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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몇 번이나 용서했습니까? (마 18:1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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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생활의 본질이 무엇인가 묻는다면 사랑이라고 대답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도 우리에게 새 계명을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율법의 완성도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럼으로 사랑을 떠나서는 신앙생활을 생각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사랑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사랑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사랑으로 행동해야 합니다.

고린도13장은 사랑장이라고 합니다. 모든 은사에 더할 것이 사랑이라 말씀 하셨습니다. 사랑이 빠져 버리면 어떤 봉사도 헌신도 어떤 기도도 다 허사입니다. 거룩한 설교도 몸을 던지는 희생도 전 재산을 다 바치는 헌금도 소리 나는 구리와 괭과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사랑이 들어가야 값진 것이 됩니다.

사랑은 상대적인 것이 됩니다. 아무도 없는 데서는 사랑할 수가 없습니다. 혼자서는 사랑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사랑에는 반드시 대상이 있습니다. 그대상이 형제이면 형제사랑이 되고 그대상이 자녀이면 자녀 사랑이 되고 그대상이 친구이면 친구 사랑이 됩니다. 더욱 나아가서 그대상이 원수이면 원수사랑이 됩니다. 주님은 여기까지 사랑하는 것이 사랑이라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 사랑으로 인간 삶에서 어떻게 실천할 수 있는가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15절“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 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을 것이요 16절 만일 듣지 않거든 한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 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확증하게 하라 17절 만약에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

우리가 사랑하기 힘든 상대가 하나 있습니다. 그것이 죄를 짓는 사람들입니다.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모범생을 사랑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여러분의 가정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말을 잘 듣는 아이를 사랑하는 것은 쉽습니다. 그러나 말썽을 피우는 아이를 사랑한다는 것은 쉽지를 않습니다. 많은 희생과 인내심과 양보가 필요 합니다.

죄를 지은 사람을 사랑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죄를 지은 사람은 사랑의 대상에서 제외할 때가 많습니다. 제외할 뿐 만 아니라 심판하고 정죄해버립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편하기 때문입니다. 신경 쓸 일이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은 그렇게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신경을 좀 써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하나가 단독으로 만나 권면하는 것입니다. 죄를 지은 사람을 바로 세우기 위하여 우리는 만나야 합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사랑을 가지고 만나는 것입니다. 그의 영혼을 사랑하고 그의 인격을 사랑해야합니다. 깊은 애정을 가지고 아무도 모르게 만나서 사랑으로 권면해야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죄에 빠진 그 영혼을 건질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런 진정한 권면으로 인하여 새롭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죄에서 돌이켜 새사람으로 살아가는 줄로 믿습니다. 그러나 이런 권면으로 돌아서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두 번째 방법은 두 세 사람의 증인을 데리고 가서 권고하라고 했습니다. 한사람의 말보다 여러 사람의 말이 효과가 있을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여러 사람이 갈 때 상대가 딴소리를 하지 않도록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도 중요한 것은 그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정죄하거나 심판하는 자들이 가면 다툼만 일으키게 됩니다.

세 번째 단계는 교회의 권면을 듣게 하는 것입니다. 교역자나 당회가 그를 권면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도 듣지 않고 죄를 계속 짓고 산다. 성경은 단호하게 말합니다. 그를 이방인과 세리같이 여기라는 것입니다. 가치가 없는 인간으로 보라는 것입니다. 더 이상 기대할 것이 없다는 것이지요. 여기에서 주는 교훈이 무엇입니까? 최선의 노력입니다. 노력도 하지 않고 사람을 버리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랑입니다. 그 다음 중요한 말씀이 나옵니다.

18절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아멘 우리에게 무엇이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매면 안 됩니다. 풀어야 합니다. 매면 죽습니다. 풀면 삽니다. 이 진리를 가르치는 것입니다.

매는 것이 무엇입니까? 묽는 것이지요. 졸라매는 것이지요. 허리를 졸라 매보세요 혈액순환이 안 됩니다. 목을 졸라매 보세요. 어떻게 되나 죽습니다. 길을 지나가다 보면 더러 철사 줄로 묽어 논 나무를 봅니다. 어떻게 됩니까? 철사 줄이 나무줄기를 파고드는 거예요. 제대로 자랄 수가 없습니다.

사람들이 근심과 걱정과 분노와 미움으로 자신을 묽습니다. 그래서 행복하지를 못 한거예요 여유가 없어요. 웃음이 없어요. 기쁨이 없어요. 자신을 묽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루 24시간을 지내면서 웃을 일이 없습니까? 무엇인가 나를 묽고 있기 때문입니다. 텔레비전에 나오는 개그 웃 참사를 보아도 재미가 없습니까? 내가 세상으로부터 묽여져 있기 때문입니다. 나를 사랑해야 합니다. 나를 사랑하면 자유가 주어집니다. 그리고 사랑하면 구르는 가랑잎만 보아도 웃음이 나옵니다. 여러분의 심령이이처럼 자유로워지기를 축복합니다.

우리는 또한 욕심으로 다른 사람을 묽는 일을 그만 두어야 합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인간들이 가지고 있는 욕심으로 남을 괴롭게 하고 눈물나게 하는지 모릅니다. 야고보 사도는 4장에서 너희 중에 싸움이 어디로부터 다툼이 어디로부터 나느냐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으로부터 나는 것이 아니냐. 2절 너희는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여 살인하며 시기하여도 능히 취하지 못하므로 다투고 싸우는도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하기 때문이요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구하기 때문이라. 했습니다. 다툼이 어디서 납니까? 정욕으로부터 나는 것입니다.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는 것 때문에 살인을 하고 시기를 합니다.

사울 왕 같은 인물이지요. 하나님께로부터 온갖 영광을 다 받았음에도 그는 욕심을 버리지 못하여 하나님의 명령을 거스리고 살았습니다. 다윗이 가지고 있는 조그마한 영광을 빼앗으려고 온갖 수단을 다 동원합니다. 그런다고 얻어졌습니까? 결국은 죽고 비참하게 그의 생애를 마감하고 마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묽으려고 하지 말고 풀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을 풀면 나도 풀어집니다. 다른 사람을 묽으면 나도 묽입니다.

박종순 목사님의 설교에서 본 이야기입니다. 어떤 사람이 26세에 모회사에 입사했습니다. 입사 당시만 해도 규모가 작은 회사였는데 외판영업사원으로 시작해 만 30년간 죽을 둥 살 둥 혼신을 다해 일했습니다. 회사가 중소기업으로 컸습니다. 회사와 가정 밖에는 모른 채 일했습니다. 그런데 구조조정이라며 명 퇴를 해야 했습니다. 절망, 분노, 배신, 허탈, 허무, 나쁜 감정이 모조리 몰려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모자라던 단잠이 사라지고 매일 밤을 뜬눈으로 지새는 불면증 환자가 되었고 한 공기 밥도 소화를 시키지 못하는 위 무력증 환자가 되었고 온종일 한쪽 골이 쑤시고 아파 견딜수 없는 편두통 환자가 되었고 뼈마디가 다 저리고 아픈 관절염 환자가 되었습니다.

원인은 절망과 분노가 자신을 얽어매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목사님은 그 사람에게 자신을 해방시키라고 했습니다. 속박을 풀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분노와 절망으로 일그러진 얼굴을 들어 미소 짓고 계시는 주님을 바라보라고 했습니다. 말씀은 안하시지만 그 미소 속에 담겨있는 위로와 평안을 받아들이라고 했습니다. 그는 목사님이 하라는 데로 노력을 한 것 같습니다. 그러기에 그는 지금 새벽기도 교인이 되었고 하나둘 셋 넷 지병들이 아쉽다며 그 사람 곁을 떠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결국치료는 사랑하는 것입니다. 나를 사랑하고 너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 사랑 속에 담겨있는 중요한 요소가 있습니다. 바로 용서입니다.

21절 “그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이르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 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까? 22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

용서는 몇 번이나 하면 되는 것입니까? 여러분은 몇 번이나 용서하실 수 있습니까? 단 한번도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께 용서 받기를 기대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한번 정도 용서하고 자신이 용서를 다 한사람처럼 자랑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주님의 가르침에 따르면 이 도 안난 사람입니다. 주님은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가르쳤습니다. 숫자적으로 계산하면 490번입니다. 한사람에 대하여 490번용서 한다면 용서 못할 일이 없을 것입니다. 부부사이에 490번을 용서하세요. 친구 간에 490번을 용서하세요. 그러나 오늘의 말씀은 숫자보다 더 큰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희브리인 들에게 7이라는 숫자는 완전한 숫자입니다. 그런데 그 7이라는 숫자를 70번 곱해서 용서하라는 것이니 무조건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용서는 끝이 없습니다. 계속해야 되는 것입니다.

19절로 가봅니다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에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들을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20절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두 세 사람이 함께 모여 기도할 수 있는 곳이면 용서가 있는 곳입니다 용서하면 두 사람 세 사람이 함께 손잡고 기도할 수 있지만 용서하지 않으면 기도를 함께 할 수도 없고 응답도 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응답받고 싶습니까? 용서하시기 바랍니다. 용서하고 하나 되어 둘이 손잡고 기도해 보세요. 하나님이 그곳에 함께 하시고 축복하실 줄 믿습니다. 몇 번이나 용서 하셨습니까? 여러분이 용서한 숫자만큼 하나님이 응답해 주실 줄도 모릅니다.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사람 속에 용서가 담겨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 숫자가 셀 수 없을 만큼 많아지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김 영 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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