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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누가와 함께 하는 예수님의 비유연구10 : 의로운 죄인, 죄 많은 의인> (눅 18: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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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종하기도 싫은 죄인들

여러분은 별명을 가지고 있습니까? 사람들이 누군가에게 별명을 붙여줄 때 흔히 칭찬하는 별명보다는 뭔가 상대방의 부족한 부분이나 약점을 꼬집어 붙일 때가 더 많습니다. 그래서 어렸을 때 친구들이 그런 별명을 부르면 너무 싫었던 경험을 가진 분도 계실 것입니다. 복음서에도 보면 사람들이 예수님을 비난하며 부르던 별명 두 개가 나옵니다. 바로 ‘죄인의 친구’와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입니다(마 11:19). 도대체 죄인이란 누구 길래 그 죄인들과 친구가 되는 것만으로도, 그들과 함께 밥을 먹는 것만으로도 비난을 받은 것일까요? 예수님 당시에 소위 ‘죄인’으로 불리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죄인’이라고 해서 무슨 살인죄를 짓거나 강도죄를 지은 것이 아닙니다. 이들이 죄인이 된 것은 직업이나 특별한 이유로 유대교의 율법을 지킬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즉 ‘율법을 어긴 죄인’이라는 뜻이지요. 대표적인 죄인이 바로 ‘세리’와 ‘창녀’입니다.

그러면 왜 세리와 창녀가 죄인이며, 왜 이들과 어울리거나 함께 먹고 마시는 것이 문제가 되었을까요? 물론 창녀는 먹고 살기 위해서 몸을 파는 직업이니 당연히 더럽고 추잡한 죄인 취급을 받았겠지요. 그런데 이 창녀에 비해 세리는 너무나 멀쩡한 사람들입니다. 부자요 로마의 권력을 뒤에 업고 힘깨나 쓰는 직업입니다. 그런데 왜 죄인일까요? 세리는 로마가 유대인들의 세금을 걷기 위해 고용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로마의 앞잡이요 개라는 매국노 취급을 받았겠지요. 뿐만 아니라 로마는 이들에게 일정한 급여를 주지 않고 거두어들인 세금 중 로마에 내는 액수만 채우면 나머지는 세리들이 갖게 했습니다. 참 교활한 수법이지요. 덕분에 세리들은 한 푼이라도 더 제 주머니에 채우려고 악착같이 세금을 거두어 들였습니다. 공인된 도적질이라고나 할까요? 그러니 제아무리 부유하고 로마의 권력을 업고 있다 해도 세리는 언제나 백성들에게 손가락질 받는 영원한 죄인이었습니다.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세리를 죄인으로 규정하고 극도로 멸시했습니다. 심지어 이런 더러운 죄인들과 어울리거나 함께 식사를 하는 것만으로도 내가 더렵혀진다고 보았습니다. 어울리지도, 가까이 하지도, 인간취급도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들과 늘 어울리며 함께 식사를 한 예수님이 비난을 받은 것이지요.




너무나 깨끗한 의인

그런데 세리 같은 더러운 죄인들의 반대편에는 ‘의인’들이 서 있습니다. 이들은 바리새인으로 대표되는 당시 유대교의 종교지도자들입니다. 현실주의자들로서 종종 정치와 세속적인 일에 참여하던 사두개인과 달리 철저하게 세속적인 것을 배제하고 경건생활과 율법수호에만 전념했던 사람들이 바리새인입니다. ‘바리새’라는 말 자체가 ‘분리되다’는 뜻인데 이는 세속적인 것과 분리된다는, 우리는 철저하게 구분된 거룩한 사람들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생명보다 소중히 여기고 그것을 지키는 데 열심이었습니다. 따라서 율법을 어기는 자가 있다면 그는 ‘죄인’이고 그 죄인이 세리든, 창녀든, 심지어 예수라 하더라도 잘라내야 할 더러운 부류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반대로 이들은 자신들이 죄와는 전혀 무관하다고 생각하며 살았습니다. 죄란 ‘율법을 어기는 것’이라고 생각했으니 율법조항만 안 어기면 의인이라는 것입니다. 율법이 무엇입니까? 율법을 요약한 십계명이 주로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등 눈에 보이는 죄를 짓지 말도록 규정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바로 이런 율법만 안 어기면, 그래서 쉽게 말하면 눈에 보이는 죄만 짓지 않으면 의인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하지만 바로 여기에 그들의 결정적인 문제가 있었습니다.

여러분, 죄가 무엇입니까? 죄와 율법과의 관계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죄 짓지 말라고 주신 것이 율법입니다. 율법을 잘 지키면 적어도 큰 죄는 짓지 않습니다. 하지만 여러분, 율법만 지키면 의인입니까? 아닙니다. 율법이란 복음이 없을 때 구약의 백성들이 큰 죄 짓지 말라고 최소한의 규정을 해 놓은 것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이제 율법은 가고 복음의 시대가 되었습니다. 율법시대에는 율법으로 의인을 판가름했지만 이제 복음시대에는 복음으로만 의인이 판가름 납니다. 오직 복음으로만 우리가 의롭게 된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진정한 의인은 누구입니까? 로마서 1:17은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말씀합니다. 성경은 누구를 의인이라고 부릅니까? 율법을 지킨 자입니까? 아닙니다. 성경은 분명히 오직 믿음으로만 의인이 된다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믿음이라면 우리가 무엇을 믿는 것입니까? 그야 당연히 예수 믿고 구원 받는다는 사실을 믿는 것이지요. 그러면 어떻게 예수 믿고 구원 받는다는 말입니까?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 바로 우리 기독교의 복음의 핵심입니다. 짧게 요약하면 이런 내용이지요. “우리는 죄인입니다. 죄로 말미암아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인데 이런 죄인인 우리의 죄를 사해주기 위해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그러므로 나의 죄를 사해주신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 받는 줄 믿습니다.” 이런 뜻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예수 믿고 구원 받으려면 먼저 어떻게 해야 한다는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우리가 죄인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내가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임을 깨달아야 예수님을 믿을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내가 죄인인 것을 믿습니까?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 없이는 도저히 살 수 없는 죄인인 것을 믿습니까? 그렇지요. 여러분은 이렇게 쉽게 ‘아멘’ 하잖아요? 그런데 이 사실을 믿기가 그리 쉽지는 않다는 것입니다. 흔히 전도할 때 “당신은 죄인입니다”라고 말하면 사람들이 펄펄 뜁니다. “내가 왜 죄인이야? 내가 무슨 사람을 죽였어? 도적질을 했어? 나는 그런 죄 지어 본 적도 없고, 착하게 살지는 못했어도 최소한 남 해치고 못된 짓은 안 하고 살았는데 내가 왜 죄인이란 말이야?”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것이 바로 율법적인 사고방식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내가 죄인인 줄 압니다. 살인도 안 하고 도적질도 안 했지만 바로 복음 앞에 서니 내가 죄인인 것이 깨달아 지는 것입니다. 저도 제가 죄인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는데 그러다가 교회를 다니게 되었습니다. 고3 때 고등부 수련회에 가서 기도를 하는데 갑자기 제 입에서 “주님 제가 죄인입니다” 소리가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니 내가 죄인인 것이 깨달아지고 복음 앞에 서니 죄가 드러나는 것입니다. 이런 깨달음이 있는 것, 이렇게 “주님 제가 죄인입니다” 소리가 나오는 것이 바로 ‘회개’고 이 회개가 있을 때에만 죄 사함이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철저한 죄인이 되어야만 철저한 의인이 될 수 있습니다. 지금 제가 말씀드리는 것이 복음의 핵심입니다. 그런데 오늘 장면에 보면 자칭 의인인 바리새인은 이 핵심을 깨닫지 못했고, 자칭 죄인인 세리는 이 핵심을 깨달았습니다. 그러니 결과는 자칭 의인 바리새인은 죄 용서를 받지 못했고, 자칭 죄인인 세리는 죄 용서를 받고 집에 내려간 것입니다.




의인의 기도, 죄인의 기도

이제 본문으로 들어가 봅시다. 9절은 먼저 이 비유가 누구에게 주어졌는지 설명합니다. 바로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 즉 자기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하는 자기의에 도취된 사람들인데, 한술 더 떠서 자기는 의롭다며 다른 사람들을 죄인 취급하고, 깔보는 그런 사람들에게 이 비유를 주셨다는 말입니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바로 바리새인이지요.

이제 10절부터 본격적으로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갔는데 한 사람은 바리새인이요 또 한 사람은 세리였습니다. 유대인들은 하루 세 번 기도하는 습관이 있었기 때문에 두 사람도 성전에 기도하러 올라간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뭡니까? 신분과 처지가 전혀 다른, 완전히 반대되는 사람 둘이 동시에 기도하러 올라갔다가 만난 것입니다. 마치 지난 주 비유에 등장한 재판관과 가난한 과부처럼 이 두 사람은 도저히 만날 수도 없고 비교할 수도 없는 완전히 다른 사람들입니다. 이미 앞서 설명한 대로 바리새인은 자칭 의인의 대표요 세리는 죄인이라고 더럽다고 멸시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이런 극과 극의 두 사람이 어떻게 어울리겠습니까? 어떻게 이 두 사람이 같은 수준일 수 있겠습니까? 기도를 한다 해도 어떻게 이 두 사람이 같은 수준의 기도를 할 수 있겠습니까? 당연히 이 두 사람의 기도는 수준도 다르고 내용도 다르겠지요.

그러면 이 두 사람의 기도를 들어봅시다. 먼저 11절에 바리새인의 기도가 나옵니다.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세리는 어떻게 기도합니까? 13절입니다.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두 사람의 기도를 보면 먼저 두 사람의 기도자세가 전혀 다릅니다.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앞에 떳떳하게 서서 당당하게 기도한 것입니다. 또 ‘따로’라는 말 속에서 바리새인이 더러운 죄인인 세리와 의도적으로 떨어지려 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세리의 기도 자세는 어떻습니까?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기도합니다. 바리새인이 당당하게 ‘서서’ 기도했던 것과 반대로 세리는 멀찍이 떨어져 기도합니다. 당시 유대인들이나 바리새인은 성전에 들어가 기도했지만 세리는 죄인이라고 여기까지 못 들어가고 아마도 성전 밖 이방인의 뜰에 서서 기도했을 것이기에 이런 표현을 쓴 것입니다. 또 바리새인처럼 하늘을 바라보며 기도하는 자세가 유대인들의 일반적인 기도방법인데도 세리는 하늘을 감히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기도합니다. 부끄럽고 두려워서 그랬던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가슴을 치며 기도한 것은 참된 회개의 자세를 뜻합니다. 내가 죄인인 것이 너무도 부끄럽고 두려워서, 내가 죄인인 것이 너무도 한심스럽고 답답해서 가슴을 친 것입니다.

이제 두 사람의 기도내용을 비교해 봅니다. 바리새인의 기도 내용은 감사입니다. 무슨 감사냐? 내가 다른 사람들, 즉 토색(남의 것을 빼앗음)하고 불의하고 간음하는 자, 즉 바로 전형적인 죄인들과 같지 않음을 감사한 것입니다. 무엇보다 결정적으로 옆에 있는 더러운 죄인 세리와 같지 않음을 감사하다는 것입니다. 나아가 그는 자기의의 근거로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소득의 십일조를 드린다고 자랑스럽게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세리는 어떤 내용의 기도를 합니까? 세리는 “하나님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시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기도합니다. 이것은 내가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니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시고 나는 하나님밖에는 의지할 이 없으니 받아달라는 기도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를 비는 기도인데 정말 좋은 기도의 모범입니다. 얼마나 좋은 기도입니까? “나는 죄인입니다,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는 이 기도는 자신의 죄를 고백하며 자신을 한없이 낮추는 겸손과 회개의 기도입니다.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기도지요.

오늘 바리새인의 기도에 나타난 문제점은 무엇일까요? 첫째, 기도는 비교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감사도 비교를 통해 나오면 안 됩니다. 내 자신이 기도하는 것이요 내 자신이 감사하는 것이지 비교하기 시작하면 참된 감사가 될 수 없습니다. 둘째, 자기의를 내세우는 것은 오히려 죄가 된다는 사실입니다. 죄를 깨닫고 자기를 낮춘 세리의 기도는 참 좋은 기도의 모범이나 자기의를 내세운 바리새인의 기도는 교만한 기도요 착각하는 기도입니다. 마지막 셋째, 금식이나 봉사나 십일조 등의 신앙생활이 물론 귀하지만 이것이 결코 의의 근거가 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결론적으로 오늘 비유는 기도는 자세가 중요하다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이에 따라 이제 주님은 마지막 14절에서 두 사람의 기도를 평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사람이 저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이 사람이란 세리요, 저란 바리새인이지요. 주님은 이 두 사람의 기도자세와 내용을 말씀하신 후, 바리새인이 아닌 세리가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고 말씀합니다. 누가 의롭다 하시는 것입니까? 하나님이지요. 그러면 지금 엄청난 일이 벌어진 것 아닙니까? 하나님은 자칭 의인이요 누가 봐도 의인이었던 바리새인을 의롭다 하지 않으시고 남들도 죄인이라고 손가락질 했지만 무엇보다 자기 자신이 죄인이라고 고백한 세리가 의롭다고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에서 주님이 이 비유를 들려주신 의도를 완전히 깨닫게 됩니다.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주님은 교만한 자를 하나님이 낮추시고 겸손한 자를 높이시는 것처럼 스스로 의인이라 생각하는 자의 기도는 하나님이 절대 안 받아주시고, 스스로 죄인이라 생각하는 자의 기도를 들어주신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당신이 그 사람이라

자, 이제 말씀을 맺기 전에 정말 중요한 사실 한 가지만 짚고 넘어갑시다. 그러면 9절에 나오는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은 오직 비유에 등장한 바리새인만 해당될까요? 많은 사람들이 바로 이 부분을 오해합니다. 마치 예수님이 바리새인들을 야단치기 위해서 이 비유를 말씀하신 것처럼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바리새인들은 이 말씀처럼 ‘자기를 의롭다고 생각해서’ 세리나 죄인들을 깔보고 멸시했으니 야단맞아 마땅합니다. 하지만 여러분, 예수님은 결코 바리새인들만 야단치려고 이 비유를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오늘의 비유를 제대로 들은 사람이라면 반드시 이런 생각이 들어야 합니다. “혹시 이 바리새인이 나 아닐까? 내가 바리새인 같은 행동을 한 것은 아닐까?” 바로 여기에 비유의 핵심이 있습니다. 이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한 자”가 바리새인도 아니요, 그 어느 사람도 아닌 바로 나 자신일 수 있다는 말입니다.

오늘 예수님을 믿는다는 우리는 어떤 모습입니까? 과연 하나님 앞에서 세리처럼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기도하는 모습입니까? 아니면 바리새인처럼 나와 남을 비교하면서 “적어도 나는 저 사람처럼 죄를 많이 짓거나 아주 나쁜 사람은 아니지요? 하나님, 저 이만하면 괜찮은 성도 아닙니까? 적어도 저는 어디 가서 몰래 죄 짓는 성도 같지 않은 사람들하고도 다르고, 최소한 주일성수 하고, 십일조와 헌금생활도 하고, 봉사도 하지 않습니까? 이만하면 괜찮지요? 감사합니다”라고 기도하는 모습입니까?

하나님은 누구의 기도를 들어주실까요? 오늘 비유는 우리가 기도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가르쳐 줍니다. 그것은 유창하고 아름다운 말로 기도하고 몇 시간씩 계속해서 기도하는 것이 아닌, 우리가 어떤 자세를 가지고 기도하는가 하는 기도의 자세입니다. 하나님은 자기의에 젖은 기도는 제아무리 멋지고 간절해도 안 받아 주십니다. 더욱이 남과 비교하는 자세는 더욱 더 싫어하십니다. 기도는 어디까지나 하나님과 나와의 1대 1의 문제입니다. 남들과 함께 서있는 것이 아니라 나 혼자 주님 앞에 서있는 것입니다. 그 주님 앞에 선 내가 바로 죄인입니다. 죽을 수밖에 없고, 감히 하늘을 똑바로 쳐다보지도 못할 못난 자입니다. 그러니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가슴을 치며 나는 죄인이라고, 나를 불쌍히 여겨달라고 외치는 것뿐입니다.

사무엘하 12:7을 펴시기 바랍니다. 뭐라고 써있습니까? “당신이 그 사람이라!” 어느 날 선지자 나단이 다윗 왕을 찾아와 이야기를 하나 들려줍니다. 부자는 양과 소가 심히 많은데 손님을 대접하기 위해 가난한 자의 하나밖에 없는 딸같이 귀하게 키운 암양새끼를 빼앗았다는 것입니다. 다윗 왕은 그 말을 듣고 노발대발합니다. 그런 나쁜 놈은 죽어 마땅하다며 분노합니다. 바로 그 때 나단이 다윗에게 한 말이 7절입니다. “그 부자, 그 뻔뻔하고 나쁜 놈이 바로 당신입니다! 부하인 우리아를 죽이고 아내 밧세바를 빼앗은 당신이란 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오늘 바리새인과 세리의 비유를 들으면서 어떤 생각을 하셨습니까? “그 바리새인 참 한심하다”라고 생각하셨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오늘 비유를 다 들려주신 후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바로 이 바리새인이다!” 설교를 들으면서, 말씀을 읽으면서 뻔뻔한 죄인들 이야기가 나오면 혹시 나와는 전혀 상관없는 남의 이야기로 여기고 넘어가지 않았습니까? 오늘 설교를 들으면서 “이 설교는 누구누구가 꼭 들어야 하는데”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까? 다른 사람을 너무나 쉽게 판단하고 평가하면서 “저렇게 살면 쓰나” 하고 생각한 적은 없습니까? 나아가 “나는 적어도 저 사람하고는 달라”라며 자신을 안심시킨 적은 없습니까?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늘의 비유는 이런 태도로는 절대 기도 응답을 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가 바로 나입니다. 그 뻔뻔한 죄인이 바로 나입니다. 그 바리새인이 바로 나입니다. 이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의 괴수가 나입니다”라고 고백할 때에만이 진정한 기도의 응답은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아무쪼록 이런 기도의 자세, 겸손한 기도, 하나님의 긍휼을 비는 기도를 통해 응답받는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이 하 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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