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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봉사로 하는 사랑 (롬 1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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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하나님은 나를, 여러분을,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오늘도 큰 사랑으로 여러분에게 함께 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랑은 표현하지 않으면 사랑이 아닙니다. 그래서 나는 분명히 사랑을 하는데, 표현하지 않으니까 상대방은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그것은 사랑의 코드가 맞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그래서 어떤 분은 선물을 주면 나를 사랑하는 거라 생각을 하는 분들도 계시고, 반대로 이건 사랑이 아니라고 생각을 하는 분들도 계십니다. 왜냐하면 선물을 주면서 "사랑합니다."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도 없이 물건이나 던져 준다고 오히려 선물을 불쾌하게 생각하기도 합니다. 이런 사람은 선물보다는 다정한 말로 사랑한다는 고백을 하는 것이 더 효과적입니다. 또 반대로 사랑한다는 말은 잘하는데 생일이 되건, 명절이 되건 간에 선물을 하지 않는다면, 상대방은 선물이 없는 말뿐인 사랑은 진정한 사랑이 아니라고 생각을 합니다. 이 만큼 사람마다 각각 사랑 받기를 원하는데, 그 표현의 코드가 맞지 않아서 사랑하면서도 사랑을 경험하지 못하는 부부나 가족이나 공동체가 적지 않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시간 우리들이 사랑의 표현방법을 배우고 있습니다.

사랑을 표현하는 방법에는 5가지가 있습니다. 지난시간 드린 말씀을 회고해 보면
첫 번째는 말로 하는 사랑입니다. 말로 복을 빌어 주라!는 것이지요.
두 번째는 행동으로 하는 사랑입니다. 즉, “함께 있어 주라!”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투자하는 사랑으로 “선물을 주라!”는 것입니다.

오늘은 사랑의 표현하는 방법 5가지 중에 4번째 시간입니다. 이것은 희생으로 하는 사랑입니다. 즉 “봉사로 사랑을 하라!”는 것입니다. 교회를 사랑하는 성도분들 중에는 성가대로, 식당봉사자로, 아침에 일찍 와서 교회 청소하는 분 등, 교회를 위해서 일을 하는 것을 보게 되면 정말 교회를 사랑하는 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을 가리켜 봉사로 하는 사랑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당연히 봉사를 해야만 합니다. 그런데 교회에서건, 직장에서건, 가정에서건 어떤 사랑의 자세로 봉사를 해야 하는지 세 가지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첫 번째는 하나님의 몸으로 알고 섬겨야 합니다.- 순종심 (3)

교회에서건, 가정에서건, 직장에서건 간에 사랑으로 하는 봉사는 하나님의 몸으로, 하나님의 것으로 생각을 하고 봉사해야 합니다.
3절을 같이 봅니다.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
우리에게 주신 모든 것은 다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가정과 교회, 직장도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마음을 갖고 봉사하는 것이 우리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의 자녀된 자의 기본적이 자세입니다.

유명한 문학가가 고급식당에서 식사를 하고 나오는데 길거리 청소를 하는 미화원을 만났습니다. 그런데 이 미화원이 하는 말이 “하나님도 무심하시지 누구는 고급식당에서 밥을 먹고 나는 더러운 길이나 쓸게 하시다니 세상 참 불공평하다!” 한숨을 크게 쉬며 신세를 한탄하는 것입니다. 거리 미화원의 불평하는 말을 이 문학가가 듣게 되었습니다. 그 모습이 참 안됐습니다. 청소하는 일이 안된 것이 아니라 그렇게 생각을 하고 한탄을 하는 것이 안됐다는 것입니다. 문학가는 불평하며 한숨짓고 신세를 한탄하며 마지못해 일을 하고 있는 바로 그 미화원을 찾아가서 그 분의 손을 붙잡았습니다. 옷을 잘 입은 신사가 찾아와 손을 잡으니 미화원은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문학가는 손을 잡고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형제여, 거리를 깨끗하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덕분에 저희 들이 이렇게 아름다운 거리를 다닙니다. 그런데 형제여, 하나님은 당신의 일하는 것을 보고 계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만든 세상을 아름답게 만드는 당신을 보고 기뻐하십니다. 형제여 하나님의 복이 임하시기를 빕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고 있는 모든 것을 보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 일에 대해 복을 주실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우리가 보는 시각에 따라서 우리의 삶의 달라진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일이라고 생각을 하면 천한 일이 없습니다. 저희 때를 보면 학창시절에 선생님께서 교무실에서 출석부 좀 가지고 올 사람을 찾으면 저마다 자기가 간다고 합니다. 그뿐입니다. 칠판에 지우개를 털 사람을 찾아도 저마다 자기가 간다고 합니다. 그런데 주번이 지우개 좀 털어 달라고 하면 간다고 하는 사람이 몇 사람이나 있겠습니까? 선생님의 일을 하니까 자기가 간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일을 하면 어떻습니까? 모두 기쁜 일뿐입니다. 직업에는 귀천이 없습니다. 사람의 차별도 없습니다. 성경에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는 말씀의 내용은 하나님이 주신 일로 생각하고 여기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도 누구 보면서 일을 합니까? 찬양대 하는 일이 목사님보고 하는 일입니까? 하나님을 보고 하는 일입니다. 그래야 기쁨이 있습니다. 이세상과 가정과 내 자녀의 주인은, 내 며느리의 주인은 하나님이 십니다. 하나님이 주신 일입니다. 사람이 함부로 하는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두려운 마음으로 사랑하고 마땅히 섬겨야 하는 줄로 믿습니다.

유대인의 지혜서인 탈무드의 보면 시집가는 딸에게 아버지가 가르치는 말씀 중에 하나가 “ 딸아, 네가 남편을 왕으로 섬겨라 그러면 네가 왕비가 될 것이다. 그러나 네가 남편을 종으로 부리면 너도 노예가 될 것이다”라는 말입니다.
중요한 말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가정에서 왕비입니까? 아니면 노예입니까? 여러분은 지금 교회에서 하나님의 자녀입니까 아니면 세상의 노예입니까?
내가 어떤 관점을 가지고 보느냐에 따라서 상대가 달라지고 나의 운명도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이 교회가 하나님의 교회라는 이해를 가지는 교인이 복을 받습니다. 사람을 보고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고 철저히 신앙생활을 하는 주의 종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가정에서도 하나님의 일군으로 일하시기 바랍니다. '나는 하나님의 일군이다'라고 생각을 하고 일을 하면 어려운 일도 힘이 들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내가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기 때문에 일이 즐겁습니다. 철저한 순종심을 가지고 하나님과 그 교회를 섬기는 일입니다.

뉴욕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이 있습니다. 이 빌딩을 왜 102층으로 지은 줄 아세요?
청계천3가에 가면 종로3가와 그 사이에 삼일 빌딩이 있습니다. 제일 처음 지어졌을 때 가장 높은 빌딩이었습니다. 그 앞에 길이 삼일로입니다. 낙원상가에서 남산 1호 터널까지 가는 길 말입니다. 삼일빌딩은 3․1절을 기념해서 지은 건물이라 31층입니다.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은 1620년 9월7일 신앙의 자유를 찾아 66일 동안 대서양을 건너 신대륙 매사추세츠주 플리머스 항구에 도착한 102명의 청교도를 기념하기 위해서 지어진 빌딩입니다.
그런데 북한은 방문자들에게 평양 대동강변에 세워진 주체탑이 있습니다. 이 주체탑을 25,550개의 돌로 세웠는데 그건 김일성 주석이 세상에 태어나 살아온 날 수, 곧 70년에 365일을 곱한 숫자라고 합니다.

청교도들은 빌딩 하나를 세워도 창조주 하나님의 역사를 기념하지만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들은 피조물인 사람을 기념합니다. 바벨탑은 무너집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는 성도는 하나님이 책임지십니다. 그리스도인은 말이나 일이나 무엇이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해야 합니다. 모든 일을 하나님의 일로 생각하고 섬기는 분은 하나님의 은혜가 있을 줄 믿습니다.

스페인의 무적함대를 이끌고 코르테스(Hernan Cortez 1485-1547) 제독이 신천지를 개척하기 위해 멕시코 동해안에 상륙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를수록 병사들은 향수병에 걸리기 시작했고 신천지 개척이라는 목적의식도 점점 흐려져 갔습니다. 이를 본 코르테스 제독은 결단을 내렸습니다. 그들이 타고 왔던 배를 모두 불태워버린 것입니다. 병사들의 마음을 개척자의 정신으로 돌이키도록 배수의 진을 친 것이었습니다.
신앙은 결단입니다. 봉사의 시작은 하나님이 주신 것에 대한 사랑입니다. 순종하는 마음으로 사랑하십시오. 여러분의 사랑이 하나님이 열납 하시는 제사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는 우리 몸으로 알고 섬기는 것이 사랑입니다. - 협동심

4절을 같이 보겠습니다. “ 우리가 한 몸에 많은 지체를 가졌으나 모든 지체가 같은 기증을 가진 것이 아니니”
우리 몸에는 여러 지체가 있습니다. 손도 있고 오른손, 왼손, 눈도 있고 코 있고, 입도 있고 이 있습니다. 그러나 코나 입이나 한 몸에 있습니다.
우리 교회 안에서도 서로 다른 성도들이 있지만 우리는 다 한 몸이라는 것입니다. 교회란 예수그리스도의 공로로 죄 사함을 받아 하나님의 백성이 된 사람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 중에는 각기 다른 인종과 민족이며 남녀노소, 부귀와 빈천 등 각 계층의 사람 들 이 포함되는 것이므로 내 교회인 동시에 당신의 교회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나와 당신 또 그 외의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모든 사람을 합한 우리 교회이기도 한 것입니다.

너와 내가 하나라는 생각을 가지십시오. 이 교회는 너와 네가 하나라는 마음으로 서로 섬기고 봉사하는 교회가 진짜 교회입니다. 가정도 마찬가지입니다. "네가 사는 것이 내가 사는 것이다. 너를 위해서 사는 것이 내가 사는 것이다." 이런 생각을 가진 직장이나 나라나 교회는 잘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그런 사랑을 가지고 살아가야 합니다.

힌두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한 인도의 선다싱이라는 유명한 사람이 어느 추운 겨울 날 동료 수도사와 함께 산을 넘어 수도원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가던 길에 한 사람이 병들어 쓰러져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함께 가던 수도사가 “저렇게 죽는 것은 저 사람의 운명이니까 우리는 갈 길을 갑시다”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선다싱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나로 하여금 이 길을 지나가게 하신 것은 저 사람을 도우라고 하는 부르심이라고 생각합니다”라고 대답하고 그 사람을 업었습니다. 자신도 힘이 없고 배가 고픈데도 말입니다. 산을 넘는데 너무 힘이 듭니다. 땀을 뻘뻘 흘리며 죽을 고생을 다해 수도원 가까이 왔습니다. ‘이젠 살았구나’하고 안도의 숨을 내쉬는데 무엇인가가 발에 걸리는 것입니다. 앞서 가던 수도사였습니다. 혼자 가다가 너무 추운 나머지 얼어 죽었던 것입니다. 이후 선다싱에게 사람들이 인생에서 가장 어려운 것이 무엇이냐고 질문할 때면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내가 지고 가야 될 짐이 없을 때 나는 가장 어려웠습니다.

대한민국이 부흥하고 발전할 수 있었던 이유 중에 하나는 세계에서 유일하게 분단국가라는 것입니다. 지고가야 할 짐이 있기 때문에, 책임이 있었기 때문에 더 잘 살게 되었던 것일지도 모릅니다. 오늘 우리가 사랑해야 하고 마땅히 지고 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복음으로 남북이 하나로 통일이 되고 북한이 하나님의 사랑으로 구원 받는 역사가 일어나도록 날마다 기도하게 될 때 북한도 살고 우리도 살게 될 줄로 믿습니다.

신·구약성경에는 천사의 노래가 가끔 소개되고 있는데 길고 짧은 차이는 있지만 어느 것 이나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천사의 노래에는 독창이 없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노래를 잘하는 천사라도 한 천사의 독창으로 찬양하기에는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 막중하고 그의 행사가 너무 위대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천사의 노래는 합창인 것입니다. 봉사는 오케스트라와 같아서 모두가 합심 합력하는 협동정신의 소산일 때만이 아름다운 것입니다.
가정도 마찬가지입니다. 서로의 필요가 무엇인지를 알아야 하고 그 필요를 채워 주려고 해야 사랑이 성립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사랑한다고 했던 부부가 2년만에 헤어지겠다고 나오는데 두 사람도 다 열심히 살았습니다. 문제가 없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까 서로의 필요를 채워주지 못했습니다. 상담가가 '서로에게 원하는 게 뭔지 적어보세요."라고 했습니다. 적은 것을 보았더니 별것도 아니었습니다. 서로가 바꿔서 준 다음에 일주일동안 실천을 해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다 해결되었습니다.
여러분 불평하는 것은 상처를 줍니다. 예를 들어서 "밥도 안했어. 빨래도 안했어? 청소도 안해놨어?" 이것은 불평하는 것이기에 상처를 줍니다. 그러나 “내가 배가 고픈데, 밥 좀 줄 수 있겠소?”, “이 Y셔츠가 더러워 졌는데, 세탁해 줄 수 있겠소?” 하는 것은 요구하는 것이기에 상대방은 기쁜 마음으로 들어 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타인의 봉사와 비교하지 말아야 합니다.
요한복은 21장에서 주님은 베드로에게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때 베드로는 옆에 있는 제자를 가리키면서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라고 묻자 주님은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봉사의 수준에 비교하여 나의 봉사의 수준을 결정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주님 앞에서 절대적인 봉사를 해야 합니다.

딸만 6명인 어느 행복한 가정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엄마가 친구로부터 예쁜 인형을 하나 선물 받았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아이는 6명이고 인형은 하나라서 누구에게 주어야 할지 난감했습니다. 엄마는 고민 끝에 말했습니다.
“오늘 제일 말을 잘 듣는 사람에게 이 인형을 줄께.”
그 말을 듣자 여섯 딸이 하나같이 소리쳤습니다.
“에이! 그러면 아빠거잖아!”
아이들 보기에 아빠가 엄마 말을 제일 잘 듣는 사람으로 보인 것입니다. 아이들에게 그렇게 보일 정도이면 행복한 가정이라고 해도 충분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삶은 ‘들어주기를 힘쓰는 삶’입니다. 반면에 세상에서 가장 추한 삶은 ‘들어달라고 떼쓰는 삶’입니다. ‘알아주는 삶’에는 행복이 깃들고, ‘알아달라는 삶’에는 불행이 깃듭니다. “고생만 시켜서 미안해요!” 하고 고생을 알아주는 관계는 행복할 수밖에 없고 “왜 내 고생을 몰라줘요!” 하고 고생을 알아달라는 관계는 불행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에게 가장 먼저 버려야 할 생각은 “내 마음을 너무 몰라줘!”라는 생각이고, 가장 먼저 실천해야 할 생각은 “내가 좀더 들어주자!”는 생각입니다. ‘들어주는 삶’에 ‘붙들어주는 삶’도 있게 되고 ‘만들어주는 삶’도 있게 됩니다. 잘 들어줄 때 사랑하는 대상은 견고한 인생으로 만들어져갑니다.
입은 하나이고 귀는 두 개인 것처럼 말하는 것보다 듣는 것을 두 배로 하고, 입보다 귀가 높은 곳에 위치한 것처럼 말하는 것보다 듣는 것을 높이고 존중할 때 행복은 결코 비켜가지 않을 것입니다. 행복은 귀가 하나이고 입이 두 개인 괴상망측한 외계인에게 찾아가지 않습니다.

봉사로 하는 사랑은 세 번째는 내 몸으로 알고 섬기는 사랑입니다. - 책임감

5절을 보겠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
우리들은 주안에서 한 몸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었습니다. 코가 아프면 눈도 아프고 다 아픕니다. 한 그루의 나무에 달린 수많은 가지들처럼, 우리는 예수님이라는 한 나무에 달린 여러 개의 가지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음으로 영접한 성도들은 모두 한 몸, 한 지체입니다.

미국으로 시집간 딸을 보기 위해서 친정엄마가 미국으로 갔습니다. 공항에는 사위가 마중을 나왔습니다. 딸은 직장 때문에 못나오고 사위는 쉬는 날이라서 나온 겁니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사위가
"어머니, 편하게 계세요" 하고는 부엌에서 딸그락딸그락 거립니다. 친정엄마가 무슨 소리인지 궁금해서 가보니 사위가 설거지를 하는 겁니다. 설거지를 하고 나더니 빨래를, 빨래를 하고 나더니 청소를 하는 겁니다. 친정엄마가 '참!! 사위하나 잘 얻었네..' 얼마나 뿌듯하겠습니까.
딸아이가 행복하게 잘 지내는 모습을 확인하고 한국으로 돌아왔습니다. 몇 일이 지났을까요. 외출을 하고 돌아오니 며느리는 외출하고 없고 아들이 부엌에서 설거지를 하는 겁니다. 왜 이렇게 속에서 무언가가 올라오는지.... '아휴.. 내가 빨래나 하고 설거지나 하고 청소시키려고 이렇게 키웠나..' 싶더니 한심한 아들을 키운 내가 더 한심해 보여서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는 겁니다.

내 딸 같은 며느리를 보는 시어머니의 마음, '내가 아들하나는 잘 키웠구나. 그렇지.. 아내를 사랑하는 마음.. 잘 배웠다'하는 마음, 예수님께서 세상의 모든 시어머니의 마음속에 이런 마음이 충만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더러운 발을 씻겨 주면서, 선생님이 제자의 발을 씻겨 주셨습니다. 이게 발 중님의 마음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었다고 하는 것은 바로 이것을 얘기하고 있습니다. 너의 아픔이 네 아픔이라고 생각을 하는 마음으로 우리가 부모님을 잘 섬기고 자식도 잘 섬기고, 며느리가 딸이 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며느리를 딸보다 더 사랑을 해야 합니다.

내가 맡겨진 사명을 가지고 나에게 맡겨진 일을 할 때, 봉사를 할 때, 사랑입니다. 일해야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것으로 사랑해야 합니다. 오늘 이런 사랑을 통해서 이 한주간도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사랑도 표현하지 않으면 사랑이 아닙니다. 말로 하는 사랑, 함께 하는 사랑, 선물로 하는 사랑, 봉사로 하는 사랑!! 여러분의 사랑이 늘 충만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 창우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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