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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너는 행복자로다 구원을 너같이 얻은 백성이 누구뇨 (신 33:2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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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행복의 대상을 이스라엘이라고 지적하셨습니다. 우리는 이스라엘이라고 할 때 종족적이거나 지역적으로 사고되는 역사적인 이해를 우선하게 됩니다. 그러나 진정한 의미에서 이스라엘은 구속사적인 차원에서 성경이 요구하는 이면적인 명료성을 분명히 이해해야 합니다. 성경에는 이스라엘을 가리키는 칭호들이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먼저 이스라엘 자손이라고 할 때는 야곱의 새로운 별칭으로 영예로운 호칭입니다(창 32:24-30). 신명기 33장 1절에 『하나님의 사람 모세가 죽기 전에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축복함이 이러하니라』고 했습니다. 또한 이스라엘 백성이라고 할 때는 택함 받은 선민이라는 말입니다(출 19:5-6; 신 33:3, 29). 신명기 7장 6절에 『너는 여호와 네 하나님의 성민이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지상 만민 중에서 너를 자기 기업의 백성으로 택하셨나니』라고 했습니다. '성도'라고 할 때는 구별된 자 혹은 바쳐진 자란 뜻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께 경건하게 예배하고 경외해야 될 의무가 있다는 의미입니다(신 6:4, 5).

여기 본문에 '여수룬'이라고 할 때는 '옳은 자', '정직한 자'라는 뜻으로 의인이라는 말입니다(신 33:5, 26). 이렇게 이스라엘에 대하여 다양한 별칭이 있습니다. 이를테면 이스라엘은 선민의 별칭입니다. 또한 신령한 이스라엘로 오늘의 구원받은 성도들의 애칭이기도 합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12지파에 대하여 축복하고 마지막으로 그들을 축복하는 축도의 부분에서 이스라엘의 행복에 대하여 감동적인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행복은 물리적인 질감이나 혹은 생물학적 요소로서 실험실에서 얻어지는 과학적인 산물이 아닙니다. 행복이라는 사전적 의미는 심신(心身)의 모든 욕구가 충족되어서 부족함이 없는 상태라고 정의합니다.

희랍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는 "인간 최고의 상태를 행복이다."라고 했는가 하면 탈무드에서는 낙심을 안 하는 사람은 행복하다고 했습니다. '시세로'는 "마음이 평온한 것이 행복이다."라고 했습니다. '로렌스 굴드'는 "남의 주머니에 든 물건을 탐내지 않는다는 것이 행복의 중요한 조건이다."라고 했습니다. 'J. S. 밀'은 "행복은 행복을 인생의 목적으로 삼지 않고 행복 이외의 어떤 다른 목적물을 인생의 목적으로 삼는데 있다."라고 했습니다. 'R. W. 에머슨'은 "행복이란 대개의 경우 쾌락이 아니며 대체로 승리인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이렇게도 행복에 대하여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시대마다 사람마다 무성한 변들로 지면이 부족할 따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행복에 대하여 좀 다르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오늘 성경 본문은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자로다' 구원을 너같이 얻은 백성이 누구뇨라고 말씀하므로 진정한 성도의 행복이 무엇인지 성경이 말하는 진정한 의미의 행복을 만나보기 원합니다.
우리의 행복이 무엇입니까?

Ⅰ. 하나님이 우리를 도우시기 때문입니다.

본문 33장 26절에 『여수룬이여 하나님 같은 자 없도다 그가 너를 도우시려고 하늘을 타시고 궁창에서 위엄을 나타내시도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구름을 타고 오다', '하늘을 타고 오다'라는 표현은 창조의 하나님을 노래할 때 자주 사용하는 말입니다(시 68:33; 사 19:1).
시편 18편 10절에 『그룹을 타고 날으심이여 바람 날개로 높이 뜨셨도다』라고 했습니다. 이러한 하나님께서 크신 능력으로 이스라엘과 함께 하며 이스라엘을 도우신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구름으로 자기 수레를 삼으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바람 날개로 다니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바람으로 자기 사역자를 삼으신 분이십니다(시 104:1-4). 여호와 하나님께서 구름을 타고 애굽에 임하실 때 애굽의 우상들이 떨고 바로와 그의 사람들이 마음이 녹았습니다. 이사야 19장 1절에 『애굽에 관한 경고라 보라 여호와께서 빠른 구름을 타고 애굽에 임하시리니 애굽의 우상들이 그 앞에서 떨겠고 애굽인의 마음이 그 속에서 녹으리로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십니다(출 6:31). 창 17장 1절에 『아브람의 구십구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전지하신 분이십니다(시 139:1-6). 하나님은 무소부재한 분이십니다(렘 23:23). 시편 139편 7절에 『내가 주의 신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시고 긍휼이 많으시고 은혜로운 분이십니다. 출애굽기 34장 6절에 『여호와께서 그의 앞으로 지나시며 반포하시되 여호와로라 여호와로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로라』라고 했습니다. 고린도전서 10장 13절에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측량할 수 없는 위대한 분이십니다(욥 11:33). 욥기 11장 7절에 『네가 하나님의 오묘를 어찌 능히 측량하며 전능자를 어찌 능히 온전히 알겠느냐』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죽을 수도 없는 분이십니다. 디모데전서 1장 17절에 『만세의 왕 곧 썩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고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이 세세토록 있을지어다 아멘』라고 했습니다.

이러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함께 하시고 친히 이스라엘을 도우시려고 위엄을 나타내시니 그 얼마나 행복에 겨운 일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 편이 되신 것만으로 우리는 행복합니다. 하나님께서 내 이름을 불러 주신 것만으로 우리는 행복합니다. 하나님의 부르심 속에 온갖 좋은 것이 다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도우실 때 천지에 있는 그 무엇도 우리를 대적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께서 우리 편이 되시고 우리를 도와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를 도우시려고 우리를 붙들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시편 121편 1-2절에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행복이 무엇입니까?

Ⅱ. 하나님이 우리의 처소가 되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본문 33장 27절에 『영원하신 하나님이 너의 처소가 되시니 그 영원하신 팔이 네 아래 있도다 그가 네 앞에서 대적을 쫓으시며 멸하리라 하시도다』라고 했습니다.
『처소』는 '거하는 곳' 즉, '집'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자기 집으로 삼은 행복입니다. 바로 하나님이 우리의 집이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시편 84편 10절에 『주의 궁정에서 한 날이 다른 곳에서 천날보다 나은 즉 악인의 장막에 거함보다 내 하나님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출생했습니다. 그리고 그 아버지의 품속에서 자라고 그 아버지와 영원히 살 것입니다. 하나님 자신이 이스라엘의 요람이요 고향입니다. 고향은 나를 잘 아는 곳입니다. 고향을 생각하면 안심이 되고 평온해지는 것은 고향은 언제나 우리를 사랑의 팔로 안아 줄 수 있는 아량과 넉넉함이 있기 때문입니다. 고향은 언제나 진실하고 생각할 때마다 모든 혈기와 분노를 삼켜버리는 어머니 품속 같은 곳입니다. 우리의 궁극적 고향은 바로 하나님 아버지가 계신 곳입니다.

그래서 오늘에 이스라엘 된 성도들은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이 조금도 어색하지 아니합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피로 값 주고 사신 교회생활에 익숙합니다. 부담을 느끼거나 두 마음을 품지도 않고 일상의 생활처럼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본문에 하나님의 팔이 네 아래 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온갖 대적들을 막아 주시는 우리들의 보호의 팔이 되십니다. 그 팔은 힘 있는 팔입니다. 그 팔은 그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유일한 팔입니다.
이 성경을 배경하고 호프만이 쓰고 그의 동지인 안토니 쇼와터가 작곡한 찬송가 458장의 '주의 친절한 팔에 안기세'라는 찬송시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잘 표현해 주고 있습니다.

주의 팔은 항상 기쁘고 복된 영원하신 팔이라고 했습니다. 천성 가는 길 편히 가는 영원하신 팔이라고 했습니다. 겁과 두려움이 없어지는 영원하신 팔이라고 했습니다. 오늘날 이 찬송은 어린이에서 어른에 이르기까지 널리 애창되는 찬송곡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고향으로 삼고 그 팔을 의지하는 자는 행복한 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언제나 반갑게 맞아 주시는 우리의 영원한 본향입니다.
우리의 행복이 무엇입니까?

Ⅲ.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기 때문입니다.

본문 33장 28절에 『야곱의 샘은 곡식과 새 포도주의 땅에 있나니 곧 그의 하늘이 이슬을 내리는 곳에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샘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의 영혼의 샘이며 물질의 샘입니다. 야곱의 샘은 대적을 쫓으시며 이스라엘이 안전히 거하며 하늘이 이슬을 내리는 축복의 샘입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 앞에 범죄 할 때는 이 샘이 말라 버린다고 했습니다. 그 결과 그 샘을 통하여 다 자란 열매들이 다른 사람들의 것이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신 28:15-57). 그러나 하나님은 마침내 오늘의 성도들의 마르지 아니하는 샘이 되겠다고 하셨습니다.
요한복음 4장 10절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애창하는 찬송가 316장에는 토마스 무어가 작시하고 사무엘 웨브가 작곡한 '목마른 자들아'라는 찬송이 있습니다. 이 샘은 좋은 샘입니다. 힘쓰고 애씀이 없을지라도 다 마실 수 있는 샘입니다. 이 샘은 수량이 많아 강같이 흐르고 온 천하만국이 다 통하는 샘입니다. 이 샘은 빈부와 귀천을 가리지 아니합니다. 이 샘은 질서가 있는 샘입니다. 이 샘을 마신 자는 다시 목마르지 아니하는 샘입니다. 이 샘의 이름은 생명샘입니다. 이 샘은 그 정함이 수정과도 같이 오염되지 아니한 샘입니다. 이 샘의 근원은 어린양 보좌가 그 근원이 되어 생명수 샘이 늘 그치지 않습니다. 이 샘은 다른 샘과 달리 거룩한 샘입니다. 우리는 이 샘으로 이식되어온 나무입니다.

시편 1편 3절에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라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가 마실 샘의 근원입니다. 그는 하나님이십니다. 그가 친히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는 영생의 샘이 되셨습니다. 요한복음 4장 14절에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행복이 무엇입니까?

Ⅳ. 하나님이 먼저 이기고 싸우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본문 33장 29절에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한 자로다 여호와의 구원을 너같이 얻은 백성이 누구뇨 그는 너를 돕는 방패시요 너의 영광의 칼이시로다 네 대적이 네게 복종하리니 네가 그들의 높은 곳을 밟으리로다』라고 했습니다.
『행복한』에 해당하는 '아쉬레'( )는 '충만한 행복', '완전한 행복'을 의미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본문을 보다 적극적으로 말하면 "너는 말할 수 없이 행복한 자로다"(You are happy beyond measure)라고 함이 옳을 것입니다.
인기리에 방영되었던 불멸의 이순신에서 정치계는 물론이고 학계와 재계에서까지 이순신의 리더쉽이 회자되고 있습니다. 그것은 이순신이 적을 먼저 이기고 싸우게 했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 23전 23승, 어떤 기록에는 30전 30승이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싸움은 하나님이 먼저 이기신 싸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를 믿고 나아가는 우리의 싸움에는 패배가 있을 수 없습니다.
{높은 곳을 밟으리로다』는 말의 의미는 싸움에서의 궁극적 승리를 말하는 것입니다.
① 이 승리는 사망의 권세와의 싸움에서 승리입니다.
② 이 승리는 다른 영들과의 싸움에서 승리입니다.
③ 이 승리는 다른 복음들과의 싸움에서 승리입니다.
④ 이 승리는 다른 예수들과의 싸움에서 승리입니다.

고린도후서 11장 4절에 『만일 누가 가서 우리의 전파하지 아니한 다른 예수를 전파하거나 혹 너희의 받지 아니한 다른 영을 받게 하거나 혹 너희의 받지 아니한 다른 복음을 받게 할 때에는 너희가 잘 용납하는구나』라고 했습니다.
승리의 결과는 구원입니다. ① 이 구원은 사망에서의 구원입니다. ② 영원한 구원입니다. ③ 이 구원은 제한된 구원입니다. ④ 악한 자 속에서의 선택된 구원입니다. ⑤ 악한 자가 다시 만지지도 못하는 완전한 구원입니다. ⑥ 이 구원은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로 인한 구원입니다. ⑦ 이 구원은 성령을 통한 구원이며 교회를 통한 구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자로다'라고 한 것은 하나님의 도우심이 행복의 근원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처소가 되는 행복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샘이 되심이 우리의 행복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모든 싸움에서 최후의 승리자가 되게 하시는 행복입니다. 성도는 거룩한 존재입니다. 얼마든지 거룩할 수 있는데도 거룩한 것을 스스로 결박하지 말아야 합니다. 결코 인간의 행복은 신앙 밖에서 찾을 수 없습니다

. 이 세상의 재물이나 명예나 부귀나 지식이나 그 어떤 것들도 신앙 밖에서는 궁극적으로 행복이 보장될 수 없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의 행복의 무대(stage)는 주님의 몸 된 교회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만을 따르고 순종하면서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섬기는 가운데서 우리는 진정한 행복을 맛볼 수 있습니다. 남상(濫觴)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양쯔강(陽子江).같은 큰 하천도 그 근원은 술잔을 띄울만큼 좁다랐게 흐르는 시냇물이라는 뜻에서 사물의 처음이나 시작을 말합니다.

믿는 자들의 처음은 미약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나중은 창대합니다. 눈에 보이는 우리의 행복지수는 미약할 수도 있습니다. 이와 같은 행복을 소유하고 있으면서도 말입니다. 그러나 눈에 보이는 행복마져도 넘치게 해 주실 것을 믿으십시오. 우리를 승리케 하시고 우리가 얻는 전리품이 바로 그것입니다.
'너는 행복자로다 너같이 구원을 얻은 자 누구뇨'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은 오늘 이 시간도 우리와 우리 자손들에게 유효하게 역사(work)하고 있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아 멘 -
(강 구원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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