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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누가와 함께 하는 예수님의 비유연구 9>항상 기도하라, 낙망치 말라 (눅 1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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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장, 기도의 복음서

사람들은 오늘 본문에 나온 예수님의 비유를 ‘불의한 재판관과 과부의 비유’라고 부릅니다. 이 비유를 더 정확히 이해하려면 먼저 본문이 나온 누가복음 18장 전체의 구조를 알아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13장을 ‘사랑장’이라고 부르거나 마태복음 13장을 ‘천국장’, 히브리서 11장을 ‘믿음장’이라고 부르듯이 누가복음 18장에 별명을 붙이라면 ‘기도장’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그 까닭은 누가복음 18장의 전반부에 아주 중요한 기도에 대한 가르침 두 개가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러고 보면 누가복음에는 기도에 관한 가르침이 유난히 많고 다른 어떤 복음서보다도 기도에 대해 많이 강조하기 때문에 누가복음에 ‘기도의 복음서’라는 별명을 붙이기도 합니다.

먼저 누가복음 18:1~8에는 불의한 재판관과 과부의 비유가 나오는데 이 비유는 1절 말씀처럼 주님이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아야 될 것”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기도하다가 응답이 없다고 절대 낙심하지 말고 끝까지 기도하라는 뜻입니다. 또 누가복음 18:9~14에는 다음 주에 살펴볼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 비유가 나옵니다. 이 비유는 참된 기도는 자세가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즉 기도할 때 무엇보다 겸손한 자세가 있어야 그 기도를 하나님이 받아주신다는 것입니다. 이 두 개의 비유로 인해 누가복음 18장을 ‘기도장’이라고까지 부르는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배경 속에서 오늘의 비유인 ‘불의한 재판관과 과부의 비유’를 살펴봅시다.

불의한 법정

얼마 전 신문을 보니 1988년 있었던 ‘지강헌 사건’을 영화화 한다는군요. 여러분, ‘지강헌 사건’ 기억나십니까? 우리나라에 88올림픽이 열리던 해 서울에서는 연쇄강도사건의 범인 지강헌이라는 사람이 체포되어 징역 7년에 보호감호 10년을 선고 받았다가 탈주합니다. 이 탈주범은 권총까지 탈취해 백주대낮 서울에서 인질극을 벌리다 스스로 권총을 쏘아 자살하고 맙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유명해 진 이유는 죽기 전 ‘유전무죄(有錢無罪) 무전유죄(無錢有罪)’라는 말을 남겼기 때문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돈만 있으면 있는 죄도 없어지고, 돈 없으면 없는 죄도 생긴다는 뜻이라고 하네요. 이 말은 당시 사회전체에 큰 파장을 몰고 왔습니다. “정말 속 시원하다!” 거의 모든 서민이 이 탈주범과 똑같이 느꼈지만 감히 말도 못하고 있었는데 이 강도가 대신 해해주니 속이 다 후련했던 것입니다. 문제는 1988년뿐 아니라 20년의 세월이 흐른 오늘날도 많은 사람이 이렇게 느끼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지금도 많은 이들은 여전히 돈만 있으면, 권력만 있으면 얼마든지 법에서 빠져나갈 구멍이 있다고 ‘굳게’ 믿고 있습니다. 이 나라 판사 중에는 정직한 분, 올곧은 분들도 있겠지만, 돈 때문에 타락했거나 재판 받는 사람의 형편에 따라 판결이 달라지는 판사도 있을 것이라는 불심감도 있습니다.

불의한 재판관

오늘 예수님의 비유에 바로 이런 불의한 재판관이 주인공으로 등장합니다. 2절을 보면 어떤 도시에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는’ 재판관이 있었다고 합니다. 요즈음도 판검사라고 하면 사회의 가장 높은 지도층들입니다. 법으로 사람의 목숨도 좌우할 수 있는 막강한 영향력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뭡니까? 이렇게 영향력이 너무 크다보니 자칫 그릇된 판단으로 잘못된 판결을 하거나, 자신의 이익을 위해 공평한 재판을 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예나 지금이나 법정에서의 정의는 그 사회의 정의수준에 척도가 됩니다. 힘없는 사람이든 힘 있는 사람이든, 가난하든 부자든 상관없이 공평한 재판을 받을 수 있으면 정의로운 사회지만 반대로 권력이나 돈으로 법정의 판결이 좌지우지 할 수 있는 사회는 후진국이요 정의가 없는 사회입니다. 그래서 아모스 5:12은 “너희의 허물이 많고 죄악이 중함을 내가 아노라 너희는 의인을 학대하며 뇌물을 받고 성문(재판정)에서 궁핍한 자를 억울하게 하는 자로다”라고 지적하면서 5:15에서 “너희는 악을 미워하고 선을 사랑하며 성문에서 공의를 세울지어다”라고 말씀합니다.

요즈음 새벽기도회에 시편을 함께 읽고 있는데 며칠 전 읽은 시편 72편 1~2절에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하나님이여, 주의 판단력을 왕에게 주시고 주의 의를 왕의 아들에게 주소서, 저가 주의 백성을 의로 판단하며 주의 가난한 자를 공의로 판단하리니...” 계속해서 12절에는 “저는 궁핍한 자의 부르짖을 때에 건지며 도움이 없는 가난한 자도 건지며”라고 했습니다. 당시 왕은 백성들을 재판하는 일도 했기 때문에 특별히 재판관 노릇을 하는 왕에게 올바른 판단력과 의로운 마음을 달라고 간구한 것입니다. 특별히 왕이 재판할 때 가난한 자, 궁핍한 자를 소홀히 여기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이게 무슨 뜻일까요? 그만큼 재판을 하는 데 있어서 올바른 판단력과 공의로운 자세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돈 있다고, 권세 있다고, 백(뒷배) 있다고 해서 봐주고, 가난하다고 힘없다고 멸시하고 죄를 덮어씌우는 일은 결코 없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오늘 비유에 등장하는 재판관은 전형적인 부패한 재판관입니다. 2절에서 그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는 재판관’이라고 합니다. 하나님도 안 무섭고 사람들을 다 무시했습니다. 실제로 예수님 당시에 이런 재판관들이 많았다고 합니다. 당시의 재판관들은 헤롯왕이나 로마 당국에 의해 고용되어 녹을 받고 일했습니다. 따라서 자기에게 월급을 주는 헤롯이나 로마 권력의 하수인일 수밖에 없었고, 게다가 오직 돈밖에 몰라서 “돈에 굶주린 자들”이라는 악명이 자자했습니다. 그러니 법정신이나 정의 같은 것에 관심이 있을 리 없습니다. 쉽게 말하면 뇌물 때문에 판결을 이랬다저랬다 마음대로 바꾸는 판사들이었다는 것입니다. 뇌물 주면 있던 죄도 없어지고, 돈 없고 백 없는 사람이면 없는 죄도 생기는 일들이 부지기수로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항간에는 이들을 ‘다아네 게세롯’이라고 불렀는데 ‘강도 재판’이라는 뜻입니다. 요즈음 말로 바꾸면 ‘날강도 같은 판사들’이라고나 할까요? 따라서 예수님 당시 사람들은 ‘하나님도 안 두려워하고 사람들, 특히 약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무시하는 재판관’이라고 하면 무슨 말인지 다 알았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이 비유에서 재판관을 이렇게 소개하는 데에는 까닭이 있습니다. 앞으로 일어날 일을 설명하기 위해서입니다.

끊임없이 졸라대는 과부

이제 이 비유에서 또 한 명의 주인공이 등장합니다. 3절에 보면 그 도시에 과부가 하나 살았습니다. 왜 하필 과부일까요? 그것은 과부가 당시 사회에서 제일 약하고 소외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요즘에야 과부들도 어떻게든 혼자 살아갈 방법이 있지만 당시 유대사회에서는 여자들이 전적으로 남편에게만 의존하고 살았고 혼자 된 여자들은 마땅한 직업을 가질 수 없었기 때문에 남편을 잃은 과부는 부모를 잃은 고아, 또 전쟁이나 기근으로 고향을 떠난 나그네와 더불어 대표적인 3대 소외계층이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과부는 앞서 나온 재판관과 완전히 반대되는 처지에 있는 사람입니다. 재판관은 존경 받고 영향력 있는 사회지도층의 대표라면 과부는 가난하고 힘없는 자의 대표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별 볼일 없고 힘없는 과부가 재판관을 찾아옵니다. 재판관에게 “내 원수를 좀 갚아주세요”하는 부탁을 하기 위해서입니다. 3절에 “내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 달라”고 부탁하는 것을 보면 아마도 과부는 누군가에게 큰 원한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사기를 당했을까요? 혹시 남편이 남기고 간 적은 재산을 누군가 가로챘는지도 모릅니다. 아무튼 과부는 법정에서 정당한 재판을 통해 그 원수를 처벌해달라고 재판관에게 요구한 것입니다. 요즈음 말로 고소를 한 것이지요. 그렇다면 재판관은 이 고소를 받아들여 당연히 재판을 해야 합니다. 이것이 재판관의 의무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앞서 이 재판관은 어떤 사람이라고 했습니까? 하나님도 안 두려워하고 사람을 무시하는 재판관이라고 했지요? 그러니 이 돈도 없고 백도 없는 과부가 안중에 있을 리 없습니다. 혹시 뇌물이라도 좀 집어주었으면, ‘떡값’이라고 봉투라도 내밀었으면 얘기가 달라졌을 텐데 과부가 돈이 없으니 결과는 뻔하지요.

이제 4절을 보십시오. 예상대로 재판관은 과부의 고소를 무시합니다. 그래서 얼마 동안 그 고소를 무시하고 지내다가 어느 날 갑자기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야, 내가 아무리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는 재판관이지만(알긴 아네요) 이 과부가 나를 이렇게 번거롭게 하니 내가 재판을 해서 원한을 풀어줘야겠다. 안 그러면 이 여자가 만날 와서 나를 괴롭게 할 것이다.” 이 말을 볼 때 우리는 무엇을 알 수 있습니까? 과부가 날마다 이 재판관을 찾아간 것입니다. 재판관이 고소를 받아들이지 않는 동안 과부는 날마다 재판관을 찾아가 왜 빨리 재판 안 해주냐고, 왜 빨리 내 원수 안 갚아 주냐고 졸라댄 것이지요. 여기서 과부가 재판관에게 ‘자주 갔다’고 하는데 이 ‘간다’는 말 자체가 헬라어로 미완료 과거형, 즉 ‘끊임없이 되풀이하다’는 반복적인 의미입니다. 따라서 과부는 끊임없이 재판관을 찾아가 계속 재판 해달라고 호소한 것입니다. 또 ‘번거롭게 한다’는 말은 단순히 성가시게 하는 정도가 아니라 업무에 막대한 지장을 주어서 도저히 정상적인 재판업무를 볼 수 없게 만드는 정도를 뜻합니다. 그래서 재판관은 이렇게 걱정을 합니다. “이 과부 말 안 들어주었다가는 늘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 여기서 ‘늘’은 원어로 ‘끝까지’, 즉 ‘목적이 달성될 때까지’라는 뜻입니다. 재판관은 과부가 자기 탄원 받아줄 때까지 계속 찾아와서 자기 업무도 못 보게 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여러분, 보십시오. 과부가 얼마나 자주 찾아가 끈질기게 졸라댔으면 이 불의하고 뻔뻔한 재판관조차도 귀찮은 마음에 할 수 없이 재판을 해줘야겠다고 생각했겠습니까? “나는 하나님도 안 무섭고 그 어떤 사람도 안 무서운데 이 과부는 무섭다. 안 들어주었다가는 도저히 내가 견딜 수가 없을 테니, 귀찮아서라도 이 과부의 부탁을 들어주어야 하겠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과부의 끈질긴 집념과 호소가 이 재판관의 완악한 마음을 이긴 것입니다.

하물며 하나님께서는...

이제 6절부터 주님은 이 비유의 의미를 설명하십니다. 6절은 이런 뜻입니다. “너희는 이 불의한 재판관의 말을 들었느냐? 못된 재판관이지만 과부가 하도 졸라대니 귀찮아서라도 과부의 부탁을 들어주지 않느냐? 하물며 하나님이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주지 아니하시겠느냐?” 어떤 분들은 이 재판관이 바로 하나님을 뜻한다고 설명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잘못된 해석입니다. 이 불의한 재판관은 하나님을 뜻하지 않고 다만 하나의 부정적인 샘플로 제시된 것입니다. 즉 이런 불의한 재판관, 하나님도 안 두려워하고 사람들도 무시하는 재판관조차도 과부의 그 끈질긴 호소에 굴복해 부탁을 들어주는데, 하물며 하나님께서는 우리 기도를 안 들어주시겠냐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마태복음 7:11에 보면 주님은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고 말씀하십니다. 악한 아버지라도 자식에게 좋은 것을 줄 줄 아는데 하물며 너희 하나님 아버지야 자녀들에게 얼마나 좋은 것으로 주지 않겠느냐 하신 것처럼 불의한 재판관도 끈질기게 붙들고 늘어지는 과부의 호소는 들어주는데 하물며 하나님 아버지야 그 자녀들이 간절히 기도할 때 안 들어주시겠느냐는 뜻입니다. 그냥 기도가 아니라 ‘밤낮 부르짖는’ 기도입니다.

여기에 이 비유의 핵심이 있습니다. 기도는 이렇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기도는 밤낮 쉬지 않고 해야 한다. 항상 기도해야 한다. 기도의 응답이 없는 것 같아도 결코 낙망하지 말고 더더욱 기도해야 한다. 아무리 불의한 재판관이라도 졸라대면 귀찮아서라도 들어주는데 하물며 너희 아버지이신 하나님이시라면 우리 사랑하는 자녀들이, 그 택하신 자들이 그토록 간절하게 기도하고 밤낮 쉬지 않고 간구하는데 어찌 들어주지 않으시겠냐는 뜻입니다. 그래서 1절에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아야 될 것을 저희에게 비유로 하여 가라사대...” 이 비유에 나온 과부가 재판관이 아무런 응답도 안 해 주었지만 실망하지 않고 항상, 끊임없이 호소해서 응답을 받은 것처럼 너희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 하나님의 자녀들도 응답 없다고 낙망치 말고 항상, 끊임없이 기도하고 간구하면 하나님이 반드시 응답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에게  ‘저희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7,8절)며, 응답이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것이라고, 우리 소망을 이루어주시는 날이 생각보다 그리 많이 남지 않았다고 말씀하십니다.

마지막 세대에 찾으시는 믿음

그런데 문제는 8절 맨 마지막에 나온 주님의 말씀입니다. 비유를 다 마치신 후 주님은 난데없이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라는 말씀을 툭 던지십니다. 인자, 즉 예수님이 오실 때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니 도대체 이게 무슨 뜻일까요? 이것은 이 과부 같은 믿음을 가진 사람이 세상에 드물다는 뜻입니다. 끝까지 실망하지 않는 믿음을 찾아보기 어렵다는 말입니다. 특별히 주님 오실 때, 즉 말세가 되면 점점 더 사람들이 조급해지고 인내와 믿음이 식어집니다. 디모데후서 3:4에 말세가 되면 사람들이 ‘조급해진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조급증에 걸린 사람들은 인내심도 없어지고 참고 기다릴 줄도 모르게 됩니다. 조금만 힘들어도 주님을 배신하고 교회를 떠나게 됩니다. 기도를 해도 응답이 없으면 절망하고 하나님을 원망하게 됩니다. 주님은 바로 이 점을 지적하면서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이런 믿음, 즉 과부처럼 끈질긴 믿음, 혹은 힘들고 어려워도, 응답이 없어도 참고 기다리는 믿음을 볼 수 있겠느냐고 물으신 것입니다.

나아가 이런 믿음이 왜 없냐고 책망만 하시는 것이 아니라 마지막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까지 이렇게 끈질기게 기도하는, 낙망치 않고 밤낮 기도하는 자녀들을 볼 수 있으면 좋겠다는, 너희가 그런 기도의 사람이 되라는 격려의 뜻입니다. 이렇게 보면 우리가 앞서 누가복음 11장에서 본 강청기도, 즉 한밤중에 친구에게 찾아가 떡 세 덩이 달라고 조른 사람과 비슷합니다. 워낙 비슷해서 두 비유를 ‘쌍둥이 비유’라고까지 부릅니다. 하지만 이 강청기도에 비해 오늘 과부가 보여준 강청기도는 훨씬 더 강력하고 더 구체적입니다. 뜻을 이룰 때까지, 내 소원을 들어줄 때까지 결코 포기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변에서 간절한 기도로 응답 받은 사람들을 많이 봅니다. 그 힘은 어떤 상황에서도 절대 희망을 잃지 않고, 반드시 하나님이 응답하시리라는 소망을 붙잡고 기도한 데서 나옵니다. 마귀사탄이 우리 성도들을 넘어뜨리는데 이용하는 가장 무서운 무기는 절망입니다. 이탈리아의 위대한 시인 단테는 유명한 장편서사시 ‘신곡’(神曲)을 썼습니다. 이 ‘신곡’에 보면 단테가 지옥에 도착했을 때 지옥문 위에 어떤 글귀가 써있었다고 합니다. 뭐라고 써있었을까요? 바로 “여기로 들어오는 모든 자들은 희망을 버릴지어다”라는 글입니다. 그렇습니다. 희망을 잃어버리면 그 때부터가 바로 지옥입니다. 그래서 우리 천국백성들은 어떤 일이 있어도 절망을 이겨내고 희망을 붙잡는 기도를 해야 합니다. 그래야 응답 받는 기도가 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습니다. 그래야 마지막 때 주님이 오실 때 주님이 우리의 믿음을 보고 “내가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노라”(마 8:10)고 칭찬하실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런 기도의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이  하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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