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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누가와 함께 하는 예수님의 비유연구 11>나 맡은 본분은 (눅 19: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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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변화시키는 작은 힘

유명한 영화에는 반드시 사람들의 기억 속에 오래도록 남는 명장면이 하나쯤 나오게 마련입니다. 오래전 2차 세계대전 중 많은 유대인의 목숨을 건진 오스카 쉰들러라는 사람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쉰들러 리스트’라는 영화가 상영되었는데 여러분 중에도 보신 분들이 꽤 많을 것입니다. 쉰들러는 처음에는 돈 밖에 모르던 탐욕스러운 사업가였지만 점차 유대인들의 비참한 현실에 눈을 뜨면서 자기 재산을 모두 써 가면서까지 수용소장 괴트로부터 유대인들의 생명을 구하게 됩니다. 이 영화에도 어김없이 명장면이 등장하는데 영화의 맨 마지막에 연합군이 진주하면서 해방된 유대인들이 쉰들러에게 감사의 표시로 금반지를 주는 장면입니다. 이 반지는 유대인들이 자신들의 금니를 빼서 만든 것인데 거기에는 “한 생명을 구하는 자는 전 세계를 구한 것이다”라는 탈무드의 격언이 쓰여 있습니다. 참 감동적인 장면입니다. 하지만 이 반지를 받은 쉰들러는 자신의 고급 승용차를 보며 이렇게 자책합니다. “이 차, 왜 괴트에게 팔지 않았지? 10명은 구했을 거야.” 남들은 네가 아무리 발버둥 쳐봐야 몇 명이나 구하겠냐고, 아무리 그래봐야 세상을 바꿀 수 있겠냐고 빈정거릴 때 그는 한 사람의 생명이 천하보다 소중한 줄 알았기에 그 일을 한 것입니다. 세상을 변화시키는 힘은 거창한 데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아주 작은 정성과 사랑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비유의 두 가지 이유

오늘의 비유는 11절에서 예수님이 이 열 므나 비유를 들려주신 두 가지 까닭을 소개하면서 시작됩니다. 하나는 ‘자기가 예루살렘에 가까이 오셨기 때문’이고 또 하나는 ‘저희가’ 즉 이 말씀을 듣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당장에 나타날 줄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조금 설명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예루살렘에 가시는 길에 여리고를 들르신 것입니다. 예루살렘에 들어가면 죽으실 것을 미리 아셨기 때문에 이제 죽음을 앞두고 이 때 쯤에는 이 비유를 통해 예수님이 죽은 후 승천하고 안 계신 동안 남아있는 제자들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말해 주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신 것입니다. 이게 바로 열 므나 비유의 첫 번째 목적입니다. 두 번째로, 당시 제자들은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이제 곧 예수님과 함께 예루살렘에 입성할 것인데 입성하기만 하면 하나님 나라가 곧바로 올 것이다.” 유대인들은 메시야인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면 로마제국을 쳐부수고 자신들을 구원하여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진다고 굳게 믿은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지금 이 므나 비유를 통해 이런 잘못된 생각을 바로잡아 주십니다. 즉,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한다고 해서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돌아가시고 승천한 후에도 종말은 한참 더 있다가 온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므나 비유를 통해 예수님은 그 한참 기다리는 동안 제자들이 어떤 자세로 살아가야 할 지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한 므나씩 받은 종들

이제 본격적인 비유의 내용으로 들어갑니다. 비유로 들어가기 전에 한 가지 짚고 넘어갈 것은 오늘 이 열 므나의 비유가 마태복음 25장에 나온 그 유명한 달란트 비유과 거의 비슷하다는 점입니다. 물론 조금씩 내용이 다르기는 하지만 전체적인 내용이 거의 비슷하고 비유가 목적하는 바도 같습니다. 오늘 이 열 므나 비유를 설명하면서 마태복음 25장의 달란트 비유와 비교해가며 설명하면 훨씬 이해하기가 쉬울 것입니다.

우선 12절에 보면 어떤 귀인이 왕위를 받아 가지고 오려고 먼 나라로 가게 됩니다. 달란트 비유에서는 단순히 ‘어떤 사람이 타국에 갈제’라고만 나와 있는 반면 열 므나 비유에서는 구체적으로 어떤 귀인(원어에는 ‘고귀한 혈통을 가진 사람’인데 그냥 ‘귀족’ 정도로 보면 될 것입니다)이 왕위를 받기 위해 먼 나라로 가게 된다고 소개하는데 이 이야기는 당시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진 한 사건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당시 유대를 통치하던 헤롯 왕의 아들 아켈라오(Archelaus)가 로마로 가게 되는데 그것은 로마황제로부터 아버지의 왕위계승을 허락받기 위해서였습니다. 당시 유대의 왕 헤롯은 말은 왕이지만 로마제국으로부터 허락을 받아 나라를 다스린 ‘분봉왕(分封王)’이었기 때문에 왕위를 물려주려 해도 반드시 로마의 허락을 받아야 했던 것입니다. 조선시대 때 우리나라의 왕이 새로 즉위하게 되면 반드시 중국에 사신을 보내 중국 황제의 허락을 받아야 했던 일을 떠올리면 이해하기 쉬울 것입니다. 헤롯왕은 죽기 전에 자신의 왕국을 세 아들인 안티파스, 빌립, 아켈라오에게 나누어 주었는데 유대지방을 물려받은 아켈라오는 로마황제의 인준을 받기 위해 로마로 떠났지만 유대인들은 아켈라오를 매우 혐오했던 터라 사절단을 구성해 로마로 보내 즉위를 막으려 했으나 결국 저지하는 데는 실패하고 맙니다. 당시 사람들은 이 사건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은 이 이야기를 배경으로 오늘의 비유를 들려주신 것입니다. 물론 이 비유에서 귀인은 아켈라오가 아니라 예수님 자신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왕위를 받아 오려고 먼 나라로 간다는 말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후 승천한 것을 뜻합니다. 여기서 ‘먼 나라’로 갔다는 것은 저 먼 하늘나라로 올라가셨다는 뜻도 되고, 또 멀기 때문에 다시 돌아오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릴 것임을 암시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나아가 그 나라 백성들이 사자를 보내 왕위 받는 것을 방해했다는 말은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거부하고 방해하고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것을 뜻합니다.

그런데 13절에 보면 귀인은 먼 나라로 떠나기에 앞서 종 열 명을 불러 은 열 므나를 주며 내가 돌아오기까지 장사를 하라고 명합니다. 열 명의 종이 사이좋게 한 므나 씩 나누어 받은 것입니다. 이 내용을 달란트 비유와 비교해 보면 우선 달란트와 므나라는 돈의 단위는 엄청난 차이가 납니다. ‘므나’는 그리이스․로마의 동전으로 한 달란트의 60분의 1에 불과합니다. 한 달란트는 금으로 약 34킬로그램에 해당되는 엄청나게 큰 단위인 반면 므나는 너무도 적은 단위입니다. 그러므로 누가는 아무리 적은 액수를 맡겼더라도 충성을 다해 성실하게 다루라며 작은 일에 충성할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또 달란트 비유에서는 주인이 달란트를 나누어 주면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라고 지시하지 않지만 므나 비유의 귀인은 처음부터 한 므나를 가지고 자신이 돌아올 때까지 장사를 하라고 시킵니다(13절). 그러니 달란트 비유의 한 달란트 받은 종은 혹 “저보고 뭐 하라고 말씀 안 하셨지 않습니까” 하고 핑계를 댈 수 있을지 모르나 므나 비유의 세 번째 종은 핑계거리가 있을 수 없습니다. 똑같은 한 므나 가지고 시작했는데 누구는 열 므나, 다섯 므나 만드는 동안  장사도 안 하고 수건에 싸두었다가(달란트 비유에서는 땅에 감추어 둡니다) 가져왔으니 할 말 없지 않습니까? 명백한 불순종입니다.

여기서 몇 가지 해석하고 넘어가야 할 내용들이 나옵니다. 먼저 므나는 무엇을 뜻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므나는 분명 돈의 단위인데 귀인이 먼 나라에 가면서 종들에게 한 므나씩 남겼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승천하시면서 우리에게 무언가를 맡겼다는 뜻인데 그 므나가 무엇이냐 하는 문제이지요. 그 답을 알려면 달란트 비유를 보면 됩니다. 달란트 비유에서 주인이 종에게 맡긴 달란트는 분명 화폐의 단위지만 그것이 나중에 영어 talent가 됩니다. ‘재능’ 혹은 ‘재주‘라는 뜻이지요. 무슨 뜻입니까? 예수님께서 우리 각 사람에게 talent, 즉 재능, 능력, 은사를 맡기셨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재능과 은사를 가지고, 즉 그 밑천을 가지고 부지런히 장사를 해서 이익을 남겨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에서 귀인이 종에게 므나를 맡기면서 장사하라는 말은 어떤 뜻인지 알 수 있습니다. 장사라는 것이 밑천을 가지고 이익을 남기는 것 아닙니까? 즉 밑천이 100이라면 장사를 해서 그 이상의 부수이익을 남겨야지 망해서 손해 보고 본전을 다 까먹는다든지, 이익을 못 남겨서 겨우 본전밖에 못 차렸다면 그것은 분명 실패한 장사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각각 한 므나 씩 맡기면서 장사하라는 것은 우리가 맡은 본전, 즉 우리의 능력과 재능을 가지고 열심히 활용해서 이익을 남기라는 뜻입니다. 그 이익이 무엇이냐?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전도해서 한 생명이라도 더 구원하는 일입니다. 또한 교회와 성도를 섬기는 일입니다. 내가 맡은 재능으로 나 자신만 위해 쓰면 본전치기입니다. 그것을 잘 활용해서 교회를 섬기고 성도를 섬기고, 그래서 교회가 복을 받고 성도들이 복을 받도록 해야 한다는 말이지요. 나 한 사람을 통해 교회의 지경이 넓어지고 영향력과 능력이 커지는 것입니다.

상과 벌

다음으로 생각해 볼 문제는 달란트 비유와 달리 왜 열 명의 종에게 똑같이 한 므나씩 맡겼는가 하는 점입니다. 달란트 비유에서는 세 명의 종에게 각각 그 ‘재능대로’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한 달란트 씩 다르게 나누어 주었는데 므나 비유에서는 열 명의 종에게 똑같이 한 므나 씩 나누어줍니다. 재능에 따라 다르게 나누어 주면 적게 받은 사람은 제 능력 부족해서 그런 줄도 모르고 불평하기 쉽습니다. 아마 달란트 비유에서 한 달란트 받은 종이 그대로 땅에 감추어버린 것도 불평불만의 표현이 아니었겠는가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왜? 저도 남들은 다섯 달란트 받고 두 달란트 받는데 혼자만 하나 받으면 이렇게 행동할 테니까요. 분명히 능력도 다르고 그릇도 달라서 그렇게 나누어 준 것인데 저 못난 것은 모르고 반항만 한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므나의 비유에서처럼 아예 처음부터 한 므나 씩 똑같이 나누어준다면 정말 할 말이 없는 것입니다. 너나 나나 똑같은 조건에서 시작한 것이니 핑계거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로 내가 얼마 받았느냐에 관심이 많습니다. 그래서 남과 비교해서 덜 받으면 불평합니다. 하지만 여러분, 정말 중요한 것은 내가 처음에 밑천으로 얼마 받았느냐가 아닙니다. 모두 똑같이 하나를 받았던, 아니면 능력에 따라 다섯, 둘, 하나를 받았던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그 받은 밑천으로 우리가 과연 최선을 다해서 이익을 남겼느냐 이것을 중요하게 보십니다.

또 15절에 보니 귀인이 왕위를 받아 가지고 돌아와서 종들을 불러 각각 어떻게 장사했는지 검사해 보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것은 마지막 때에 일어날 일을 보여줍니다. 승천하신 예수님은 마지막 종말 때가 되면 재림하시어 우리 모두를 불러 그 앞에 세우십니다. 그리고 마치 맡긴 돈을 어떻게 했는지 계수하시는 것처럼 우리의 믿음과 행실을 철저히 검사하고 그에 따른 대가를 주시게 됩니다. 그러면 결과는 어떻게 됩니까? 므나 비유나 달란트 비유 둘 다 마찬가지로 한 므나로 열 므나를 만든 종이나 한 므나로 다섯 므나를 만든 종이나, 다섯 달란트로 열 달란트를 만든 종이나, 두 달란트로 네 달란트를 만든 종이나 모두 똑같이 주인의 칭찬을 받고 상급을 받는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즉 예수님이 나중에 최후 심판 때 우리가 얼마나 남겼나 계수하시는데 얼마를 남긴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얼마나 최선을 다했는가를 보신다는 말입니다. 다만 두 종이 글자 하나 안 틀리고 똑같이 칭찬과 상급을 받는 달란트 비유와 달리 므나 비유는 상급이 차이가 납니다. 열 므나를 만든 종은 열 고을 권세를 차지하고 다섯 므나 만든 종은 다섯 고을 권세를 차지합니다. 이 고을을 다스리는 권세란 나중에 예수님이 재림하셔서 온 세상을 통치하실 때 주님과 함께 통치하는 권세를 상급으로 얻는다는 뜻인데 그 권세에는 어느 정도 차이가 난다는 뜻이 되겠지요.

이제 마지막으로 한 므나를 받아 그대로 들고 온 종의 모습이 나타납니다. 달란트 비유에서 한 달란트를 땅에 묻었다가 가지고 온 종이나 므나 비유에서 수건에 싸두었다가 가지고 온 종이나 어찌 되었던 간에 이 두 종은 주인으로부터 받은 귀중한 밑천을 방치했다가 가지고 온 것이지요. 주인의 분부대로 장사하지 않았으니 첫째로 불순종의 죄입니다. 둘째로, 맡은 바 사명을 감당하지 못하고 방치한 죄입니다. 이런 죄를 짓는 까닭은 내가 맡은 본분이 무엇인지 모르거나, 알면서도 감당하기 않는 것인데 오늘 본문을 보니 이 종은 분명 자기 본분이 무엇인지 알았습니다. 당연히 장사를 해야 하는지 알면서도 회피한 것입니다. 그래서 죄가 더 큽니다. 여러분, 자기 사명이 뭔지 모르는 것도 문제지만 알면서 감당치 않는 것은 얼마나 더 큰 죄인지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그에게 주어지는 벌은 그 한 므나를 빼앗기는 것이고 그 빼앗긴 므나는 열 므나를 가진 종에게 주어집니다. 이미 열이나 있는데 왜 또 주냐고요? 주인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무릇 있는 자는 받겠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하나님 나라는 이와 같이 철저하게 부익부 빈익빈입니다. 은혜를 사모하는 사람은 더 받게 되어있고 은혜 못 받는 사람은 있는 것마저도 빼앗깁니다. 축복도 마찬가지입니다. 받는 사람은 점점 더 받고, 못 받는 사람은 다 빼앗깁니다. 그러니 우리는 반드시 점점 더 복 받고 점점 더 은혜 받는 사람 되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귀인은 자신의 왕 됨을 원치 않고 방해한 자들을 심판합니다. 물론 이 말씀은 예수님을 부인하고 십자가에 매단 유대인들에 대한 심판을 뜻합니다. 하지만 오늘날 이 말씀은 예수님의 왕권을 인정하지 않는 자들 모두에게 주어지는 심판의 말씀이기도 합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사람들일까요? “나를 누가 다스려? 내 삶의 주인은 난데” 하면서 내 능력으로 스스로 사는 것이라고, 내 맘대로 살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교회 다니면서도, 신앙생활 하면서도 끝내 예수님이 내 삶의 주인이시며 그 분 뜻대로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을 인정하지 않으면 예수님도 그 사람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

오늘 므나 비유는 “마지막 종말 때에 우리가 할 일은 무엇이며, 우리가 주님께 판단 받는 기준은 무엇인가?”를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그것은 주님이 맡겨주신 능력으로 얼마나 최선을 다해 주의 일을 하고 생명을 구원하고 교회를 섬기느냐 하는 것입니다. 얼마 남겼느냐, 액수의 문제가 아니라 얼마나 최선을 다 했느냐가 중요합니다. 만일 우리가 최선을 다했는데 열 므나나 다섯 므나 만들지 못했다 해도 할 수 없습니다. 한 므나 받은 종이 정말 최선을 다했는데 겨우 하나 더 남겨서 두 므나를 들고 주인에게 왔다면 주인이 책망하겠습니까? 아닙니다. 그도 최선을 다했기에 열 므나나 다섯 므나 만든 종과 똑같이 칭찬 받고 상급 받았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나의 왕 되신 예수님을 위해 최선을 다 하는 것을 오늘 본문 17절에서는 ‘충성’이라고 부릅니다. 그래서 달란트 비유에서도 두 종에게 주신 칭찬이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입니다. 그래서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입니다(고전 4:2). 주님이 사명 맡은 자들에게 최고로 쳐주는 자세는 충성, 바로 최선을 다하는 자세입니다.

그런데 17절에 보면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하였으니’라는 말이 나오고, 마 25:21, 23에 보면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니’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게 참 중요합니다. 므나 비유나 달란트 비유나 충성 중에서도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긴다는 사실입니다. 흔히 우리는 ‘충성’ 하면 대단히 거창한 것을 생각합니다. 그러다보니 한 므나(달란트) 받은 종처럼 자기가 받은 것이 보잘것없다고 생각하면 불평만 하고 그 받은 것을 소홀히 여겨 함부로 방치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은 분명히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하는 것을 가장 소중한 충성으로 보십니다. 내가 맡은 것이 보잘것없어 보이고, 남들에게 인정받는 일이 아니라 해도 우리가 그 일에 충성을 다할 때, 그래서 아무리 적은 것이라도 마지막 때 “제 충성의 결과입니다” 하고 주인께 가져갈 때 주인 되신 예수님은 감격하고 기뻐하며 상급을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 상급을 받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어떤 선교사가 불타는 사명감을 안고 복음의 불모지에 파송되어 여러 해 동안 최선을 다해 선교사역을 감당했지만 결국 단 한 사람밖에는 전도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는 자신을 파송한 총회에 가서 부끄러운 마음으로 이 사실을 보고 했습니다. 물론 그 자리에 참석한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선교보고를 듣고 비웃거나 비난할 줄로만 알았습니다. 하지만 그 자리에 참석한 모든 사람들은 그 선교사의 선교보고에 진정으로 감동하여 기립박수를 쳤다고 합니다. 왜일까요? 숫자가 중요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수년 간 정말 최선을 다했는데 그 결과는 고작 한 명입니다. 하지만 그 한 명이 천하보다 소중하다는 사실을 알았기에, 선교사가 진정 최선을 다했고 충성을 다 바쳤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았기에 그들은 감동한 것입니다. 우리도 언젠가 다 주님 앞에 서서 보고를 하게 될 것입니다. 그 때 거창한 결과를 가지고 보고하는 것도 좋겠지만 정말 주님이 듣기 원하시는 보고, 주님을 감동시킬만한 보고는 무엇일까요? 바로 내 사명을 소중히 여기고 최선을 다하는 충성된 마음입니다. 바로 그 충성을 보시고 우리 주님은 감동하여 잘 했다고 충성된 종이라고 진심 어린 박수를 쳐주실 것입니다. 이 박수를 받는 여러분 꼭 되시기 바랍니다. (이 하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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