 약속하였습니다. 임금의 측은지심이었습니다. 긍휼의 은혜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탕감해 주는' 임금의 행위는 석방과 사면의 두 법적 행위를 의미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자신이 지은 엄청난 죄악을 인정하고 용서를 간청하는 죄인에 대해 하나님은 죄에 대한 양심의 가책에서 해방되게 하실 뿐만 아니라 죄에 대한 아무런 보상 없이도 의롭다고 선언하십니다. 의인의 자격은 우리의 지불 능력의 가부에 따라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죄의 선언으로만 가능한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피값에 의하여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모든 죄악을 용서받음으로서 의롭게 되었는데 그리스도의 대속 또한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와 사랑에 의한 것입니다.

  기독교 방송에 맹인 윤인수 목사의 간증 드라마가 방송된 적이 있습니다. 중병으로 앓아 누워 있는 어머니를 간병하기 위해 어린 소년 윤인수가 길거리에 나가 신문을 팔고 구두닦이를 시작했습니다. 친구의 도움을 받긴 했지만 앞을 보지 못하는 윤인수로서는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습니다. 어느 날 윤인수는 열심히 일을 해서 벌은 돈을 가지고 기쁜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와 어머니에게 돈을 내놓았습니다. 돈을 받아 든 어머니는 아들 윤인수의 등을 두들겨 주며 "십일조를 먼저 하나님께 떼자"고 말했습니다. 이에 윤인수는 버럭 화를 내며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어머니, 십일조는 무슨 놈의 십일조입니까? 하나님이 우리한테 해준 게 뭐가 있단 말입니까? 나의 눈은 멀게 됐고 어머니는 중풍으로 병들게 했고, 우리는 공산당에게 쫓겨 피난민 신세가 되게 했고, 재산도 다 빼앗기게 한 그런 하나님께 무슨 놈의 십일조를 내라는 것입니까?"
  그러나 그의 병든 어머니는 어린 아들의 손을 꼭 쥐고 이렇게 권면하였다고 합니다.
  "인수야. 고향 잃어버린 것도 한스럽고, 집 잃어버린 것도 원통하고, 건강 잃어버린 것도 서러운데 하나님까지 잃어버리고 믿음까지 잃어버리면 우리에게 뭐가 남겠니?"

  인간의 결심과 기억력은 한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너무나도 많은 것을 잊고 살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일만 달란트 빚진 죄인이었으나 하나님의 전적인 긍휼과 은혜로 완전히 용서받은 의인이 되었습니다. 용서받은 의인임을 반드시 기억합시다. 별 것 아닌 세상적이고 인간적인 것 때문에 용서의 감격이 작아지거나 변질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전적인 용서를 늘 감사찬송하면서 용서받은 의인으로서 행복한 삶을 누리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3. 나는 형제를 용서해야 할 성도입니다

  본문 35절"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임금으로부터 일만 달란트를 탕감 받은 종은 감격의 눈물이 채 마르기도 전에 백 데나리온 빚진 동관의 목을 잡고 옥에 가두었습니다. 1백 데나리온은 1만 달라트에 비해 60만 분의 1에 불과합니다. 참으로 계산할 가치조차 없는 미미한 소액이었습니다. '동관'이란 채권자와 채무자가 서로 동료 관계에 있음을 시사해 줍니다. 난폭하고도 매정한 성격과 거만한 태도를 표현해 주고 있습니다. 상대에게 극한 모욕을 주는 무자비한 폭행인 것입니다. 임금에게 빚의 지불 기간의 연장을 요청했던 그가 자신의 채무자의 지불 기한 연장을 거절했을 뿐만 아니라 구속시켜 버렸다는 사실은 받은 사랑을 주는 사랑으로 환원하지 못하는 참사랑을 모독하는 모습입니다. 말로서 이뤄진 490번의 용서라고 하더라도 단 한번의 진심에서 우러난 용서보다 못한 것입니다. 이 비유의 결론은 단순히 '끝없는 용서의 회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행한 끝없는 용서'에 그 강조점이 있는 것입니다. 형제를 진심으로 용서하고 용납하는 것만이 하나님과 더불어 화해하며 사랑 받는 길입니다.

  두 친구가 사막을 걷고 있었습니다. 한참을 걸은 후 그들은 어느 지점에 이르러 말다툼을 하게 되었고 한 친구가 다른 친구의 뺨을 때렸습니다. 뺨을 맞은 친구는 매우 아팠지만 아무 말 없이 모래 위에 다음과 같은 말을 썼습니다. '오늘 나의 가장 친한 친구가 내 뺨을 때리다.' 그들은 계속 걸어 오아시스에 도착했습니다. 거기서 목욕을 하고 있는데, 뺨을 맞았던 친구가 수렁에 빠져 점점 가라앉기 시작했습니다. 뺨을 때린 친구는 그를 서둘러 구해 냈습니다. 친구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지게 된 그가 돌에 다음과 같은 글을 새겼습니다. '오늘 나의 가장 친한 친구가 내 생명을 구하다.' 그를 구한 친구가 물었습니다.
  "아까는 모래에 썼는데, 지금은 왜 돌에 쓰는 거야?"
  "누군가 나를 아프게 할 때 모래에 쓰는 것은, 용서의 바람이 불어와 지워버릴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지. 그렇지만 누군가 내게 선을 행하면 절대로 바람이 그것을 지을 수 없도록 돌에 새겨 넣는 거야."

  우리 모두는 하나님으로부터 일만 달란트에 해당되는 용서받을 수 없는 큰 죄를 용서받았으나 우리 형제의 일백 데니리온에 해당되는 용서할 수 있는 작은 죄를 용서하지 않았습니다. 아직도 '그 사람'만큼은 용서할 수 없다고 벼르고 저주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조건 없이, 먼저, 그 사람을 용서합시다. 용서하고 기다립시다. 저주의 권리는 없고 용서의 의무만 우리에게 있습니다. 먼저 용서하면 반드시 화해와 기쁨과 감격의 기적이 임하게 됩니다.

  사랑하는 번동가족 여러분!
  미움과 분노와 싸움이 가득한 세상입니다. 가정과 교회와 사회가 전쟁터와 같습니다. 우리는 용서받을 수 없었던 죄인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용서 받은 의인이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가 모두를 용서해야 할 차례입니다. 용서의 축복을 날마다 누리며 사는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김 정 호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