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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이 땅의 죄악을 하루에 제하리라 (슥 3: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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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의사’하면 보통 ‘병 고치는 사람’이라는 개념이 먼저 떠오릅니다.
  물론 의사에게 있어서 치료하는 능력이 중요한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지만, 그에 못지않은 또 하나 중요한 것이 있는데 그것이 곧 진단의 능력입니다.
  우선 환자의 병이 어떤 것인지, 그 상태가 어떠한지를 정확하게 진단해 낼 수 있어야만 그에 대한 적절한 처방을 준다든지 치료를 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가끔 듣기도 하고 실제로 겪기도 하는 일이지만, 초기 진단이 잘못되어 전혀 엉뚱한 약을 쓰고 불필요한 치료를 됨으로써 오히려 병이 더 도지게 되는 환자들이 실제로 꽤 많이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 포로지에서 해방을 얻어 유다로 돌아와서 새 예루살렘을 건설하고 있던 시기에 하나님께서 선지자 스가랴에게 일련의 환상들을 통하여 내려 주신 계시입니다.
  그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의 조국 재건은 하나도 제대로 되는 일이 없고 새로운 문제들만 계속 산적해 가는 마당이어서 도대체 어떤 것부터 어떤 식으로 풀어나가야 할지 난감하기만 했던 상황이었습니다.
  바로 그런 가운데 하나님께서는 스가랴 선지자를 통하여 그들의 가장 근본적이고도 고질적인 문제가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진단해 주시면서 동시에 아예 처방과 치료 방법까지 자세히 가르쳐 주셨던 것입니다.

  그것들이 무엇이었습니까?
  모든 시대의 모든 사람들이 자기 자신에 대하여 꼭 바로 알고 있어야만 할 가장 중요한 진단이 무엇이며 또한 그 고질적인 문제에 대한 처방은 과연 무엇입니까?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만이 이 문제에 대하여 유일한 정답을 오늘도 들려주고 계십니다.

  1. 아무리 선하게 보이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예외가 없이 하나님 앞에서는 ‘오직 죄인’일 뿐입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께서 모든 인생을 두고 내려 주시는 가장 정확한 진단입니다.
  본문 1절부터 3절에 기록하기를 “대제사장 여호수아는 여호와의 사자 앞에 섰고 사단은 그의 우편에 서서 그를 대적하는 것을 여호와께서 내게 보이시니라 /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사단아 여호와가 너를 책망하노라 예루살렘을 택한 여호와가 너를 책망하노라 이는 불에서 꺼낸 그슬린 나무가 아니냐 하실 때에 / 여호수아가 더러운 옷을 입고 천사 앞에 섰는지라”고 했습니다.

  스가랴 선지자는 이 네 번째 이상을 통하여 실로 뜻밖의 장면을 보게 됩니다.
  그것은 “대제사장 여호수아가 여호와의 사자 앞에 섰고 사단은 그의 우편에 서서 그를 대적하는” 장면이었습니다.
  이 ‘여호와의 사자’는 구약에서 성자 하나님을 가리킬 때 쓰이는 대표적인 명칭입니다.
  사단은 대제사장 여호수아의 우편에 서서 “그를 대적하고” 있었다고 했는데, 이것은 사단이 여호수아를 고소하는 고발자의 위치에 서 있는 것을 뜻합니다. ‘사단’이란 이름 자체가 원래 ‘고발자’라는 어원에서 온 것이라는 사실이 이 장면에서는 더욱 잘 들어맞고 있는 셈입니다.

  대제사장 여호수아는 당시 바벨론에서 예루살렘으로 귀환한 이스라엘 백성 중에 초대 대제사장이 되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대제사장이 서 있는 어떤 장소를 생각한다면, 성전이라든지 제단 앞이라든지 해야 어울리는 법인데, 지금 여호수아는 천상의 법정에서 사단의 고발을 받으며 재판장 되신 하나님 앞에 서 있는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로서는 평소에는 상상도 할 수 없던 아주 이상한 장면이었습니다.

  더구나 3절에 보면 그 대제사장 여호수아는 “더러운 옷”을 입고 있었다고 했습니다.
  즉 그는 대제사장이 보통 때에 입고 있는 아름답고 깨끗한 세마포 예복이 아니라 때가 새까맣게 뭍은 더러운 옷을 입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곧 그가 그 법정에서는 실로 변명의 여지가 없는 죄인의 신분으로 서 있음을 상징합니다.

  대제사장하면 두말 할 것 없이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서는 그 직분상 가장 거룩한 자리에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를 성전이나 길거리에서 만나게 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눈에는 늘 거룩하고 깨끗하고 의롭고 선한 인상만 주던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그런 여호수아가 이처럼 더러운 죄인의 모습으로, 그것도 사단의 고발을 받으며 서 있다는 것은, 정말 어울리지 않는 장면이며 수치스러운 모습이며 사람으로서는 상상할 수도 없었던 광경이었습니다.

  하지만 바로 그런 여호수아의 모습이야말로 하나님의 눈에 비치고 있는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의 참 모습이었으며 오늘날 우리들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완벽하게 거룩하시고 선하시고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는, 제 아무리 이 땅에서 남보다 좀 더 거룩하게 보이고 선하게 보이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오직 죄인이라는 피고의 입장만으로 설 수 있을 따름입니다.
  우리가 ‘나는 착한 사람이다,’라든지 ‘저 사람은 법 없이도 살 수 있는 사람이다.’라고들 말하는 것은 오직 우리 사람들끼리 ‘도토리 키 재기’하면서 하는 말이지, 하나님 앞에서는 어림도 없는 소리일 뿐인 것입니다.

  아무리 도토리 중에서는 제일 크다고 해도 밤알 한 톨에는 비교의 상대도 되지 않을 것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하물며 사람이 제 아무리 남보다 좀 더 착하고 의롭다고 해도 저 완벽하게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는 어떻게 무슨 양심적인 사람이니 성자니 하면서 자기는 죄인이라는 소리 듣기 싫다고 감히 말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것은 결코 무슨 양심선언이 아니라 지독한 교만의 망언일 뿐인 것입니다.

  세상에서 그 어떤 선한 사람이라 해도 저 거룩하신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는 단 한 명의 예외도 없이 전적으로 무력한 죄인이 될 뿐입니다.
  아무리 양심적인 사람이라 해도 죄라고는 한 점도 없으신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는 그 누구나 다 예외가 없이 ‘전적으로 타락한’ 죄인에 불과한 것입니다.
  거기에는 대제사장이라고 해서 예외가 될 수 없고, 목사나 장로라고 해서 예외가 될 수 없습니다.
  아니 사람 중에서는 더 이상 거룩하고 선할 수 없는 어떤 최고의 의인을 골라 그 자리에 세운다 하더라도, 그는 사단 따위의 악한 존재로부터도 오히려 고발을 받으면서도 말 한 마디 변명할 수 없는 실로 비참한 위치에 있는 죄인일 뿐인 것입니다.

  오직 죄와 아무 상관없이 완벽하게 거룩하신 하나님만이 이와 같이 우리 인생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를 정확하게 진단해 주고 계십니다.
  자신의 이 고질병을 모르면 아무도 자기 인생의 진짜 문제를 해결 받을 길이 없어집니다.
  우리가 겉으로는 사람들의 눈에 설사 대제사장처럼 거룩하게 보인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는 꼭 같이 더러운 옷을 입고 서 있는 꼭 같은 죄인에 불과한 존재인 것을 먼저 겸손하게 깨닫고 인정함으로써, 그 병에 대한 바른 치료를 시작할 수 있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그 어떤 악한 죄인이라 할지라도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단번에 죄 용서함을 입을 수 있습니다.

  4절과 5절에 기록하기를 “여호와께서 자기 앞에 선 자들에게 명하사 그 더러운 옷을 벗기라 하시고 또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 죄과를 제하여 버렸으니 네게 아름다운 옷을 입히리라 하시기로 / 내가 말하되 정한 관을 그 머리에 씌우소서 하매 곧 정한 관을 그 머리에 씌우며 옷을 입히고 여호와의 사자는 곁에 섰더라”고 했습니다.

  여호수아가 비록 대제사장이라 할지라도 그처럼 자기 죄에 대한 변호에 있어서는 전적으로 무력한 상태에 있을 때, 실로 놀라운 일이 그 법정에서 벌어집니다. 그것은 재판장 되신 하나님께서 무조건 피고의 편을 들어 주시는 장면입니다.

  우선 아까 2절을 다시 보시면, 여호와께서는 오히려 사단을 “책망”하셨습니다.
  지금 여호수아를 심판대에 세워 놓고 신이 나서 침이 마르도록 그를 고발하고 있는 사단을 향하여 하나님께서 “여호와가 너를 책망하노라”고 두 번씩이나 호통을 치고 계십니다.
  재판장이 죄인을 책망하는 대신 검사를 향하여 대갈일성 야단치는 실로 신기한 장면이 벌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그 재판장은 “예루살렘을 택한 여호와”이시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재판장 되신 하나님은 이미 그 피고 된 이스라엘 백성을 택하시고 사랑하고 계시는, 아주 ‘편파적’인 분이시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이스라엘 백성을 가리켜 “불에서 꺼낸 그슬린 나무”라고 표현하고 계시는 것은, 바로 바벨론 포로 생활의 고난 중에서 건져 내어 주셔서 살아남게 만드신 백성이란 뜻입니다.
  지금 예루살렘에 돌아온 유다인들은 이처럼 이미 당신의 특별하신 사랑을 입고 있는 자들인데, 그런 당신의 택하신 백성을 어떻게 감히 고발하느냐고, 하나님께서는 대제사장 여호수아의 우편에 서 있는 그 고발자 사단을 향하여 오히려 크게 책망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피고 입장에서는 이보다 더 좋은 일이 어떻게 있을 수 있겠습니까?
  지금 자기 앞에 앉아 있는 재판장이 아예 처음부터 완전히 자기편이 되어 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오히려 자기를 고발하는 검사가 자기의 죄를 나열하고 구형하기는커녕 한 마디 대꾸도 하지 못하고 고개조차 들지 못할 정도로 재판장으로부터 야단을 맞고 있는 장면이 벌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세상의 그 어느 법정에서도 일어날 수 없는, 세상의 그 어느 피고도 기대하거나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입니다.

  하지만 바로 그런 일이 하나님의 법정에서는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택함을 입은 백성을 아무도 정죄하지 못하도록 아예 그 고발자들의 말문을 막아 버리시는 신기한 재판장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그것은 죄인이었던 피고에게는 실로 은혜가 아니겠습니까?
  사도 바울은 바로 그 은혜를 두고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누가 능히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롬 8:33, 34)라고 감격에 겨워 외쳤던 것입니다.

  그 재판장은 검사를 책망할 뿐 아니라 피고에게 최고의 선처를 내려 주셨습니다.
  그의 “더러운 옷”을 당장 벗겨 버리게 하고 그 대신 “아름다운 옷”으로 바로 그 자리에서 갈아입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시면서 그것이 바로 “네 죄과를 제하여 버린” 표식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죄악을 따지고 선고내린 후에 감형해 주신 분이 아니라, 아예 재판 첫 순간에 ‘무조건 무죄’라고 선언해 주시는 재판장이 되셨던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한 술 더 떠서 “정한 관”을 그 여호수아의 머리에 씌워 주셨습니다.
  이것은 바로 천상에서 하나님과 교제하며 동거할 수 있는 영화로운 자격을 상징합니다.
  그저 죄인의 죄만 용서해 주시고 다시 땅에만 살도록 하시는 분이 아니라, 아예 그 죄인을 재판장과 같은 위치에까지 끌어 올려 주시고 함께 살 수 있을 만큼 그 신분을 격상시켜 주시는, 정말 기가 막히는 재판장이신 것입니다.

  바로 이런 신기한 재판 과정을 통하여, 처음에는 여호수아의 “앞”(1절)에 서 계시던 여호와의 사자는 이제 여호수아의 “곁”(5절)에 서 주시게 됩니다.
  즉 그 재판은 죄인을 심판하시던 위치에 계시던 하나님께서 아예 죄인과 나란히 서 주시는 희한한 장면으로 끝을 맺게 되는 것입니다.

  실로 우리는 얼마나 은혜로운 재판정에 있는 것이겠습니까?
  남으로부터 고발당하는 것은 참 괴로운 일입니다.
  못난이라고 손가락질 당하는 것, 나쁜 놈이라고 욕을 듣는 것, 죄인이라고 정죄당하는 것은 그 어떤 사람에게나 괴로운 일입니다.
  비록 자신은 그런 고발을 당해도 싼 처지에 있다 하더라도, 꼭 같이 죄인인 다른 사람으로부터, 아니 죄악 세계의 임금인 사단으로부터 그런 고발을 당하는 것은 정말 고통스러운 일인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런 무력한 피고 입장에 있던 우리 죄인들을 뜻밖에도 오히려 감싸 주시고 전적으로 무죄 선언을 내려 주시는 실로 신기한 재판장이십니다.
  당연히 우리에게 사형언도가 내려져야 마땅할 그 무서운 ‘백보좌’ 바로 그 자리에서 하나님께서는 저와 여러분에게 오히려 빛나는 세마포를 입히시고 영광의 면류관으로 씌우시고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그 영화로운 천성으로, 그 하나님 바로 곁에 서게 되는 양자의 위치에까지 끌어올려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은혜가 아니면 도대체 무엇이겠습니까?

  눈을 씻고 찾아다녀 보십시오.
  세상의 그 어떤 다른 종교에서, 그 어떤 교주가 이처럼 은혜로운 죄 용서를 우리에게 베풀어 주고 있습니까?
  마땅히 죄를 심판하고 벌주실 그 재판장께서 오히려 철두철미하게 죄인의 편이 되어 주시는 이 황송스럽기 짝이 없는 은혜, 오직 인애와 자비가 한량없으신 하나님만이 내려주시는 이 놀라운 ‘오직 은혜’의 사죄만을 전적으로 의지하고 실제로 체험하는 복된 성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3. 그런 무조건적인 사죄의 은총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만 베풀어집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은혜로운 죄 용서함을 시술해 주시는 유일한 의사 한 분을 또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소개해 주셨습니다.
  6절로 9절 말씀에 기록하기를 “여호와의 사자가 여호수아에게 증거하여 가로되 /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에 네가 만일 내 도를 준행하며 내 율례를 지키면 네가 내 집을 다스릴 것이요 내 뜰을 지킬 것이며 내가 또 너로 여기 섰는 자들 중에 왕래케 하리라 / 대제사장 여호수아야 너와 네 앞에 앉은 네 동료들은 내 말을 들을 것이니라 이들은 예표의 사람이라 내가 내 종 순을 나게 하리라 /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너 여호수아 앞에 세운 돌을 보라 한 돌에 일곱 눈이 있느니라 내가 새길 것을 새기며 이 땅의 죄악을 하루에 제하리라”고 했습니다.

  이어서 여호와의 사자께서는 그처럼 죄 용서함을 선언 받은 대제사장 여호수아에게 그가 앞으로 살아가야 할 길을 일러 주십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도와 율례”를 준행하며 지키는 것이었습니다.
  죄 용서함의 은혜를 체험한 성도에게 따라오는 것이 바로 성경 말씀에 순종하며 충성하는 생활이 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렇게 살 때 “네가 내 집을 다스릴 것이요 내 뜰을 지킬 것이며”라는 축복이 이어진다고 하셨습니다.
  즉 죄용서함을 받은 성도들이 교회를 섬기는 복스러운 직분을 감당하게 될 것을 가리키는 말씀입니다.

  유의해야 할 것은, 이 모든 것들이 5절 이전에 기록된 죄 사함의 선언 이후에 따라온다는 사실입니다.
  여호수아가 말씀 잘 순종하고 성전을 잘 섬김으로써 그 대가로 그의 죄과가 제하여 버림을 받은 것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죄 사함 받은 것을 무조건으로 먼저 선언해 주신 후에 이런 일련의 생활 지침을 내려 주신 것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오늘날의 성도들 역시 먼저 하나님께로부터 죄 사함 받았다는 이 은혜에 대한 확신이 있을 때, 그 감격에 넘쳐서 말씀 중심, 교회 중심으로 사는 성화의 생활이 자연히 따라오게 되는 것입니다.

  대제사장 여호수아에게는 이처럼 공짜로 선언된 죄 사함이었지만, 하나님 편에서는 결코 아무 값없이 내려 주신 무죄 선언은 아니었습니다.
  그와 같은 재판장의 자비로운 공의는 오직 장차 오실 메시아의 구속 사역을 통해서만 가능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바로 8절 이하의 말씀에서 예언하고 있는 바가 그것입니다.

  “여호수아와 그의 동료들” 즉 모든 제사장들은 바로 “예표의 사람” 즉 ‘미래에 있을 좋은 것의 상징’이라고 했습니다.
  물론 이것은 참된 대제사장으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지칭하는 말씀입니다.
  그 메시아를 가리켜 “내 종 순(荀)”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그 메시아께서 ‘종’의 모습, 즉 비천하고도 연약한 모습으로 오실 것을 가리킵니다.
  바로 이사야 53장에 예언되어 있듯이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고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는” 연한 순으로, 아니 오히려 “멸시를 받고 간고를 많이 겪으며 귀히 여김을 받지 못하는” 종으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여기서 또다시 예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처럼 천하고 약한 모습으로 이 땅에 오신 메시아께서 장차 “한 돌”이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바로 흔들리지 않는 든든한 교회의 기초가 되실 메시아를 뜻하는 말씀입니다.
  그 돌에 “일곱 눈”이 있다는 말씀은, 바로 온 세상을 밝히 살피시며 인도하시는 성령을 가리키는 상징이며, 전체적으로는 바로 보혜사 성령을 통하여 교회를 세우시고 지키실 그리스도의 사역을 뜻하는 말씀이 됩니다.

  그 돌에 “새길 것을 새기며”라고 했습니다.
  우리 개역번역에는 조금 부자연스럽게 번역되어 있지만, 원래 원문의 뜻은 바로 그 돌에 “이 땅의 죄악을 하루에 제하리라”는 글자가 새겨질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즉 메시아의 영원히 효력 있는 사역의 초점이 바로 여기에 집중되어 있음을 강조하는 표현입니다.
  “하루에”라는 말은 문자적으로 ‘바로 그 날에’라는 뜻입니다.
  여호수아나 이스라엘 백성뿐 아니라 “이 땅의 죄악” 전체를 다 순식간에 제하여 버릴 그 한 날이란 어느 날이겠습니까?
  두말할 것 없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그 한 날입니다.

  어느 유대인 랍비가 바로 이 본문을 해석하면서 “나는 모르지만 미래의 어느 한 날에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가 모두 제함을 받게 될 것이다.”라고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그때 예수를 믿는 한 소년이 “그 날이 어떻게 ‘이스라엘 백성’의 죄만 사해지는 날이 되겠습니까? ‘이 땅의 죄악’이라고 했으니 온 세상 사람의 죄가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그 날은 바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날이 아닙니까?”라고 반문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 랍비가 대꾸할 말을 잃은 것을 물론입니다.
  성령의 감동을 받은 자라면 비록 어린 아이라 할지라도 이 말씀이 뜻하는 바가 무엇이며 이 예언이 가리키는 사람이 누구인지는 이토록 명백한 것입니다. 죄인으로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그 놀라운 사죄의 은혜는 오직 이런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이 있었던 까닭에 가능하게 된 것이라고 하나님께서 이미 구약에서부터 곳곳에 증거해 주고 계셨던 것입니다.

  의사라고 다 같은 의사가 아니지 않습니까?
  아무리 병명을 알고 처방전과 치료법까지 알게 되었다 하더라도, 시술하는 의사가 가짜이거나 돌팔이이면 치료는커녕 더욱 악화되고 끝내는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다른 종교에서도 ‘구원’이라는 말을 쓰고 ‘사죄’라는 단어도 쓰기는 하겠지만, 그 교주들은 그야말로 ‘돌팔이 의사’에 불과한 것입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런 종교적 돌팔이 의사 때문에 고생을 했습니까?
  중세에는 자기 자신의 몸을 채찍으로 때리면서 돌아다니면서 죄 용서 받겠다는 순례자 집단들이 도처에서 발생했었습니다.
  돈을 주고 면죄부를 사면 이미 지옥 가 있는 자기 부모도 천당까지 보낼 수 있다는 엉터리 사기 진단을 믿었던 사람들도 부지기수였습니다.
  오늘날에도 뭔가를 스스로 깨달아야만 구원 얻을 수 있다고 해서 그러지 않아도 복잡한 인생을 더욱 골머리 앓게 만드는 교주를 따르는 소위 종교인들이 수두룩합니다.
  다들 의사 하나 잘못 만나서 고생은 고생대로 톡톡히 하고 그 죄의 병은 더욱 중증으로, 아니 아예 불치의 병으로 악화되고 있는 불쌍한 인생들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라는 이 신기하고도 완벽한 죄의 치료법을 시술해 주시는 구세주는 오직 예수님 한분밖에 없습니다.
  죄의 병을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하여 스스로 사람의 몸을 입고 연약한 순 같이 이 땅에서 사셨던 예수님, 그 병을 확실히 고쳐 주시겠다는 언약을 십자가에서 대신 죽으신 당신의 몸에 아예 새겨 주신 예수님, 오늘도 고발당할 수밖에 없는 죄인 바로 곁에 나란히 서 주시고 죄인을 변호해 주시는 이 예수님 안에서만 오직 사죄의 은총이 있고 구원의 약속이 성취될 것을 믿고 소망하는 성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님 여러분, 10절 말씀에 결론적으로 기록하기를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날에 너희가 각각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아래로 서로 초대하리라 하셨느니라”고 했습니다.
  이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 사역을 체험하게 된 날이야말로 죄인에게는 실로 인생 최대의 기쁜 날이 됩니다.
  “각각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아래로 서로 초대하는” 날, 즉 구원의 확신을 가진 성도들만이 교회를 중심으로 기쁨과 행복 가운데서 교통하며 살게 될 것이라고 예언하신 것입니다.
  죄 용서함 받는 것이야말로 죄인들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기쁨이며 그런 같은 은혜를 공유한 성도들이 모여 있는 교회야말로 지상 최대의 잔치가 연일 벌어지는 이 땅의 천국이 아니겠습니까?

  바로 이런 기쁨과 축복을 누리게 하시기 위하여 ‘아무리 인간적으로 선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꼭 같은 죄인이다.’라는 가장 중요하고 정확한 진단을 하나님께서 친히 내려 주셨습니다.
  ‘죄인은 자신의 노력이나 공로 때문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만 고침 받을 수 있다.’라는 유일한 처방을 또한 하나님께서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런 은혜로운 사죄의 치유를 공짜로 그리고 무조건적으로 베풀어 줄 의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뿐이시다.’라고, 그 죄의 병을 고쳐 주실 유일한 의사 역시 하나님께서 알려 주셨습니다.
  바로 이것을 우리에게 똑 바로 알려 주시기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사람들 중에서는 가장 거룩하게 여기고 의롭게 여기고 완벽하게 여기는 대제사장 여호수아를 스가랴 선지자의 환상 중에 세우시고, 그 대제사장조차도 하나님 앞에서는 더러운 죄인일 뿐이며 대제사장 역시 자신이 드리는 최상의 제물 때문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써 구원받을 수 있을 뿐이며, 대제사장이라고 해서 자신이 백성의 중보자가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역시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가 필요한 존재일 뿐임을 이처럼 충격적으로 뚜렷하게 계시해 주셨던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정확한 진단과 이 확실한 치료보다 더 중요한 것, 더 급한 것이 우리 인생에서 무엇이 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마 9:12, 13)고 말씀하셨습니다.
  자기가 죄인인 줄 모르고 스스로 건강하다고 교만하는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어집니다.
  하지만 그 진단을 겸손히 받고 자기 병을 인식할 때, 그 때는 이 의원되신 예수 그리스도가 얼마나 귀하고도 고마운 분이신지를 절감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땅의 죄악을 하루에 제하리라”는 선언을 갈보리의 십자가 위에서 성취해 놓으신 주님께서는 바로 오늘 저와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을 향하여 “내가 네 죄과를 제하여 버렸으니”라고 또한 약속해 주고 계십니다.
  세상의 그 어떤 다른 의사도, 그 어떤 다른 철학자나 과학자나 정치가도 내려 주지 못한 이 인생의 진단과 이 구원의 처방을 받고, 금세에서 죄 용서함의 은총을 입고 내세에서 영생의 축복을 함께 누리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석  기 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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