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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를 만난 사람 (눅 19: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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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서 여리고로 들어가서, 그 곳을 지나가고 계셨다. 그런데 마침 삭개오라고 하는 사람이 거기에 있었는데, 그는 세리장이고, 부자였다. 삭개오는 예수가 어떤 사람인지를 보려고 애썼으나, 무리에게 가려서, 예수를 볼 수 없었다. 그는 키가 작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는 예수를 보려고 앞서 달려가서, 뽕나무로 올라갔다. 예수께서 거기를 지나가실 것이기 때문이었다. 예수께서 그 곳에 이르러서 쳐다보시고, 그에게 말씀하셨다. '삭개오야, 어서 내려오너라. 오늘은 내가 네 집에서 묵어야 하겠다.' 그러자 삭개오는 얼른 내려와서, 기뻐하면서 예수를 모셔들였다. 그런데 사람들이 보고서, 모두 수군거리며 말하기를 '그가 죄인의 집에 묵으려고 들어갔다'하였다. 삭개오가 일어서서, 주님께 말하였다. '주님, 보십시오.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겠습니다. 또 내가 누구에게서 강탈을 했으면, 네 배로 갚아 주겠습니다.'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다. 인자는 잃은 자를 찾아 구원하러 왔다."

하나님의 한량없으신 은혜로 여러분들의 삶의 전체에 항상 평안하심이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기독교 영성에 관한 책가운데 다음과 같은 말 한마디가 있습니다. "눈을 뜨는 데는 평생이 걸릴 수도 있다. 그러나 보는 것은 찰라에 이루어진다." 여기서 '눈을 뜬다'고 하는 것은 물론 '깨닫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인생의 의미를 깨닫기까지 또는 진리를 깨닫기까지 수십년 또는 평생이 걸릴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깨닫게 되는 것은 순간에 이루어지는 사건이라는 말입니다. 이런 것을 신학적용어로는 '종말론적'이라고 말하고, 성서용어로는 '카이로스'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매주일 교회에 온다고 할지라도 또 매일 매일 성경을 읽는다고 할지라도 거기서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고 하는 것은 평생이 걸릴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어느 날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을 만나게 된다고 하는 것은 찰라에 이루어지는 사건입니다. 그러나 보는 것이 찰라에 이루어진다고 해서, 깨닫는 것이 찰라에 이루어진다고 해서 저절로 보이게 되고 저절로 깨닫게 되는 건 아닌 것 같습니다. 모든 눈이 다 볼 수 있고 모든 귀가 다 들을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씨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말씀하신 다음에 "들을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사람들 가운데서 보아도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하는 사람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다시 이어서 "눈은 보고 있으니, 귀는 듣고 있으니 복이 있다"라고 그렇게 말씀하십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여러분은 이 시간, 이 순간 여러분의 눈에 무엇이 보이고 있으며, 여러분의 귀에는 무엇이 들려오고 있습니까? 우리는 지금 무엇을 보기를 원하고 무엇을 듣기를 원하고 있는 것입니까? 각기 다른 직업을 가진 사람이 어느 날 한사람을 동시에 보게 되었습니다. 안경가게 주인은 그가 쓴 안경이 눈에 띄게 보이고, 신발장수를 하는 사람은 그가 신은 신발이 눈에 띄게 되고, 의상 디자이너는 그가 입은 옷이 먼저 눈에 띄게 됩니다. 이것은 사람은 자기의 관심에 따라서 자기의 '주파수'를 맞추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는 지금 이 자리에서 우리의 주파수를 어디에 맞추고 있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고 하나님을 만날 수 있도록 '믿음의 주파수'를 맞추고 있는 것입니까? 쉬운 예로 우리가 TV에서 무엇을 시청할 때도 보고 싶은 프로그램이 있으면 그곳으로 채널을 돌려야만 그것을 시청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까? 이 말은 적어도 교회에서 우리의 주파수를 명예를 얻는데 권력행사를 하는데 재물 모으는데 맞춰서는 결단코 안된다는 이야기입니다.

교회에서 우리의 '믿음의 주파수'를 맞춰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예수님을 만난다면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오늘 우리가 읽은 사도행전의 말씀은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예수님을 믿는 사람을 핍박하던 사울이 다메섹 도상에 부활하신 예수를 만나게 된 후 철저하게 근본적으로 변화돼 지금까지 그가 그렇게도 핍박하던 바로 그 예수를 오히려 그리스도라고 증언하는 대사로 변화된 모습을 우리들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9장 22절에 보면 사울은 더욱더 능력을 얻어서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하고 다메섹에 사는 유대인들을 굴복시켰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을 통하여 로마 전국에 전파되어 갔습니다. 신약성서에서 그의 글을 우리는 오늘 가장 많이 소유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를 만나기 전에 예수를 믿는 사람을 핍박하던 사울이 예수를 만난 후 그를 증거 하는 사도가 되었다는 사실은 그의 삶에 있어서 그야말로 180도의 변화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여기에서 다 열거할 수는 없겠지만 복음서에 보면 소경이 예수를 만나면 보게 되고, 귀머거리가 예수를 만나면 듣게 되며, 문둥병환자가 예수를 만나면 깨끗해지고, 앉은뱅이가 예수를 만나면 일어나 걷게 되고, 귀신들린 자가 예수를 만나면 귀신이 나가고 죽은 사람이 예수를 만나면 살아나 일어났음을 우리는 복음서에서 읽고 있습니다. 예수를 만나면 이렇게 변화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를 만난 삶은 철저하고 근본적으로 변화되는 삶이 일어나야 된다는 말입니다. 예수를 만나면 우리의 삶, 우리의 존재가 180도로 변화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성서는 이것을 '거듭난다', '새로운 피조물', '새로운 인간성' 등등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내용을 반대로 말해서 만약에 우리에게서 아무러한 변화도 없다면 우리는 아직 예수를 만난 것도,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것도 아니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나 변화된 삶이란 어떤 것입니까? 우리는 이것을 삭개오의 이야기를 통해서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볼 수 있습니다. 뽕나무에서 예수를 보았고 예수를 자기 집에 모실 수 있게 된 삭개오는 예수님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합니다.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겠고, 빼앗은 것이 있으면 4배나 갚겠습니다." 이 말을 들은 예수님은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다!"라고 그리고 나는 이런 자를 찾아 구원하러 왔다고 말씀하십니다. 삭개오의 이야기에서 가장 중요한 대목은 바로 이것입니다. 구원이란 무엇입니까? 구원이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예수님을 만나는 순간 '여기서' 이루어지는 찰라적 사건입니다. 구원은 결코 과거지사도 아니고 미래의 일어날 사건도 아니라 예수를 만난 '지금 여기서' 이 순간 일어나는 현재적, 현실적으로 일어나는 사건이란 말입니다.

구원이란 무엇인가를 삭개오의 삶의 변화에서 다시 한번 찾아 볼 수 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만났을 때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 빼앗은 것의 4배를 갚겠다고 했습니다. 삭개오의 이 말에서 4배니 절반이니 하는 물량적인 표현양식은 별로 중요하지가 않습니다. 절반대신에 3분의 1이라고 해도 좋고, 네 배 대신에 두 배라고 해도 삭개오의 말의 근본적인 것에는 변화가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4배니 두배니 하는 것은 삭개오가 예수님을 만나 변화되었다는 것을 나타내는 상징적 언어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를 만난 후 삭개오는 전적으로 그리고 근본적으로 달라졌다는 이야기입니다. 삭개오는 예수님을 만나기 이전에는 어떤 방법으로든 돈을 모으기 위해 방법을 가리지 않았던 사람이었습니다. 남의 것을 내 것 만드는 세리의 일로 부자가 된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이 예수님을 만난 이후로 그는 나누어주고 그리고 갚겠다고 하는 말을 합니다. 말하자면 철저한 이기주의자였던 그가 지금은 철저히 남을 위한 사람이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러한 사람의 변화를 에릭 프롬의 말을 빌면 소유 지향적 인간에서 존재 지향적인 인간이 되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이것을 가리켜서 성서적, 신학적 용어를 든다면 그것이 바로 회개고 그것이 바로 구원받은 인간의 모습입니다.

예수를 만나기 전에 우리의 세계관과 가치관을 철저하게 버리고 전혀 다른 인생관, 세계관, 가치관을 가져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안에 내가 살고, 내가 발견되기 위해서 이외의 것은 오물과 같이 버렸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예수를 만나면 우리에게 정말로 코페르니쿠스같은 변화가 일어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를 만나면 버림과 더불어 새로운 가짐을 우리는 가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를 만나고 새로운 존재가 되기 위해서는 우리는 옛것을 버려야 합니다. 예수님도 '자신을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따르라'고 하신 것은 예수를 만나기전 옛자아를 버리라고 하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고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을 지칭하고 있는 말입니다. 우리가 저 유명한 테레사 수녀같이 그야말로 하나님의 몽당연필 되어 살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우리가 저 앨버트 슈바이처 같이는 못한다 할지라도, 우리가 성프랜시스같은 성빈의 삶은 살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래도 우리가 교회생활에서 다른 사람의 아픔과 고통에 같이 하는 작은 그리스도의 사랑의 삶은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예수를 만나기 전에 내 욕심만 생각하고 나 중심의 삶을 살았다면 예수를 만난 이후에는 우리라는 중심으로 새로운 삶을 시작해야 할 것이고 예수를 만난 후 우리의 삶은 나 자신을 비우는 그런 겸손의 삶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전에 나의 삶이 거짓과 부정의 삶이었다면 예수를 만난 뒤의 나의 삶은 진실과 의로움과 깨끗한 삶으로 변화되는 삶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이 왜 우리의 구세주입니까? 그것은 그가 명예가 있었기 때문도 아니고 재물이 있어서도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우리를 위해 자신을 송두리째 버리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욕망으로 가득한 나로부터 자유해야 합니다. 그 때 우리는 비로소 참된 크리스천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 (주 재용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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