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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추석] 주님 모실 객실이 있는가? (눅 22: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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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절입니다. 우리는 명절이 되면 참으로 바쁩니다. 아무리 멀어도 고향을 찾고 부모를 찾아 길을 떠납니다. 10시간 고생도 마다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고향에 이르러서는 명절 음식을 준비하느라 또 수고합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명절에 우리는 어디를 찾아야하고 무엇으로 인해 바빠야 하는지를 잊고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명절은 고향을 찾는 날이 아니라 주님을 찾는 날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네 명절은 고향을 찾아 조상들께 감사하는 날로 생각합니다. 아닙니다. 하나님께 감사 드리는 날이 되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도 우리는 먼저 주님 앞으로 모여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네가 떡과 제물을 준비해서 제사를 드리는 것이 무엇 때문입니까? 조상들이 우리의 삶을 지켜 주셨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과연 그렇습니까? 아니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도우시기에 오늘 우리가 이 자리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에 오늘 우리가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가을 곡식이 무르익어 가지만 하나님이 도우시지 않고서는 한 톨의 양식도 우리는 거둘 수가 없습니다. 아니 풍요롭게 거둔다고 하더라도 그 날 하나님이 우리의 생명을 거두신다면 우리의 수고한 그 모든 것이 무슨 소용이 있단 말입니까? 그렇기에 우리는 먼저 하나님께 감사해야 하는 것이요 송편을 빗고 음식을 장만하는 마음으로 먼저 하나님께 감사의 예물을 드릴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준비된 예물을 가지고 주님 앞으로 나아와 감사를 드려야 마땅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먼저 생각할 것은 명절에 마지막 만찬을 준비하시는 주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 사람들을 구원하시기 위한 공생애의 사역을 시작한 이후 머리 둘 곳도 없으실 정도로 가난하게 사셨습니다. 그랬기에 예수님께서 유월절을 맞아 예루살렘으로 올라오실 때도 베다니 지경에서 어린 나귀를 빌려 타고 예루살렘 성에 들어오셨습니다. 예루살렘 성을 향하여 올라가시다가 감람산 지경에서 예루살렘 성을 보시면서 우셨던 주님이십니다. 얼마 있지 않아 예루살렘 성이 멸망을 당하고 그 가운데 많은 사람이 죽임을 당할 것을 아시기에 우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자기들에게 임할 멸망을 알지도 못한 채 영원히 살 것처럼 웃고 떠들며 성밖 맞은 편 마을 베다니 사람들과는 달리 성 안에서 풍족하게 살아가고 있는 예루살렘 성 사람들을 볼 때 예수님은 우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니 멸망이 가까운 줄도 모른 채로 여전히 자기 배를 채울 궁리로만 바빠서 백성이 다 죽어가고 함께 망하게 될 것은 전혀 생각지도 않고 있는 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을 생각할 때 더욱 우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지도자를 잘못 만나서 죽음의 길인지도 모른 채 그 죽음의 길로 따라가고 있는 백성들을 볼 때 그리고 지금 당장의 풍족한 삶을 누리면서도 주위로 작은 도움의 손길조차 펼치지 않고 있는 백성들을 볼 때, 마치 삯군 목자를 따라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들어가는 양들처럼 죽음의 길로 달려가고 있는 것만 같아서 예수님은 통곡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통곡만 하고 계실 수가 없었습니다. 한 시간이라도 더 백성들을 말씀으로 깨우쳐야 하고 한 사람이라도 더 말씀 안에 회복될 수 있도록 하여야 하겠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예수님은 알고 계십니다. 자기가 바로 유월절 어린 양처럼 백성들을 위한 희생 제물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 한 주간 동안 예루살렘에서 백성들을 가르치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제자들과 마지막 저녁을 나누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마지막 저녁을 먹을 수 있게 준비하도록 부탁을 하고 계십니다.
"가서, 우리가 먹을 수 있게 유월절을 준비하여라"

하지만 제자들로서는 답답합니다. 유월절이 가까워져 예수님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올라왔지만 낮에는 성전에서 말씀을 가르치시다가도 저녁이 되면 성밖 맞은 편 마을 베다니로 나가셔서 그곳에 머물렀기 때문입니다. 아니 성 안에는 머물만한 곳도 없단 말입니까? 이왕이면 좋은 집에서 좀 지내면 어때서 가난한 자들이 몰려 사는 베다니 마을로 나가셔서 주무신단 말입니까? 물론 길을 가는 도중이라면 흔히 노숙도 하고 하는 것조차 상관하지 않았지만 지금 자기들은 예루살렘에 들어와 있는 것이 아니냔 말입니다. 그런데 날마다 머물던 베다니 마을은 너무도 초라한 집들뿐이어서 한적하게 자기들끼리만 모여 저녁 식사를 나눌만한 그런 집들조차 없습니다. 그렇다고 가진 돈이라도 충분하다면 어디 큼직한 집이라도 하나 빌려서 식사 준비를 하면 되겠지만 주머니도 텅 비어 있습니다. 그들을 따르는 사람들도 하나 같이 어려운 사람들입니다. 갈릴리라면 자기들이 살던 집에라도 식사 자리를 준비하면 되겠지만 여기는 예루살렘입니다. 그런데 도대체 어디에다 예수님은 유월절 저녁 식사 준비를 하라고 하시는가 그들을 궁금합니다. 아니 답답해서 미칠 지경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반문합니다.
"어디에다 준비하기를 바라십니까?"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참으로 답답한 시간을 보낼 때가 있습니다. 무언가 해야 될 텐데 길이 보이지를 않습니다. 도무지 방법이 없습니다. 마음 같아서야 그냥 시작만 하면 될 것 같은데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모릅니다. 하기는 해야 할 텐데 뭐 가진 것이 있어야지요. 그저 막막할 뿐입니다. 하고는 싶은데 아는 것이 있어야지요. 누군가 도움의 손길을 찾아보기도 하지만 도무지 도움의 손길조차 막연하기만 합니다. 그렇다고 아무에게나 도와달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 아니 자존심 때문에라도 말을 할 수가 없습니다. 어떤 문제는 남들 앞에 꺼내 놓기조차 힘든 것도 있습니다. 남들은 아주 쉽게 하는 일도 내게는 어렵기만 합니다. 차라리 모든 것을 다 포기해 버리고 말까 하는 생각을 하다가도 그렇게 포기해 버리기에는 너무 아쉽기만 합니다.

우리들 앞에 펼쳐져 있는 문제들이라고 하는 것들이 다 그렇습니다. 사실 쉽게 해결할 수 있는 일이라면 문제라고 할 것도 없겠죠.
주님을 섬기는 것도 그렇습니다. 가진 것이 충분하다면 그래도 낫겠습니다. 시간이라도 많다면 그래도 뭘 좀 해 볼 수 있겠습니다. 아니 건강하기라도 하다면 몸으로라도 때운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렇다고 손재주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누구는 말이라도 잘 한다지만 나는 말재주도 시원찮습니다. 그렇다고 지혜가 뛰어나냐 하면 그것도 아닙니다. 마음은 뜨겁고 간절한데 방법이 없습니다. 그럴 때 얼마나 답답합니까? 그래서 포기합니까?

하지만 여기 주님의 계획하심이 있습니다. 제자들은 답답해서 어디에다 준비하기를 바라십니까 묻고 있지만 이미 주님께서는 모든 준비를 다 마치고 계시더란 말입니다. 이미 주님께서는 유월절 마지막 저녁 식사를 하실 장소를 다 생각하고 계십니다. 단지 제자들이 모르고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답답해했던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길도 그렇습니다. 우리 가운데 함께 계신 주님이 어떤 분이라고 했습니까?
이사야서 9잘 6절로 7절은 말씀합니다.

"한 아기가 우리에게서 태어났다. 우리가 한 아들을 얻었다. 그는 우리의 통치자가 될 것이다. 그의 이름은 '기묘자, 모사, 전능하신 하나님, 영존하시는 아버지, 평화의 왕'이라고 불릴 것이다. 그의 왕권은 점점 더 커지고 나라의 평화도 끝없이 이어질 것이다. 그가 다윗의 보좌와 왕국 위에 앉아서, 이제부터 영원히, 공평과 정의로 그 나라를 굳게 세울 것이다. 만군의 주의 열심이 이것을 이루실 것이다."

우리의 구세주 예수님이 누구십니까? 기묘자 즉 아주 뛰어나신 신령하신 하나님이요 모사 즉 지혜의 근본이며 우리의 조언자가 되시며 그분이 우리의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며 우리 가운데 영원히 함께 계시는 아버지가 되시며 평화의 왕이시라고 말씀합니다. 이분이 우리를 영원히 다스리시며 그 나라를 공평과 정의로 굳게 세우실 것인데 만군의 주의 열심이 이것을 이루실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주님만을 의지하고 주님의 뜻을 바로 알게 되면은 염려할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다 계획하시고 준비하시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 모든 일을 만군의 하나님의 열심이 이루실 것이라고 했습니다. 나보다도 우리보다도 주님이 더 열심입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두려워 할 것도 없고 염려할 것도 없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이를 깨달은 바울 사도가 우리를 권면합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아라 오직 모든 일에 기도하고 간구하되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아뢰도록 하여라 그리하면 모든 생각에 뛰어나신 하나님께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실 것이다"

그래요. 우리가 무언가를 하고 싶을 때 마음 같아서는 다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실제로는 안 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좌절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그것 때문에 괴로워할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마음으로는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은데 막상 말하려고 하면 왜 그렇게 힘든지요. 마음으로는 다 용서하고 잊어버리고 싶은데 막상 용서했다고 생각했는데 또 다시 생각이 나는 것은 무엇 때문이죠? 왜 그렇게 용서한다고 말하기가 어려운 걸까요? 같은 말이라도 좀 더 부드럽고 다정스럽게 말하고 싶은데 왜 나도 모르게 거친 말을 하게 되는 걸까요? 나도 할 수 있다고 말하고 싶은데 막상 입을 열면 못 한다는 소리부터 하게 되는지요? 이왕이면 좋은 남편, 좋은 아내, 좋은 돕는 배필이 되고 싶은데 막상 시작했다 하면 어느 사이 좋은 남편, 좋은 아내, 돕는 배필이 아니라 원수처럼 되고 마는 것일까요? 좋은 부모가 되고 싶고 좋은 자녀가 되고 싶은데 왜 우리는 서로 마음만 상하게 만들고 있을까요?

그래서 나는 결국 이런 모습 밖에는 안 된다고 포기하십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은 오늘 우리에게 부족한 부분을 채우시기 위해 우리를 돕고 계신 분인 것을 기억하십시오. 우리 스스로 온전할 수 없기에 돕는 배필을 세우셨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돕는 배필이란 곧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을 전제로 합니다. 이는 나 역시도 도움이 필요하고 또한 남편에게 아내에게 자식에게 부모에게 그리고 이웃에게 역시 도움을 주어야 하고 도움을 받아야만 하는 존재임을 알려줍니다. 그런데 악한 마귀는 그런 우리를 향해 "너 혼자서도 할 수 있어 너 혼자 해봐" 이렇게 속삭입니다. 그리고 도움을 주려고 하는 사람에게조차 역정을 내게 만듭니다. 내가 어린애인줄 아느냐고요. 아니면 무슨 다른 속셈이 있어서 그런 것 아니냐고요. 하지만 어린애라서가 아니라 또 다른 속셈이 있어서가 아니라 우리는 근본적으로 서로 돕고 협력하면서 살아가게끔 지어졌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그리고 이를 위해 우리의 부족한 부분을 채우고 돕기 위해 또한 성령께서 내 곁에 함께 계시다고 하는 사실도 우리는 결코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니까 나 홀로 무엇을 하려고 하지 말고 주님께 맡기고 주님께 아뢰십시오. 그리고 주님이 협력자로 세우시는 남편을 아내를 그리고 부모와 자녀 이웃들과 그리고 주의 종들과 함께 협력하고 함께 돕는 아름다운 관계를 이루어나가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모든 것을 홀로 하실 수가 없어서 제자들을 보내 유월절을 예비하기 위한 저녁 식사 자리를 제자들에게 준비하도록 하십니까? 아닙니다. 주님께서 혼자서도 다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이 함께 이 일에 동참하고 협력하고 준비할 수 있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두 세 사람이 함께 모이도록 하시고 그들 가운데 함께 계시겠다고 하신 것이요 두 사람이 합심해서 기도하도록 하시면서 저들을 위해 그 기도를 응답하시리라고 약속하시는 것입니다.

하지만 한 가지 더 기억하고 명심할 것이 있습니다. 돕는 것과 간섭하는 것의 차이를 우리가 바로 알아야 합니다. 돕는다는 것은 상대방이 일을 잘 할 수 있도록 협력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돕는다고 하면서 돕는 것이 아니라 주장하려고 할 때 문제가 생기고 마찰이 생기더란 말입니다. 협력이라고 하는 것은 힘을 합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상대방의 부족한 부분을 내가 채워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채워준다고 하면서 막상 내 뜻대로 모든 것을 끌고 가려고 한다면 그것은 돕는 것이 아닌 간섭이 되더란 말입니다. 그래서 도움의 손길을 펼칠 때도 상대방의 뜻을 잘 이해해야 합니다. 또 어떤 분은 도움을 받는 것은 약한 사람이나 그런 것으로 생각해서 도움 받는 것을 또 별로 좋아하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지만 도움을 함께 주고 받는 것이 진정 아름답다고 하는 것을 우리가 기억해야 합니다. 같은 일을 해도 혼자 하는 것보다 협력해서 하면 보다 쉽게 할 수 있습니다. 또 혼자 생각보다는 여러 사람의 생각을 합할 때 더 좋은 방향을 찾아낼 수 있습니다.

반면에 처음부터 도움만 바라는 분도 계십니다. 그런 분은 자기 성장을 할 수가 없습니다. 내 나름대로의 길을 찾아보면서 부족한 부분을 옆에서 채우면서 돕도록 하여야 하는데 나는 전혀 해볼 생각도 않고 다른 사람의 손길만 의지하려고 한다면 이 역시 바른 협력의 관계가 될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이제 우리는 서로 협력하고 서로 돕고 도움을 받는 아름다운 길을 찾아 나가되 나 스스로도 바로 설 수 있도록 힘을 다해 수고하는 귀한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럴 때 주께서 우리 가운데 함께 계시며 우리들의 길을 함께 도우시며 열어주시게 됩니다. 아울러 우리들에게 필요한 모든 것으로 채워 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귀한 협력자요 동행자로서 우리 모두가 함께 사랑을 함께 나누는 성도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우리는 서로 돕는 협력자기 될 뿐 아니라 또한 주님을 모실 객실을 준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유월절을 맞아 예루살렘으로 올라오실 때 베다니 지경에서 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 성에 들어오셨습니다. 그때 베다니 건너 편 마을로 제자들을 보내 어린 나귀를 끌고 오도록 하셨습니다. 어린 나귀의 주인이 "왜 남의 나귀를 푸느냐?"고 물었을 때 제자들은 "주께서 필요로 하신다"고 했고 이에 주인은 기쁨으로 어린 나귀를 예수님께로 보내 예수님이 그 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가셨습니다.
그런데 이번 유월절을 예비하기 위한 저녁식사를 준비하는 과정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집니다.
"가서, 우리가 먹을 수 있게 유월절을 준비하여라."
"어디에다 준비하기를 바라십니까?"
"너희가 성 안으로 들어가면, 물 한 동이를 메고 오는 사람을 만날 것이니, 그가 들어가는 집으로 따라가거라. 그리고 그 집주인에게 말하기를 '선생님께서 당신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내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 음식을 먹을 그 방이 어디에 있느냐고 하십니다' 하여라. 그러면 그 사람은 자리를 깔아 놓은 큰 다락방을 너희에게 보여 줄 것이니, 너희는 거기에다 준비를 하여라."
그들이 가서 보니, 예수께서 말씀하신 그대로였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유월절을 준비하였습니다.
여기 예수님의 말씀대로 자기의 다락방을 내어준 다락방 주인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집은 나중에 최초의 예루살렘 교회로 탄생되게 되었던 것입니다. 다락방 주인이 예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였더니 더 큰 은혜와 복이 임하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오늘 우리들은 예수님이 언제든지 필요로 하여 나를 찾으실 때 아낌없이 나의 지닌 것을 내어 드릴 수가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미리 드릴 수 있도록 준비할 필요가 있습니다. 많은 것을 귀한 것을 준비하여야 되는 것이 아니라 내게 있는 것으로 드릴 마음의 자세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가난한 집의 어린 나귀는 가난한 집의 입장에서는 아주 가장 값진 것이었습니다. 여기 다락방의 주인 역시 제사장들과 유대 지도자들이 예수를 잡아죽이려고 노리고 있는 입장에서 본다면 어쩌면 자기 목숨을 내어놓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주님께 나의 가진 것을 드리는 자세가 바로 이래야 합니다. 나의 목숨까지도 주님께 드린다는 각오로 모든 것을 드리고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 중 귀하지 않은 것이 있겠습니까? 그것을 주님이 필요로 하신다고 할 때 선뜻 내어놓을 수 있는 것이 바로 섬김의 믿음이요 순종의 믿음입니다.

주님께서 필요로 하신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단지 교회가 필요로 한다는 뜻입니까? 아닙니다. 이는 곧 주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지극히 작은 자 하나를 돕는 것이 곧 주님의 필요를 채우는 것이요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더욱 생명을 건져 구원하기 위해서 우리가 드리는 시간과 열심과 그리고 우리의 재물은 주님께서 이 세상 그 어느 것보다 더 귀하게 받으신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그렇다면 그 도움의 손길 역시 기쁨으로 주고받을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왜 우리가 참된 사랑의 실천자가 되어야 합니까? 바로 그런 섬김의 모습을 통해 세상 사람들이 주님의 사랑을 깨닫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쁨으로 섬기며 이웃을 위해 도움의 손길을 펼칠 수 있어야 합니다. 이웃이 나의 도움을 필요로 할 때 기쁨으로 도와야 된다는 말입니다. 그 필요한 도움은 단지 물질만이 아닙니다. 때로는 위로가 필요하고 때로는 격려가 필요하고 때로는 다정스런 눈길이 필요하기도 합니다. 어떤 때는 너무 지나치면 안 된다는 말도 합니다. 하지만 사랑에 있어서 지나침은 없습니다. 우리가 그것을 부담스럽게 생각하는 것은 내가 그에 대해 무언가 보답을 해야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나도 받은 만큼 주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기억하십시오. 참다운 보답이란 다른 것이 아닙니다. 내가 받은 것처럼 다른 사람에게 베풀면 됩니다. 나도 따뜻한 사랑과 격려의 말로 힘을 얻었다면 나 역시 지쳐있는 사람들에게 따뜻한 사랑과 격려의 말을 전해주면 됩니다. 내가 물질로 아쉽다면 먼저 필요한 사람에게 나눠주도록 해 보십시오. 그러면 놀랍도록 하나님께서 채워주십니다. 그 손길과 방법은 사람에 따라 여러 가지 다른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그 방법이야 서로 다르다고 하더라도 나중에 결과적으로 보면 "아하 이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하셨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되더란 말입니다. 그리고 흩어 구제하면서 그만큼 내가 부족해진 것 같았는데 나중에 보니까 더 풍성하게 누리고 있는 것을 깨닫게 되더란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말 한 마디를 하더라도 힘이 되고 용기를 줄 수 있고 마음에 주님의 참 사랑을 깨닫게 만들어주는 그런 말을 해야 하고 주님이 역사하시도록 도울 수 있는 그런 말을 해야 하는 것이요 그 모든 격려와 모둠을 또한 기쁨으로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시편 45편 2절에서 우리가 본 바와 같이 우리가 은혜를 입술에 머금게 될 때 하나님께서 영원히 복을 더하시리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말 한 마디를 하더라도 상대방이 힘을 얻을 수 있도록 그렇게 말을 해야 하고 상대방을 격려하고 위로할 수 있는 그런 말을 해야 하는 것이요 작은 일에도 칭찬을 아끼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말이 입에 달린 말이 아닌 우리 마음 중심으로부터 드려지게 될 때 그 말이 아름다운 열매를 맺게 되고 놀라운 주님의 열심을 불러온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을 나누고 서로 돕고 협력하는 귀한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도 더욱 우리의 입술의 말이 주님을 찬양하며 감사하는 말이 되어야 하고 서로를 붙들어주며 세워주는 말을 하도록 더욱 힘써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기쁨으로 도움의 손길을 내밀고 이를 또한 부담없이 받아들이되 내가 갚을 길이 없으니 주님께서 갚으시도록 주님 앞에 간구하며 축복할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제 사랑의 실천에 부담을 갖는 우리가 아니라 작은 것으로부터 시작해서 큰 것 같지도 함께 나누되 더욱 사랑의 말, 다정스러운 말, 위로와 격려와 칭찬의 말과 축복의 말을 우리의 중심을 다해 나누며 하나님께 영광 돌릴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어짐으로 이 모든 영광 하나님이 받으시고 하나님의 열심이 우리의 모든 삶을 지켜 인도하여 주시는 귀한 삶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준비하십시다. 다시 말해서 항상 도울 수 있는 준비, 주님을 섬길 수 있는 섬김의 자세가 준비되어야 합니다. 마음으로 준비가 된 사람만이 도울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섬김의 자세는 주는 것과 받는 것이 다 함께 포함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도울 수 있는 힘은 이미 주님께서 다 준비하여 주셨습니다. 이를 위해 주님이 임마누엘 하나님으로 우리 가운데 함께 계십니다.

지혜가 부족합니까? 먼저 하나님께 구하십시오. 힘이 약합니까? 내가 약하기에 주님은 더욱 강하게 나를 붙들고 우리를 붙들어 주심에 감사하십시오. 그러기에 나의 약함을 보지 마시고 나의 부족함을 보는 것이 아니라 나와 함께 하시는 주님의 모든 풍요로움을 보십시오. 내가 할 수 없기에 더욱 주님을 의지하십시오. 그리고 이 사랑의 고백을 자꾸 연습하십시오. 다시 말해서 끊임없이 사랑을 고백하도록 하되 나는 받기만 하고 주지 못한다고 생각지 마시고 그래서 받는 것도 부담스럽다고 하지 마시고 그렇기에 더욱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하도록 하십시오. 그리고 모든 불신과 죄악된 일에는 단호하되 사랑으로 감싸는 일에는 앞장서도록 하십시오. 그래서 이런 사랑의 실천, 사랑의 주고받음을 통해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며 생명을 건져 구원하는 디딤돌 된 삶이 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홍 인 것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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