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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십자가에서 주신 말씀 (요 19:2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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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수님의 말씀들은 우리들에게 모두 생명의 말씀들이다. 특히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서 구속하시면서 우리에게 주신 말씀들은 참으로 귀한 말씀들이다. 그것은 모든 시대, 모든 사람, 모든 상황에서 같은 말씀으로, 때로는 각자에게 또 다른 말씀으로 우리에게 들려오기도 한다. 목사 안수를 받기 일 주일 전에 고난주간에 이 말씀들을 묵상했는데 나는 그 말씀들을 통해서 예수님과 같은 목자가 되기로 했었다. 그리고 오늘 이 말씀들은 또 다른 감동을 주고 있다.

  오늘은 가상칠언 가운데 요한복음에 나오는 말씀을 중심으로 말씀드린다.

  예수님의 십자가 곁에 있었던 사람들은 누구였을까? 성경에는 어머니 마리아, 마리아의 자매였던 예수님의 이모, 글로바의 아내였던 마리아, 막달라 마리아(일곱 귀신 들렸다가 예수님이 고쳐 주셨던 여인), 예수님의 제자 요한 이렇게 다섯 명의 이름이 나온다. 이처럼 십자가 곁에는 그렇게 연약한 자들이 함께 있었다.

어머니 마리아와 요한에게 말씀을 주신다.
  어머니 마리아에게 말씀하신다.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여자여”(귀나이)라는 말을 사용했다. 예수님은 가나 혼인잔치에서도 어머니를 이렇게 불렀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초기 사역과 마지막 십자가 사역에서 모두 다 어머니를 이렇게 부른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육체적인 혈연관계에 연연하지 않고 하나님 안에서 영으로 맺어지는 하나님의 가족 안에서 어머니를 바라보셨다는 의미이다.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하나가 되는 거룩한 가족이 되기 위해서는 혈연이 끊어지면서 새로운 영적관계로 승화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천국에서 먼저 간 우리의 가족들을 만날 것이다. 그러나 그 때는 어느 가문의 어떤 성을 가진 사람으로가 아니라, 어느 가정의 한 아버지로서가 아니라, 어느 가정의 어떤 아들딸로서가 아니라 우리는 그리스도의 피로 맺어진 새로운 영적인 관계가 있는 성도로서 만날 것이다. (물론 천국에서도 우리의 의식이 있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의 혈연관계를 다 잊지는 않겠지만 그것보다는 거룩한 가족(성도)로서 만날 것이다.

  여기에서 문제는 ‘아들이 누구인가?’ 하는 점이다. 문제가 되는 것은 주어가 생략되어 있기 때문에 아들을 제자 요한으로 볼 수도 있고, 예수님으로 볼 수도 있다.

  일반적으로 제자 요한을 가리킨다. 이런 해석은 26절과 27절을 연결해서 자연스럽게 보인다.

  그러나 예수님 자신으로 보는 사람들도 있다. 이 견해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만약 위의 해석을 따른다면 “요한이 이제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요한아, 이 분을 이제 너의 어머니로 모셔라.” 이렇게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면 평소에 효도 한 번 안하다가 자신이 죽게 되자 요한에게 어머니의 공양을 맡겼다면 어떻게 주님께서 효의 모범을 보이신 분이 될 수 있겠는가? 하고 의문을 제기한다.

“여자여 보소서, 나는 당신의 아들입니다.” 이 말씀은 십자가 위에 있는 자신을 어머니에게 보이면서 자신의 어머니의 아들임을 말씀하시는 모습이라는 것이다.

  즉 어머니의 덕분으로, 어머니의 아들답게 하나님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사명을 다한 아들의 긍지로운 자기 선언인 동시에 어머니에 대한 감사의 고백이다.

  여러분은 부모님을 공경하는가? 그 분들께 효도하는가?

여러분 가운데 혹시 “나는 부모님과 같은 인생을 살고 싶지 않습니다. 나는 엄마와 같은 인생을 살지는 않을 거야.” 라고 말한다면 우리는 진정으로 부모님을 공경하지 않는 것이요, 효를 행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진정한 공경과 효도는 부모님의 인생을 그 자체로서 인정해 주는 것이다. 그 분들의 인생에 있는 경륜과 무게는 내가 아무리 뛰어나고, 잘 나고, 현재 잘 나가는 자식이라고 할지라도 결코 따를 수 없는 것으로 인정해 주는 것이다. 이렇게 인정할 수 있을 때 우리는 고백할 수 있다. “나는 당신들의 자녀입니다. 당신들은 나의 아버지 어머니(부모님)입니다.” 라고 인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마리아를 보라. 그녀는 십자가에서 처참하게 죽어가는 아들을 보고 있다. 아들이 죽어가는 모습을 어떻게 차마 볼 수 있을까? 마리아의 마음은 칼로 찌르듯 했다.

  그러나 마리아는 홀로 그 엄청난 슬픔을 삼키면서 아들의 죽음을 주시한다. 이것이 마리아가 평상시에도 예수님이 자기의 친자식이었지만, 단지 자기의 아들로 자신의 소우로 키워오지 않았다는 증거이다. 내 아들이지만 하나님이 왜 그를 내 가정에 보내셨는가를 알고 있었고 그 하나님의 뜻을 이뤄드리기 위해 자신의 욕심은 포기했음을 보여준다.

우리는 오늘 우리의 자녀들을 어떻게 키우고 있는가? 

예수님은 요한에게 말씀하신다. “보라, 네 어머니라.” 그러자 요한은 그 말씀의 뜻을 잘 이해하고 마리아를 자기 집에 모시게 된다.

  여기에서 한 가지 의문은 왜 예수님께서 어머니 마리아를 어머니의 자매였던 예수이모가 있었음에도 가까운 친척에게 맡기지 않고 제자 요한에게 맡겼을까? 하는 점이다. 이것은 제자도와 관련하여 이해할 필요가 있다.

요13장에 예수님의 사랑하시는 제자로 처음 등장하는 요한은 이상적인 제자의 모델로 등장한다. 제자 요한은 예수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예를 들어 보자. 제자 요한은 식사할 때 예수님의 품에 기댈 정도로 친밀한 관계를 가진다. 마치 예수님이 하나님 아버지의 품에 기대는 것처럼 요한은 예수님과 친근한 교제를 나눈다.

또 예수님이 잡혀서 대제사장의 뜰에 올 때 제자 요한도 그 곳에 들어온다. 모든 제자들이 떠난 십자가의 자리에서 요한은 끝까지 주님의 곁에 머문다.

이런 것들은 이것이 참 제자도의 모습임을 보여주고, 이런 요한에게 예수님은 어머님을 맡긴다. 왜냐하면 누군가를 돌보는 일은 인내와 끈기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두 번째 말씀을 하신다. “내가 목마르다.” 그리고 이것은 모든 것이 이루어진 줄 아시고 성경을 응하게 하시기 위해서 말씀하셨다고 성경은 말한다.

여기에서 ‘모든 것’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시면서 예수님에게 맡기신 모든 사역을 말한다. 사람들의 죄를 속하는 하나님의 어린양으로서 세상에 보내신 그 일, 사람들을 대신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의 공의를 이루신 일,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막힌 담을 헐 수 있는 유일하신 통로가 될 그리스도의 사역을 이루는 일이다. 이제 이 모든 사역, 모든 은혜와 긍휼이 자신의 죽음을 통해서 도래할 것을 아신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면서 성경을 응하게 하기 위해서 “내가 목마르다”고 하셨다. 그러자 그 말씀을 들은 사람들이 신포도주를 해융(스폰지)에 적셔서 우슬초에 꿰어 예수님의 입에 갖다가 대었다.

어떤 성경을 응하게 하기 위함인가? 시 69:21 “그들이 쓸개를 나의 음식물로 주며 목마를 때에는 초를 마시게 하였사오니” 이 말씀이다. 

다시 한 번 정리해 보자.

  첫째, 예수님은 지금 “목마르다”고 외치셨다. 왜 주님은 목마르셨을까? 여러분은 언제 목마른가? 더울 때이다. 불같은 기운이 있을 때 우리는 목마르다. 예수님은 성전을 정화하시면서 요 2:17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주의 전을 위한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이 말씀은 시69:9의 인용)

‘열심’(열정, 뜨거운 것), 그 열정이 결국 예수님을 삼키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주의 전(성전)’,  예수님은 자주 예수님 자신의 몸을 가리켜 성전이라고 말씀하셨다. 이 모든 것을 종합해 보면 예수님의 육신은 무엇인가 뜨거운 불과 같은 것에 의해서 삼킴을 당하는 모습을 떠올릴 수 있다. 지금 예수님의 몸은 십자가위에서 불과 같이 뜨겁다. 살점이 뜯어져 나가고 상처가 나고 피가 흐르고 뜨거운 고통으로 시달린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성전(구원을 이룰 수 있는 자신의 육체)을 위한 열심이 십자가의 불에 타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은 목이 말랐고, 그 결과 “내가 목마르다”고 외쳤고 사람들이 신 포도주를 줌으로써 성경이 최종적으로 성취된 것이다.

둘째, 예수님은 왜 목마르다고 했을까? 주님은 자기 앞에 다가온 십자가의 죽음을 ‘아버지께서 주시는 잔’으로 이해했다. 그러므로 지금 이 순간에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마지막 한 방울까지 다 마셔야 했기에’, 그렇게 함으로써 성경을 응하게 하려고 했기에 주님은 목마르다고 외치신 것이 아니겠는가? 

우리 예수님은 마지막 그 순간에도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했고, 나를 통해서 어떻게 그 말씀이 이루어질 것인가를 생각했고, 나를 이 땅에 보내신 하나님의 뜻을 헤아렸다. 우리는 어떤가?

주님은 세 번째 말씀하셨다. “다 이루었다.”

  이것은 우리의 구원을 위해 이루신 예수님의 구속 사역의 완전성과 넓이와 결정  적임을 분명히 보여준다. “다” 이루었다는 말씀을 유의해 보라. 나의 죄악의 크기에 상관없이 그 분은 나의 구원을 이루셨다. 그래서 사람을 죽인 살인자들도 그 분 앞에 나와 죄의 고백과 함께 구원받았다. 나의 과거의 죄, 현재의 죄, 미래의 죄까지 모두 다 그 용서아래 있다.

오늘 성경에는 예수님께서 돌아가실 때 “영혼이 떠나가셨다.”라고 기록한다.

예수님의 죽음에 대해서 공관복음과 요한복음이 선택한 단어는 다르다.

공관복음에서는 일반적으로 ‘마지막 숨을 내쉬다. 또는 죽다’의 뜻인 ‘에크프네오’ 사용하지만 요한복음에서는 ‘파레도오켄 토 프뉴마’ (즉 ‘영을 넘겨주다’)라고 표현했다. ‘파레도오켄’의 기본 동사는 ‘파라디노미’(넘겨주다)이다. 이 단어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기 위해서 사람들에게 넘겨질 때 사용된 단어이다.

  이 말은 일반적으로 예수님의 죽음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예수님께서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그가 약속하신 성령이 그의 백성에게 주어질 것을 암시하기도 한다. 예수님은 고별강화에서 누누이 그가 가야(즉 예수님이 죽으시고 승천해야만) 비로소 성령이 오실 것에 대해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그의 영을 아버지의 손에 넘겨주심으로 이제 비로소 성령님이 오실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으셨다. 예수님은 자기의 목숨을 빼앗긴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구원과 성령님의 강림을 위해서 자신의 영을 넘겨주셨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셨다.
험악한 십자가에서도 주님은 어머니에 대한 극진한 사랑을 보여주셨다.
정신이 가물거리는 그 곳에서도 영원한 생명, 사랑, 구원에 “목마르다”
숨이 막혀오는 그 고통 중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쫒아 살았고, 삶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셨다.

  우리는 오늘 십자가 아래에 있다. 이곳은 평온한 자리요, 내 대신 주님이 다 대신 담당하신 자리이다.

  우리도 주님의 사랑을 본받아 부모와 자녀와 형제에 대한 사랑해야 한다. 우리는 진실로 “서로 사랑해야 한다.”
  우리도 예수님의 그 영혼에 대한 갈증처럼 죽어가는 영혼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기 위해서 “목말라 해야 한다.”
  우리도 아버지의 뜻을 따라 살기 원했던 주님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어가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

  주님은 십자가 위에서 십자가 아래 있는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너도 나처럼 사랑해야 하느니라.”
“너도 나처럼 목말라해야 하느니라.”
“너도 나처럼 하나님의 뜻을 다 이루어야 하느니라.”
(이 양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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