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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추석] 고향생각 (히 11:1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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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이 소리 없이 물감을 찍기 시작하는 9월의 둘째 주일입니다. 오늘도 우리 주님이 주시는 삶의 기쁨과 소망이 예배드리는 여러분 모두위에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오늘 저는 읽어드린 말씀을 중심으로 고향생각이라는 제목의 말씀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추석 명절이 일주일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해마다 이맘때가 되면 마음이 분주해지기 시작합니다.

며칠 전 태풍으로 인해 농촌에서는 익어가는 벼가 쓰러져 물에 잠기고 낙과로 인한 피해로 울상입니다. 도시에서는 물가 급등 및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인해 마음이 무거운 분들이 늘어가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추석 명절은 좋은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고향에 가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 중에는  벌써부터 마음이 고향에 가 있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아직은  길이 붐비지 않지만 며칠 후면 전국의 도로는 귀성객들로 북새통이 될 것입니다.

항상 그렇듯이 귀성 길은 고생길입니다. 그래도 고향 가는 사람들의 표정은 한결같이 환합니다. 그 만큼 고향은 좋은 것이고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는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있기 때문입니다.

정진홍시인은 고향을 이렇게 그리워했습니다.

고향에 가고 싶다.
큰댁 뒷동산에 있었던 용트림하던
소나무는 죽은 지 오래다.
내가 자라던 집은 흔적조차 없다.
동구 밖 느티나무 아래에서
스무 걸음 떨어진 개울에는 물도 말라 버렸다.
거기에 빨래하던 아낙들은 어쩌면 이제는 모두 이 세상 사람들이 아니게 되었을 듯하다.
그런데 가고 싶다.
그래,
고향에 가면,
고향으로 돌아가면,
나는 비로소 나를 사랑하리라.
나는 나를 토닥거리고 싶다.
따뜻하게 안아주고 싶다.
피곤한 마음도 상처 난 몸도 쉬게 하고 아프지 않게 하리라.

정진홍시인의 <마당에는 때로 은빛 꽃이 핀다>중에 나와 있는 글입니다.

그렇습니다. 가장 나를 편안하고 따뜻하게 안아 줄 곳은 고향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또 하나의 고향이 있습니다. 이 땅의 고향도 있지만 더 나은, 더 좋은 고향이 있습니다. 본문 16절 말씀에 보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요.”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에게는 땅위의 고향도 있지만 동시에 하늘위의 고향도 있습니다. 땅위의 고향은 육신의 고향이고 하늘의 고향은 영혼의 고향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을 통하여 우리의 생각이 육신의 생각에만 메이지 말고 영혼의 고향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며 나아가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첫째로, 고향이란?
고향이란 말은 듣기만 하여도 정겹고 생각만 해도 마음이 푸근해 집니다. 고향을 그리워하며 찾아가는 열심은 모든 민족 모든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본능입니다.

출애굽기 13장 19절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하면서 요셉의 유골을 가지고 나가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속에는 어린 시절 고향을 떠나와 평생 고향을 그리워하며 살았던 요셉의 마음이 담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연어는 16,000km나 되는 먼 바닷가로 나갔다가 알을 낳기 위해 모천으로 회귀합니다. 성냥개비만한 연어가 어른 팔둑크기로 자라나듯이 고향을 떠날 때보다는 한결 넉넉해져서 돌아옵니다. 그러나 귀향길이 결코 즐겁지만은 않습니다. 우리나라 남대천에 돌아온 연어들은 온 몸이 상처투성이입니다. 먼 길을 헤치고 달려왔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귀성 전쟁을 치루어야 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의 본능적으로 고향을 향해 가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고향은 어머니의 모태와 같은 마음의 안식처이기 때문입니다. 세월이 변하고 나도 변했지만 고향은 그대로 그 자리에 있어서 객지 생활에 지친 몸들을 쉬게 해 주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제 아무리 출세를 했어도, 제 아무리 유명한 사람이 되어도 내 어릴 적 모습 그대로 변함없이 대해주는 곳이 고향입니다. 또한 나를 가식으로 꾸며주지 않고, 있는 그대로 맞이해 주는 곳이 고향입니다. 더욱이 괴롭고 외로울 때 일수록 고향은 그리워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향에 못가는 사람들의 슬픔은 아마도 이 세상의 어떤 슬픔과도 비교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한 번은 신문에서 이런 기사를 본 적이 있습니다. 혈혈단신으로 탈북한 청년인데 얼마나 고향이 그리운지 한 밤중에도 벌떡 일어나 엉엉 울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어찌 보면 이해가 안가고 이상한 일입니다. 거기서 살다가 살기가 너무 힘들어 목숨 걸고 탈출했는데, 여전히 그 곳을 그토록 그리워하고 있다니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의 심성에 새겨진 귀소본능일 것입니다.

또한 고향에는 평소에 내가 그리워하던 사람들이 있습니다. 날 낳아주시고 길러주신 늙으신 부모님이 계시는 곳입니다. 자식들은 분주한 생활 속에서 가끔 잊고 지내지만 고향 떠난 자식들을 기다리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며칠 전 벌초 겸 고향에 다녀왔습니다만 부모님이 안 계시는 고향은 별 의미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만약에 하늘나라에 우리 주님이 안 계신다면 들어갈 일이 없을 것입니다. 또한 고향이 그리운 것은 내 어릴 적 친구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고향을 지키며 농사를 지어 자식을 도시로 내 보내 공부시키는 친구, 바닷가에서 고기를 잡는 친구들이 있습니다.

한번은 부천역에서 고향친구를 만났는데 농사를 지어서 그런지 얼굴이 검게 그을리고 머리는 히끗히끗했습니다. 군대 간 아들을 면회하고 오는 길이라 했습니다. 고향에 오면 꼭 자기 집에 들러가라고 하면서 기르던 닭까지도 잡아 주겠노라고 했습니다. 언제 보아도 어디서 만나도 정겨운 것이 고향친구입니다. 그 뿐 아니라 고향은 마음에 담긴 추억들이 있는 곳이요, 별을 보면서 미래를 꿈꾸었던 추억들이 서려있는 곳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고향은 마음의 안식처요, 내 사랑하는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는 곳이요, 내 마음의 방향을 정해주는 곳입니다.

둘째로, 더 나은 고향을 사모해야 합니다. 신앙이란 새로운 고향에 대한 선언입니다. 본문 히브리서 11장은 흔히 믿음장이라 부릅니다. 여기에 보면 믿음의 조상들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아벨, 에녹, 노아, 아브라함, 이삭, 야곱 등등  이들은 하늘나라를 영원한 고향으로 삼은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한결같이 천국에 잇는 더 나은 본향을 바라보고 믿음으로 살다가 그 믿음으로 천국에 들어간 사람들입니다.

본문 11장 15절~16절 말씀에 보면 “그들이 나온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라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잇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아브라함의 고향은 갈대아우르입니다.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발생지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고향으로 생각하고 가기를 갈망했던 곳은 그 갈대아우르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15절 말씀을 보면 “저희가 나온바 본향을 생각하였다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라고 말합니다. 그가 얼마든지 갈대아우르로 가려고 했다면 얼마든지 갈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곳이 진정한 고향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즉 과거에 머물렀던 한 시점이나 장소를 고향이라 하지 않고 미래에 돌아갈 곳 천국을 자기의 고향으로 고백하며 그 곳으로 가기를 열망했다는 것입니다. 날이 어둡고 차가 막혀도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가고 싶은 고향이 천국이라는 것입니다.

아프리카에 선교사로 나가서 평생을 보내고 이제는 은퇴하고 돌아오는 노부부 선교사가 배를 타고 뉴욕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기다리던 뉴욕항구에 도착을 하자 선창에는 수많은 인파가 몰려 있었고 군악대가 환영의 음악을 연주하고 있었습니다. 선교사 부부는 기뻤습니다. 그런데 이상했습니다. 그 환영인파는 자신들을 환영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알고 보니 미국의 유명한 비행사 린드버그를 환영하고 있었습니다. 그 비행사는 단발 비행기로 대서양을 횡단하는데 성공을 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선교사 부부가 탄 배로 귀국을 하고 있었습니다.

한 평생 아프리카에서 흑인들을 위하여 복음을 전하고 몸과 마음이 피곤에 지쳐 기진해 돌아오는 그들을 맞이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고 비행사 린드버그를 환영하는 사람들로 선창은 꽉 차 있었습니다. 그들은 린드버그를 부르면서 환영의 축제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선교사 노부부는 오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허름한 3류 호텔에 여장을 풀고 그날 밤 통곡을 하면서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우리들은 아프리카 오지에서 복음 증거로 한 평생을 보내고 돌아왔지만 환영은커녕 알아보는 사람도 없습니다. 그런데 겨우 비행기를 타고 대서양을 한번 횡단했다고 해서 전 뉴욕시민이 환영을 하고 있으니 이럴 수가 있습니까?”

그러자 늙은 노부부 선교사에게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사랑하는 종아, 린드버그는 고향에 돌아와서 환영을 받는 것이지만 너희는 고향에 돌아오지 않았지 않느냐? 너희들의 고향은 뉴욕이 아니라 하늘나라이니라. 너희들이 하늘나라 고향에 돌아올 때는 리드버그가 뉴욕시민에게서 환영받은 것은 비교도 안 된단다. 하늘에 있는 천군 천사가 나팔을 불어서 너희를 환영할 것이고 천국에 먼저 간 사람들이 모두 환영할 것이며 너희의 구주 예수님께서 너희의 눈물을 닦아 주실 것이니라. 그 때 까지만 참고 기다려라.”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늘이 고향인 사람은 세상을 고향으로 생각하는 사람들과는 가치관이 달라야 합니다. 아브라함은 세상의 가치에 따라 살지 않고 천국의 가치를 가지고 이 세상을 살았습니다. 그는 거부였지만 자신을 위해 땅 한 평, 집 한 채 갖지 않고 이 세상을 나그네로 살았습니다. 갈대아우르의 풍요로움을 추구하지 않았습니다. 물질문명, 더 좋은 집, 더 좋은 차, 이런 것들은 아브라함의 관심사가 아니었습니다. 그에게는 하늘에서 부르신 부르심의 상 그것이 푯대가 되고, 하늘에서 받을 면류관 그것이 삶의 목표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다고 하는 것은 고향이 바뀐 것입니다. 요한복음 5장 54절에 보면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낸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고 구원 받은 것은 "옮긴 것" 입니다. 사망에서 생명으로, 어둠에서 빛으로, 이 땅의 시민에서 천국의 시민권자로(빌3:28) 옮겨 주신 줄 믿습니다.

저희집에는 해결되지 않은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고향문제 입니다. 저희 집 식구들은 모두가 제가 호주로 되어있는 호적등본에 이름이 올라와 있습니다. 또한 학교에서 생활기록부를 써도, 이력서를 써도, 본적하면 저를 따라서 강화군 길상면 온수리 446번지입니다. 그런데 고향이야기만 나오면 한 사람은 서울이라고 목소리를 높이고, 두 아이는 부천이라고 주장합니다. 절대적으로 고향이 강화인 사람은 저 혼자라고 합니다.

자기들은 모두 도시에서 태어났고 자랐기 때문에 고향이 시골인 사람은 저 혼자라고 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목소리를 높여도 제게 속해 있는 한 본적도 고향도 저를 따라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으면 고향이 바뀌어 지는 줄로 믿습니다. 예수께 속해 있으므로 땅에 속한 자가 하늘에 속한 자로 바뀌어 지고 육신의 고향에서 영혼의 고향으로 더 나은 본향을 선물로 받은 줄 믿습니다.

그러므로 더 나은 본향 하늘나라에 대한 가치관을 가지고 천국을 준비하며 사시는 신령한 나그네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세째, 고향집과 같은 교회입니다. 담임 목사로서 우리 교회에 대한 이상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교회가 고향집과 같은 교회가 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실제적으로 교회는 고향이 같은 사람들끼리 모이는 곳입니다. 함께 모여서 서로서로의 고달픈 삶을 위로하며 하늘나라의 복된 소식을 나누는 곳입니다. 또한 강단에서의 설교는 하늘나라에 대한 고향 소식을 알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낯선 타향 객지 생활에서 교회를 고향처럼 생각하고 살아야 합니다. 삶에 실패한 사람도 고향에만 오면 힘을 얻고 용기를 얻는 것처럼 새 힘을 얻는 역사가 일어나야 합니다.

고향이 왜 좋습니까? 고향은 나의 허물을 알고 있고, 약점도 다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탓하지 않고 나를 반겨주기 때문입니다. 또한 나의 성공과 번영에도 시기하지 않고 기쁨으로 환영해 주기 때문입니다.

구약성경 룻기서에 보면 사사시대에 베들레헴 땅에 사는 나오미라는 여인이 나옵니다. 나오미는 엘리멜렉이라는 사람과 결혼하여 두 아들을 낳아 그의 이름대로 희락, 기쁨을 누리며 살았습니다.

또한 그의 고향 베들레헴은 "떡집" 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나 베들레헴을 거론할 때면 뒤에 베들레헴 에브라다(미5:2)야 하고 에브라다가 붙습니다. 그 말의 뜻은 “수확이 많은 떡집”이라는 뜻입니다.

이렇게 “수확이 많은 떡집”이라는 축복이 보장된 베들레헴 땅에 흉년이 들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거역한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였습니다. 당시 사사 시대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떠나 자기 옳은 대로 행하는 영적으로 암흑시대였습니다. 우상을 섬기는 등 영적, 도덕적으로 제 멋대로 살았습니다. 이 때에는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돌이켜야 하는데 나오미는 남편을 부추겨서 두 아들과 함께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이방 땅으로 피난을 갔다가 남편도 두 아들도 잃어버리고, 가지고 갔던 재산도 다 허비하고 빈턴털이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다행이도 나오미는 환란을 당한 후에 하나님을 기억했습니다. 고향을 기억했습니다. 때 마침 고향소식을 들었는데 그 곳에는 흉년이 그치고 풍년이 왔다는 것입니다. 이 때 나오미는 모압 출신 자부인 룻과 함께 고향에 돌아왔습니다. 고향 사람들은 그녀를 보자 나오미가 아니냐고 하면서 반갑게 맞이했습니다. 그러나 나오미는 “여러분 나를 나오미라고 칭하지 마십시오. 나는 마라입니다.” 라고 고백했습니다.나오미는 희락, 기쁨이란 뜻이지만 마라는 쓰다, 고통스럽다는 뜻입니다.

낭패와 실망을 당한 뒤에 돌아온 것입니다. 그럼에도 고향 사람들은 따뜻하게 맞아주었습니다. 온 동네 사람들이 축하해 주고, 배려해 주니 살길이 열렸습니다. 모압 출신의 자부 룻을 통해 무너진 가문이 다시 세워지고 복에 복을 받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입을 크게 벌리고 웃는 나오미의 모습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또한 함께 기뻐하는 고향사람들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고향은 이래서 좋은 것입니다.

우리가 섬기는 동부천 교회가 바로 이런 곳이 되어야 합니다. 고향집처럼 마음 넉넉한 친정아버지가 있고 따뜻한 친정어머니가 있는  곳이어야 합니다. 언제나 정겹게 반겨 맞아주는 고향친구가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고향을 생각만 해도 힘이 나는 것처럼 우리 교회를 생각만 해도 살맛이 나고 새 힘이 솟는 교회를 만들어 가시기 바랍니다.

서로의 허물과 약점이 있어도 받아주고 감싸 안는 교회가 되시기 바랍니다. 잘 될 때에 시기하지 않으며 칭찬하고 함께 기뻐해 줄 수 있는 하늘 고향의 모형이 되시기 바랍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유난히도 고향생각이 더한 주일 아침입니다. 내가 태어나고 자란 육신의 고향을 그리워하는 것은 사랑의 귀소본능입니다. 이번 명절에 고향에 가셔서 마음껏 느끼시고 고향의 정을 가슴속 깊이 푸근하게 담아가지고 오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고향에 내려가면서 언젠가는 나도 더 나은 본향 하늘나라에 돌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그날을 준비하는 인생이 되시기 바랍니다.

바라옵기는 이번 명절에도 넉넉하신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이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김 명 섭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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