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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은혜로 사는 삶 (마 20: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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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강석공 목사  I  2005년9월18일 설교 
 
  1980년 5월 18일 발생한 미국 워싱톤 주 세인트헬레나 화산 폭발은 지역 생태계를 순식간에 철저히 파괴해 버렸습니다. 워낙 피해 지역이 넓고 그 피해 정도가 심해서 대부분의 학자들은 생태계 회복에 아주 많은 시간이 소요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지역을 순찰하던 직원이 놀라운 현상을 발견했습니다. 황량하기 짝이 없는 그 곳에 양치류를 비롯한 각종 식물들이 무성하게 자라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신기하게 생각한 그 직원은 주위를 두루 살피다가 더욱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식물들이 자라난 땅의 모양이 마치 고라니가 누워 있는 것과 같은 모양을 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화산재에 묻혀 죽은 고라니를 영양분으로 삼아 바로 그 자리에서 각종 식물들이 새 생명을 싹틔운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은 대체로 몸에 배인 습관에 따라서 살아갑니다. 그런데 간혹 평소 습관과는 다르게 사는 사람들을 볼 수 있습니다. 풀을 먹고 살아야 할 고라니가 오히려 자기를 식물들에게 영양분으로 제공하지 않았습니까? 물론 의식적으로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 그로 말미암아 죽음의 현장에 새 생명이 싹트게 되었습니다.

  주님은 제자들이 세상에서 그와 같은 삶, 즉 죽은 고라니와 같은 삶을 살기 원하셨습니다. 범죄하고 타락한 인간이 평소 습관대로 살면 과연 어떻게 되겠습니까? 결국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망할 수밖에 없다는 말입니다. 때문에 주님은 제자들이 죄와 사망이 지배하는 이 세상에 새 생명을 싹트게 하는 삶을 살기 원하셨습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새로운 삶을 통해서... 바로 그 목적을 이루시기 위해서 주님이 제자들을 부르셨습니다.

  목적이 이끄는 삶의 저자인 릭 워렌 목사가 말하고 있는 것처럼 인간은 결코 우연의 산물이 아닙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지으심을 받았습니다. 모든 발명품에는 발명자의 목적이 분명히 있는 것처럼 인간도 창조주 하나님의 뜻인 존재 목적이 분명히 있습니다. 때문에 인간과 인간의 삶을 볼 때 하나님의 눈으로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인간의 제한적인 지식이나 경험을 근거로 보고 판단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준으로 보고 판단할 필요가 있다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마태복음 19장 30절 말씀을 좀 더 자세히 설명하시려고 주님이 하신 비유의 말씀입니다.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마 19:30) 한 부자 청년이 주님에게 나아와 영생을 얻을 방법을 물었습니다. 그러자 주님은 그 청년에게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 준 후 주님을 따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씀을 들은 그 청년은 슬그머니 사라져 버렸습니다. 성경은 그 청년이 재물이 많기 때문에 주님의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갔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영생을 얻기 위해서 재물을 포기할 수 없었다는 말이요 결국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그 때 그 모든 상황을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베드로가 주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 모든 것을 포기한 자신들은 과연 무엇을 보상받게 될 것인가 주님에게 물었습니다. 바로 그 물음에 대한 답변으로 주어진 것이 포도원 품꾼의 비유로 알려진 본문 말씀입니다.

  천국은 마치 품꾼을 얻어 포도원에 들여보내려고 이른 아침에 나간 집 주인과 같다는 말씀으로 비유는 시작됩니다. 그는 인력 시장에 나가 일할 곳을 찾고 있는 사람들을 불러다가 자신의 포도원에 가서 일하도록 했습니다. 정오에도, 오후 세 시에도 여전히 일할 곳을 찾지 못해서 서성거리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도 또한 자신의 포도원에 가서 일하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오후 다섯 시에도 초췌한 모습으로 종일토록 일할 곳을 찾지 못해서 애태우고 있는 사람들을 발견했습니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지만 그들도 가서 일하도록 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품삯을 지급하는 시간에 일어났습니다. 늦게 온 사람들부터 품삯을 주는데 모두 같은 품삯을 지급하는 것이었습니다. 먼저 온 사람들로서는 불평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어떻게 하루 종일 일한 사람과 고작 한 시간 일한 사람을 똑같이 취급합니까? 그러나 주인은 개의치 않고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뭘 잘못했는가? 약속대로 정확하게 한 데나리온을 주지 않았는가? 내 것을 가지고 내 맘대로 하지도 못하는가?”

  오직 은혜로 용서받았고 또 구원받았는데 뭘 더 달라고 하는 것입니까? 주님은 이 말씀을 통해서 천국의 일꾼은 오직 은혜로 사는 존재라는 사실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천국의 일꾼은 남과 비교하려는 생각을 가진 사람이 아닙니다. 또한 자신의 공로를 내세우려는 생각을 가진 사람도 아닙니다. 뭘 좀 얻으려는 생각으로 사는 사람이 아니라 다만 받은 바 은혜에 감격하여 사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은혜는 얼만큼 많이 일했는가 하는 것에 따라서 결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은혜는 말 그대로 선물입니다. 천국의 일꾼에게 필요한 것은 은혜에 대한 감격뿐이라는 사실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필립 얀시는 이 세상을 가리켜서 “은혜 없는 세상”이라고 말하면서 오늘 크리스챤들에게 진짜로 필요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은혜로 치료된 눈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오늘 많은 교회들이 또 다시 율법주의에 사로잡히고 있습니다. 받은 바 은혜에 감격하기보다는 무엇을 얼마나 했는가 하는 것에 더 관심을 갖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분명히 기억해야 할 것은 천국의 일꾼은 꼭 무엇을 얻기 위해서 계약에 따라서 일하는 사람이 아니고 다만 일꾼으로 불러 주신 주님의 은혜에 감격해서 기쁘고 즐겁게 일하는 사람이라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래도 포도원 주인이 품삯을 주는 방법은 가진 자의 횡포처럼 느껴집니다. 경제 원칙에도 어긋나는 것 같고 노동자들의 권익 보호 차원에서도 그런 방법은 지탄을 받아 마땅한 것 같습니다. 물론 경제 논리로 보면 많은 모순점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어떻게 한 시간 일한 사람과 열두 시간 일한 사람을 똑같이 취급할 수 있습니까? 그러나 품꾼들에게 불공평한 대가를 지급하는 것을 주님의 방식으로 착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은 이 세상에 은혜를 주시려고 오셨습니다. 이 세상을 은혜로 고치시고 살리시려고 오셨습니다. 다른 어떤 조건도 없습니다. 다만 주님의 크고 놀라운 은혜를 거저 주시려고 오셨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제자들을 불러 세우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제자들이 아직 그 은혜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과의 관계도 계약 관계로 생각했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위해서 무엇을 하고 또 내가 하나님께 얼만큼 충성하면 하나님께서도 그에 따른 무엇인가를 해 주실 것이라는 생각이 그들의 생각을 지배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 제자들을 깨우쳐 주시려고 이 말씀을 들려 주신 것입니다.

  주님은 먼저 제자들에게 부르심을 받은 것에 대해서 감격하라고 말씀하십니다. 포도원 일꾼들에게 먼저 요구되는 것은 일할 곳이 없었던 그들에게 일할 곳이 생겼다는 사실에 감격하는 마음입니다. 그런 감격이 있을 때 비로소 일하는 것이 기쁨이 될 수 있습니다. 일하게 해 주신 것이 은혜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일하도록 부르심을 받은 것에 대해서 감격해야 바른 일꾼으로 설 수 있습니다. 오후 다섯 시에 온 일꾼은 비록 한 시간밖에 일할 시간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불러 주셨습니다. 그리고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않았지만 하루치 품삯을 주셨습니다. 어떻게 감격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주님은 또한 제자들에게 받은 바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일하라고 말씀하십니다. 포도원에서 일한 일꾼들은 대체로 두 부류의 사람들로 나눌 수 있습니다. 받은 바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일한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단순히 계약으로 생각하여 일하고 더 달라고 불평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주님이 이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서 보내시려는 사람은 은혜에 감사하는 사람입니다.

  “Amazing Grace”라는 찬양은 노예 상인이었던 존 뉴턴이 쓴 것입니다. 폭풍 때문에 물에 빠져 죽을 뻔한 그는 비로소 하나님을 찾게 되었습니다. 그 후 그는 노예 상인이라는 직업을 버리고 목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노예 제도 폐지를 위해서 싸웠습니다. 존 뉴턴은 자신이 빠졌던 그 깊은 수렁을 결코 잊을 수 없었기 때문에 그 주님의 은혜에 감사하여 이렇게 찬양했던 것입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와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우리가 사는 것은 오직 주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사는 것입니다. 또한 장차 저 천국에 가서 해 같이 빛나게 살 소망을 갖게 된 것도 오직 주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우리는 더 이상 어두움의 자식들이 아닙니다. 죄가 더 이상 우리를 지배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이제 우리에게 남은 것은 받은 바 주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은혜의 소식을 널리 전하는 것뿐입니다. 주님의 은혜에 감격하여 늘 감사하는 마음으로 그 주님을 널리 전하고 증거하기로 결단하는 여러분 모두의 삶의 현장에 주님이 주시는 참된 기쁨이 넘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강 석 공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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