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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일곱 교회 순례(4): '두아디라 교회' (계 2:1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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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아디라 교회: 「이세벨을 용납한 교회」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교회, 두아디라 교회>
오늘은 소아시아의 7교회 중 네 번째 교회를 살펴볼 차례입니다.
그동안 우리는 에베소 교회, 서머나 교회, 버가모 교회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이제 두아디라 교회에 대해서 살펴볼 차례인데, 이해하기 가장 어려운 부분입니다.
사실, 두아디라 교회에 주신 말씀이 가장 긴데, 해석하기는 가장 까다롭습니다.

먼저 두아디라가 도대체 어떤 도시였는지 알기 어렵습니다.
'두아디라'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사람은 '루디아'라는 여자입니다.
행 16: 14에 보면 바울 사도를 도와 유럽 최초의 교회인 빌립보 교회를
개척하는데 일등공신이었던 자주 장사 루디아가 두아디라 출신이었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 한가지 사실을 제외하고서는, 적어도 성경을 통해서,
두아디라가 어떤 곳이었는지 알 수 있는 근거는 없습니다.

주후 1세기 경의 지도를 보면 소아시아의 북쪽 내륙 지역에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세 도시가 나란히 세로로 병렬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다른 도시들에 비해 두아디라는 두드러진 특징이 없었다고 합니다.
헬라의 여러 잡신들을 섬기는 신전들이 있었지만 주목을 끌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물론 황제숭배도 했지만 에베소나 서머나와 같이 중심지는 아니었습니다.

그나마 두아디라에서 유명했던 것은 염색업이었는데 상업과 수공업이 발달했습니다.
이들 장사하는 사람들끼리 조합을 결성해서 서로 도움을 주고받았다고 합니다.
여류 기업가 루디아가 두아디라 출신이라는 사실도 이와 같은 염색 조합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어쨌든지 간에 두아디라는 활발한 사업이 일어났던 도시였습니다.

두아디라 교회가 언제 어떻게 세워졌는지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서머나 교회에 대해서 추리한 바와 같이 바울이 에베소 지역에서
선교 사역을 했을 때 북쪽 내륙 지방인 두아디라까지 올라가서
복음을 전하지 않았나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본다면 계시록이 기록되었을 당시에
두아디라 교회는 약 40년 정도의 역사를 가진 교회였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님은 두아디라 교회를 어떻게 보고 계셨을까요?
거듭 말씀드리지만 교회의 머리가 되신 예수님이 그 교회를 어떻게 보셨는가가 중요합니다.
교회 자신이나 세상이 보는 눈도 중요하지만 주님이 보시는 눈이 훨씬 더 중요합니다.

더욱이 오늘 우리는 두아디라 교회에 주시는 말씀을
우리 내리교회에 주시는 말씀으로 들을 수 있는 귀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두아디라 교회와 닮은 점은 무엇이며 다른 점은 무엇인지 생각해봐야 합니다.
그리하여 두아디라 교회의 장점은 배우고 단점은 물리쳐야 할 것입니다.

<두아디라 교회의 虛와 實>
다른 교회들과 마찬가지로 두아디라 교회 역시 장점과 단점을 다 가진 교회였습니다.
주님은 두아디라 교회의 좋은 점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먼저 좋은 점부터 칭찬하십니다.
그런데 주님이 두아디라 교회를 칭찬하시는 진짜 이유가 중요합니다.

우리가 우리의 자녀나 이웃과 대화를 할 때 꼭 책망해야 할 때가 생깁니다.
그 때 상대방의 잘못된 점부터 지적하면서 곧바로 책망을 시작하면,
처음부터 싸움을 거는 것처럼 되기 쉽습니다.
이렇게 되면 대화가 될 수 없고, 듣는 사람도 기분이 상해서 아예 귀를 막고
그 어떤 말도 들으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와 같이 분명히 대화의 주목적이 꾸짖는데 있다고 할지라도
먼저 분위기를 부드럽게 하기 위하여 좋은 점부터 먼저 칭찬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칭찬하는 말부터 시작해도 전반적인 대화의 내용을 보면
그 강조점이 책망 쪽에 가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두아디라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이 두아디라 교회가 잘하고 있는 것 몇 가지를 분명히 칭찬부터 먼저 하셨지만,
그것은 더욱 엄하게 책망하시기 위한 전초 작업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두아디라 교회가 주님으로부터 칭찬받은 점은 무엇입니까?

두아디라 교회의 장점
19절을 보세요.
"내가 네게 사업과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를 아노니
네 나중 행위가 처음 것보다 많도다."

크게 두 가지를 칭찬하셨습니다.
첫째로, 두아디라 교회는 사업, 즉 일을 많이 하는 교회였습니다.
그 일이란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를 통하여 열매를 맺은 결과였습니다.

교회는 일을 많이 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 일은 언제나 사랑과 믿음과 봉사와 인내를 통하여 이루어져야 합니다.
교회일은 세상일과 다릅니다.
어떤 이득이나 욕심이나 경쟁심 때문에 벌어지는 사업이 되어서 안 될 것입니다!

둘째로, 두아디라 교회는 나중 행위가 처음 행위보다 더 훌륭한 교회였습니다. 
처음도 중요하지만 나중이 더 중요합니다.
신앙 생활은 처음이 아니라 나중에 의해서 결정됩니다.
처음에 잘못했어도 나중에 잘하면 처음 잘못한 것을 다 보충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처음에 아무리 잘했어도 나중에 잘못해버리면 처음 잘한 것이 무효가 되고 맙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나중된 자가 먼저 되고 먼저 된 자가 나중 되리라."
(마 20: 16; 막 10: 31; 눅 13: 30)고 말씀하셨고,
"나중까지 견디는 사람이 구원을 얻는다."(마 10: 22)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기독교는 전반전의 종교가 아니라 후반전의 종교입니다.
두아디라 교회는 처음보다도 나중이 나은 교회였습니다.
우리 내리교회도 지나온 역사보다도 앞으로가 훨씬 더 훌륭한 교회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나중이 아름다운 교회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두아디라 교회의 약점
이제 이렇게 칭찬받을 만한 점을 언급하신 다음에 예수님은 갑자기 어조를 바꾸십니다.
20절 말씀을 보세요.
"그러나 네게 책망할 일이 있노라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세벨을 네가 용납함이니
그가 내 종들을 가르쳐 꾀어 행음하게하고 우상의 재물을 먹게 하는도다."

여러분, 이 말이 무서운 말입니다!
예수님이 두아디라 교회에 진실로 하고 싶었던 말씀은 칭찬이 아니라 바로 책망이었습니다.
'그러나,' 'BUT,' 네가 몇 가지 점에서는 잘했지만, '그러나' 이 점이 큰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두아디라 교회의 치명적인 약점은 무엇이었을까요?
한 마디로 말해서 자칭 여선지자라 주장하는 이세벨을 용납했다는 것입니다.
이세벨이 가르치는 바 우상숭배와 음행, 이 두 가지에 빠졌다는 것이지요!
소아시아의 7교회가 빠졌던 두 가지 위험은 우상숭배와 음햄이었는데,
두아디라 교회 역시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우상숭배는 영적 간음이요, 음행은 육적 간음인데
영혼과 육신이 한 분 하나님, 한 남편이나 한 아내가 아닌 또 다른 주인들에게 팔린 것입니다!

이세벨이 과연 누구인가에 대해서는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어떤 학자들은 구약 시대의 이세벨 여왕을 상징화한 것으로서 해석합니다.
이세벨은 시돈 왕의 딸(왕상 16: 31)로서 바알 신과 아스다롯 신을 섬기던 사람이었습니다.
이세벨은 아합왕과 결혼한 뒤 우상잡신들을 이스라엘로 끌고 들어와
영적인 혼란을 부추긴 장본인이었습니다(왕상 21: 25; 왕하 9: 30).

한 마디로 이세벨은 한 분 참 하나님을 배격하고 우상숭배와
종교적 혼합주의를 조장한 여인이었습니다.
여기서 말한 여선지자 이세벨은 바로 우상숭배를 조장했던 이세벨 여왕과 같은
역할을 했던 사람임을 강조하기 위해서 상징적인 의미로 대입했다는 것이지요.

그런가 하면 또 어떤 사람들은 두아디라 교회에 실존했던 교인으로 보기도 합니다.
이방 신전에서 온 여사제로서 그 당시 많은 여사제들이 그러했듯이
몸을 파는 고급창녀였다는 것입니다.
한 때 이방 신전의 여사제로서 수많은 남성들을 종교의 이름으로 유혹했던 이세벨이
이제 기독교로 개종해서 두아디라 교회로 들어왔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이세벨의 개종은 참된 개종이 아니었습니다.
사과와 같이 겉과 속이 달랐습니다.
겉은 교인의 모습으로 변화되었지만 속은 예전에 하던
우상숭배와 음행의 버릇을 버리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두아디라 교회가 이세벨의 가르침을 쫓아 우상에게 바쳤던
제물을 먹어도 좋으며, 성적으로 부도덕한 생활을 해도 눈감아 줄 수 있다는
방종주의에 빠져들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이세벨이 구약 시대의 이세벨 여왕을 상징화한 것이든,
아니면 두아디라 교회 안에 실존했던 전직 이방 신전의 여사제 출신의
교회지도자였든 간에 분명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이세벨은 두아디라 교회 안에 우상숭배와 음행을 조장했던 우두머리라는 사실입니다!
20절 말씀을 다시 한 번 보세요.
여기에서 이세벨은 1) 스스로 예언자로 자처했으며,
2) 주님의 종들로 하여금 가르치고 미혹시켜서 행음하게 했으며,
3) 우상 앞에 바쳐진 제물을 먹게 만들었습니다.

이세벨은 주님의 종들을 교란시켜 하나님의 진리로부터 멀어지도록 만들었습니다!
그 옛날 이세벨 여왕이 아합왕을 유혹해서 바알과 아스다롯 신을 섬기며
온 나라를 윤리적 타락으로 몰고 갔던 것처럼,
또 다른 이세벨이 두아디라 교회 안에 침투해 들어와
제일 먼저 주의 종들부터 오염시키고 타락시키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세벨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참 하나님 신앙을 방해하는 사탄의 세력을 지칭합니다.
옛날의 구습을 벗어 던지지 못하고 겉만 기독교인이 된 상태에서 주의 종들로 하여금
우상숭배와 음행의 올무에 빠지도록 만드는 적(敵)-그리스도의 세력인 것입니다.
두아디라 교회를 섬기던 주의 종들은 이세벨의 가르침을 쫓아
더 이상 주님의 종이 아니라 이세벨의 종으로 전락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오늘도 하나님의 교회는 현대판 이세벨을 조심해야 합니다.
이들은 겉모습만 기독교로 개종했을 뿐, 옛날 이방신을 섬기던 이교적 버릇을
청산하지 못하고 주의 종들부터 타락의 길로 내모는 무리들입니다.

존 칼빈은 일찍이 "목사는 연약한 양들을 위로하고 치료하는 부드러운 음성을
가져야 함과 동시에, 자신의 신분을 속이고 우리 안에 몰래 들어온 늑대를
내어쫓는 날카로운 음성을 가져야 한다"고 했습니다.
참 목자는 이중음성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렇습니다.
참 목자는 양들을 사랑으로 돌보는 따뜻한 목소리도 가져야 하겠지만,
우리 안에 몰래 들어와 수많은 양들을 물어 죽일 수 있는
이리떼를 내쫓을 수 있는 날카로운 목소리도 가져야 할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두아디라 교회에 주신 말씀을 통하여, 
진정으로 거듭나지 못하고 겉모습만 변화된 사람들을 지도자로 세울 때
교회가 엄청나게 오염될 수 있다는 사실을 하나의 교훈으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화려한 모습으로 위장한 채 우리를 유혹하는
현대판 이세벨을 조심해야 합니다.
가지가지의 모습으로 우리를 넘어뜨리려고 하는 이세벨의 정체를 꿰뚫어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이세벨에게 조금의 기회도 주지 말아야 합니다!

<이세벨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주신 경고>
이제 주님은 두아디라 교회를 오염시키는 이세벨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셨지만,
이세벨은 자기 죄를 회개하려 들지 않았습니다.
주님께서 회개하여 잘못된 길로부터 돌아서라고 기회를 주셨건만 이세벨은 듣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회개하지 않는 이세벨에게 삼중의 재앙을 내리신다고 경고하십니다.
22-23절 말씀을 보세요.
"볼지어다 내가 그를 침상에 던질 터이요 또 그로 더불어 간음하는 자들도
만일 그의 행위를 회개치 아니하면 큰 환난 가운데 던지고 또 내가 사망으로
그의 자녀를 죽이리니 모든 교회가 나는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는 자인 줄 알지라
내가 너희 각 사람의 행위대로 갚아주리라."

첫째로, 회개하지 않을 때 침상에 던진다는 것입니다.
침상에 던진다는 것은 질병에 걸려 침대에 눕게 한다는 것입니다.
둘째로, 큰 환난 가운데 던지겠다는 것입니다.
가지가지의 물리적 육체적 재앙에 빠지도록 한다는 것이지요.
셋째로, 그 자녀들을 죽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이세벨의 가르침을 따라 방종하는 사람들, 특히 성적으로 타락한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무서운 징벌을 가하시겠다는 경고의 말씀이지요!

그런데 이 말씀은 두아디라 교회를 향해 말씀하시는 주님의 모습과 관계되어 있습니다.
교회마다 말씀하시는 주님의 모습이 각각 다르게 표현되어 있는데
에베소 교회를 향하신 주님의 모습은 '오른 손에 일곱 별을 쥐시고,
일곱 금 촛대 사이를 거니시는 분'이었습니다.
서머나 교회를 향하신 주님의 모습은 '처음이요 마지막이요,
죽으셨다가 살아나신 분'이었습니다.
버가모 교회를 향하신 주님의 모습은 '날카로운 양날 칼을 가지신 분'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두아디라 교회를 향하신 주님의 모습은 어떤 모습입니까?

18절 말씀을 보세요.
"두아디라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그 눈이 불꽃같고
그 발이 빛난 주석과 같은 하나님의 아들이 가라사대."

여기서의 주님은 불꽃같은 눈동자를 가진 주님입니다.
아무도 그 속마음을 속일 수 없도록 우리의 중심을 꿰뚫어보시는 주님이라는 말씀이지요.
이세벨이 아무리 겉모습을 화려하게 단장한다고 할지라도
불꽃같은 주님의 눈을 속일 수 없습니다.
또한 주님의 발은 주석같은 발입니다.
이 발로 내리 밟을 때 그 어떤 것도 견뎌낼 수 없습니다.
그대로 박살이 나고 맙니다.
주님께서 이세벨 무리들을 심판하신다는 것이지요.

<만국을 다스릴 철장과 새벽 별을 바라보며>
이렇게 이세벨을 따라 구습을 버리지 못하고 세상과 타협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주님은 불꽃같은 눈동자로, 주석같은 발을 가지신 분으로 심판하시지만
끝까지 믿음의 지조를 지키는 사람들에게는 위로의 말씀을 주십니다.

24-28절 말씀을 보세요.
"두아디라에 남아 있어 이 교훈을 받지 아니하고 소위 사단의 깊은 것을
알지 못하는 너희에게 말하노니 다른 짐으로 너희에게 지울 것이 없노라
다만 너희에게 있는 것을 내가 올 때까지 굳게 잡으라
이기는 자와 끝까지 내 일을 지키는 그에게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리니
그가 철장을 가지고 저희를 다스려 질그릇 깨뜨리는 것과 같이 하리라
나도 내 아버지께 받은 것이 그러하니라 내가 또 그에게 새벽 별을 주리라."

두아디라에는 이세벨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고 끝까지 믿음을 지키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에게 주님은 다른 짐을 지우지 않으시고 주님이 주신 것을
끝까지 잘 지키라는 부탁만 하십니다.
복음과 믿음을 주님 오실 그 날까지 잘 지키라는 것이지요.
그러면서 이기는 사람, 즉 주님의 일을 끝까지 지키는 사람에게 세 가지 약속을 주십니다.

첫째로, 모든 민족들을 다스릴 권세를 주신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끝까지 붙들고 충성할 때, 하나님께서 이와 같은 권세를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권세를 갖게 되면 마치 철지팡이로 질그릇을 산산조각이 나도록 깨뜨리듯이
이세벨과 같이 잘못된 무리들을 징치할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세상적인 풍조를 따라 교회를 어지럽히는 무리들이 하나님의 진리 앞에
여지없이 무너진다는 것이지요!

둘째로, 새벽 별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새벽 별은 주님 자신을 의미할 뿐 아니라
신앙의 최후 승리자들에게 주어질 영광과 위엄을 의미합니다.
하늘 높이 떠서 반짝반짝 빛을 발하는 샛별처럼 빛나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이세벨의 유혹에 물들지 않고 끝까지 믿음의 정절을 지켜내어 승리하는 사람들은
샛별같이 찬란하고 영롱한 빛을 발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 우리 내리교회는 이세벨 신앙에 물들어서 안 될 것입니다.
참된 진리 안에서 믿음을 끝까지 지킬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리하여 만국을 다스릴 수 있는 철장과 샛별을 선물로 받는 교회가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아멘
(김 흥 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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