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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환도뼈가 꺽인 인생 (창 32:2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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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받은 성도는 날마다 새로워지고 계속해서 변하는 사람입니다. 그것이 아주 조금씩일 지라도, 또는 너무 적어 눈에 보이지 않을지라도 분명한 사실은 날마다 변해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과거에 붙잡혀 있지 않습니다. ‘왕년에 내가 어쨌는데...’ 그런 말을 할 필요가 없는 사람들입니다. 왜냐하면 아직도 ‘내 생애 가장 좋은 날은 오지 않았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작년에도 분명 좋았습니다. 올해는 훨씬 더 좋아질 것입니다. 오늘도 굉장한 날이었습니다. 그러나 내일은 더 좋은 날이 될 것입니다. 날마다 새롭게, 날마다 더 좋게 변화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변화는 외모나 소유나 지위가 아닙니다. 진정한 변화는 속사람, 존재의 변화입니다.
육체가 쇠하고 나이를 많이 잡수셨다고 ‘이젠 다 틀렸어’ 그래서는 안 됩니다. 성경은 분명히 말합니다. “겉 사람은 날로 후패할지라도 속사람은 날마다 새롭도다.” 이 말씀을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아직도 내 생애 최고의 날은 어제가 아니라 오늘이 아니라 아직 오지 않은 내일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삶은 행복합니다. 세월이 가도 속사람은 자꾸만 좋아지고 나아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침내 이 세상을 떠나는 그 날, 그 날이야말로 내 생애 중 가장 황홀한 순간이 될 것입니다. 승리의 개선가를 부르며 아버지 앞으로 나아가 면류관을 받게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하늘 문을 활짝 여시고 나를 품에 안으시며 영접하실 것입니다. 늘 꿈에서나 바라보며 그토록 가기를 소원했던 아버지의 집, 그 영광의 나라에서 영원히 살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 소망이 있습니까? 자꾸 옛 추억만 회상하며 내 인생에 좋은 날은 다 지나갔다고 체념하며 살아선 안 됩니다. 함께 따라 합시다. “내 생애 가장 좋은 날은 아직 오지 않았다”

21세기의 문제를 스피드(속도)로 푸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속도를 따라 잡지 못하는 개인, 기업, 국가는 도태되고 만다는 것입니다. 신앙의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성도들은 세상과의 속도 싸움에서 이겨야 합니다. 세상이 나쁘게 변하는 속도는 엄청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람들은 세상 속도보다 더 빠르게 변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세상에 끌려가고 맙니다.

여러분은 얼마큼씩 변하고 있습니까? 적어도 내 주변 환경이 나쁘게 변해 가는 속도보다는 주님을 닮아가는 속도가 더 빨라야 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말합니다. “때가 되면 자연히 변 할 거야.” 아닙니다. 변화의 능력은 하나님으로부터 오지만, 변화의 주인공은 나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생각 없이 가만히 있는 사람이 아니라, 변화하려고 애쓰는 사람을 쓰십니다.

우리가 변화되지 않는 첫 번째 이유는 변화를 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에게 물으셨습니다. “내가 네게 무엇 해주기를 원하느냐?” 네가 원하는 것이 동전 한 푼이냐, 아니면 두 눈을 뜨는 것이냐? 소경인 동안에는 남에게 얻어먹긴 해도 일하지 않고 편하게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두 눈을 뜨면 자기 힘으로 일해서 먹고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어떤 삶이 더 가치 있는 삶입니까? 사람들은 변화를 위해 지불해야 할 대가가 무섭고 그 변화가 지금의 안일과 편안을 깰까 두려워하기 때문에 변화를 싫어합니다.

오늘 여기에 머무르려고 하지 마십시오. 구원받은 성도는 날마다 변해야 할 도상위의 존재입니다. 언제나 오늘 지금이 변할 때입니다. 내가 변하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의 때는 오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가 변하는 데에는 두 가지 길이 있습니다. 1. 알아서 스스로 변하는 방법과 2. 하나님이 강제로 손보시는 방법입니다. 대부분은 알아서 변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욕심대로 갈 데까지 가다가 하나님이 손을 대시면 어쩔 수 없이 변화되는 경우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난 야곱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야곱에게 변할 수 있는 기회를 계속 주셨지만 그는 조금도 변화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만큼 야곱은 자기 생각, 자기 방식 하나만을 붙잡고 살았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내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내 힘으로 얻을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얍복강을 건너기까지 40년을 그 방식으로 살면서 그는 자신이 원하는 모든 것을 차지했습니다. 고향에서는 형을 속이고 장자권을 빼앗았고, 외삼촌 집에 가서는 외삼촌 재산을 빼앗습니다. 그는 마침내 엄청난 재물을 모아서 다시 고향 땅 가나안으로 돌아갑니다.

그러나 40년의 세월이 지났지만 정작 사람은 변한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야곱은 고향을 떠나 외삼촌 집을 향해 가는 도중 벧엘에서 하나님을 대면하는 사건을 경험했습니다. 하나님은 그곳에서 그를 축복하셨고 다시 고향으로 돌려보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는 인간적인 조급함으로 하나님의 축복을 기다리지 못하고 자신의 힘과 꾀로 그 약속을 성취하려고 했습니다. 그는 그것이 지름길인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꾀를 의지하다가 오히려 20년을 외삼촌 집에서 종살이해야 했습니다. 하나님은 이 20년 동안 그에게 고난과 시련을 주시며 깨닫게 하셨지만 야곱은 그의 가치관과 인생의 수단을 결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렇게 사는 자기가 옳다고 믿었습니다. 마침내 하나님이 야곱을 손보시기 시작했습니다. 그렇지만 야곱은 그걸 몰랐습니다. 이 싸움은 하나님이 먼저 거신 것이지 절대로 야곱이 먼저 건 싸움이 아니었습니다. 사실 본문을 잘 살펴보면 야곱은 씨름할 생각도 갖지 못했습니다. ‘어떤 사람이’ 먼저 그에게 다가왔고, 씨름도중 야곱의 환도뼈를 치므로 싸움은 깨끗이 끝났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본문에서 야곱이 하나님에게 싸움을 건 것이 아니었음을 분명히 해야 하겠습니다. 이 시간 얍복강에서 야곱의 씨름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변화시키시는 지를 찾아보려고 합니다.

1. 하나님이 야곱을 변화시키기 위해 제일 먼저 하신 일은 혼자 두는 것이었습니다.
밤에 일어나 두 아내와 두 여종과 열한 아들을 인도하여 얍복 나루를 건널 새 그들을 인도하여 시내를 건너가게 하며 그의 소유도 건너가게 하고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22-24절)

하나님은 먼저 야곱이 그때까지 의지하던 모든 것을 다 잘라 내셨습니다. 아내와 자식들도, 그 많은 재물도 다 강을 건너게 한 후 야곱 홀로 있게 하셨습니다. 사람은 홀로 있어야 자기를 봅니다. 그 직책이 자기가 아니고, 소유물이 자기가 아니라는 것을 모든 것을 잃어버린 후 비로소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서 하나님은 우리에게서 모든 것을 분리시키십니다.

또 남과 비교해서는 평생 자기를 볼 수 없습니다. 절대자이신 하나님, 나를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 앞에 설 때에만 나를 제대로 볼 수 있습니다. 명함에 쓸 수 있는 그 모든 직책이 나 자신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내가 뒤 집어 쓰고 있는 가면 뒤의 참 나를 보시는 분이십니다. 너절너절한 가면을 쓰고 사람들은 속일 수 있었을지 몰라도 이제 하나님 앞에서는 벗어 던져야 합니다. 우리가 아무도 없을 때 한일을 하나님은 알고 계십니다.

변화는 자기를 아는 것에서부터 시작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서 가면을 쓰고 속이고 있는 한 변화할 수 없습니다. 남 앞에서 항상 척하며 쓰고 있던 가면을 벗어버리십시오.
“하나님, 이게 바로 내 모습입니다. 평생을 가면을 쓰고 사람들을 속이고 살았습니다. 신앙이 있는 척, 사랑이 있는 척, 예수를 잘 믿는 척, 누구보다도 행복하고 괜찮은 척, 척척하며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어느 하나도 나의 참 모습은 아니었습니다. 자신을 속이고 남을 속여서라도 원하는 것을 가지려 발버둥 치며 살아왔지만 만족은 없었고 이제 더 이상 채워지지도 않습니다. 돌아보니 추수할 것 없는 빈 들판과 같습니다. 이제 이 모든 가면을 벗고 싶습니다.”

가면 뒤의 여러분의 모습이 아무리 흉하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정직한 자의 얼굴을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진실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홀로 있어야 합니다.
야곱의 변화는 홀로 있음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두 번째 단계는 하나님이 싸움을 거시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하다가(24절)

하나님은 인간적인 방식과 세상 식으로 살던 야곱을 하나님의 식으로 살아야 할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들기로 작정하셨습니다. 그렇지 않는 한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약속을 이룰 수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부모가 자식의 억지를 몇 번은 들어주지만 자꾸 계속하면 브레이크를 겁니다. 왜? 가만두면 잘못된 길로 나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깨닫게 하시는 데에도 계속 억지를 부리며 자기 고집대로 나가면 하나님의 브레이크가 있습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내 고집대로 내 욕심만을 위해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여전히 그 방식대로 하는데 안 되더란 말입니다. 반드시 그런 때 가 옵니다. 그럴 때 ‘아, 하나님이 내게 싸움을 걸어오시는 구나’ 생각하십시오.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그런 때가 찾아오는 것은 하나도 이상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나를 바꾸시려는 하나님의 사랑의 간섭이기 때문입니다.

자기 힘으로 무엇이든 다 된다고 믿고, 자기욕심을 채우는 것이 인생의 전부인줄 알았던 야곱의 방식을 겪는 것은 밤이 깊어가고 날이 샐 때까지 계속 되었습니다. 본문에 “날이 새도록” 이라는 말 속에서 이 싸움이 간단히 끝나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 간단히 끝나는 방법은 있었습니다. 무엇일까요? “예, 하나님, 제가 잘못했어요. 제 식을 버리겠습니다.” 그러면 끝나는 거 에요. 그런데 계속 따지고 고집 피우니 밤새도록 싸움이 가는 것입니다.

성도들 가운데는 하나님이 못이기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하나님이 하지 말라는 일을 끝까지 합니다. 이런 사람은 결국 자기 고집 때문에 망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싸움을 걸어오시면 빨리 하나님의 식으로 바꾸십시오. 미련한 자만이 하나님을 대적합니다.

3단계: 하나님이 환도뼈를 껶는 단계입니다.
그 사람이 자기가 야곱을 이기지 못함을 보고 야곱의 환도뼈를 치매 야곱의 환도뼈가 그 사람과 씨름할 때에 위골 되었더라 (25절)

얍복 나루터에서 야곱은 다시는 스스로 일어서지 못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환도뼈는 몸의 중심이며 힘의 원동력입니다. 환도뼈가 부러진 사람은 절대로 못 일어납니다. 야곱은 스스로 자신의 힘이라고 자랑했던 모든 것이 그때 다 부러졌습니다. 그동안 스스로의 힘으로는 겪을 수 없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직접 그의 인간적 능력의 근원인 환도뼈를 겪으셨습니다. 야곱은 이제부터 지팡이를 의지하지 않고는 걸을 수 없는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는 평생 지팡이를 의지하며 사는 인생으로 바뀌었습니다.

여러분이 의지하던 것이 다 무너지고 말았습니까? 염려하지 마십시오. 그 일이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된 것이라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변화시켜서 새 인생을 살게 하시려는 일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내 힘의 근원이 바뀌지 않고는 결코 하나님의 사람으로 쓰임 받을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은 내 환도뼈를 치십니다. 그리고 거짓된 힘이 아닌 참 된 힘 하나님의 능력으로 내 힘의 근원을 바꾸어 주십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힘의 근원으로 삼고 사십니까? 여러분의 환도뼈는 무엇입니까? 여러분이 자랑하는 삶의 힘은 무엇입니까? 돈입니까? 인기입니까? 세상의 성공과 명예입니까? 하나님이 꺾으실 때 그것이 참 힘이 아니었음을 비로소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 깨달음이 너무 늦게, 모든 기회를 다 잃어버린 인생의 황혼에 오지 않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4단계는 야곱이 모든 것을 포기하고 하나님께 결사적으로 매달리는 단계입니다.
야곱의 환도뼈가 부러짐으로 싸움은 하나님의 일방적 승리로 끝이 났습니다. 이제부터는 야곱의 싸움이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종종 얍복강의 야곱처럼 하나님과 결사적으로 씨름하는 것이 기도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적어도 여기서는 아닙니다. 이미 싸움은 끝났고 하나님은 가시려고 하십니다. ‘그 사람이 가로되 나로 가게 하라.’

그 때 야곱이 매달렸습니다. 야곱이 가로되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 (26절) 그러나 그것은 싸움이 아니라 차라리 애원이었습니다. 혼자 힘으로 일어설 수도 없는 사람이 어떻게 맞싸울 수 있겠습니까? 야곱이 할 수 있었던 유일한 행동은 그냥 매달리는 것이었습니다. 죽기 살기로 하나님을 붙잡는 것뿐이었습니다.

물에 빠진 사람이 손을 흔들며 살려 달라고 애타게 부르짖고 있습니다. 구조대가 도착해서 그 사람에게 다가갑니다. “여보시오, 내가 당신을 구하러 갈테니 시키는 대로만 하시오. 허우적대지 말고 힘을 빼시오. 그래야 당신을 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물에 빠진 사람은 긴장해서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안간힘을 다해 구조대원을 붙잡습니다. 그러나 그럴수록 구조대원을 밖으로 밀어내는 것밖에 되지 않습니다.

물에 빠진 사람은 살려는 자신의 노력이 오히려 죽음으로 이끌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상황이 점점 악화되면 구조대원은 최후의 비상수단을 쓰게 됩니다. 물에 빠진 사람에게 타격을 가해서 물속에 푹 담구어 버립니다. 그렇게 해서 물에 빠진 사람이 힘을 잃고 완전히 의지할 상태가 되면 끌고 밖으로 나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만을 완전히 의지하도록 가르치시기 위해 필요하시다면 구조대원처럼 일격을 가하실 수도 있습니다. 물에 죽게 내 버려두는 것보다는 고통이 따르지만 한 대 때려서라도 건져내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여기서 하나님께 전적으로 매달려 있는 야곱의 모습을 가만히 상상해 보십시오. 한 다리는 땅에 걸치고 한 다리만 하나님께 걸친 것이 아니라 두 다리를 모두 하나님께 걸쳐야 했습니다. 물에 빠진 사람이 힘을 빼고 구조대원에게 완전히 몸을 의지하는 것처럼, 야곱의 두 다리가 공중에 붕 떠있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야곱은 이제 전적으로 하나님에게 자신의 전부를 맡긴 채 매달려 있게 되었습니다.

오늘 말씀의 핵심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매달려 있는 동안만 변합니다.”
그것은 인간적인 힘으로는 결코 변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합니다. 한 다리라도 땅에 놓으면 변할 수 없습니다. 다시 내 힘으로 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하면 무엇이든 금방 나쁜 쪽으로 변하게 되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한 다리라도 땅에 걸치면 변화는 끝납니다. 땅을 의지하면 안 됩니다. 그러나 하늘에 매달려 두 다리를 땅에서 놓고 있는 동안은 좋은 쪽으로 변합니다. 변화는 두 다리를 완전히 들고 나를 붙들고 계시는 하나님만 의지할 때 일어납니다.

여러분의 두 다리는 지금 어디에 놓여 있습니까? 땅에 한 다리를 의지하고 한 다리만 하늘에 의지하고 살지는 않습니까? 아니면 온전히 여러분의 삶 전부를 하나님께 내어 맡기고 살아갑니까? 여러분의 두 다리는 완전히 하나님께 매달려 있습니까?

5단계는 야곱이 이스라엘로 바뀌는 단계입니다.
그 사람이 그에게 이르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그가 가로되 야곱이니이다. 그 사람이 가로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사람으로 더불어 겨루어 이기었음이니라 (27-28절)

환도뼈가 부러져 더 이상 씨름할 수 없는 고통 가운데에서도 야곱은 하나님을 놓지 않습니다. 그리고 축복해달라고 애원합니다. 여기서 하나님은 한 가지 조건을 제시합니다. 그것은 이름을 묻는 것이었습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하나님의 질문에 야곱은 그동안 속고 속이며 살아온 40년 누더기 같은 인생을 대변하는 자신의 부끄러운 이름을 말합니다.
“야곱이니 이다”

야곱은 자기 이름을 밝힘으로 마침내 자신의 전 존재를 드려냅니다. 눈먼 아버지를 속이고 형의 축복을 가로챈 기만자, 태어나기 전부터 형의 발뒤꿈치를 붙잡더니 마침내 배고픔을 미끼로 형의 장자권을 빼앗아 형의 자리를 대신 차지한 찬탈자. 외삼촌을 속이고 그의 재산을 모두 가로챈 사기꾼. 하나님은 야곱을 축복하시기 전에 먼저 야곱에게 자기 이름을 고백하게 하셨습니다.

우리의 본성이 바뀌고 하나님으로부터 새 이름을 받으려면 먼저 내 이름을 고백해야 합니다. 내가 누구인지, 어디서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아온 존재인지를 고백해야 합니다.

야곱은 죽었고 이제 이스라엘이 태어났습니다. 남의 발뒤꿈치를 잡고 걸어 넘어뜨리던 자, 속이던 자가 하나님의 왕자 ‘이스라엘’ 이라는 이름으로 바뀌었습니다. 싸움은 하나님의 일방적인 승리였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야곱은 하나님으로부터 축복을 받아냈습니다. 어떻게 된 것입니까?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께 자신을 완전히 던지는 야곱에게 하나님이 져 주신 것입니다.

세상에 자식이기는 부모는 없다지 않습니까? 자식이 힘으로는 절대 부모를 못 이기나 열 번 백번 이기는 방법이 있습니다. 부모를 사랑하고 부모에게 순종하는 자식에게 부모는 항상 져 줍니다. 야곱은 어떻게 하나님을 이겼습니까? 하나님을 사랑하고 순종함으로 이겼습니다. 야곱이 하나님께 자신을 완전히 드렸을 때 하나님이 져주시는 분이 되셨습니다.

마지막으로 야곱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았다.
야곱이 브니엘을 떠날 때 절었다고 했습니다. “그가 브니엘을 지날 때에 해가 돋았고 그 환도뼈로 인하여 절었더라.” 환도뼈가 부러진 고통이 있었지만 그러나 그 일로 야곱은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법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그는 평생 부러진 환도뼈로 절뚝거릴 때마다 “나 혼자서는 안 된다. 은혜 없이는 못산다” 며 늘 고백했을 것입니다.

비록 몸은 망신창이가 되었지만 하나님을 만나서 이스라엘로 변화된 야곱이 브니엘을 지날 때 해가 돋았습니다. 이제 그의 인생에 어둠과 절망의 구름이 걷히고 기쁨과 희망이 찾아 온 것입니다. 이제는 자기 스스로 세우는 허영의 인생이 아니라 하나님이 세워 주시는 인생을 살게 된 것입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여러분, 야곱이 이스라엘로 변화되는 과정은 우리 생애 단 한 번의 싸움이 아니라 날마다 되풀이되어야 할 과정일수도 있습니다. 변화가 끝이 나는 지점이 어디든 바로 그곳에서 우리는 다시 이 단계를 밟아가야만 할 것입니다.

혹시 여러분 인생에 얍복강의 야곱처럼 홀로 있는 시간이 찾아왔습니까?
지금까지 철저히 내 식만 고집하며 살아왔는데 어느 날 갑자기 내가 믿고 의지하던 모든 것이 무너지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야곱스런 인생을 살던 나의 환도뼈를 치셨습니까?

변화하려고 아무리 씨름을 해도 환도뼈가 아직 겪이지 않았다면 변화 될 수 없습니다. 변화를 위해 우리가 지불해야 할 대가는 환도뼈를 겪는 것입니다. 변화된 성도라면 누구든지 환도뼈가 부러진 흔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환도뼈가 한 번씩 부러질 때마다 변화의 역사는 일어납니다. 그리고 풀리지 않는 인생의 문제 앞에 설 때마다 우리는 계속해서 나의 환도뼈를 겪어야 합니다. 내 환도뼈가 겪어질 때 비로소 우리는 새 이스라엘로 변화될 수 있습니다.

영리하고 처세술에 능했던 야곱, 모든 사람을 속일 수 있었고 자신이 원하는 것은 자신의 힘으로 다 차지할 수 있다고 자신만만했던 그 야곱은 이제 자기 힘으로 설 수 없는 불구자가 되었습니다. 그것은 지금까지 살았던 야곱의 식, 야곱의 길, 야곱의 능력에도 불구가 되었음을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시간 우리의 환도뼈도 겪어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 나의 환도뼈를 겪어 주옵소서. 똑똑하고 잘난 척하며 남을 속이며 살아온 야곱스런 인생에 대해서는 영원히 절뚝거리며 일어서지 못하게 하시고, 이제 하나님의 지팡이만 의지하며 하나님이 세워주시는 인생을 살게 해 주옵소서.”
나의 환도뼈, 나의 생각, 나의 힘, 나의 자랑하던 모든 것이 겪어져서 다시는 스스로 일어설 수 없게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축복입니다.

이스라엘의 후손들은 조상 야곱이 하나님과의 씨름에 져서 환도뼈를 빼앗겼기 때문에 그 일을 기념하여 환도뼈의 힘줄을 다시는 먹지 않았다고 합니다. 영적 이스라엘의 후손인 성도들도 마찬가지가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예수를 믿을 때 환도뼈의 힘줄은 이미 하나님의 것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로 살려면 언제나 힘과 생명의 원천이 내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속해 있다는 것을 고백해야만 합니다. .

날마다 나의 환도뼈를 겪는 고통을 통해 새롭게 태어나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바랍니다.
야곱스런 인생에는 영원히 절뚝거릴지라도 하나님을 의지하며 사는 인생에는 완전해 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권 영국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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