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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추석] 본향을 향하는 순례자 (창 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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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기도>
만물이 무르 익어가는 좋은 계절을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이 결실의 계절에 우리 또한 예수님의 귀한 삶을 본받아
열매 맺는 삶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오늘 고향에서 가족과 함께 명절을 보내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고향에 갈 수 없는 이, 가지 못한 이들의 안타까운 마음을 헤아려 주시옵소서.
오늘이 주일 범하는 날이 되거나 죄와 타협하는 날이 되지 않게 하시옵소서.
지금 이 자리에 참석하여 주님께 감사의 예배를 드리는
모든 성도들과 함께 하시고 이 예배를 받아 주시옵소서.
이 좋은 때 가정을 떠나 멀리 외국에 나간 이, 군대 나간 이
객지에 나간 이, 병상에 누운 이들을 기억하여 주시옵소서.
저들 외롭지 않게 도우시고 우리가 받는 은혜를 하께 누리도록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부족한 종이 말씀을 증거하려고 합니다.
성령님의 인도하심으로 붙잡아 주셔서
아버지의 마음을 드러내는 시간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듣는 자와 전하는 자 모두가 신앙의 결단을 새롭게 하는 시간 되도록
은혜 위의 은혜를 베풀어 주시기를 원하오며
예수님 거룩하신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할렐루야!
오늘이 "추석"입니다.
좋은 명절의 때에 여행을 가신 분도 계시고 여행을 오신 분도 계실 것입니다.
오늘 복된 예배의 자리에 있는 분들에게 감사 드리고
큰 은혜와 축복이 넘치시기를 축원합니다.
옆의 분과 "좋은 명절 되시기 바랍니다"라고 인사하시기 바랍니다.
 
요즘에는 고향이 어디냐고 묻는 것이 실례입니다.
취업을 하려고 할 때 쓰는 이력서에 고향이나
본적, 출신학교, 학력등을 기록하지 않습니다.
그 사람의 현재의 모습만으로 평가합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고향을 좋아합니다.
해마다 명절이 되면 고향을 찾는 수많은 사람들로
나라 전체가 들썩이고 고속도로가 막힙니다.
 
무엇이 사람들을 그렇게도 고향으로 돌아가게 만드는 것일까요?
[고향]은 "제가 나서 자라난 곳"이라고 말합니다.
나서 자란 곳이 아닐지라도, 조상이 오래 누려 살던 곳을 고향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고향은 생각만 해도 편안함이 느껴지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고향을 찾는 것은 뿌리를 찾는 것이며, 잊었던 평안을 되찾는 것과 같습니다.
 
사람들이 고향을 찾아가는 이 계절에 우리가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하나님을 믿는 우리들은 진정으로 사모해야 하고
꼭 가야하는 고향이 어디인가 하는 것입니다.
명절 때 고향으로 돌아가는 사람을 귀성객이라 부릅니다. 
귀성객(歸省客)은 한자말로 손님으로 돌아와 살피다 가는 사람
"돌아올 귀",  "살필 성", "손님 객" 이라는 말들의 합성어로
"객지에서 부모를 뵈러 고향에 돌아오는 사람"을 뜻합니다.
그러나 "손님 객" 자가 지칭하는 것처럼 귀성객은 고향에 돌아가도 손님으로서이지
결코 평생토록 안주하기 위함이 아닌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본향을 향해 가는 순례자
 
우리 또한 이 땅에서 손님과 같은 존재입니다.
영양제를 먹고, 머리에 염색을 하고, 주름을 펴도…
100년 후에는 이 땅에 안계실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 모두는 다 시한부 인생입니다.
"100년 안남았습니다."라고 옆의 분에게 가르쳐 주시기 바랍니다.
우리들 다 이땅에 잠시 왔다 가는 존재입니다.
우리는 영원히 이 땅에 발붙이고 살 사람이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를 나그네와 같은 존재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믿는 우리들을 표현할 때는
세상 사람들과 다르게 "객"이 아닌 "순례자"라고 합니다.
"순례자"(巡禮者)는 '믿음의 도를 쫓아 순회하는 사람'을 뜻합니다.
 
우리는 단순한 순례자가 아니라 "본향을 향해 가는 순례자"입니다.
즉 "믿음의 바탕, 뿌리, 근본"을 향하여, 저 높은 곳을 향하여 가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럼 우리가 하는 순례의 끝인 본향은 어디입니까?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처음으로 순례의 길에 나섰던
아브라함의 이야기 속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모든 믿는 자들의 "조상", "믿음의 조상"이라는 칭호를 듣습니다.
그의 순례의 삶은 전 세계 모든 믿는 자들이 본받아야 할
믿음의 본보기임을 나타내는 칭호가 "믿음의 조상"입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의 순례의 길은 우리도 본받아 따라가야 할 길입니다.
 
아브라함은 75세에 하나님께로부터 새로운 삶의 길로 부름을 받습니다.
그 부름은 지금까지 살아왔던 모든 삶의 길을 뒤로하고
새로운 장소, 새로운 삶의 터전을 향하여 출발하라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실행하기 힘든 명령을 내리십니다.
"떠나라", "가라" 라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명령은 참으로 황당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기 위해서는
"본토", "친척", "아비의 집"을 떠나야 했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사람을 지칭할 때 가장 기본적으로 하는 말입니다.
"그 사람 어디 사람이야? 고향이 어디야? 어느 집안 자식이야"라는 뜻입니다.
그 가장 기본적인 것을 끊고 떠나라는 것이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그리고 수많은 약속을 주십니다.
네가 내 명령대로 하면,
-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 복을 주어 이름을 창대케 하고,
- 복의 근원이 되게 하며,
-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통해 복을 얻을 것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이 약속들이 아브라함에게 하나가 꼭 있어야 이루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아브라함이 75세가 되도록 없었던 "자식, 아들"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자식이 있어야 큰 민족을 이루고, 이름이 창대케 되며,
복의 근원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창세기 11장 30절에 보면
"사래는 잉태하지 못하므로 자식이 없었더라"며
아브라함 부부의 자식 없음이 분명하게 밝혀져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아브라함은 하나님께로부터 백지수표 같은 약속을 부여받았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자신의 모든 근본을 끊고 출발하느냐 아니냐는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믿느냐 아니냐에 달려 있습니다.
 
사실 하나님의 명령은 인간적으로는 말도 안되는 명령이며,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되는 약속입니다.
아브라함이 지금까지 75세의 삶을 살아오면서 관계를 맺었던 사람들이 있습니다.
수많은 경험이 있고, 터전이 있고… 어느 정도 안정된 그의 삶을
다 포기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충분히 갈등하고 고민할 수 있는 사항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의 반응은 지극히 단순합니다.
4절에 보면 단 한 마디로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좇아갔고" 라고 기록합니다.(창12:4)
이것이 아브라함의 믿음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지금 들은 말씀대로… 이루어질 것을 믿고 출발하는 믿음입니다.
모든 믿음의 순례자의 길은 사실 이렇게 출발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순례자의 길이 믿음의 길이 쉽지 않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뿌리를 자르라고 명령하십니다.
삶의 뿌리, 인생의 뿌리를 자르면 하나님께서 뿌리가 되어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믿음으로 자신의 뿌리를 자른 사람은 하나님께서 뿌리가 되어 주십니다.
하나님께 자신의 뿌리를 내린 사람은 시냇가에 심은 나무와 같이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않으며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게 하십니다.(시1:2~3)
 
아브라함은 자신의 뿌리를 자르므로,
다시 말해 지금까지 자신과 연결된 삶의 모든 것을 다 자르므로
믿음의 순례를 시작합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에 들어갔을 때
그 땅은 비어있는, 비옥하여, 마음대로 살 수 있는 땅이 아니었습니다.
창세기 12장 6절에 보면
  "아브람이 그 땅을 통과하여 세겜 땅 모레 상수리나무에 이르니
  그 때에 가나안 사람이 그 땅에 거하였더라”(창 12:6)  했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땅으로 갔는데
그 땅은 이미 다른 사람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다른 사람들이 잘 살고 있는 데 아브라함이 자기 가족들과 가축을 데리고 가서
터를 잡으려 하면 그 동네 사람들이 가만히 있겠습니까.
그것은 싸움날 일이고, 전쟁이 날 만한 일입니다.
아브라함의 가족들 뿐이 아닙니다.
창세기에 보면 아브라함의 조카 롯과 아브라함을 따르는 사람들,
모은 재산, 당시의 재산은 대부분 가축들이었습니다.
그러면 가축을 기르는 하인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을 데리고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땅으로 갔는데
거기엔 이미 다른 사람들이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아브라함의 삶이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그 땅에 들어가서 아브라함이 한 일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 예배하는 장소를 만들었습니다.
여호와를 위한 제단을 쌓았습니다.
아브라함은 약속의 땅에 세 개의 단을 쌓았습니다.
아래의 지도를 보면 <우르>라는 곳이 있습니다. 우르는 지금의 쿠웨이트를 말합니다.
우르는 유프라테스 강과 티그리스 강이 만나는 지역으로
메소포타미아 문명이 발달했던 곳입니다.
이 우르지역에서 발굴되는 유물을 보면 지금도 그대로 사용할 수 있는
수세식화장실을 아브라함 때도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그 옛날 문명시대에 살고 있던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이 떠나라고 명령하셔서
지금의 바벨론쪽으로 떠나는데 지금의 이라크와 이란 사이를 거쳐
시리아까지 북쪽으로 올라갔다가 내려와서
갈릴리 호수 북쪽(세겜 땅)에 제단을 쌓고(창12:7)
그리고 벧엘과 아이 사이에(12:8), 마지막으로 헤브론에(창 13:18)… 쌓았습니다.
 
이 세 제단의 위치를 살펴보면 아브라함의 의도를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의 믿음 또한 분명히 느낄 수 있습니다.
세겜은 북쪽의 중요한 지역이며, 벧엘과 아이 사이는 남쪽과 북쪽의 경계지역이며,
헤브론은 남쪽의 대표적인 지역입니다.
 
아브라함은 약속의 땅의 북쪽, 중심, 그리고 남쪽에
각각 한 개씩의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이 땅은 여호와의 땅이라"고 선포하였습니다.
"비록 너희들이 오랜 세월 살아온 땅이지만,
이제 이 땅은 하나님 여호와의 땅"이라고 선언하며 예배를 드렸습니다.
 
하나님 말씀에 순종 잘하며 하나님 마음에 합하게 살았던 아브라함이지만
단 한 번의 흔들림도 없이 하나님 마음에 쏙 들게 살지는 않았습니다.
약속의 땅에 가뭄이 들었을 때 하나님의 약속을 잊고
이집트 땅으로 내려가는 실수를 범했고, 자기의 아내가 너무 예뻐서 이집트왕 바로가
자기 아내를 탐내서 자기를 죽일까봐 아내 사라를 누이라 속이고
이집트왕 바로에게 넘기는 오류를 범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75세에 아브라함에게 후손을 주시겠다고 하셨는데
순례의 여정 10여년 동안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후손 아들이 없자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기다리지 못하고 사라의 말을 따라 85세의 나이에 첩을 취하고
자신의 힘으로 아들 '이스마엘'을 낳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의 이러한 실패를 통해 하나님이 주신 약속은
인간이 아닌 하나님께서 이루신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마침내 아브라함이 모든 것을 포기하고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겼을 때,
아브라함이 100세가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약속을 이루실 아들 "이삭"을 주셨습니다.
 
 
흔들리지 않는 아브라함의 믿음
 
아브라함은 75세에 약속받은 아들을 100세에 얻었습니다.
그러니 그 아들이 얼마나 예쁘고 귀했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 다시 또 나타나셔서
아브라함에게 청천벽력 같은 명령을 내리셨습니다.
또 "가라" 라는 것입니다.
 
이 두 번째의 "가라" 또한 결코 쉽지 않은 명령이었습니다.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창22:2) 는 것입니다.
 
아들이 없이는 하나도 이루어 질 것이 없는 약속들을 주시고
100세가 되어서 우여곡절 끝에 겨우 얻은 약속의 씨,
'이삭'을 하나님께서 달라시는 것입니다. 죽여 제물이 되게 하라는 것입니다.
이성적인 판단으로 말도 안되는 소리입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으로 인해 미래의 희망을 꿈꾸며 살았는데…
하나밖에 없는 가지, 하나밖에 없는 장래의 희망, 이삭을…
말도 안됩니다. 어떡합니까?"라고 항변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신기하게도 단 한 마디의 말도 하지 않고
하나님의 명령을 실행합니다.
 
성경은 아브라함이 평상시 보다 더 일찍 일어났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창세기 22장 3절은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사환과
  그 아들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가지고 떠나
  하나님의 자기에게 지시하는 곳으로 가더니" (창 22:3)  라고 했습니다.
 
소풍을 가는 것도 아니고 자식을 바쳐야 하는 길인데도 아침 일찍 떠났습니다.
아브라함은 사흘 길을 걸어가야만 하는 모리아 산까지 가야 했습니다.
사람이 어떤 결심을 하고 그 결심을 3일정도는 지킨다고 합니다.
3일이 지나면 결심대로 잘 지키지 않는 경우를 많이 봅니다.
그래서 '작심삼일'이란 말이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결심하고 순종하기로 하고 가다가도 마음 변할 수 있는 삼일 길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아브라함은 흔들리지 않는 믿음으로 순종했습니다.
아무리 하나님의 명령이라 해도 그게 어떻게 가능합니까?
히브리서 11장에 그 답이 나와 있습니다.
히브리서 11장 17절~19절에 보면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저는 약속을 받은 자로되 그 독생자를 드렸느니라" (히11:17)
  "저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히11:18)
  "저가 하나님이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 (히11:19)
 
19절을 새로 번역된 [쉬운성경]으로 보면 이렇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죽은 사람도 살려 주신다는 것을 믿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다시 받은 것입니다."(히11:19)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 지 분명히 믿었습니다.
비록 이삭을 죽일지라도 다시 살려주실 것을 믿었습니다.
 
이렇게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비록 이삭을 죽일지라도
다시 살려주실 것을 믿었기 때문에 "믿음의 조상"이 된 것입니다.
여러분도 이런 믿음을 소유하시기 바랍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의 바탕이요 뿌리인 본토, 친척, 아비의 집도 끊고 떠나면
하나님께서 약속해 주신 대로 이루어 주실 것을 믿었고,
100살에 주신 자식도 하나님의 명령대로 행하면
결국은 하나님께서 죽여도 살려 주실 것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이끄시는 곳이 어디이든지, 어떤 일이든지…
그대로 하면 하나님께서 결국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주실 것을 믿었습니다.
 
오늘 예배가 끝나고 고향을 찾아 가거나 고향에서 오신 분들 모두
여러분이 여러분의 가정에 믿음의 조상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브라함이 아브라함의 가정에 믿음의 조상이 되었던 것처럼,
이스라엘 민족의 믿음이 조상이 되었던 것처럼,
전 세계의 모든 믿는 사람들의 믿음의 조상이 되었던 것처럼…
여러분들이 모두 가정에서 믿음의 조상이 되시기 바랍니다.
 
<추석 명절>은 태어난 곳, 자란 곳, 고향을 향하는 날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이 고향 가는 사람, 저 높은 곳을 향하여 순례하는 사람인 것을
다른 사람들이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이 시골에 가도 도시에서 온 사람들인 것을 시골 사람들이 압니다.
다른 나라에 가도 여러분이 관광하러 온 사람인지
거기에 사는 사람인지 그 동네 사람들은 다 압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 땅에 영원히 살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는 순례자, 고향에 가는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디에 가든지, 누구를 만나든지…
여러분의 삶이 고향 가는 삶, 본향을 향해 가는 삶인 것을 드러내야 합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품을 향하여 가고 있는 지, 바르게 가고 있는 지 확인해야 합니다.
- 개인적인 삶이 천국 가는 순례자의 삶인지…
- 가정생활이 천국 가는 사람들이 사는 곳 같은 지
- 직장에 다니고 사업을 하면서도
  그 발걸음이 천국 가는 자의 삶으로 빛 되고 소금 된 삶인지…
- 신앙생활하며 교회에서 예배드리는 삶이, 입으로 하는 말이
  손으로 하는 일이 순례자의 하는 일인지…
- 친구를 만나고 고향 사람을 만나도 순례자임이 드러나는지…
다른 사람들에게 인정 받아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도 알 수 있어야 합니다.
 
세상엔 우리의 순례의 길을 방해하는 일이 많습니다. 사람도 많습니다.
사탄은 우리의 순례의 길이 평탄하게 두지 않습니다.
우리의 개인적인 믿음을 잡아 흔듭니다.
사탄은 여러분의 가정이 화목한 것을 원치 않습니다.
부부간에 화목한 것, 형제간에 우애있는 것을 가만히 두지 않습니다.
부부간에 다툼이 생기고 싸움이 생기면 사탄이 흔드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사탄은 여러분의 일터를 흔듭니다.
여러분의 사업이 잘 되는 것, 일터가 안정된 것도 가만히 두고 보지 못합니다.
사탄은 교회의 평안도 가만히 두지 못합니다. 그래서 잡아 흔들고 소근거리게 합니다.
집사님, 권사님 끼리 끼리 모여 앉아 소근대는 말은 대부분 좋지 않은 이야기입니다.
좋은 이야기라면 소근댈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 것이 다 교회의 평안을 깨는 것입니다.
마귀들의 이용거리가 되고 있는 것입니다.
사탄은 평안한 것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흔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라"고 했습니다(고전15:58).
흔드는 존재가 있으니까 견고해서 흔들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믿음이 흔들리지 않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가정의 화목이 흔들리지 않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일터의 안정이 흔들리지 않기를 바랍니다.
기둥교회의 평안함이 흔들리지 않기를 바랍니다.
진정한 믿음의 본향인 하나님의 품을 향하여,
저 높은 하나님의 나라를 향하여…
아브라함의 믿음을 본받아서 가십시다.
한없이 한없이 끝없이 가는 것 같아도 종착점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여러분의 순례의 발걸음이 승리의 발걸음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축원합니다.
 
<기도>
전능하신 하나님, 은혜와 사랑을 감사합니다.
우리의 믿음을 흔들고, 화목을 흔들고, 안정을 흔들고, 평안을 흔드는
사탄의 흔듬에 흔들리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 않도록 도와 주시옵소서.
땀흘려 애써 모은 물질을 하나님께 드리려고 합니다.
저들의 정성을 받아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2005년  9월 18일 주일낮설교, 고 신일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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