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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나그네 (벧전 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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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오늘 주신 본문, 베드로 전서 1장 1절을 보니, 이 편지의 발신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베드로>요, 수신자는 <흩어진 나그네>입니다. 사도 베드로가 흩어진 나그네에게 편지를 써 보내는 중인데요, 거기 1절 말씀을 보니, 저들이 흩어져서 나그네로 살고 있는 다섯 곳의 지명이 등장합니다.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 그러고 보니 이 편지는 사도 베드로가 불특정 다수에게 보낸 회람 성격의 공동 서신이군요.

여기서 한 가지 궁금증이 생깁니다. 왜 사도 베드로는, 사도 바울처럼 어느 한 지역을 정하여 편지를 보내시지 않고, 아시아 지역 전체에 흩어져 있는 불특정 다수에게 편지를 보내셨나 하는 점입니다. 저들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편지 한 통으로 저들 전체에게 어떤 메시지를 전할 만큼 저들은 공통의 문제를 안고 있었던 것일까? 이 궁금증을 풀기 위해서 먼저 당시의 시대 상황을 알아보아야 합니다.

이 서신은 주후 64년경에 기록되었다고 전해지는데, 당시는 로마의 기독교 박해가 극에 달했던 시기입니다. 특히 주후 64년 7월 19일에 발생한 로마의 대 화재는 초대교회 신자들을 나그네로 몰아내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습니다.

3일간이나 계속된 로마의 대 화재는, 건축에 대한 열정을 가지고 있던 네로 황제가 새로운 로마를 건설하기 위해 일부러 불을 질렀던 방화사건이었지만, 그래서 불이 꺼지려고 하면, 몰래 다시 불을 질러 결국 로마 전체를 태워버린 사건이었지만, 네로가 범인이라는 소문이 퍼지면서 로마 시민들의 비난과 분노가 빗발치자, 네로는 희생양을 찾을 수밖에 없었고, 결국 예수 믿는 그리스도인들이 네로 대신 방화범으로 몰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로마의 역사가 타키투스는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로마 황제가 시민들의 분노를 진정시키려고 온갖 방법을 다 동원했지만, 로마의 화재가 네로의 명령에 의한 것이라는 소문을 없앨 수는 없었다. 결국 그는 크리스천이라는 이름의 공적을 범인으로 내세워 그 위기에 빠져나오려고 하였다.>

불행히도 네로의 계략은 적중했습니다. 성난 군중들의 비난이 이제 그리스도인들에게 퍼부어졌습니다. 이를 이용해 폭군 네로는 기독교를 박해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시민들의 분노를 잠재우기 위해 온갖 잔학한 방법으로 그리스도교 신자들을 공개 처형하기 시작했습니다. 붙잡힌 신자를 송진 가운데로 굴려 네로의 정원을 밝히는 살아있는 횃불로 사용하는가 하면, 야수의 가죽을 입힌 후 사냥개를 풀어 신자들을 물어뜯게도 하였습니다.

결국 예루살렘 대 박해를 피해 여러 곳으로 흩어졌던 것처럼, 이들도 극심한 박해를 피해 여러 곳으로 흩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루아침에 삶의 터전을 잃고 떠도는 나그네가 되었던 것입니다. 나그네가 된 저들은 어딜 가나 본토 민들에게 차별과 박해를 당하는 신세였습니다.

1절에 나오는 지명 가운데 갑바도기아 같은 곳은, 유명한 성지순례 코스인데요, 지금도 당시 그리스도인들이 생활하던 지하 도시가 남아 있다고 하지요. 박해를 피하여, 그리고 신앙을 지키기 위하여, 지하로, 지하로, 내려갔던 저들의 모습은, 요즘 우리 마음엔 낭만으로 다가오는 <나그네>란 단어만 가지고는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처참한 것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사도 베드로가 흩어져 살고 있는 나그네 그리스도인들에게 소망과 위로를 전하기 위해 편지를 써 보냈던 것입니다. 여러 곳의 불특정 다수를 수신자로 편지를 보냈던 것은, 당시 저들이 처한 상황이 대동소이했기 때문입니다.

그랬습니다. 저들은 집에서 쫓겨난 나그네였습니다. 어디 간들 평안할 수 없는 나그네였습니다. 모든 것이 불안하고 모든 것이 부족하고 모든 것이 낯선 나그네였습니다. 언제나 본토 민들의 눈치를 살펴야 했고, 언제든지 본토 민들이 쫓아내면 쫓겨날 수밖에 없는 그런 신세였습니다. 그런 저들에게 가장 시급하게 필요한 것은, 은혜와 평강이었습니다. 해서 저들에게 보낸 편지의 첫 인사에서 사도 베드로는 이렇게 복을 빌어 줍니다. 2절 맨 뒤,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 찌어다!> 하나님 주시는 은혜와 평강이 없이는, 하루도 지탱할 수 없는 인생, 저들은 나그네였습니다.

<은혜와 평강으로 충만하시기 바랍니다.>

# 2
그런데 놀라운 점은, 그런 힘없는 나그네를 가리켜, <택하심을 입은 자들>이라 불렀다는 사실입니다. 2절의 중간, <택하심을 입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라!> 그랬습니다. 저들은 그냥 구름 따라 물 따라 떠다니는 나그네가 아니었습니다. 분명 하나님의 택하심 가운데 여기로 흩어져 살고 있는 나그네였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인간의 실존을 꿰뚫는 사도 베드로의 놀라운 통찰력을 발견하게 됩니다. 또한 여기서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이 무엇인지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모두는 나그네입니다. 신분고하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자기 본향을 떠나 객지에 살면서, 늘 고향을 그리워하는 존재, 바로 우리 인간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 나그네 여정 속에 하나님의 섭리가 흐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저 정처도 없이 방향도 없이 목적도 없이, 마냥 떠도는 나그네 같으나, 아니, 하나님이 택하신 인생이요, 그 택하심 가운데 특별한 목적과 방향성을 지니고 살아가는 인생이란 뜻입니다.

해서 사도 베드로는, 우리가 힘없는 나그네요, 흩어진 나그네인 것,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그 보다 더 중요한 사실이 있으니, 당신들은 하나님의 택하심을 입은 자라는 사실을 잊지 말라고 선포했던 것입니다. 우린 하나님의 택하심 가운데 여기로 흩어져서 살고 있는 나그네입니다. 우린 선택 받은 나그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남는 과제는 택하심의 뜻과 의미와 목적을 발견하는 일입니다. 왜? 선택엔 항상 목적이 전제되기 때문입니다. 나를 선택하셨다는 말은, 나를 어떤 목적으로 부르셨다는 말과 같습니다. 택하신 분이 아무런 목적도 없이 선택하는 경우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택하심을 입은 자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나를 택하신 분의 목적을 정확하게 파악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그 목적을 온전히 이루어 드리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택하시고 부르신 그 목적을 온전히 이루어 드리는 멋진 나그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 3
그렇다면 사도 베드로가 흩어진 나그네, 곧 초대교회의 디아스포라를 향하여 선포했던 선택의 목적과 계획은 무엇일까? 이 목적을 이루기 위해 우리 나그네 신자들은 무엇을 해야 하나? 말씀을 통해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2절 말씀을 보니, 놀랍게도 사도 베드로는 이 짧은 구절 속에서 삼위 일체 하나님에 대한 신앙 고백을 전제로, 택하심의 목적과 내용을 전하고 있습니다.

1.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된 일이다!

2절의 첫 문장이지요. 우리가 택하심 가운데 이렇게 흩어져 살고 있는 것, <이미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이루어진 일>이라는 고백입니다. 달리 말해 성부 하나님의 영원하신 계획안에서 우리를 부르셨고, 택하셨고, 여기까지 흩어 보내셨다는 고백이지요.

이 점에 대하여 사도 바울도 같은 고백을 한 적이 있습니다. / 에베소서 1:3-4 / (읽기) / 중요한 사실은, 아버지 하나님께서 우리를 택하셨다는 사실입니다.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린 그저 물결치는 대로 떠다니는 부평초 인생이 아닙니다. 바람 부는 대로 흘러다니는 민들레 홀씨 인생이 아닙니다.

아버지 하나님께서 이미 창세전부터 아셨고, 그 예정의 섭리 가운데 선택하시어, 오늘 여기로 보내신 인생, 해서 그 방향과 목적이 뚜렷한 인생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극심한 박해 속에서 말로 할 수 없는 고초를 겪으면서도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자고 권면했던 것입니다.

다시 베드로 전서로 돌아오실까요? 1장 3절의 첫 단어, 찬송하리로다! 사도 바울과 똑같은 고백이요 권면이군요. 찬송하자, 찬송할 수 있다, 나는 찬송할 것이다. 왜? 다시 3절, 아버지 하나님이 긍휼하심을 베푸시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을 주셨기 때문이라 합니다. 그럼요, 우리의 인생은 아버지 하나님의 미리 아심을 따라 택하심을 입은 존귀한 인생이요, 주 안에서 산 소망으로 가득한 인생입니다. 찬송이 그치지 않는 인생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저를 보십니다. 우리가 어떤 일을 할 때에, 중차대한 일일수록 오래전부터 미리 계획하고 미리 준비합니다. 그런데 우리를 구원하실 계획을 아버지 하나님은 언제부터 세우셨다? 창세전부터! 할렐루야! 그만큼 우리를 구원하시는 일이 하나님 아버지의 최대 관심사라는 뜻이지요. 해서 창세전부터 알고 계셨고, 계획을 세우셨고, 그 목적을 따라 오늘 나를 택하시고, 여기로 흩어 보내셨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귀한 말씀, 마음에 새기시고, 꼭 믿으시고, 그리고 자부심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우리 모두 나그네 인생인 것 맞습니다. 때로 서럽고, 때로 불안하고, 때로 도망가고 싶고, 때로 포기하고 싶은 나그네 인생, 설움 가득한 나그네 인생인 것 맞습니다. 그러나 잊지 말 것은, 우린 그냥 나그네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우린 하나님의 택하신 나그네입니다.

그러므로 우린 어떤 경우에도 낙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섭리가 내 인생 속에 흐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 인생은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어낼 존귀한 인생이기 때문입니다.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이미 나를 아시고, 예정의 섭리 가운데, 나 자신조차도 상상할 수도 없는 최고의 걸작품으로 나를 만들어 가고 계십니다. 이 모든 일은 아버지 하나님의 미리 아심을 따라 된 일입니다.

2.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으로 된 일이다!

2절의 중간 대목인데요, 이렇게 흩어진 나그네로 살고 있는 우리이지만, 이 역시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을 위하여 된 일이라는 겁니다. 성부 하나님의 목적과 계획은 성령 하나님의 역사를 통해 이루어집니다. 아버지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일을 성령 하나님께서 집행하십니다. 그러므로 나를 택하신 아버지 하나님의 섭리와 목적은 성령 하나님 안에서 이루어진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택하심 받은 성도는 성령의 역사 아래 살아야 합니다. 성령의 손길을 거부하지 말아야 합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에 순종해야 합니다. 진흙이 토기장이의 손을 거부하면 아름다운 도자기로 거듭날 수 없듯, 우리가 성령의 역사를 거부하면 하나님의 걸작품으로 거듭날 수 없습니다.

중요한 점은, 성령의 역사란 성화의 역사라는 사실입니다.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은 성도들, 이제 성령의 도우심으로 성화의 과정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성령께서 하시는 일, 성화요, 곧 거룩케 하시는 일입니다.

여기서 성화의 과정을 살아야 할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새벽 제단에서 받고 있는 말씀인데요, 이사야서로 갑니다. / 이사야 1:16-17 / (읽기) / 스스로 씻어라, 스스로 깨끗케 하라, 스스로 거룩한 인생이 되게 하라는 건데요, 이 명령을 주신 이유가 있습니다. 13절의 맨 뒤,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성회로 모여 예배할 땐 거룩한데 세상에 나가 사는 것을 보면 악을 행하는 것들, 더 이상 볼 수가 없다는 거지요. 15절, 그 손에 피가 가득한 것들, 해서 그런 너희의 제사를 받지 않을 것이요, 그런 너희의 기도에 응답하지 않는다고 경고하신 거지요.

해서 선지자 이사야가 간곡하게 권면하는 말, 제발 스스로 씻고, 스스로 깨끗케 하라는 거였지요, 한 마리고 거룩하게 되라, 성화의 삶을 살라는 명령인데요. 문제는 이 대목에서 수많은 크리스천들이 결정적으로 잘못 생각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오래된 착각이요 너무 널리 퍼져버린 오해인데요, 내용인즉, 우린 세상에 나가 죄를 짓고, 교회에 와서 나를 거룩하게 씻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다 보니 교회 안에서만 거룩하고 세상에 나가선 맘대로 삽니다. 교회 안에선 그렇게 경건한 것 같았는데, 정작 세상에 나가선 경건의 능력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아니오, 그건 착각이요 오해입니다.

그럼 어디서 씻으라는 건가? 어떻게 씻으라는 건가? 16절, 악업을 버리고 악행을 그치는 것이 성화의 방법이라 하십니다. 17절, 선행을 배우고, 공의를 구하고, 약자를 편들고, 학대받는 자, 고아, 과부, 한 마디로 약자의 편을 들어주고, 저들의 한을 풀어주고, 약자를 변호해 주는 것이 성화의 과정 그 자체라는 겁니다.

중요한 대목입니다. 나를 스스로 씻는 곳, 교회가 아니라 세상입니다. 세상에 나가 살면서 깨끗하게 씻고 오라는 겁니다. 어떻게? 약자들 편을 들어줌으로써, 약자들의 한을 풀어줌으로써, 약자들을 도와주고 변호함으로써, 거룩해지라는 겁니다. 그 길 외에는 없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렇게 거룩해진 손으로 거룩한 제물을 가져오라는 겁니다. 그렇게 거룩해진 내 인생 가지고 와서 산제사로 드리며 예배하라는 겁니다. 그런데도 우린 세상에 나가서는 적당히 살다가 교회에 와서 씻으면 된다고 착각합니다. 아니오, 예배는 면죄부가 아닙니다. 우리가 바치는 제물이 면죄부가 될 수 없습니다. 주신 은혜와 축복에 대한 감사요 찬양이지, 그 역은 아닙니다. 우린 세상에 나가 스스로를 씻어야 합니다. 나그네 잘 대접하며 <거룩>을 완성해야 합니다. 우린 하나님의 택하심 가운데 성령의 도우심으로 거룩한 인생으로 완성되어 가는 여정 속에 있는 나그네이기 때문입니다.

3. 예수 그리스도께 순종함과 그의 피로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된 일이다!

이 대목에서 성자 예수님을 만나게 되는데요, 우리를 택하시고, 여기로 흩어져 보내신 또 하나의 목적과 뜻이 계시니,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 순종하게 하기 위하여, 그리고 그의 피로 피 뿌림을 얻게 하기 위하여 라는 겁니다.

무슨 뜻인가? 어차피 나그네로 살다가 본향으로 돌아가야 할 우리들일진대, 저 하늘나라, 영원한 본향으로 돌아가기 위해 선결해야 할 문제가 있으니, 바로 죄의 문제라는 겁니다.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본향으로 돌아갈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해서 잃어버린 자식을 되찾으려는 어버이의 심정으로, 탕자를 기다리는 아버지의 심정으로, 아담의 죄로부터 시작된 죄의 악순환 속에서, 자꾸만 쫓겨 다니기만 하는 나그네 인생들을, 다시 에덴으로 불러 모으시고자, 저 영원한 본향으로 받아주시고자, 독생자 예수님을 보내시어, 화목 제물로 삼으셨던 것입니다.

문제는 아들 예수를 십자가에 내 주어, 그 피의 공로로 본향으로 돌아올 길을 열어 주셨건만, 죄로 물든 불쌍한 나그네들이, 그 예수를 거부한다는 데 있습니다. 그렇게 고향으로 돌아가고 깊다고 아우성 쳐서, 보내주신 그리스도를 알아보지 못하고, 저를 거부하고 있으니, 정말 안타까운 현실이지요.

해서 사도 베드로께서 호소하는 말, 아니, 순종함과 피 뿌림을 얻게 하기 위하여 택하신 백성이니, 성령 안에서 순종하라고,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그 피로 피 뿌림을 얻어 죄의 문제 해결하고, 어서 본향으로 가자고 호소하고 있는 겁니다.

사도 베드로는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일이 얼마나 복된 일인 줄을 누구 보다 잘 알고 있었던 인물이었습니다. 그 자신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고백 한 마디로 천국 열쇠를 얻었으며, 반석이란 이름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가을, 그리스도를 다시 만나시고, 그 분을 나의 주님으로 영접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주님께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하여 아버지 하나님의 택하심 가운데, 그리스도의 은혜와 성령의 도우심을 힘입어, 거룩을 완성하며, 마침내 본향에 다 돌아가는 아름다운 나그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 4
끝으로 사도 베드로는 택하심 가운데 여기저기로 흩어져 살고 있는 나그네 신자들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을 기원하는 축복의 덕담으로 첫 인사를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

왜? 우리는 은혜를 떠나서는 살 수 없는 나그네이기 때문입니다. 물고기가 물을 떠나 살 수 없듯이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지 않고서는 살아갈 소망이 없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세상이 어렵다 아우성친다 하여도, 하나님의 은혜로 충만하기만 하면, 우린 그 무엇도 이길 수 있고, 그 무엇도 넉넉히 감당할 수 있습니다. 해서 우리 나그네 성도들은 자나 깨나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고, 언제나 주님의 은혜로 충만해야 합니다. 나그네에게 필요한 것은 은혜입니다.

베드로가 그랬습니다. 갈릴리에서 고기 잡던 사람 베드로, 그가 예수님을 만나지 아니하였더라면 그는 평생 고기만 잡다가 갔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주님을 만났고, 주님을 영접했고, 주님께 순종하여 영원히 사랑받고 존경받는 사도 베드로로 거듭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가 수제자가 될 수 있었던 것, 남다른 지성을 가졌다든지, 깊은 도덕성과 인격을 구비한 사람이었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충동적인 사람이었고, 매우 불안한 인물이었습니다. 그의 본명 시몬이 뜻하는 대로 그는 <갈대>같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주 안에서 반석으로 거듭났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부여하신 영적인 자질을 보셨습니다. 그에게 반석이라는 뜻을 가진 이름을 지어주셨습니다. 과연 그는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반석과 같은 인물이 되어 반석과 같은 역할과 사명을 감당하였습니다.

시몬이 은혜와 평강 가운데 베드로가 되었듯, 이 가을, 주님을 새롭게 만나,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시기 바랍니다. 내 인생, 나그네 인생, 하나님의 손 안에 있기만 하면, 우린 하나님의 걸작품이 될 수 있습니다. 이 믿은 안에서 은혜와 평강이 차고 넘치는 한가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4
한가위입니다. 한가위 날이 주일날입니다. 우리 교회의 모든 공 예배는 변함없이 진행될 예정입니다. 고향을 돌아보는 일, 친지들을 만나는 일, 한가위에 해야 할 일들, 미리 다 해 두시고, 주일엔 함께 모여 예배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특별한 손님들을 초청했습니다. 우리 모두 나그네 인생이지만, 특별히 이 땅에 살고 있는 나그네들 가운데, 은혜와 평강이 절실히 필요한 나그네 인생들 30명을 초청했습니다. 시화 지구에서 생활하는 필리핀 노동자 형제자매들인데요, 윌리암 팔마 목사님이 섬기는 예배 공동체이기도 합니다.

외국인 노동자들을 학대하는 것, 죄악입니다. 외국에서 우리 땅에 들어와 사는 나그네를 잘 대접하는 일은, 그리스도를 대접하는 일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나그네 천사들을 영접하려고 합니다. 이 일을 위해 당회 장로님 내외분들이 그 날 점심을 직접 만들어 주실 예정입니다. 그리고 함께 예배드리고, 함께 점심 먹고, 함께 찬양하며, 아버지의 집에서 은혜와 평강을 나누려고 합니다.

<너는 이방 나그네를 압제하지 말며 그들을 학대하지 말라.

왜냐하면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였었기 때문이다.>

<네가 만일 그들을 해롭게 하므로 그들이 내게 부르짖으면 내가 반드시 그 부르짖을 들으리라.>

오늘도 우리 주님, 나그네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부지중에 나그네를 대접하다가 주님을 영접하는 아름다운 역사가 우리 가운데 계속 되기를 소망합니다. 주신 말씀 마음에 새기며, 명상 기도합니다. 아멘!
(장 빈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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