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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모새골 동막골 예닮골 (롬 12:1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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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회를 ‘에클레시아’(헬)라고 하는데, 그 뜻은 ‘부르심을 받은 자들의 모임’이라는 뜻입니다. 모임이란 공동체를 의미합니다. 한 사람이 공동체가 될 수는 없고, 두 사람 이상이 모여서 공동체를 이룹니다. 예수님을 구세주와 삶의 주인으로 영접한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가  교회입니다. 교회라고 하면 사람들은 먼저 십자가가 달린 보이는 건물을 연상하는데, 교회는 건물 이전에 하나의 보이지 않는 공동체입니다.

  그러면 서울중앙교회는 과연 공동체인가? 공동체의 사전적인 정의는 이렇습니다. “운명, 행동, 생활을 같이 하는 모임” 공동체는 단어 뜻 그대로, ‘같이 하나된 몸’입니다. 특히 교회라는 공동체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같이 하나된 몸’입니다. 우리 교회는 진정으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같이 하나된 몸입니까? 그렇게 되어야 진정한 공동체입니다. 10명이 모이고 100명이 모여도, 그 모인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같이 하나된 몸이 될 때, 그 것이 진정 공동체요 교회입니다. 1,000명이 모이고 10,000명이 모여도, 그 모인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같이 하나된 몸이 되지 못할 때, 그 것은 교회란 이름만 걸어놨지, 일반 세상 조직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얼마나 많이 모이느냐’에서 공동체의 진정성을 찾을 것이 아니라, ‘그 모인 사람들이 참으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같이 하나된 몸이 되었는가’에서 공동체의 진정성을 찾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우리 교회가 어떤 공동체가 되기를 원하십니까? 작년에 제가 ‘모새골’에 다녀오면서 우리 교회가 모새골과 같은 공동체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모새골은 경기도 양평의 어느 작은 마을에 세워졌는데, ‘모두 새로워지는 골짜기’의 준말입니다. 모새골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을 하나의 정원(garden)으로 보고, 그 안에서 삶의 의미와 목적을 새롭게 발견하고 그리스도를 본받아 살아가는 삶을 실현해가는 영적 정원사들(gardner)의 공동체입니다. 예배, 묵상, 기도생활을 중심으로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를 하고, 그 공동체에 오는 사람들을 영적으로 갱신(renewal)하는데 초점을 두고 있습니다. 그 곳에서 제가 받은 첫인상은 ‘거룩’과 ‘평안’이었습니다. 거기에 다녀오면 마음의 세수를 한 것처럼, 마음이 깨끗해지고 평안해지고 심령이 새로워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모새골을 한 학기 동안 체험하면서, 우리 교회 성도님을 이런 생각해봤습니다. ‘과연 우리 교회 성도님들도 우리 교회에 오면, 마음의 세수를 한 것처럼, 마음이 깨끗해지고 평안해지고 심령이 새로워질까?’ 우리 교회도 모새골과 같은 공동체로 만들어가면 좋겠다라는 바램을 가져 봤습니다.

    지난 주간에는 ‘동막골’에 다녀 왔습니다. 동막골은 현재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는, 영화상에서 볼 수 있는 공동체입니다. 지난 주 찬양예배 때 김옥경 전도사님이 우리 교회가 동막골처럼 되었으면 좋겠다고 해서, ‘웰컴투 동막골’이란 영화를 봤습니다. 영화의 시대적 배경은 6.25 전쟁인데, 국군 2명과 인민군 3명, 미군 조종사 1명이 깊은 산골짜기로 들어갔다가 우연히 동막골이란 마을에서 만나게 되었습니다. ‘동막골’이란 ‘아이들이 마구 뛰어다니는 골짜기’란 뜻인데, 그 마을은 전혀 세상의 때가 묻지 않은, 순수 그 자체의 마을이었습니다. 여주인공(머리에 꽃을 꽂고 다니는 여성)을 비롯해서 마을 사람들은 세상 물정은 전혀 모르고 그저 순박하게, 평화롭게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런 마을에 뛰어든 국군과 인민군, 미군은 처음에는 서로 발견하자마자 죽이려고 했지만, 마침내 그 마을 사람들에게 동화가 되어서 동막골 주민처럼 되고 맙니다. 거기서는 도무지 싸움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나중에 국군과 인민군은 비행기폭격으로부터 마을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서 대신 죽는 것으로 이야기가 종결되는데, 제가 동막골에서 받은 가장 깊은 인상은 그 마을은 도무지 싸움이 되지 않은 곳이라는 사실입니다. 아무리 싸울래야 싸울 상대가 되지 않고 평화가 유지되는 동막골! 우리 교회도 동막골같은 공동체로 만들어가면 좋겠다는 바램을 가져 봤습니다.

    제가 서울중앙교회를 목회하면서 성령의 도우심에 의해서 궁극적으로 실현하기를 원하는 공동체 상은 오늘 본문 롬 12:14-21에 나타나 있습니다. 로마서는 바울이 로마에 있는 교회와 성도들에게 쓴 편지입니다. 특히 롬 12장 이후로는 실천적 권면을 했는데, 그리스도인 개인의 실천적인 삶에 대한 권면을 하면서, 어떤 모습이 진정한 공동체를 이루어가는 것인지에 대해서 오늘 본문에서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울이 원하는 공동체의 모습이요 주님이 원하시는 공동체의 모습입니다.

    본문을 보면서 공동체 이름을 하나 붙이면 좋겠는데, 어떤 이름을 붙일까 생각하다가, 심사숙고 끝에 나온 이름이 ‘예닮골’이란 이름입니다. ‘예수를 닮아가는 골짜기’의 준말입니다. 저는 우리 서울중앙교회가 ‘예수를 닮아가는 골짜기’와 같은 공동체가 되기를 원합니다. 서울중앙교회에 들어온 사람은 하나같이 다 예수님을 닮아가게 되고, 예수를 닮은 자로서 서로를 대하고 섬기고, 교회 밖 세상에 나아가서는 예수를 닮은 자로서의 삶을 살아서 그들도 결국 예수를 닮게 하고, 그래서 마침내 그들을 주님께로 인도하는 공동체가 되기를 원합니다. ‘완전히’는 아니지만, ‘조금씩’ 이미 그렇게 되어가고 있고, 그런 가능성과 희망이 보입니다. 서울중앙교회의 藝名은 ‘예닮골’이고, 저와 여러분은 이제 그 ‘예닮골’의 사람들입니다.
    그러면 그 ‘예닮골’의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인가?

    1. 나를 핍박하는 사람을 도리어 축복하는 사람들입니다.

    14절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 여기서 ‘축복하다’라는 단어는 ‘율로게오’(헬)라는 단어의 번역인데, ‘좋게 말하다’, ‘칭찬하다’의 뜻입니다. 율로게오는 대단히 중요한 단어입니다. 하나님을 찬양한다는 의미로도 쓰이고, 하나님이 복주신다는 의미로도 쓰이고, 상대방을 축복한다는 의미로도 쓰입니다. 그런데 축복을 하되, ‘내게 잘하는 사람’, ‘나와 가까운 사람’, ‘내 말을 잘 듣는 사람’을 축복하라는 것이 아니라,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축복하라고 했습니다. 과연 이렇게 할 수 있습니까?

    예닮골 사람들은 이렇게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바울은 지금 자신의 생각으로 하는 말이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에 근거해서 이렇게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 5:44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눅 6:28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나를 핍박하는 사람, 나를 저주하는 사람, 나를 모욕하는 사람을 축복할 수 있다면, 세상 모든 사람을 축복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이 이 말씀대로 행하셨고, 바울 역시 이 말씀대로 행했고, 로마교회 성도들에게 그리고 오늘 우리들에게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닮골의 사람들은 남을 저주할 줄 모릅니다. 오직 축복 밖에는 할 줄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군에 입대하면 훈련받고나서 주특기를 받게 됩니다. 저는 320(통신) 주특기를 받았습니다. 좋으나 싫으나 그 주특기대로 군생활을 해야 합니다. 예수를 믿으면 그리스도인이 받게 되는 주특기가 있는데, 그 것은 ‘축복’이란 주특기입니다. 좋으나 싫으나 그 주특기대로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과연 공동체 안에서 얼마나 남을 축복하고 있습니까? 특히 나를 핍박하는 사람을 얼마나 축복하고 있습니까? 제자생활언어는 바로 이런 ‘축복’ 주특기 훈련입니다. 예닮골의 사람들은 축복하기를 즐기는 사람들입니다. 하루에 열명을 만나면 열 번을, 백명을 만나면 백 번을 축복하시기 바랍니다. 지금 옆 사람부터...... ‘만사형통하시기를 바랍니다’

    2. 남보다 낮은 데 처하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입니다.

    16절 “서로 마음을 같이 하며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 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있는 체 말라” 세상사람들의 가치관과는 정반대입니다. 세상사람들은 마음을 높은 데 둡니다. 지금 자리보다 더 높은 곳을 향해서 날마다 나아갑니다. 더 높은 지위, 더 높은 사람이 되기 위해서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애를 씁니다. 창세기에 보면, 바벨탑을 쌓는 사람들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자, 성과 대를 쌓아 대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마음을 항상 높은 데 두고자 하는 것이 세상사람들의 마음입니다. 높은 데 마음을 두는 것을 교만이라고 하는데, 세상사람들의 가치관이 그렇습니다. 사는 맛이 높은 데......

    그러나 예닮골 사람들은 결코 마음을 높은 데 두지 않습니다. 도리어 스스로 낮은 데로 나아갑니다. 낮은 데로 나아가되, 지금보다 좀 더 낮은 데로 내려갑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삶이 평생 낮아지는 삶이었기 때문입니다. 빌 2: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예수를 믿으면서 아직 마음을 높은 데 두고 있으면, 예닮골 사람이 아닙니다. 그런데 실상 오늘의 교회와 교인들을 보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높은 데 마음을 두고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신앙생활의 기쁨을 풍성하게 누릴 수가 없습니다. 점점 예수를 닮아가는 것이 아니라 점점 사단을 닮아갑니다.

    젊을 때 노동자들과 함께 도시산업선교회를 18년 섬기다가, 달월교회에서 13년 섬기다가, 자원해서 물러나서 지금은 봉평 태기산에서 집을 짓고 혼자 살고 있는 조화순 목사님이란 분이 있습니다. 그 분은 우리나라 노동운동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한 사람이요, 한국 기독교 역사에서 아홉 번째 여성목사입니다. 편안한 삶을 버리고 항상 낮은 곳에서 처하면서 이웃을 섬기다가, 조금 일찍 후배들에게 사역지를 물려주고는, 자연에서 삶을 정리하고자 하는 그 분의 삶이 바로 예닮골 사람들의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그 분이 쓴 책, [낮추고 사는 즐거움]이란 책의 제목이 그 분의 삶을 요약해줍니다. 예닮골 사람들의 유일한 즐거움이 있다면, 그 것은 낮추고 더 낮추는 즐거움이입니다. 예닮골 사람들이 즐겨 찾는 곳이 있다면, 지금보다 더 낮은 곳입니다. 지금 나는 낮추는 즐거움으로 충만한가? 나는 지금 낮은 곳에 있는가?

    3. 평화를 최고로 생각하고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입니다

    18절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 ‘할 수 있거든’이란 전제가 있는데, 이 말씀은 모든 사람과 더불어 평화한다는 것이 어려울 때도 있다는 점을 감안해서 하는 말씀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할 수 없으면’ 평화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씀 또한 아닙니다. 인간의 힘으로는 안될지라도, 이 땅에 평화의 왕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면 반드시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평화하라’ 이것이 예닮골의 목적문입니다. 예닮골 사람들은 평화를 최고로 생각하고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입니다. ‘평화하라’의 반대는 무엇이겠습니까? ‘싸우라’ 싸우는 것은 예닮골 사람들의 모습이 아닙니다.

    그러면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 방법을 바울이 가르쳐 주었습니다. 17절 “아무에게도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21절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평화하려면 악으로 악을 아니라, 선으로 악을 이겨야 합니다. 벧전 3:9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이는 복을 유업으로 받게 하려 하심이라” 악은 나쁜 것이니 다른 악으로 응징하는 것은 오히려 더 큰 악을 만들어냅니다.

    요즘 인기를 끌었던 ‘친절한 금자씨’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저는 제목만 보고는 ‘아, 금자씨가 친절해서 감동적인 스토리를 만들어가보다’하고 영화를 봤습니다. 그런데 ‘친절한 금자씨’가 아니라 ‘무서운 금자씨’, ‘끔찍한 금자씨’였습니다. 그 영화를 보면서 ‘여자가 참 무서운 존재구나’ 새삼 깨닫게 되었습니다. 금자씨가 어린 사내를 납치 살해했다는 오명을 뒤집어쓰고 억울한 옥살이 13년간을 한 끝에 출감하면서, 교회 전도사에게 ‘너나 잘하세요’ 하면서 원래 살해범을 찾아 복수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살해된 어린 아이의 부모에게 용서를 구하고, 자기 딸에게도 용서를 구하면서 또 다른 한 편으로는 참회할 줄 모르는 뻔뻔한 살해범을 찾아서 복수를 하는데, 여러 피해자들의 부모를 동원해서 아주 끔찍하게 복수를 합니다. 악에 대한 응징은 사회보편적인 윤리이기 때문에 정당화될 수 있지만, 그러나 역시 처절한 복수로 끝내는 영화의 끝은 시원하다기보다는 씁쓸했습니다. 만약 ‘친절한 충현씨’라는 제목으로 영화를 만든다면, 저는 본문에 기초해서 조금 다른 방법으로, 곧 ‘악으로’가 아니라 ‘선으로’ 접근할 것입니다.
   
예닮골 사람들은 악한 세상 속에서 선으로 악을 이기는 스토리를 만들어가는 사람들입니다. 예닮골! 저는 말만 들어도 가슴이 벅차오릅니다. 우리 교회가 대한민국의 예닮골, 우리 교인들이 예닮골 사람들이 되어서 이 땅에 구원의 역사, 전도의 역사, 천국의 역사를 만들어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김 충 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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