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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겨자씨와 누룩 (마 13:3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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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자씨 비유와 누룩의 비유들은 씨 뿌리는 자의 비유나 가라지의 비유와 함께 ‘하나님 나라의 성장’을 말하고 있습니다. 씨 부리는 자의 비유는 많은 사람들의 거절 속에서도 옥토와 같은 사람들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가 성장하는 측면을 말했다면, 가라지 비유는 사단의 훼방 속에서도 하나님의 나라가 성장하는 측면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겨자씨 비유는 하나님 나라의 외적인 성장을, 누룩 비유는 하나님 나라의 외적인 성장을 말하고 있습니다.

“또 비유를 베풀어 가라사대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이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나물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느니라”(31-32) 예수님께서는 천국, 곧 하나님의 통치를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의 상황에 비유하셨습니다. 겨자씨를 직접 보지 못한 분들도 겨자는 맛보셨을 것입니다. 냉면이나 생선회를 먹을 때 코를 콕 찌르는 매콤한 맛의 향신료인 겨자가 겨자씨를 갈아서 만든 것입니다.

겨자씨는 볼펜으로 점을 찍어둔 것만큼이나 크기가 작습니다. 그러나 문자적으로 세상에서 가장 작은 씨는 아닙니다. 가끔 비유를 통해서 ‘겨자씨’가 세상에서 가장 작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사람들이 ‘난(蘭)의 씨’가 더 작다는 것을 알게 되면 당황합니다. 성경이 자연과학적 지식을 주려는 목적으로 써지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접근하다가 오류에 빠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비유는 식물학적 지식을 제공하기 위한 목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아마도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접하는 씨앗들 중에 가장 작은 것이 겨자씨였겠지요. 당시의 랍비들도 겨자씨를 아주 작은 것을 지칭하기 위해 위한 격언으로 사용하곤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당시 사람들의 일상적인 관념을 사용하셔서 천국의 비밀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비유에서 몇 가지 더 이상한 점이 있습니다. 농사지으면서 겨우 겨자씨 한 알만 달랑 밭에 심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비유에서는 사람은 “겨자씨 한 알”만 심었습니다. 또 엄밀히 따지자면 겨자는 나무가 아니라 쌍떡잎식물로서 일년생 혹은 이년생 풀입니다. 다 자라면 1-2m 정도 되고, 팔레스틴 지역에서는 3-4.5m 정도로 자라기도 하지만 여전히 나물이지 나무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말하자면 예수님께서는 과장하여 비유하셨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일상적인 풍경을 비유로 드시면서도 전혀 일상적이지 않는 과장 속에 비유의 의도가 담겨 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과장하신 부분에 주목할 때 비유의 목적을 보다 명확하게 알 수 있습니다. 이 비유의 요점은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의 작은 시작과 엄청나게 성장한 결과를 대조하는데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 곧 하나님의 통치는 한줌의 겨자씨도 아닌, 겨우 “한 알”의 겨자씨처럼 시작합니다. 땅에 떨어지면 눈에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미미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한 알의 씨는 점점 자랍니다. 마침내 새가 깃들일 ‘나무’ 같을 정도까지 됩니다. 구약에서 ‘나무’는 주로 큰 제국을 지칭할 때 사용되었고, ‘새들’은 열방을 지칭하는 랍비들의 관용어였습니다. 아마도 예수님께서는 겨자를 ‘나무’라고 지칭하심으로서 하나님 나라를 거대한 제국같이 묘사하시고 나중에는 세계 열방이 그 나라의 영향권에 포함될 것임을 암시 하신 것 같습니다. 그만큼 하나님의 통치는 시작과 결말에서 두드러진 차이가 있다는 것입니다.

유대 변방에서 예수님께서 복음역사를 시작하셨을 때, 그것은 마치 겨자씨 한 알과 같았습니다.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자라가는 과정이 순탄하지도 않았습니다. 싹이 피기도 전에 밟아 버리려는 유대 지대자들의 끈질긴 저항과 로마 황제들의 극심한 박해가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세기가 채 끝나기도 전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로마 제국의 심장부에 전해졌고, 392년 데오도시우스 황제 때에는 로마의 국교로 선포되었습니다. 지금은 옛 로마 지경을 넘어서서 온 세계 열방이 하나님의 통치에 깃들이고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반드시 성장합니다. 아무리 미약하게 시작했어도 필연적으로 자라서 마침내 시작과는 비교할 수 없는 정도로 창대해집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백성이 항상 가져야 Vision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비록 그 시작이 미약하였을지라도 반드시 창대하게 완성될 하나님 나라를 믿고 소망해야 할 것입니다. 동시에 그 믿음과 소망 가운데서 현재는 미약해 보이는 그 나라를 사랑해야 할 것입니다. 크게 자란 겨자 나무의 시작이 아주 작은 한 알의 씨앗이었기 때문입니다.

루터는 로마서를 연구하던 중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1:17)는 말씀을 통해 하나님에 대해 떨칠 수 없었던 공포 대신 거듭난 것 같은 느낌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한 사람의 내면에 일어난 작은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일이 결과적으로는 종교개혁이라는 위대한 일을 가져오게 했습니다. 교회사에서 유명한 루터의 ‘탑의 경험’ 이야기입니다. 루터가 탑에서 복음의 진리를 깨닫는 그 순간이 하나님 통치의 시작이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로마서 1장 1절을 읽을 때도, 그리고 그 이전에 시편을 연구하고 있을 때도 하나님의 통치는 이미 시작되었다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할 것입니다. 만약 그러한 시작과 과정이 없었다면, 로마서 1:17절의 깨달음도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이 자리에 앉아서 주님의 말씀을 듣고 있는 일은 아주 작은 일입니다. 때로는 말씀을 통해 깨달음을 얻기도 하지만 그렇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미약한 시작과 과정이 결국에는 엄청난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몇 사람이 지하실에 모여서 예배를 드리는 것은 어떤 면에서 초라해 보일지라도, 그것은 하나님의 통치이기 때문에 결코 무시되어서는 안 됩니다. 저는 우리 중에서 혹은 우리의 후손 중에서 루터와 같은 역할을 할 사람이 분명 있으리라고 믿습니다. 그러한 Vision 속에서 현재의 하나님의 통치를 사모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누룩 비유도 소량의 누룩과 그것이 가져올 결과를 대조합니다. “또 비유로 말씀하시되 천국은 마치 여자가 가루 서 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33) 서 말로 번역된 된 가루의 양은 대략 40리터에 해당합니다. 창세기 18장에서 아브라함이 손님을 맞이하기 위해 사라에게 준비시켰던 분량과 같습니다(창 18:6). 그 양이면 장정 100명분의 빵을 만들 수 있습니다. 가정에서 만들기에는 부담스러울 정도로 많은 양입니다. 하루 한 끼 먹기도 힘들었던 그 시대에, 엄청난 분량은 사람들의 뇌리에 충격을 주었을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상식에서 벗어나는 과장을 통해 소량의 누룩이 끼치게 될 엄청난 영향력을 효과적으로 제시하셨습니다.

이 비유에서도 자연스럽지 않은 점이 있는데, 여자가 누룩을 넣는다고 할 때, 그 단어가 ‘감추어 넣다’는 뜻을 가졌다는 점입니다. 일상생활에서는 누룩을 감추어 넣는 사람은 없습니다. 청중들은 이러한 부자연스러움에 부담을 느끼게 되고 주목하게 되는데, 예수님은 비유의 의도를 바로 이곳에 숨겨두셨습니다. 즉, 하나님 나라는 은밀하게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동시에 은밀하지만 그 영향력은 참으로 엄청나다는 것이 서 말의 가루 “전부”를 부풀게 한다는 표현 속에 담겨 있습니다.

예수님의 초림을 생각해보면 그것은 전혀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막강한 권세나 엄청난 재물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를 성장케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분은 조용히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영향을 미쳤습니다. 한 사람의 내면을 변화시키고 변화된 그를 통해 그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변화시키셨습니다.

당시 열심당원들은 혁명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려고 했습니다. 그들에게는 로마를 뒤집어엎을 수 있는 힘과 권력이 필요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는 그렇게 확장되지 않습니다. 역사는 힘과 권력으로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려고 하는 곳마다 부패했던 것을 보여줍니다. 313년에 콘스탄틴이 밀라노 칙령을 통해 종교의 자유를 선포함으로 기독교 박해가 종식되었습니다. 교회는 빼앗겼던 재산을 돌려받았습니다. 기독교가 국교가 되면서부터는 국가로부터 많은 혜택을 받았습니다. 기독교로 개종한다는 것은 신분 상승과 출세의 수단이 될 수 있었고, 병역에서도 면제될 수 있었습니다. 중세 교황제가 흥왕할 때는 참으로 교회가 힘과 권력을 막강하게 소유했었습니다. 지금도 건축하기 힘든 거대하고 화려한 건물들이 세워졌었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시대에 기독교는 가장 부패했었습니다. 기독교는 영향력을 상실하고, 오히려 온갖 부패의 온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로마제국이 기독교 국가가 되었을 때, 당시의 많은 사람들이 로마 제국을 하나님 나라의 확장 도구로 생각했었습니다. 그러나 로마는 411년 아리안 이단 사상을 가진 고트족에 의해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이처럼 오늘날 중동 전쟁에 대해서도 미국을 하나님 나라 확장의 도구로 해석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저는 그러한 해석들이 건전한 해석이 아니라 16세기 때부터 식민지를 착취할 때마다 사용했던 제국주의적인 해석이라 생각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처럼 힘과 권력을 앞세운 정복을 통해 확장되지 않습니다. 기독교의 영향력은 재력과 힘을 앞세운 왁자지껄한 전도를 통해서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거대하고 화려한 건물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는 것도 아닙니다. 현대 교회의 그러한 모습들은 부패를 향해 달려가고 있던 중세 교회의 모습을 떠올리게 합니다. 당장에는 효과가 있는 것처럼 보일지 몰라도 오히려 기독교의 영향력을 상실하게 하고 부패하게 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누룩이 주변의 반죽 덩이를 변화시키듯 은밀한 영향력을 통해서 확장됩니다. 예수님을 통해 우리의 생각과 말과 행동들이 하나님 백성답게 변하고 가치관과 윤리 기준이 변할 때, 자연스럽게 우리 삶의 주변 사람들에게도 영향을 미치게 됨으로 확장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로 힘과 권력이 아닌 진정한 영향력을 가진 하나님의 백성들이 되게 하시기를 간구합니다. ♥ (최 동 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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