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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내가 범죄하였나이다 (삼상 15:24-35, 롬 7:19-24, 눅 5: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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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여러분은 “큰 바위 얼굴(The Great Stone Face)”이라는 소설을 알고 계실 줄 믿습니다. 동네 앞 저 멀리 산에 있는, 성인(聖人)같이 인자하게 생긴 큰 바위가 있어서 그 바위를 닮은 사람?오게 되면 그가 그 도시의 지도자가 되리라고 하는 전설이 있었습니다.

그 사이에 숱하게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큰 바위 얼굴의 지도자라고 하면서 나타난 일들이 여러 차례 있었습니다. 그러나 번번이 시민들은 실망해야 했습니다. 그 동네에 어네스트라고 하는 소년이 있었는데 늘 큰 바위 얼굴을 바라보면서 성장했습니다. 많은 세월이 흘러서 어느덧 소년이었던 어네스트도 노인이 되었습니다. 그가 어느 날 시민들 앞에서 연설을 하고 있었는데 그의 얼굴을 바라보던 시민 중 한 사람이 소리쳤습니다. “여기 큰 바위 얼굴의 성인이 나타났도다!”. 다름 아닌 어네스트를 두고 한 말이었습니다. 어릴 적부터 늘 큰 바위 얼굴을 바라보며 자라온 그는 마침내 바로 그 큰 바위 얼굴이 품고 있는 그런 사람으로 변하여 갔던 것입니다.

사람은 무엇을 바라보든지 그 대상을 닮아갑니다. 이것을 “바라봄의 법칙”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라”고 했습니다.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이야말로 예수를 믿을 뿐만 아니라 예수를 바라보는 사람들입니다. 그리하여 예수의 어떠하심과 같이 우리도 그렇게 닮아 가게 됩니다. 닮도록 역사하십니다.

사실 처음 하나님이 사람을 만드실 때 어떻게 했습니까?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자”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을 닮은, 하나님을 닮아가는(Godliness)” 존재로서 사람을 만들자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궁극적인 목표는 하나님을 닮는데 있습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늘 주님을 바라보고, 그 말씀이 풍성히 거하게 하며, 주의 성령께서 충만하도록 해야 합니다.

그런데 저 에덴동산에 마귀가 나타났습니다. 그 마귀는 하와에게 접근해서 그녀를 유혹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마귀는 하나님의 말씀을 교묘하게 왜곡해서 하와를 헷갈리게 했습니다. 요새 사이비 이단들이 그리스도인들에게 접근해서 넘어뜨릴 때 그 무기가 무엇입니까? 말입니다. 논리 정연한 그럴듯한 말로 아직 진리에 굳게 서지 못한 교인들을 마치 마취시키듯 혼란하게 해서 넘어뜨립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만들 때  “우리 모양대로(Godliness)" 만들자고 했습니다. 님을 닮도록 만들자고 했습니다. 그런데 마귀는 뭐라고 속삭였는지 아십니까? 창3:5에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 같이(God-likeness) 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닮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되라는 유혹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을 닮으라”는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하나님 같이 되라”는 마귀의 말에 넘어갔습니다. 이것이 원죄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게쎄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그 기도 말이 무엇입니까? “아버지여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원대로 하옵소서”였습니다. 여기 “나의 원대로” 즉 “내 맘대로” 하려고 하는 이것이 바로 “하나님 같이 되는 것, 하나님이 되려는” 죄악입니다. 그러나 “아버지 원대로”라고 할 때 이것이 “하나님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내가 나의 왕이 아닙니다. 내가 하나님이 아닙니다. 주님만이 나의 왕이십니다. 주님만이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이 목숨을 걸고 싸운 것이 하나님으로 하나님 되게 하시는 운동 즉 “여호와만의 신앙(Mono-Yahwhism)”이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확립해야 할 신앙도 역시 “하나님만의 신앙”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이 절대 신앙 앞에서 우리 자신을 살피고 회개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십계명 맨 처음에 “나 외에 다른 신들을 두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우리 주님은 “하나님께 경배하고 오직 그분만을 섬기라”고 하셨습니다. 이 기준에서 볼 때 사울은 실패자입니다.

2. 이스라엘 초대 왕으로 선택받은 사울의 실패 원인이 어디 있습니까?

(1) 그의 탐심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열 가지 계명 가운데 “탐내지 말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탐심은 우상 숭배라”고 했습니다. 이 탐심이 우리 신앙을 실패하게 만듭니다.

사무엘이 사울 왕에게 “아말렉을 진멸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전쟁 수행 과정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했습니다. 사무엘상15:9에 “가장 좋은 것은 남기고....하찮은 것은 진멸하였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진멸하라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사울은 “남긴 것”이 있습니다. 자기를 위하여 좋은 것을 남겼습니다. 탐심이 발동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중심입니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아나니아 삽비라는 얼마나 훌륭한 일을 했습니까? 그들은 초대 교회에 임한 성령의 역사와 함께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크게 결단했습니다. 재산을 팔아 주의 사업을 위해 교회에 바치기로 결심했습니다. 말이 그렇지 이런 일이 어찌 쉬운 일이겠습니까? 우리 교회가 성전을 건축하는데 여러분, 건축을 위하여 헌금 하는 일이 쉬운 일만은 아니지 않습니까? 이런 측면에서 볼 때 결코 아나니아 삽비라를 쉽게 비판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들의 문제가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자기를 위하여 남겨둔데 있습니다. 그 중심이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 자신입니다. 하나님 뜻이 분명한데도 불구하고 내 듯대로 행하고 말았습니다. 자신이 주인이 되려고 했습니다. 자신이 하나님이 되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밑바닥에 탐심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2) 24절에 “내가 여호와의 명령과 당신의 말씀을 어겼다”고 했습니다.

사울이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을 떠난 대신 인간적인 수단 방법에 치중했습니다. 삼상14:52에 “사울이 사는 날 동안에 블레셋 사람과 큰 싸움이 있었으므로 사울이 힘 센 사람이나 용감한 사람을 보면 그들을 불러 모았더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을 의지했습니다. 그러나 그 군인들이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습니까? 그 용사들이 사울의 정권과 그 목숨을 끝까지 지켜줄 수 있었습니까? 인간들이 쌓아올린 바벨탑도 하나님이 무너뜨리실 때 그들의 노력은 헛수고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아말렉과의 싸움에서도 역시 이런 인간적 수단에 사로잡혔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전쟁을 승리했음에도 불구하고 승전하자말자 그는 하나님의 명령, 하나님의 말씀을 잊어버렸습니다. 그가 쓸만한 것을 남겨 둔 것은 이미 전쟁은 이겼으니 그 이후를 대비해야겠다는 계산 때문이었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말씀을 휴지조각으로 만들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그가 실패한 결정적인 원인입니다.

이래서 사울은 하나님께 아픔을 안겨 드렸습니다. 삼상15:11에 하나님께서 “내가 사울을 왕으로 세운 것을 후회한다”고 했습니다. 여기 “후회한다”는 말은 마음이 아파 견디지 못하는 것을 뜻합니다. 우리가 말씀을 떠나서 자행자지할 때 하나님의 마음은 몹시도 아프십니다.

그리고 사무엘은 이런 사울 때문에 “온 밤을 근심하며 여호와께 부르짖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떠나고 자기 마음대로 처신하는 교인들을 보는 교역자들의 마음은 정말 아프고 또 슬픕니다.

이런 현실에서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고 하실 때 하나님은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하나님께 기쁨을 안겨 드리는 성도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3) 사울의 실패 원인은 24절 하 반절에 “내가 백성을 두려워하여 그들의 말을 청종하였음이니이다”라고 했습니다.

예수님 당시 로마 총독이었던 빌라도는 매우 판단력이 뛰어난 사람이었습니다. 온 유대 종교 지도자들과 군중들이 예수는 십자가 처형이 마땅하다고 탄핵을 했습니다. 그런데 빌라도는 “예수 사건”을 단지 그들의 말만 듣고 처리하지 않고 예수님을 직접 만나서 심문을 했습니다. 그리고 내린 결론은 “이 사람에게는 사형에는 해당하는 죄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몰려든 유대 종교 지도자들과 군중들 앞에 예수를 세우고 “내가 보니 이 사람에게는 죄가 없다. 그러니 때려서 (경고하고) 놓아 주겠다”고 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종교지도자들과 백성들은 자신들의 뜻을 관철시키기 위하여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합니다. 그 중의 하나가 “만일 총독께서 이 사람을 놓아 준다면 총독은 황제의 충신이 아닙니다. 황제에게 거역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사람은 자신을 왕이라고 주장했기 때문입니다”라고 역공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빌라도는 심각한 고민에 빠졌습니다. 양심과 현실 사이에서의 고민이었습니다. 양심대로 하자니 백성들의 반격이 만만치 않았습니다. 자칫하면 자신의 자리는 물론 목숨까지도 위협을 받는다고 느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저들의 요구를 들어주기에는 자기 양심이 허락지 않았습니다.

여기서 빌라도는 어중간한 임기응변의 타협의 길을 취했습니다. 예수는 군중의 요구대로 십자가형을 선고하면서 대야에 손을 씻고 자기는 이 사람의 죄에 무관하다고 했습니다. 빌라도는 결국 사람들이 무서워서 하나님의 아들에게 십자가형을 언도하는 씻을 수 없는 죄를 범하고 말았습니다.

사무엘상 15:에는 우리 신앙의 핵심을 말씀해 주는 아주 유명한 구절이 있습니다. 그것은 22절에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낫다”고 하는 말씀입니다. 말씀을 듣는 것, 말씀에 순종하는 것 이상 가는 제물도 제사도 있을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한때 기독교 국가였던 북 아프리카의 나라들, 소아시아지방, 그리고 러시아 같은 나라들이 그 후 이슬람교와 공산주의화하게 된 원인이 어디 있습니까? 그들이 단지 종교 의식에만 치중하고 말씀을 버렸기 때문입니다. 종교가 자기 안일에 빠져서 있는 사람, 가진 사람 편에만 서 있다가 부패하고 타락하여 빛과 소금의 역할을 다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런 역사적 사실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거울이 됩니다. 예수님은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저들과 같이 망하리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 신앙패턴을 바꾸어야 하겠습니다. 교회 다닌 연조가 곧 신앙인줄 알았던 착각을 버려야 하겠습니다. 교회에서의 직분이 바로 천국행 티켓이나 상급인줄 알았던 망상을 버려야 하겠습니다. 성경 지식이 바로 나의 경건의 척도인줄 알았던 교만을 버려야 하겠습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제 나의 주님을 만나는 일입니다.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본다”고 하신 말씀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향하여 진심으로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이제부터는 주님의 말씀을 들을 때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지금도 나에게 직접 들려주시는 말씀으로 듣고 받아야 합니다. 저 엠마오 도상으로 내려가던 제자들이 주님을 만나 그 말씀을 들을 때 마음에 불이 타올랐던 것처럼 뜨거워져야 하겠습니다. 그들이 눈이 밝아져서 주님을 얼굴로 마주 뵙게 된 것처럼 인격적인 만남이 이루어져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발걸음을 돌이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서 부활의 증인 된 것처럼 주님의 말씀, 주님과의 만남의 감격이 우리 인격과 삶을 근본적으로 바꿀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으로 하여금 하나님 되시게 하는 일입니다. 하나님은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나도 존중히 여긴다”고 했습니다.

세례 요한이 예수님을 향하여 말하기를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고 했는데 예수님은 이 세례 요한이야말로 여인이 낳은 자 중 가장 큰 자라고 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주님을 높여 드리시기 바랍니다. 오직 주님께만 영광을 돌리시기 바랍니다. 그리하면 주께서 반드시 여러분을 회복시켜 주실 줄 믿습니다.

여러분을 높여주셔서 남의 꼬리 되지 않게 머리되게 해주시며 남에게 꾸러 가지 아니하고 꾸어주게 되리라고 하신 약속을 이루어주실 줄 믿습니다. (김  오 동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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