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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진리를 좇아 행하라! (요삼 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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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하는말

사도요한은 본문 3절에서 “형제들이 와서 네게 있는 진리를 증거하되 네가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하니 내가 심히 기뻐하노라”고 말했습니다. 사도요한이 본문에서 말하는 진리는 “신학적인 진리”가 아니었습니다. 사도요한이 말하는 진리는 사랑하는 가이오가 그의 일상생활에서 몸소 실천하는 진리를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14장 6절에서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자가 없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인생이 가야할 유일한 길이며, 인생이 실천해야 할 유일한 진리요, 인생이 하나 더 가질 수 있는 유일한 생명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라 함은 바른 길을 가는 자라는 말이며, 진리를 실천하는 사람이라는 말인 동시에, 또 하나의 다른 생명을 가진 자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진리를 좇아 행한다는 말은 그리스도를 좇아서 살아가는 생활을 일컬어 하는 말입니다. 진리를 생활에서 실천하는 것을 말합니다.

독일의 위대한 철학자인 “임마누엘 칸트”의 아버지 이야기입니다. 한번은 칸트의 아버지가 자기의 고향인 폴란드의 실레시아를 향하여 말을 타고 여행길을 떠났습니다. 깊은 숲길을 통과해 가고 있었는데 갑자기 강도들을 만나 값진 것들을 다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강도들은“네가 가진 것이 이것뿐이냐?”라고 물었습니다. 칸트의 아버지가 “그게 전부요”라고 대답하자 비로소 강도들은 그를 가도록 허락했습니다. 말도 빼앗기고 겁도 나서 뒤도 돌아보지 않고 빠른 걸음으로 가다보니 옷깃에서 묵직한 것이 손에 닿았습니다. 그것은 옷 속에다 안전하게 꿰매어 보관한 금덩이었습니다.  칸트의 아버지는 즉시 되돌아 강도들이 있는 곳으로 달려갔습니다. 그리고 금덩이를 손에 들고 강도들에게 말을 했습니다. “여보시요들! 내가 아까 말한 것은 진실이 아니었소. 내가 무서움에 질려서 미처 생각을 못했던 것이오. 자 여기 내 옷 속에 감추었던 금덩이를 받으시오.”  이 말을 들은 강도들은 아무도 그 금덩이를 받으려고 하지를 않았습니다. 오히려 한 강도는 빼앗은 지갑을 다시 내어 놓았습니다.

물론 요사이에도 이런 사람이 있을까 생각해보지만, 하여튼 진실과 정직 앞에서 강도들도 감격하고 회개한 것을 볼 때 우리들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뜻 깊은 이야기라고 여겨집니다.

1. 하나님께 합당하게 행하여야 합니다.

진리를 좇아 행하는 것은 하나님을 좇아 행하는 것이요, 진리 안에서 행하는 것은 하나님 안에서 행하는 것입니다.

진리에 합당하게 행하는 것은 하나님께 합당하게 행하는 것을 말합니다. 사도요한은 본문 6절에서 “네가 하나님께 합당하게 저희를 전송하면 가하리라”고 말했습니다. 가이오는 하나님께 합당하게 행하려고 많은 노력을 했습니다. 하나님께 합당하게 행하는 것이 바로 경건 생활입니다. 경건 생활은 모양이 아니라 능력입니다.

바울 사도는 디모데후서 3장5절에서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 이 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고 디모데에게 권면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 합당하게 생활하지 못했습니다. 광야에서 10번이나 하나님께 도전하고, 반역을 했습니다. 결국 하나님은 그들을 광야에서 걸러내셨습니다.

요나는 처음부터 하나님께 불만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틈나는 대로 도망질치려고만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놓아 주시지 않으셨습니다. 강제로 니느웨로 보내셔서 복음을 증거케 하셨습니다. 다행히 니느웨는 하나님의 뜻대로 회개하여 용서를 받았습니다. 요나는 설교를 한 후 동산에 올라가 니느웨가 어떻게 되는가 구경하고 있었습니다. 니느웨가 멸망은커녕 회개하고 있었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의 용서를 받았습니다. 요나서 4장9절에 “하나님이 요나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 박넝쿨로 인하여 성냄이 어찌 합당하냐 그가 대답하되 내가 성내어 죽기까지 할지라도 합당하니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요나는 속이 상했습니다. 게다가 뙤약볕을 피하던 박넝쿨이 하나님의 역사로 시들어 버렸습니다. 요나가 성질을 냈습니다. 요나는 자기의 설교의 능력이 나타나서 니느웨가 회개한 것에 대하여 감사치 않고 박넝쿨 죽은 것에 대하여 성을 낸 것이 하나님께 합당치 않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요나에 요구하신 것은 경건생활이었습니다.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 주님의 어머니 마리아, 디모데의 외조모 로이스, 어머니 유니게는 성경의 대표적인 경건 되고 현숙한 어머니상들 입니다.

탕자 어거스틴이 목메어 애원하는 어머니의 손을 뿌리치고 이탈리아로 도망치던 밤에, 그의 어머니 모니카가 밤새 울고 기도하는 소리를 등 뒤에 버리고 멀리 떠나 방탕하던 어거스틴이 회개하고 돌아왔습니다. 탕자가 성자가 된 것은 어머니의 경건한 기도생활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기도하는 어머니의 자식은 결코 망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무디의 아버지는 40세에 별세하고 유복자 쌍둥이를 합해서 아홉 자녀를 키운 무디의 어머니는 밤마다 벽난로 앞에서 성경을 가르치고 자녀들이 잠든 후에는 밤을 새워 울며 기도하던 어머니였습니다. 아침에는 햇살처럼 밝고 맑은 표정으로 아이들을 대했습니다. 웨슬레의 어머니 스산나는 19명의 자녀를 성자처럼 믿음의 자녀로 키워 감리교의 어머니로 유명합니다. 감리교는 남자들이 세운 것이 아니라 여자가 세운 것이라는 말이 더 어울릴 겁니다.

세상에서 만난 우리의 첫사랑, 우리에게 처음 언어와 기도를 가르치고 주님과 하나님 아빠를 부르게 해 주신 어머니가 있다면 그렇게 염려 할 필요는 없습니다.  경건한 어머니의 신앙은 자식이 자라 날 수 있는 자양분이 되기 때문입니다.

2. 교회 앞에서 합당하게 행하여야 합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교회의 머리는 그리스도입니다. 교인들은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들입니다.  그러므로 교회 앞에서 행하는 것은 곧 그리스도 앞에서 행하는 것입니다. 교회 앞에서 합당하게 행하는 것은 곧 그리스도 앞에서 합당하게 행하는 것입니다.

사도요한은 본문 6절에서 “저희가 교회 앞에서 너의 사랑을 증거하였느니라 ”고 말했습니다. 가이오는 교회 안에서 사랑을 실천했습니다. 형제들은 가이오의 사랑의 행동을 교회 앞에서 증거했습니다.  가이오의 사랑의 실천은 두 가지였습니다. ❶교회와 하나님의 일에 거치는 자인 “디오드레베”를 내친 일이었습니다. 디오드레베는 바울 사도의 선교 일행을 망령되이 폄론했습니다. 형제들을 접대치도 않았고, 접대하고자 하는 자를 교회에서 내어 쫓았습니다.  ❷가이오는 교회 안에서 거치는 자인 “디오드레베”를 본받지 않았습니다. 반면에 바울 사도의 사신인 “데메드리오”를 받아 환영했습니다. 내칠 자를 내치고, 환영할 자를 환영하는 것이 교회 앞에서 합당하게 행하는 것입니다. 

사도요한은 가이오에게 본문 11절에서“사랑하는 자여 악한 것을 본받지 말고 선한 것을 본받으라 선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고 악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을 뵈옵지 못하였느니라”고 말했습니다. 

교인들은 교회 앞에서 합당하게 생활하고 행동해야 합니다. 만일 그렇지 않으면 그리스도 앞에서 합당하게 생활했다고 주장할 수는 없습니다.  바울사도는 고린도전서 10:31-33절에서 고린도 교인들에게 “그런즉 너희가 ❶먹든지 마시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❷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❸하나님의 교회에나 거치는 자가 되지 말고 ❹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❺나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고 ❻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❼저희로 구원을 얻게 하라”고 권면했습니다. 

초대 교회사에 나오는 위대한 순교 사화입니다. 로마 교회의 “식스투스 감독”은 경건하고 인자하여 그의 목회에 감동받은 수많은 사람들이 그를 따랐습니다.  그는 빈민 구제와 사랑을 실천하여 존경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당시에 “발레리아누스” 황제는 그를 처형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조용히 순교의 길을 걸어갔습니다.  식스투스 감독이 사형장에 끌려갈 때 “라우렌티우스” 집사가 식스투스의 뒤를 따라가면서 “아버지여, 당신께서 제단으로 나아가실 때 늘 저에게 도움을 청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어찌하여 지금은 저를 데려가지 않으십니까?”하며 눈물을 흘립니다.  그때 식스투스는 “사랑하는 아들아, 그대도 며칠 후면 나의 뒤를 따르게 되리라”고 대답하였습니다. 라우렌티우스 집사는 당시에 식스투스 감독의 교회 수석 집사로 거대한 교회의 재산을 관리하고 있었습니다.  이 막대한 재산을 알게 된 로마 시장은 교회의 모든 재산을 상납토록 명령을 내렸습니다. 라우렌티우스 집사는 교회 재산을 정리하겠다는 구실을 내세워 상납일을 연기하도록 허락받고 교회당의 모든 보물을 다 팔았습니다.  그리고 교회에 의존하고 있는 수천의 민중들에게 모두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리고 교회당에 그 사람들을 모집하였습니다. 약속한 날 시장이 교회당으로 올라오면서 “보물은 어디에 있느냐?”라고 물었습니다. 그리고 교회의 문을 열라고 명령하였습니다. 그때 라우렌티우스 집사는 교회당 문을 활짝 열고 소경, 벙어리, 걸인, 병자, 고아, 과부의 무리를 가리키며 “교회의 보물이 여기 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눈치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성실히 행하는 사람을 기뻐하십니다.

3. 진리대로 잘 되는 복을 받습니다.

합당하게 행하면 합당한 대우를 받습니다. 합당한 복을 받습니다. 특히 진리 안에서는 틀림이 없습니다.  사도요한은 본문 2절에서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고 말했습니다.

1). 영혼이 잘 되어 소생합니다. 영혼이 잘된다는 말은 죽었던 영혼이 다시 살아나는    거듭남을 말합니다. 중생함을 말합니다.

자녀들의 영혼이 거듭나고, 자신들의 영혼이 거듭나고, 부모의 영혼이 거듭나고, 형제들의 영혼이 거듭나서 영혼이 망하지 않고 잘되는 것은 진리의 역사입니다. 영혼이 싱싱하고 건강한 것은 신앙인이 받아야 할 최고의 축복입니다.

“에드워드 모트”라는 37세 된 목수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젊은 시절. 공장에서 일하면서 열등의식과 반항심. 원망 등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겨우 이런 공장에서 망치나 두들기며 일하다니.. 우리 부모는 왜 나에게 이런 삶밖에 주지 못하는 걸까.”  이 열등의식. 반항. 원망.. 삶은 그에게 전혀 무의미한 것이었고 그에게 소망이란 조금도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추운 겨울 날, 그는 런던의 거리를 배회하다가 길가에 있던 자그마한 교회에 들르고 싶은 마음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그 교회에 들어갔습니다. 그 교회 강대상에서 “존 하이야트” 목사님이 요한복음 3장을 가지고 “거듭난 도리”에 관한 설교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 말씀을 들었을 때 에드워드에게는 “그렇다. 나는 거듭나야 한다.”라는 강력한 소원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성령께서 그의 마음 문을 열어주셔서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거듭났습니다.  이렇게 거듭난 에드워드 모트는 그의 일기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내 망치는 이제 노래하기 시작했다. 내 망치는 이제 춤을 춘다. 그리고 내 눈동자는 생기가 돌고 내 마음 속에는 생수가 솟는다. 예수께서 내 마음에 오셨기 때문이다. 나는 거듭났다.”  이제 그는 행복한 목공이 되었습니다. 그의 생은 점점 풍요로워졌습니다. 자기가 고용되어 일하던 목공소가 자기의 소유가 되었으며 그 목공소는 점차 확장되었습니다. 곧. 그는 성공적인 사업가가 된 것입니다.  55세 되던 해 그는 자기의 전 재산을 드려서 교회를 짓고 목회공부를 하여 목사안수를 받고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복음을 증거하기 시작한 첫날에 그는 주님의 첫사랑을 기억하면서 주님을 향한 감사의 시를 지었습니다. 그 시는 찬송가 539장(이 몸의 소망 우엔가) 으로 지금도 널리 불리게 되었습니다.

본문의 가이오의 영혼은 잘 되었습니다. 디오드레베의 영혼은 잘못 되었습니다. 데메드리오의 영혼은 잘 되었습니다. 영혼이 일단 행복하면 다른 것은 따라서 행복해지기 마련입니다.

2). 육신이 잘 되어 건강합니다. 사람의 육신도 진리에 순응하도록 지음을 받았습니    다. 우리의 몸을 세상에 리듬을 맞추면 빨리 깨어집니다. 우리의 몸을 예수님에게,    하나님에게, 진리에 리듬을 맞추면 오래 오래 깨끗하고 건강하게 유지 될 수 있습    니다.

3). 범사가 잘 되어 형통합니다. 카메라는 언제나 피사체에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초점이 맞추지 못하면 좋은 사진을 찍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이 진리에 맞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에 부합해야 합니다. 진리의 흐름에 맞추어야 합니다. 진리의 리듬에 맞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지나친 욕심으로 그치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잠언 3장 6절에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지도하시는 길을 잘못 갈릴 없습니다. 하나님의 지도하시는 일이 잘못 될리 없습니다.  잠언 3장 9-10절에 “네 재물과 네 소산물의 처음 익은 열매로 여호와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창고가 가득히 차고 네 즙틀에 포도즙이 넘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가나의 혼인 잔칫집에 포도주가 넘친 것은 예수님의 진리의 말씀에 순종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진리 되시는 예수님에게 초점을 맞추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끝맺는 말

진리를 좇아 진리대로 행하면 영혼이 잘 됩니다. 육신이 건강합니다. 범사에 복을 받습니다.
(신 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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