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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잡힌 것, 잡은 것 (빌 4: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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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사람들은 자기 자신에 대하여 부정적인 생각을 몰아내고, 긍정적인 자아상을 심어야 인생을 성공할 수 있습니다.  존 맥스웰은 그의 책 [오늘을 사는 원칙]에서 "어제는 어제로 끝났다"라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과거에 얽매이지 않으면서도 과거를 거울삼고, 분명한 목표를 세우고, 미래를 향하여 전진해야겠습니다. 그는 이런 말을 합니다.  "인생에서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싶으면 오늘에 집중해야 한다"고 합니다.  "가능성을 찾고, 일에 집중하고, 좋은 건강을 유지하고, 안정감을 느끼고, 우위를 점하고, 끈기를 갖고, 다양한 선택을 하고, 내적 평온함을 느끼고 성취감을 느끼고 가치를 느끼고 방향을 찾고, 배우고 학습하면서 하루를 살라"고 합니다.

  존 맥스웰은 그의 친구 데일 위더링톤(Dale Witherington)의 "인생을 설계하는 사람의 신조"라는 제목의 시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인생을 설계하는 사람의 신조
"오늘은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날/ 성공과 승리, 노력과 패배로 가득 찬 어제는/ 이미 사라지고 없다. // 과거는 과거일 뿐/ 이미 지나갔고/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시간이다./ 과거를 되돌릴 수 없는 법, 과거로 돌아가서 바꿀 수 없는 법/ 그러나 나는 과거로부터 배워서 오늘을 개선한다.//  오늘, 바로 이 순간은/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선물이자 내가 갖고 있는 모든 것// 즐거움과 설움, 승리와 고뇌로 가득 찬 내일은 여기에 없다./ 오지도 않을 수 있는 내일을/ 나는 결코 걱정하지 않으리//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것은 오늘/ 이것이 내가 가진 모든 것이니, 최선을 다하리/ 오늘, 내가 가진 모든 능력과 자질과 성격을/ 가족과 친구와 고객과 동료들에게 보여주리/ 오늘 내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것들을 찾아내서/ 끝까지 최선을 다해 마무리지으리/ 그렇게 오늘이 지나간다면/ 내가 이룬 것들을 흡족하게 바라볼 수 있으리// 그 때, 바로 그 때, 오늘보다 더 좋은 내일을 꿈꾸며/ 하나님과 함께 내일을 계획하리라./ 그리고 나는 평화와 만족을 느끼며 잠자리에 들리라" 참 귀한 시라고 생각합니다.  벤자민 프랭클린은 "오늘 하루는 미래의 이틀을 합친 것보다 더 가치 있다.  지금의 내가 미래의 나를 만든다"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자신에 대하여 항상 긍정적인 생각을 가졌습니다.  유대교의 교권자들이 그를 공격할 때에 할 수 없이 자신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것은 자만하기 때문이 아니요, 교인들에게 특별한 신임을 얻으려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유대인들이 어떤 특권의식이나 선민의식이 있었다고 하면 바울 자신도 그들에게 조금도 뒤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고 있을 뿐입니다. 

  바울은 진정으로 유대인이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그런 특권이나 선민사상을 내려놓을 수 있었고, 모두다 양보할 수 있었습니다.  과거에 그렇게도 자랑스럽게 여겼던 어떤 권리라도 과감하게 내어버리고 해로운 것으로 여길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상 고상하고 고귀하였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되었고, 그의 소유가 된 후로는 세상의 어떤 보화라고 버릴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위한 일이라고 하면 나머지 모든 것은 배설물처럼 여길 수 있었습니다.  바울은 그가 가진 특권을 하나하나 열거하는데 그 모든 것은 사실 대단한 의미가 있는 것들이었습니다. 

  그는 태어난 지 8일만에 할례를 받았는데, 할례는 아브라함에게 명령한 것이요, 그의 몸에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라는 표지를 가지는 것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의 자식 중에 난 지 8일만에 할례 받는다는 것은 13살에 할례 받는 이스마엘 족속이나 유대교로 개종한 사람이 성년으로 받은 할례도 아니요, 태어나면서부터 유대교를 믿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 족속이라고 했습니다.  유대인들이 이스라엘 족속이라는 말을 할 때는 하나님과 특별한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족속이란 말은 하나님의 택하신 언약의 백성이란 뜻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아들 중에 하갈을 통하여 낳은 이스마엘이나, 이삭의 아들 가운데 에서의 후손인 에돔 족속도 이스라엘 족속이란 말을 쓸 수 없습니다.  바울이 이스라엘 족속이란 말을 하는 것은 순수한 선민이요, 언약의 백성이라는 말이었습니다. 

  바울은 이스라엘 12지파 중에 베냐민 지파였습니다.  베냐민 지파라고 하면 이스라엘 12지파 중에서 최고 알아주는 엘리트에 속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베냐민 지파는 이스라엘 12지파 중에서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베냐민은 야곱이 사랑한 부인 라헬의 아들이요, 오직 베냐민만이 약속의 땅이요 하나님이 축복하신 가나안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왕 사울이 베냐민 지파 출신이었기에 왕족이었습니다. 

  단일 국가 이스라엘이 남쪽의 유다와 북쪽의 이스라엘로 나뉘어질 때에 베냐민 지파는 남쪽 유다에 속하였으며,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와서 유다를 재건할 때에 앞장 선 사람들이었습니다.  북왕국의 이스라엘은 역사상에서 사라졌지만, 남쪽의 유다는 나라를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이 베냐민 지파 출신으로 바벨론 포로 시절에 나라를 사랑하고 유대인들을 죽음의 자리에서 건진 이가 있었는데, 그가 에스더라는 왕후요, 모르드개가 있습니다. 바울이 자기 집안이 베냐민이라고 하는 말은 이스라엘 12지파에서 가장 알아주는 지파라는 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은 모국어인 히브리어를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이요, 양친이 모두 히브리인이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바벨론 포로 이후에 전 세계에 흩어져 살던 유대인들이 모국어인 히브리어를 잊어버리고 헬라어를 사용하던지 바벨론에서 사용하던 아람어를 사용하였지만, 그는 히브리어를 잊지 않고 자유롭게 구사할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순수한 혈통의 유대인이요, 히브리어를 사용할 수 있었기에 그가 붙잡혔을 때에 그는 자기의 모국어인 히브리 언어로 자기를 변호하는 말을 하였습니다.

  바울은 율법을 제대로 알고 지키는 바리새인이었습니다. 그가 바리새인이라고 하는 말은 여러 번 강조하였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아주 많은 것이 아니라, 당시에 약 6000명 정도 있었습니다. "바리새"라는 말이 "분리"라는 말입니다. 그들은 성별의식을 유지하기 위하여 헬라화되어 가는 사두개파의 교권자들과 하스모니안 왕조의 사람들과 결별하였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바로 지키기 위하여 세상과 구별하였습니다. 율법만이 그들의 전부였습니다. 

  바울은 율법을 수호하기 위하여 대단한 열심을 가졌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새롭게 일어나는 기독교회를 박해하였습니다.  구약에서 비느하스란 제사장이 하나님을 향한 열심을 가졌기에 민족을 구하고 영원한 제사장이 되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심판을 거두게 하려고 이방여인을 끌어들인 시므온이란 사람을 이방여인과 함께 죽였습니다.  시편 기자는 시69:9에서 "주의 집을 위하는 열성이 나를 삼키고"라는 말씀 그대로 유대교를 지키고, 율법을 지키기 위하여 이단과 반대자들을 상대로 싸웠습니다. 그는 기독교에 들어오기 전에 유대교를 지키고 율법을 지키려는 목적으로 교회를 핍박하고 없애려 하였다고 여러 번 간증하고 있습니다.  지금 그렇게도 사랑하고 의지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미워하였고 이단시하였으며, 저주하였던 사람이라고 그의 부끄러운 과거사를 들추어내고 있습니다.

  바울은 율법이 정하는 의에 관하여 흠이 없는 자였습니다.  그는 율법을 말할 때에 비난받을 일이 없는 사람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는 로마의 한 주였던 길리기아주의 수도인 다소에서 태어난 사람이었지만, 예루살렘에 유학을 와서 가말리엘이란 유명한 랍비의 문하생이 되어 율법을 연구하였고, 그의 신앙의 체계를 수립한 사람이었습니다. 

  바울은 로마 사회에서 부르던 이름이었고, 유대인의 이름은 사울이었습니다.  사울이란 이름은 희망이란 뜻이 있었고, 베냐민 지파 사람들이 많이 사용한 이름이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이란 뜻은 "작은 자"라는 뜻을 가진 말이었습니다.  그는 나면서부터 로마의 시민권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것을 보면 그의 할아버지나 아버지가 로마에 공로를 세운 사람이었거나 대단히 부자였기에 시민권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7-9절에서 "그러나"로 그의 주장을 새롭게 수정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그가 자랑스럽게 여기고, 그에게 유익하게 여겼던 모든 것들을 내어 던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의"라는 말은 그리스어로 "디카이오쉬네"라고 하는데, 이 말은 사실 어려운 말입니다.  인간이란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로 맺어야 하고, 바른 관계에 들어가야 합니다.  하나님을 그의 하나님으로 고백하고, 언제나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성경에서 바울이 말하려고 하는 "의"는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맺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로, 택하신 백성으로 받아주시는 것은 유대주의 율법이 주는 의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인하여 새로운 의를 소유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지금까지 자랑스럽게 여기던 바리새인이라든지, 율법으로는 흠이 없었다는 것이나, 할례를 받았다는 것, 교회를 박해하였던 모든 열심은 다 쓰레기와 같고 배설물로 여길 수 있다고 선언합니다.  그는 지금까지 자신의 노력으로 자신의 열정으로 하나님 앞에서 설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선행이라든지 공로라든지 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는 가증한 것이요, 하등의 도움을 주지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을 행하므로 얻을 수 있는 획득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이루어놓으신 의를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이었습니다.  지금도 자신의 선행으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전혀 불가능한 착각에 빠져 있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과 화해하고 싶습니까?  진실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하겠습니까?  하나님이 아들을 보내주시고 이룩하신 십자가의 희생과 사랑을 나를 위한 것으로 받아들여야만 합니다. 행위로 구원받았다고 하면 자랑할 것들이 있지만, 믿음으로 구원받았는데, 그 믿음마저도 하나님의 선물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은혜로 구원받은 것입니다.

  여기서 그리스도를 안다는 말의 깊은 뜻을 말씀드립니다.  바울은 신앙생활이란 것이 무엇이냐 함을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10-11절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라고 했습니다.  좀더 쉽게 번역해야 하는데, 새번역을 읽어드립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그리스도를 알고, 그 분의 부활의 능력을 깨닫고, 그 분의 고난에 동참하여, 그 분의 죽으심을 본받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나는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나는 부활에 이르고 싶습니다."라는 뜻입니다.

  또한 우리는 '안다'는 말을 잘 이해하여야 합니다.  바울이 사용한 "알고자 하여"라는 말이 원어로는 "기노스테인"인데, 이 말은 "기노스코"라는 단어에서 나왔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지능적인 지식이 아니라, 몸으로 아는 것을 말합니다.  체험적인 지식을 말합니다.  어떤 사실이나 이론이 아닌 개인적으로 체험에서 나온 불변의 확신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구약의 용법을 비교해보면 더욱 자세히 알 수 있습니다.  구약에서 안다는 말은 성적인 교제를 의미하는 말이었습니다.  히브리어 "야다"라는 말입니다.  "아담이 그 아내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창4:1)라고 하였는데, 동침한다는 말을 난하주에는 "히브리어로 알게 되매"라고 하였습니다.  아담이 그 아내를 알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안다는 말을 할 때에 피상적으로, 상식적으로 아는 정도가 아닌 피부로 알고, 인격적으로 안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이론이나 논리로 말하는 학문적인 앎이 아니라, 바울에게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는 그의 사건이었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알고 깨닫기를 원하였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데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알아야 합니다.

  부활의 능력이란 정말 위대한 역사였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기에 우리도 그 부활에 참여할 것이며, 우리 육체를 소중히 구별할 수 있습니다.  이 말은 우리는 죽을 몸을 가지고 있지만 우리에게는 영원한 생명이 주어졌습니다.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예수님의 부활에 참여하는데 이것은 영원히 사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절대로 죽을 자가 아니요, 패배자가 아니요 승리자요, 살아날 사람입니다.  그래서 죽음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세계로 이어지는 관문입니다.  바울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후로 예수님의 부활이 우리 구원의 완성인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여야 하는 사람인 것을 알았습니다.  우리들이 예수님을 믿는 것은 매우 영광스러운 일이지만 고난도 영광으로 알아야 합니다.  빌1:29에서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셨습니다.  바울은 골1:24에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고 했습니다.  갈6:17에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고 했습니다.  예수의 흔적이란 예수님이 받은 상처자국을 말합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신앙 때문에, 우리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으로 받는 고난은 벌이 아니라, 특권이란 점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실 때에 당신을 보내신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일하셨습니다.  "내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요5:17)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셨는데, 다른 사람을 인식하지 말고, 오직 주님을 바라보면서 주의 일에 힘써야 합니다.  무슨 직분을 의식하고 일하지 말고, 누가 알아달라고 일할 것도 아닙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집에 있어야 하고, 하나님의 일을 하여야 합니다.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여야겠습니다. 

  바울은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라고 했습니다.  우리 성도들은 주님 예수와 연합하고 동행하다가 마침내 주의 부활의 자리에 들어갈 것입니다.  주님이 걸어가신 십자가의 길을 가다가 주님이 오라고 하시면 우리는 주님의 부활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주님을 안다고 할 때에 그리스도를 알고, 주의 부활의 능력을 알고, 주님의 고난에 참여하고, 주님과 함께 연합하고 동행하다가 죽을 때에 주님께서 우리를 영광스러운 자리로 인도하시는 것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이제 12절 말씀으로 들어갑니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고 선언합니다.  여기서 아주 중요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는 예수님에게 잡혀진 사람이요, 지금은 붙잡힌 것을 놓지 않으려고 잡으려고 힘쓴다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꼭 알고 넘어가야 하는 말은 "온전히"란 말입니다.  이 말은 완전해졌다, 완성되었다, 조금도 부족함이 없다는 말이 아니라,  "기능적인 완전"을 말하는데, "목적에 대한 적합성"을 말합니다.  이것은 미숙한 것과 대별하여 성숙한 것을 말합니다. 목표점에 도달하였다는 말입니다.  온전히 이루었다 함이 아니라고 하였으니, 목표점에 다다른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이 바울서신에서는 '제자'라는 말을 대신하여 쓰여지기도 하고, 성숙한 자, 순교자라는 말로도 사용되었습니다.

  우리는 달려가는 도상의 사람이지, 절대로 완성되었고, 이제는 더 이상 바랄 것도 없고, 자랄 것도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지난날에 봉사한 것을 가지고 자랑하거나 과거의 향수에 젖어 안주하지 말아야 합니다. 

  바울은 예수님에게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하였습니다.  바울은 지금 회심의 순간을 회고하면서 다메섹 도상에서 자기가 핍박하였던 예수님에게 붙잡혔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자기에게 나타나셔서 붙잡으셨습니다.  그는 다메섹으로 가고 있었는데, 엄청난 빛에 눈이 캄캄해지면서 놀라서 땅에 엎드러졌습니다. 그 때에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그는 대답하였습니다.  "주여, 누구십니까?"  그는 거역할 수 없는 두려움에 빠져들었습니다.  사울이라는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것을 보면서 하나님이 찾으시는 것을 느끼면서 "주여"라고 말했습니다.  그 때에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일어나 시내로 들어가라 네가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고 하셨습니다.  바울은 다메섹으로 가면서 기독교회를 잔멸하고 예수 믿는 이들을 잡아오려고 의분에 넘쳐 가던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는 이단이요, 메시아병에 걸린 미친 사람으로 보았습니다.  예수 믿는 이들을 잡아 없애는 것이 유대교를 세우는 일이요, 하나님을 위한 진정한 역사라고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스데반을 죽이는데 앞장섰으며 증인이 되었습니다.  같은 사람으로 아무리 죽여야 할 사람이라고 판단하지만, 돌을 들어 쳐죽이는 것은 강심장이 아니면 안 되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예수님이 그에게 나타나셔서 장차 네가 할 일을 일어줄 것이라고 하시면서 자기를 살려주는 것이었습니다.  자기를 그 순간 죽이신다고 하여도 아무런 변명도 할 수 없는 죄인 중의 괴수였으며, 하나님을 대적한 사람이었습니다.

  여기서 바울은 예수님의 죽으심의 의미와 그 효력과 부활하신 예수님이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고, 하나님과 관계를 바르게 맺어주시는 의가 되시며, 예수님이 생명이시며, 영원한 진리가 되시는 것을 단번에 다 알게 되었고, 체험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성경의 해답이요, 인류의 숙제를 풀어주신 분이었습니다. 그런 그 예수님이 자기를 붙잡으신 것입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우리도 예수님에 붙잡혔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여 주신 것은 단순히 구원 받아 즐거워하라고 부르신 것이 아니라, 사명을 주시면서 붙잡으셨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잡힌 것이요, 이제는 우리가 부르심을 확신하고 주님을 붙잡아야 합니다.  우리도 우리의 죄악 길에서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예수님이 찾아오셨고, 붙들어 주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달려가야 하는 골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푯대가 되십니다. 

  우리는 온전히 이룬 자에 속하는 제자들이 되었습니다.  온전히 이룬 사람이란 "성숙한 사람"을 말합니다.  오래 믿은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지금 어떤 단계에 이르렀든지 지금의 자리에서 충성하시면서 주님을 향하여 달려가시기를 바랍니다.  내일에 가서 충성하겠다고 미루지 말고, 오늘 하루에 최선을 다하여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야 합니다. 

  존 맥스웰은 "우리의 미래는 우리가 오늘 하는 것의 결과이다"라고 했습니다.  성경적으로 말하면 "심은 대로 거둔다"는 말과 같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뒤에 있었던 것을 잊어버리고, 앞만 바라보고 달려가야 합니다.  여러분은 우리 주님에게 잡히신 사람들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영광이요, 자랑이요 특권입니다.  이제는 그것을 놓지 않고 잡으려고 달려가야만 합니다.  위에서 부르신 상을 얻을 때까지 최선을 다하시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 홍모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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