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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그 땅을 위하여 응답하신 하나님 (삼하 21:1-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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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도 변함없이 추수감사절을 맞이한 평안의 모든 가정 위에 요셉을 양떼와 같이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동행하심의 복이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의 복을 헤아릴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감사하고 기쁜 일인지 모릅니다. 나에게 있어서 지난 한 해가 감사의 제목이 어느 해보다 풍성했음을 고백할 수 있다면 그것보다 더 큰 복은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은 이스라엘 땅에 연부년 기근이 삼 년동안 계속되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기근이란 비가 오지않아 농사를 정상적으로 지을 수 없어 겪어야 하는 재해입니다. 우기와 건기가 분명한 지역에선 우기때 비가 와야하는데, 연이어 삼 년 동안이나 비가 오지 않았다면 부족한 식량과 물의 부족으로 인한 환경적 고통으로 견디기가 매우 어려운 상황이었을 것입니다.

처음 기근이 들었을 때는, 요즘처럼 이상기온이겠지... 그렇게 한 해 한 해를 지나다가 삼년이나 연속되는 것을 보면서 다윗 왕은 무엇인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기도의 사람이요, 찬양의 영성이 살아 있던 그에게 연부년 삼년 동안의 기근이야말로 창조주 하나님의 분명한 메세지가 있음을 깨닫게 된 것습니다. 결국 다윗 왕은 무릎을 꿇었습니다. "하나님, 이 땅에 삼 년이나 계속적으로 기근이 계속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 아닙니까? 이 나라가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나라가 아닙니까? 하나님, 알게 해 주십시오. 깨달은 대로 실천하겠습니다..." 다윗 왕의 기도는 이와 다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즉시 다윗의 간구에 응답하셨습니다. 이 땅에 삼 년동안이나 기근을 심판으로 내리신 이유는 다름아닌 사울 왕 시대의 문제가 아직 해결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1절에 보면, "이는 사울과 피를 흘린 그 집을 인함이니 저가 기브온 사람을 죽였음이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윗 왕 때 일이 아니라 사울 왕 때의 일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다윗으로서는 너무나 억울하고 서운할 수 있는 문제입니다. 그것은 내가 한 일이 아닌데...

최근들어 우리나라는 대통령이 바뀌면 통과의례처럼 하는 일들이 있는데 바로 전임자들의 비리와 실정을 들추어 문제를 삼는 일입니다. 경제가 어려워 서민들이 살기가 어렵다고 하면 그건 전임자가 IMF 시대를 만들었기 때문이라며 비켜가고, 북한과의 관계가 너무 일방적으로 끌려가며 퍼주기만 하는것 아니냐고 하면, 그건 전임자때 노벨상을 받기위해 코가 꿰었기 때문이라고 비켜갑니다. 한일 관계가 여러가지 현안으로 어려워질 때면, 그것은 이 나라의 여러분야 즉 교육, 국방, 경찰, 검찰 등의 분야에서 일제시대에 교육을 받았거나 그 당시 활약했던 사람들 때문이라며 그들을 청산해야 문제가 해결된다고 비켜갑니다.

결국 앞사람의 일로 내가 책임을 지고 싶지는 않다는 것이지요. 그러한 논쟁으로 귀중한 세월 다 보내다가 결국 하고 싶은 일, 꼭 해야 하는 일들을 못하고는 아쉬움만 남긴채 물러나는 되풀이를 언제까지 해야하는지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다윗 입장에서도 하나님의 처사가 너무나 억울하고 속이 상할 수 있습니다. 전임자 사울이 잘못한 일들 때문에 삼 년 동안이나 온 나라에 가뭄과 흉년으로 기근이 들었으니 말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달랐습니다. 전임자의 책임이라고 떠넘기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어떻게 해야 이 어려운 난관을 해쳐갈 수 있겠느냐며 여호와 하나님께 물었습니다. 그것은 곧 자신이 그 문제에 대하여 책임을 지겠노라는 선언과도 같은 것입니다. 그리고 즉시 억울함과 분노에 가득차 있던 기브온 사람들을 불렀습니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어떻게 하랴. 내가 어떻게 속죄하여야 너희가 여호와의 기업을 위하여 복을 빌겠느냐?....." 이제 다윗은 단순히 기근 문제를 해결할 뿐만아니라 자신들을 원망하고 미워했던 그들에게서도 축복을 받는 민족으로 살고 싶다는 의지를 보이고 있는 것입니다.

도대체 사울 왕 시대에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출애굽기 34장에 보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시내산에서 언양을 체결하시면서 강조한 부분이 다름아닌 이방인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출 34:11-17 까지는 장차 가나안을 점령하면 그 땅의 대표적인 7족속들을 내어 보내고 그들이 섬기는 신이나 우상들을 따라가지 말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이 오히려 언약 백성의 순결한 삶에서 떠나 타락과 불순종의 올무가 될까 염려하셨기 때문이었습니다.

본래 이스라엘 민족이 기브온 사람들과 관계를 맺은 것은 여호수아 시대였습니다. 여호수아가 여리고를 점령할 당시, 그들은 먼 나라에서 온 것 같이 꾸며 여호수아에게 자신들과 조약을 맺자고 요청하였고 여호수아는 그들의 제안을 받아 들였습니다. 결국 가나안 족속들이 다 멸망할 때 그들은 살아 남게 되었습니다. 언약을 맺은지 삼 일만에 그들이 먼곳에서 온 족속이 아니라 기브온, 그비라, 브에롯, 기럇여야림 등에서 온 것이 드러났지만, 이미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으로 언약했기에 파기할 수 가 없었습니다. 결국 그들은 여호수아에 의하여 이스라엘 공동체 안에서 살되 영영히 종이 되어 나무를 패며 물 긷는 자들이 되었었습니다.

가나안 거민들이 기브온이 이스라엘과 화침했다는 소식을 듣고서 기브온을 치려하자 여호수아는 그들을 도와 싸웠고, 하나님께서는 그 당시 하늘에서 우박을 내리시며 도우셨고, 여호수아는 하나님께 태양을 기브온에 머물도록 간구하자 하나님께서 응답하신 전무후무한 역사가 바로 그들로 인하여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여호수아 10: 14는 이렇게 당시를 회상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목소리를 들으신 이 같은 날은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없었나니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싸우셨음이니라"

이렇게 시작된 기브온 백성들의 삶은 고급스러운 삶은 아니었지만, 전능하신 하나님의 백성 가운데 편입되어 산다는 것으로 만족하며 지내왔는데, 사울 왕 시대에 이 언약을 일방적으로 파기하고 기브온 족속을 학살하는 일을 자행했던 것입니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도망쳐 겨우 목숨을 부지했지만 힘이 없다 보니까 그들은 억울함도 호소하지 못했고 저항도 하지 못하며 지내왔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건은 역사의 뒤안길로 지나가 버리는듯 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에게 성공이 아니라 실패가 때때로 은혜인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잘 될 때가 아니라 안될 때가 감사의 기회가 될 줄로 믿습니다. 이런 시련을 통하여 오히려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기회를 갖게 되고, 다시금 온전함으로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때 그것이 진정한 복인 줄로 믿습니다. 다윗에게 있어서 기근이라고 하는 문제가 오히려 하나님의 뜻을 보다 분명하고 정확하게 깨닫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는 결단을 내렸습니다. 기브온 지도자들이 요구하는 일곱명의 사울의 후손들을 지정해 처형함으로써, 피를 흘린 곳에서 속죄를 받지 아니하면 속죄함을 받을 수 없다는 민수기 35: 33의 말씀을 그대로 실천하였던 것입니다. 다윗은 사울의 잘못을 자신의 잘못으로 간주하여 기브온 사람들의 한을 풀어 주었습니다. 이스라엘이 여호와의 기업으로 번영을 누리기 위해서는 반드시 "죄"의 문제가 해결되어야 함을 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에, 그는 기근이 하나님의 진노하심이라는 사실도 알고 있었습니다.

가뭄과 기근은 시내산 언약에 규정된 형벌이었습니다. (레 26:19-20, 신 28:38-40) 이 언약적인 형벌의 목적은 여호와와 언약을 맺은 이스라엘이 여호와께로 다시 돌아오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믿음의 사람 다윗은 범 국가적으로 내린 재난의 원인을 알기 위하여 여호와를 찾았고 결국 그는 그 원인을 알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 후에야 여호아 하나님께서는 비를 내리셨습니다. "그 후에야..."라는 표현은 단순히 사울의 후손을 처형한 후가 아니라, 기브온 백성들을 위로할 뿐만 아니라 사울 가문의 슬픔과 정리되지 못했던 베냐민 지파의 조상의 묘실에 대한 것 까지 해결되었을 때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는 오늘 또 한가지를 더 생각하기를 원합니다. 이 기브온 민족들은 약소민족, 이방민족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과 함께 거하기를 원했습니다. 실제적으로는 그래서 이스라엘민족들과 같은 대우를 받았습니다. 요즘으로 말하면 외국인이 한국사람이 되기를 원해서 귀화한 것과 같은 것입니다. 한 외국 프로선수는 귀화하여 이름까지 바꾸었지만 엄청난 자녀교육비를 감당 못하고 본래의 자기 나라로 돌아갔다는 소식도 들었습니다.

이방사람이 외국에서 자기나라처럼 산다고 하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것입니다. 그러나 그 앞의 사람들은 하나님과 언약을 통해서 함께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힘이 없다고, 그들이 자기들에게 도움이 안 된다고, 그들을 학살하는 만행을 사울은 저지른 것입니다. 이 일은 보시고 하나님께서는 분노하셨습니다. 우리 나라에도 지금 필리핀, 태국, 미얀마, 방글라데시, 인도네시아 등 많은 외국인들이 돈을 벌기위해 우리나라에 들어와 있습니다만, 여러분들은 이들을 대할 때 어떤 마음으로 대하셨는지요?

우리의 한국인들이 그들을 대하는 태도는 그들을 같은 인격적으로 같은 민족으로 같은 하나님의 자녀로 대하기 보다는 한 단계 낮추어서 대하는 모습을 우리는 그들의 말과 행동을 통해서 느끼게 됩니다. 언어는 통하지 않아도 우리는 느낌에서 나를 존중하고 있는지, 무시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가끔씩 운동장에 가 보면 베트남이나 외국인 형제들이 오는데 우리 성도들이 그들을 대하는 것을 보아도 제가 볼 때에 썩 맘에 들지 않아요. 뭔가 행동이 경솔한 것 같고, 낮추는 것 같고, 그런 느낌을 지울 수가 없어요.

제가 영국에 1년 있는 동안 그런 설움을 많이 당했습니다. 그들은 동양에서 온 사람, 일단은 한단계 낮추어서 대합니다. 그런 걸 말이 아닌 느낌으로 느낄 수 있어요. 가게에서 물건을 사도 그런 것을 느낍니다. 거리에서 길을 가다가도 그런 것을 느낍니다. 아마 그런 것들을 지금 우리나라에 와 있는 많은 동남아시아에 느끼면서도 그냥 돈 벌고 돌아가면되지. 아마 그런 마음으로 견디는지 모르겠습니다.

성경에 보면 레위기 19장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너희는 고아와 과부와 이방인들을 위하여 추수할 때에 이삭을 줏지 말라. 여러분 벼농사 끝나고 나면 벼베기를 하지요. 벼를 벨 때에 보통 왼손으로 볏단을 잡고서 오른손을 볏단 밑을 베는데, 아무리 잘 하는 사람도 베다 보면 볏짚을 놓칠 수 있지요.

그런데 성경에 보면 볏단에 벼를 베다가 하나뿐인 이 이삭을 줏지 말라고 하셨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는 자기의 논이나 밭의 모퉁이는 베지 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과수원에서 포도원이나 무화과나 올리브같은 과수원의 추수를 할 때에도 과수의 전체 열매를 따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한 나무에 적어도 몇 송아리 정도씩은 그 열매를 남겨두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과수원이 없고, 논이 없고, 밭이 없는 사람들이 추수가 끝나고 나면 모퉁이에 남아있는 벼를 그들이 걷어다가 떨어져 있는 이삭을 주워다가 남아있는 그 열매를 따다가 그들의 가족이 양식을 삼기 때문에 고아나 과부와 이방인을 위해서 절대로 모퉁이의 벼를 베지 말고, 과수원의 과수를 다 떼지 말라고 우리 주님께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약자라고 할 수 있는 고아와 과부와 이방인들을 위해서 그러한 배려를 하면서 우리는 살았습니까?

오늘 우리는 추수감사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추수감사라고 하는 것은 11월 3째주일 120년 전에 선교사님들이 한국에 들어오면서 우리에게 가르쳐 준 미국의 추수감사절이 지금까지 계속적으로 지켜져 왔어요.

우리 평안의교회는 23년 전부터 추수감사절이 11월 3째주일 하면 벌써 찬 바람이 휭휭 불고 밭에는 들에는 곡식들이 추수가 끝나서 아무 것도 없는 아주 황량한 그런 들과 밭이기 때문에 이 때 추수감사를 한다는 것이 뭔가 계절적으로 우리나라에는 무언가 맞지 않는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 너희가 맏물을 거둘 때, 너희가 첫 곡식을 거둘 때 하나님을 찬송하고, 하나님께 감사하라고 하는 그 말씀의 의미를 생각하면서 그럼 우리나라에서 첫 번째 곡식을 거둘 때가 언젠가?

여름곡식을 첫 번째가 거둘때가 맥추감사절이라고 하면 가을곡식을 거둘 때가 언제인가 하면 우리는 추석 때라고 하는 것이지요. 우리 한국에서는 추석 때 맏물을 거두어다가 조상에게 제사를 드리는, 부모에게 효도하는 우리에게 좋은 전통이 있는데 우리는 더 한 걸음 나아가서 성경의 정신대로 하나님께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일이 이게 우리나라의 추수감사절의 절기가 맞겠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우리가 추석을 맞는 그 앞 주간을 우리는 추수감사주간으로 지키고 있습니다. 지금은 많은 교회들이 추석을 앞 주간이나 혹은 늦어도 10월달로 추석을 전후에서 추수감사절로 드리는 변화된 모습으로 드리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11월에 하느냐, 10월에 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의 첫 수확을 하나님 앞에 감사로 드리겠다고 하는 우리의 정신, 우리의 그 마음 자세가 중요한 줄로 믿습니다.

우린 모든 평안의 성도들이 보너스도 받고, 봉급도 밀린 것을 받고, 그렇게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렇게 좋은 만사가 형통하는 가정과 기업들도 감사하지만, 때때로 추수의 감사의 때를 맞이해서 년부년 삼년동안 기근의 문제가 왔을 때도 우리가 감사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 그 문제를 위해서 하나님 앞에 다윗이 먼저 구했던 것은 무릎꿇고 기도한 것인 줄 믿습니다.

오늘 말씀 마지막 절 14절을 보면 문제를 다 해결한 후에 그 후에야 하나님께서 이 땅을 위하여 기도를 들으신 줄로 믿습니다. 가뭄이 들었던 땅에, 기근이 들었던 땅에 하나님께서 응답하셨다는 말씀은 뭐예요? 기근이 든 땅에 풍년을 주시고, 가뭄이 든 땅에 비를 주시는 것인 줄 믿습니다.

우리의 진정한 축복이라고 하는 것은 막혔던 하늘, 하늘 문을 열어서 기근이 풍년이 되고, 가뭄이 비가 오는 역사의 손길, 막혔던 부분들이 터지는 역사가 우리의 진정한 감사의 때가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오늘 추수감사주일을 맞이하면서 진정한 감사의 제목을 가지고 주님 앞에 나온 성도들에게는 더욱더 하나님 앞에 감사의 제사로 주님께 영광 돌리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지만 때때로 시련으로, 가뭄과 기근으로 지난 한 해 동안을 몸부림 쳤던 가정들이 있다면 이것이 기상이변이 아니라 이것이 환경적인 것이 아니라 우리의 죄악 때문에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서 우리의 막힌 담 때문에 우리의 삶의 물꼬가 트여지지 않았다고 하면 주님 이제 주님 무릎꿇고 해결하기를 원합니다.

그 문제, 그 문제가 다른 사람에 의해서 일어났던 문제라 할지라도 책임을 전가하지 않고, 나의 문제로, 나의 책임으로 생각하고 다윗처럼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었을 때 하나님께서 그제야 기도를 들으시고, 그 땅에 막혔던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오히려 이 추수감사의 기회를 통해서 하나님과 막힌 담을 풀고, 하나님과 우리가 교통되지 못했던 부분들이 교통이 되어가면서 이 추수감사주일에 축복의 통로요, 은혜의 통로가 새롭게 열리는 은혜의 주일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고마우신 하나님, 형통케 하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지난 한 해 동안 우리의 가정과 우리의 기업과 우리의 자녀와 우리의 삶을 은혜로 인도해 주신 것 감사를 드립니다. 만입이 있어도 그 주신 은혜를 다 감사할 수 없노라고 고백하는 믿음의 선조의 고백처럼 우리가 입을 다하여 마음을 다하여 주님을 찬양하며 영광 돌리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때때로 우리가 연약하므로, 때때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 범죄함으로 그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 하늘을 철처럼, 땅을 놋처럼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는 그 심판에 신음하면서 고통받았던 지난 세월을 기억합니다. 이스라엘의 년부년 삼년동안 기근이 있었던 것처럼 그러나 믿음의 사람, 기도의 사람 다윗이 엎드려 기도하면서 그 문제를 알고, 그 문제를 해결하면서 그 후에야 하나님께서 그 땅을 위하여 비를 주셨고, 은혜를 주셨던 것처럼 오늘 우리에게 막혔던 축복의 통로들이 회개와 결단을 통하여 새롭게 트여지는 은혜의 축복의 기회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평안의 모든 성도들, 어린이부터 어른에 이르기까지 이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에 온전히 인도함을 받는 복되고 복된 추수감사절기가 되기를 원하옵고, 우리 구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황 요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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