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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복음 전파의 준비 (시 118:15~17, 눅 14: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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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전에 신문에는 재미있는 기사가 났습니다. 추석선물로 가장 적당한 가격이 얼마냐는 설문에 가정주부들이 답을 했습니다. 시댁에는 5-10만원이 가장 적당하고, 친정에는 10-20만원이 적당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말하는 주부들이 딸보다 아들을 더 선호하는 건 여전합니다. ‘득남 클리닉’도 생겼습니다. 남자아이만 임신시켜준다는 것입니다. 남자아이 임신을 비법이 있다고 하지만 전문가들은 전혀 근거가 없다고 합니다. 그런데도 그 사이트가 활개를 친다는 것입니다. 우리 스스로가 얼마나 앞뒤가 안 맞는 사람들입니까? 친정에 배나 비싼 선물을 사 드리면서 아들을 낳고 싶어 하는 이상한 심리입니다.

  저 출산이 정말 문제입니다. 지난번에 한번 말씀드렸지만 세 번째 아기부터는 출산비를 드리겠다고 했는데 진짜 드립니다. 아들 딸 구분 말고 좀 많이 낳으세요. 어제신문에는 전라남도가 드디어 사망자가 신생아보다 많아졌다고 합니다. 경상북도와 전라북도도 위해하다고 합니다. 15년 후면 전반적으로 인구감소 현상이 나타난다고 합니다. 경북 의성군에는 산부인과나 소아과가 전혀 없이 장례식장만 있습니다. 이미 전국의 시, 군, 구 가운데 87곳이 초상집이 돌잔치보다 많습니다. 저 출산에 늙어가는 도시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흔히 이런 말을 하지 않습니까? “아이들이 없으니 웃을 일이 없다”구요. 잔치가 많은 집이 사실은 좋은 집입니다. 그런 집이 즐거운 집입니다. 잔치가 없는 집은 기쁨을 상실한 집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잔치가 많은 교회가 좋은 교회이고 즐거운 교회이고 기쁨이 충만한 교회입니다.

  성경은 온통 잔치입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기뻐하며 잔치를 벌입니다. 아하수에로왕은 잔치를 베풀고 왕비 와스디를 오라고 했지만 오지 않아 왕비를 폐위시키고 대신 유대인인 에스더를 왕비로 얻습니다. 성경의 잃은 것을 찾은 비유에는 찾은 후의 잔치가 있습니다. 계시록에는 어린양의 혼인잔치가 나옵니다. 특히 혼인잔치는 미래에 있을 천국의 그림자입니다.

  오늘의 본문은 마태복음 22:1-14의 혼인잔치의 비유와 매우 흡사하지만 최후의 심판을 강조합니다. 마태복음의 결론은 “바깥 어두움에 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고 합니다. 오늘의 본문인 누가복음의 혼인잔치를 통해 잔치를 준비하는 자의 자세를 다시 다듬어 보시기를 바랍니다. 이제 곧 추석잔치 준비도 시작해야지요? 잔치를 어떻게 준비해야 할까요? 성경이 말한 잔치를 보기를 바랍니다.

첫째, 잔치를 준비하였으므로 많은 사람을 청합니다.

  “어떤 사람이 큰 잔치를 베풀고 많은 사람을 청하였더니”라고 합니다. 잔치가 크니 사람이 많아야 합니다. 큰 잔치가 사람이 없다 혹은 사람이 적다고 생각해 보세요. 이것도 아주 볼모양이 없습니다. 우리 예배당도 작은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결혼식 때 너무 적게 오니 보기가 안됐습니다. 예배당을 크게 지어놓고 교인들이 늘지 않으면 이런 때에 목사나 장로님들이 받는 스트레스는 대단합니다.

  하늘나라는 큰 잔치입니다. 많은 사람이 청함을 받았습니다. 누구나 다 자격이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초청의 대상입니다. 누구도 제외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잔치는 처음부터 누구나 초청되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입니다. 하나님의 뜻입니다.
  누구든지 구원받을 자라는 것은 요한복음 3:16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누구든지 저를 믿으면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으리라”고 합니다. 누구든지 영생을 얻습니다. 그러나 조건이 있습니다. 저를 믿어야 구원을 얻습니다. 이것이 구원의 보편성과 제한성입니다. 누구나 다 얻지만 모두다 얻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빈 자리를 싫어하십니다. 벵겔(Bengel)이란 학자는 “자연이나 은혜나 다 같이 빈 자리를 싫어한다”고 했습니다. 채워야 찹니다. 이것은 단순한 원리입니다. 사람이 채울 때 예수님은 채우십니다. 예수님이 채우시면 우리도 찹니다. 예수님은 혼인잔치에 가셔서 첫 번째 기적을 베푸셨습니다. 잔치는 기적이 있고 기쁨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2:7에 보면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 하시니 아귀까지 채우니”라고 합니다. 예수님도 물을 채우라고 하셨고 채울 때에 기적은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채워야 합니다. 채우지 않으면 의미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채우는 것을 좋아하십니다.

  우리들은 빈 공간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습니다. 철학자 스피노자는 이것을 ‘공간공포’라고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빈 곳만 있으면 채우고 싶어 합니다. 하나님의 잔치인 교회를 채우는 것은 공간공포가 아닙니다. 주일날 빈 것보다 찬 것을 보면 좋지 않습니까? 여러분, 지난 특별새벽기도회 때의 감격을 기억하시지요? 예배당이 40일 동안 가득 찬 감격을 우리도 느꼈습니다. 우리가 감격하고 기뻐하는데 하나님이 어찌 기쁘지 않으시겠습니까? 공간공포가 아니라 한 사람이라도 더 구원하고, 예배하고, 함께 교제하는 것이 얼마나 좋은지 모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존 세아는 “천국 연회장 다른 사람과 기꺼이 자리 같이 할 준비 된 사람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열려 있다고 다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도 청함을 받은 자의 거절이 나옵니다. “다 일치하게 사양하여 이르되”라고 합니다. 어떤 이는 밭을 사서 못간다고 합니다. 어떤 이는 소 다섯 겨리를 사서 시험하러 간다고 합니다. 어떤 이는 장가들었다고 합니다. 마침내 주인은 노하여 그 종에게 말하기를 가난한 자들, 몸 불편한 자들, 맹인들, 저는 자들을 다 데리고 오라고 합니다. 주인이 왜 노하였는지 아십니까? 이들을 이미 초청하였고 허락하였습니다. 고대 중동에서는 잔치에 초정을 세 번씩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세 번씩이나 했는데도 변명하며 오지 않은 것입니다. 당시에 소외된 자들을 다 데리고 와서 채우라고 합니다. 잔치는 채워야 합니다. 그래야 잔치답기 때문입니다.

  구원받지 못할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구원에 예외가 없습니다. 그러나 모두 구원받는 것은 아닙니다. 잔치에 초대하고 잔치의 즐거움을 맛보게 해야 할 책임이 우리 모두에게 있습니다. 그리하여 한 사람도 구원받지 못하는 사람이 없기를 바라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드려야 할 것입니다.
  마지막 잔치는 어린양의 혼인잔치입니다. 이 잔치에 버금갈 잔치가 없습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이 잔치가 더딥니까? 남아프리카의 복음주의 신학자 앤드류 머레이는 말했습니다. “왜 하나님은 때때로 지체하시는가? 하나님이 지체하실 때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갑절의 축복을 준비하고 계시다”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부지런히 준비하고 계십니다.

  ‘양병십년 용병일일’(養兵十年 用兵一日)이란 말이 있습니다. 병사를 십년을 준비하여 하루를 써먹는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준비하는 시간은 결코 낭비하는 시간이 아닙니다. 준비는 이기는 것과 지는 것의 차이를 말해줍니다. 세르반테스는 “전투에 준비된 자는 이미 반을 싸운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잔치 준비를 잘 하면 이미 성공한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설교자가 설교준비에 땀을 흘리지 않으면 성도가 설교 시간에 땀을 흘린다는 말을 들어보셨습니까? 저 어제 땀 많이 흘렸습니다. 성도가 잔치에 맞을 준비에 땀을 흘리지 않으면 새 가족이 예배당에서 땀을 흘립니다. 우리의 마지막 날을 준비하는 것이 매일의 일이 되어야 합니다. 잔치준비는 우리의 매일의 과제입니다.

둘째, 모든 것이 준비되었으므로 오라고 합니다.

  “오소서 모든 것이 준비되었나이다”라고 합니다. “모든 것”이란 말은 완벽한 준비를 의미합니다. 초청하는 자세가 이래야 합니다. 완벽하게 준비하고 초청해야 합니다. 모든 것이 준비되었다는 것은 빠짐없다는 것입니다. 대충대충이 아닙니다. 건성건성이 아닙니다.

  요즘 어느 개그맨이 유행어를 만들어냈습니다. “그 까이꺼 대충”이란 말입니다. 그 개그맨의 말도 재미 있고 연기도 귀여운데 정말 모든 사람들이 일을 대충할까 염려가 됩디다. 우리의 일은 대충할 것이 아니라 완벽하게 해야 합니다. 이래야 준비다운 준비가 될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에 나타난 예수님의 공생애를 보면 공생애는 3단계입니다. 초기의 “와서 보라”는 단계가 있습니다. 중기의 “믿으라”는 단계가 있습니다. 요한복음 11장에는 나사로를 살리시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때에 “이 말씀을 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그들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기적의 목적은 믿음이었습니다. 그리고 말기의 “사랑하라”는 단계가 있습니다. 이 때는 “서로 사랑하라”,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등의 사랑의 말씀을 많이 하셨습니다.

  “와서 보라”는 말은 요한복음의 특징어입니다. 모든 것이 준비된 자세입니다. 요한복음 1장에는 세례요한의 두 제자가 요한과 함께 있었던 기록이 있습니다. 요한이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고 하니 두 제자가 예수를 좇았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무엇을 구하느냐?”고 하였을 때 그들은 “랍비여 어디 계시오니까?”라고 합니다. 1:39에는 말합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와서 보라 그러므로 그들이 가서 계신 데를 보고 그 날 함께 거하니”. 요한복음 1:46에는 빌립이 나다나엘에게 예수님을 소개했을 때에 나다나엘이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올 수 있느냐?”고 합니다. 그 때 “빌립이 이르되 와서 보라”고 합니다. 요한복음 4:29에는 수가 우물 가의 여인이 예수님을 만나서 동네에 들어가 “내게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서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고 외칩니다.

  “와서 보라”는 말은 당당한 자신 있는 말입니다. 모든 것이 완벽하게 준비되었다는 표현입니다. 모든 것이 다 있다는 말입니다. 물질이 필요한 자에게는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만물이 풍요합니다. 지식이 필요한 자에게는 로마서 11:33의 말씀처럼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지식이 풍요합니다. 힘이 필요한 자에게는 “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능력이 풍요합니다.

  루터는 “죽기까지 복음주의, 죽기까지 독일주의”라고 했습니다. 일본의 우찌무라 간조는 “Two J's, Jesus and Japan”이라고 했습니다. 간디는 “그리스도는 남겨두고 그리스도교는 가지고 가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것입니다. 풍요입니다. 부족이 없습니다.
  예수께 오면 모든 것이 해결됩니다. 잔치에 오면 모든 것이 다 있습니다. 여기에 삶의 지혜, 건강, 물질의 축복, 지식의 부요함, 온갖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여기에는 모든 것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와서 보라”는 문자적으로는 “오라, 그리하면 볼 것이다”라는 말입니다. 와야 본다는 뜻입니다. 오지 않으면 못봅니다.

  교회는 우선 ‘오라 구조’입니다. 우선 오게 해야 합니다. 우선 모시고 오면 그 다음은 새가족반에서 책임집니다. 교회는 ‘오라 구조’(come structure)와 ‘가라 구조’(go structure)가 병행합니다. 호켄다이크는 “흩어지는 교회”(The church inside out)를 말했습니다. 오라 구조와 가라 구조가 병행해야 합니다. 와서 배우고, 훈련하고, 성장하고, 그리고 가서 일하고, 봉사하고, 또 전해야 합니다.

  아인슈타인은 늘 친구들을 집으로 초대하여 물리학, 철학, 문학에 관해 토론하였다고 합니다. 친구들을 초청하여 함께 있으면 많은 것을 배우고 그들의 좋은 점들을 닮아가는 공부를 하는 것입니다. 교회에 오면 교회를 배우고, 성도를 닮아갑니다.

결론

  주택이 투기 수단으로 된 이유가 있답니다. 요즘 한국인의 집의 용도는 투기용이랍니다. 결혼은 결혼식장에서 합니다. 아기의 출생은 병원에서 합니다. 아이들은 학교와 학원에서 종일 지냅니다. 아빠는 직장과 밖에서 밤늦도록 일하고 잠만 잡니다. 엄마는 낮에 집에 있으면 주변머리 없는 주부가 됩니다. 생일이나 돌이나 회갑 등은 음식점에서 합니다. 장례는 장례식장에서 합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그래서 집이 더 이상 가족의 사랑의 보금자리가 아니라 부유층의 과시수단이고, 전 국민의 투기 대상이 된 것입니다.

  교회는 어떻습니까? 우리들만의 자리가 아닙니까? 우리들만의 잔치가 아닙니까? 모두가 오는 자리가 아니라면 교회도 용도가 잘못된 것입니다.
  탕자의 비유에서 큰 아들은 율법주의자였습니다. 율법주의는 항상 잔치를 망치게 합니다. 은혜만이 잔치를 복되게 합니다. 교회를 율법적으로 보지 말고 은혜로 봅시다.

은혜 가운데 많은 사람이 초정되고 말씀의 잔치가 풍성하게 하기를 바랍니다.
  (이 성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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