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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랑① - 사랑은 감동과 능력과 선행을 능가합니다 (고전 1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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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살아가면서 점차 그 기능이 퇴화되는 것도 있지만 일정기간까지는 많은 능력과 지식과 지혜가 상승되는 것을 봅니다. 시간이 가면서 자라지 못하는 믿음도 있지만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으로 우리는 점차 믿음에 은혜와 능력을 소지하게 됩니다. 하지 못하던 일을 하게 되고 표현하지 못했던 것들을 유리하게 표현하며 잘 이루지 못했던 관계를 매끈하게 이루기도 합니다. 절절매던 일들이 별 것 아닌 것들처럼 쉽게 처리되기도 합니다. 말하자면 삶의 능력이 크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믿음의 사람에게는 이것만이 삶의 전부는 아닙니다. 주님은 이 땅에 오셔서 율법을 능가하는 사랑의 법을 주셨습니다. 주님은 이 땅에 오셔서 스스로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40일간 금식을 하면서 시험도 받으셨고, 기적을 행했음에도 불구하고 비난을 받기도 하셨습니다. 급기야는 로마 군병들에게 잡혀서 고초를 겪었습니다. 기적을 보고 겉옷을 깔아 길에 펴고 예루살렘 입성 시에 종려나무가지를 흔들며 호산나 외치는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노도의 함성을 외치기 시작했습니다. 심지어는 십자가상에서 조차 한편 강도에 조롱을 받았습니다. 창에 찔리고 가시관을 쓰고 손발에 못을 박혀 그는 인간적으로 모든 물과 피가 다 소진하여 한 많은 눈물과 생을 마치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 모든 일을 다 하면서도 인간에 대한 분노는 품지 않고 인간들이 죄로 인하여 자기들의 하는 일을 알지 못함을 안타까이 여기셔서 다 용서하셨습니다. 오히려 그들의 죄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우리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를 구원하시는 대 사랑의 역사를 이루신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가장 큰 계명은 첫째로 내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둘째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이 두 가지는 한 개의 법입니다. 즉 사랑의 법입니다. 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을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있을까요? 우리의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함으로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을 표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상한 갈대를 꺾지 않고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않는 자비와 사랑의 분이십니다.
간음한 여인을 예수님 앞에 데리고 와 그를 처형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바닥에 쓰셨습니다. ‘누구든지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양심의 가책을 받은 그들이 슬금 슬금 다 피해 돌아가게 되자 예수님은 마지막으로 이 여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 용서하셨던 사랑의 법의 완성자였던 것입니다.

병이 들고 장애가 있고 귀신들려 고통하는 자를 곳곳마다 만나서 고쳐주셨습니다. 귀찮아 않으시고 가슴 아파하시며 그들에 대한 진정한 사랑의 역사를 이루셨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생각할진대 그 주님은 능력의 주님 이전에 그 능력을 베푸시는 근원이 있었으니 바로 죄인이요, 연약한 인간에 대한 사랑이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따르는 우리 모든 백성들은, 주님을 따르는 성도, 주님의 제자들은 그 모든 것 이전에 주님의 법을 따라야만 우리는 주님의 백성이요, 제자요, 성도라 할 수 있습니다. 요즘 새벽기도회시에 고린도전서를 같이 읽었습니다. 고린도전서를 읽는 중에 13장 부분에 와서 이 부분은 온 성도들이 같이 공유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몇 주 동안 하나님의 말씀의 은혜를 주일 예배 때 나누고자 합니다.

물론 고린도전서 13장은 사도 바울이 그의 동역자인 바나바를 생각하면서 거기서 힌트를 얻어 기록을 했다고 일설에 전해집니다. 사도 바울은 매우 이지적인 인물입니다. 매우 날카로운 사람이며 논리적이며 지성적인 사람이었습니다. 논리적이고 이지적이고 지성적이고 날카로운 사람들이 그러하듯이 다른 사람들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매우 호전적이고 공격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바나바는 사도 바울의 이와 같은 모든 면을 잘 품고 품어서 다른 사람에게 그의 모든 날카로운 면을 부드럽게 이해하고 소개시켜 준 사람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변화를 받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증거하려고 할 때 사람들은 사도 바울을 믿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사도 바울이 이렇게 예수님의 말씀을 전하고 우리를 잡아다가 옥에 가두고 죽이려 해’ 하고 오해했을 때 바나바라는 사람은 사도 바울을 기독교 사회 무대에 등장시키고 그를 소개하고, 세례 요한처럼 그의 길을 엶으로 말미암아 사도 바울이 그의 사역을 감당할 수 있도록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들은 각기 다른 능력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서로를 비교하지 않고 에베소 교회에서 같이 목회를 하였습니다. 또 뿐만 아니라 그 둘은 같이 파송을 받아 선교사 사역을 하였습니다. 마가라고 하는 사람의 문제로 인하여서 그들은 선교활동을 하는 중에 헤어져서 다음번 선교활동을 할 때 같이 떠나지 못하고 헤어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둘의 사랑과 우정은 근본적으로 깨어질 수 없었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성품을 생각할 때 이 바나바의 성품을 생각할 때 ‘사랑이라는 것은 이런 것이구나’라는 것을 힌트 받고 깨달아서 오늘 고린도전서 13장을 기록했다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고린도전서 13장을 묵상해 봄으로 우리 성도들이 진정히 소유해야 할 사랑의 역사에 대한 묵상을 해보고자 합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내 하고 싶은 말 다하고 내 하고 싶은 일 다 하고 내 싫어하는 것 다 나타내고 내 감정 표현하고 내가 하기 싫은 일 다 나타낸다면 도대체 사랑이라는 것이 우리 가슴에 존재할 부분이 있는가 생각해 봅니다. 때로는 참고, 꿀꺽 삼키고, 인내하고, 기다리며, 때로는 다른 이의 잘못을 보았을 때 오히려 내 잘못을 생각하여 나를 질책하여 진보를 이루며 다른 이들의 허물을 보았을 때 내 허물을 생각하여 위로하고 격려합니다. 스스로 내 죄를 고백하고 사람을 상대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상대로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생각하고 또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기에 애쓰기 위한 우리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어찌 생각하면 우리의 인격이라는 것도 결국 주님의 사랑을 소유하고 있는가? 주님의 사랑을 소유하지 못하고 있는가 하는가에 따라 결정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따라 몇 가지를 좀 더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오늘은 특별히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락하여 품게 하시기를 원하는 사랑이라는 것은 상대를 감동시키는 이와 같은 능력이나 아니면 특별한 역사를 이루는 영적 능력이나 선행을 베푸는 것을 능가하는 진정한 사랑임을 우리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사랑은 사람을 감동시키는 것보다도 능력을 행하는 것보다도 선행을 행하는 것보다도 더욱 더 큰 역사임을 봅니다. 오늘 나누는 말씀을 우리는 사랑에 대한 아름다운 성가로만 듣지 않고 우리 가슴을 후패이며 아프게 하는 말씀으로 들어 진정한 회개와 새로운 각오와 진보의 발걸음이 이루어져 우리 삶이 주님이 원하시는 진정한 사랑의 사람이 그리고 사랑의 삶이 되기를 원합니다.

우리 성도들에게 있어서 사랑하면 좋고 그렇지 못하면 도저히 안돼 할 수 없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이라는 것은 반드시 이루어야만 하는 호흡과 같은 것입니다. 아무리 능력이 없다고 핑계해도 호흡을 멎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무엇인가 호흡해야만 생명이 있기에 우리가 생명의 존속을 유지하기 소원하는 한 우리는 호흡하기 위해서 애를 쓰는 것처럼 우리가 예수를 믿는 그리스도의 백성으로 존재하려 하는 한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우리 마음에 품고 그 사랑의 능력을 활용하고 사랑의 힘대로 살아감이 우리에게 당연한 것입니다. 아무리 어려워도 우리는 그야말로 버둥질치며 꼭 이루어야할 것이 있으니 바로 그것이 사랑입니다. 이제 말씀을 좀 더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13장 1절을 보니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찌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라고 말씀합니다. 즉 첫 번째 생각하는 것은 사랑은 사람을 감동시키고 상대를 설득시키는 방언이나 천사의 말보다 더 큰 능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은 사람을 감동시키거나 이해시키거나 설득하는 능력이상입니다. 사랑은 모든 능력을 비로소 능력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빵을 만든다고 하면 밀가루를 잘 반죽하고 그 반죽한 밀가루에 여러 가지 재료를 넣고 같이 반죽을 합니다. 모양을 만들고 그 위에 맛있는 것을 다 얹어 넣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빵은 아닙니다. 오븐에 넣고 열을 가해서 구워야만 빵이 됩니다. 사랑이 없으면 모든 것은 미완성이고 맛이 없고 배탈이 나는 것 굽지 않는 빵과 같습니다. 굽지 않은 빵과 같은 것은 아직 밀가루와 같은 것입니다. 그것을 구워서 익혀서 맛을 내야 그것이 빵이 되듯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능력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믿음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믿음의 요소와 모든 선행들도 결국 사랑에 의해서 익혀져야만 그것이 바로 맛이 있는 주의 은혜의 역사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열심 있는 것 같고 일도 잘하는 것 같으나 늘 분란을 일으키고 사람을 괴롭히는 사람들이 있는 경우가 있는 것이 있습니다. 잘하는 것 같다 뒤집어 지는 것은 오히려 상처만 더 끼치고 극심한 자기중심적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한 유아적 사고입니다. 온 우주가 나 중심으로 돌아가야 한다면 우리는 이미 하나님의 자녀에서 이탈한 것입니다. 내가 주님 중심으로 주님이 섭리하는 삶의 틀에서 내가 움직여져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주도적으로 이루어야하나 하나님도 무시하고 하나님의 사람도 무시하고 또 다른 사람들을 안중에 두지 않은 지나치게 주도적인 것은 하나님을 무시하는 행위에 불과합니다.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사랑의 도구로 사용함이 중요합니다. 그러니 사랑이 없으면 그 모든 것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 시간 ‘그래도 능력이 있어야지 능력은 능력이야’ 하는 마음이 든다면 그 마음을 철저히 뜯어 고쳐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결단코 화가 임하여 마침내 하루아침에 멸망에 자리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재앙은 세게 홀연히 그물이 덮침같이 어느 날 홀연히 우리에게 덮쳐진다고 말씀했습니다. 욥에게 재앙이 닥칠 때 노아 시대에 물이 덮쳤을 때 소돔과 고모라 성에 불이 내렸을 때 우리는 무엇을 말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서남아시아의 쓰나미 현상처럼 해일이 덮쳐서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가는 것을 볼 때, 요즘 미국 루이지에나주의 뉴올리언즈를 덮쳤던 이와 같은 홍수 태풍을 보면서 우리는 세계에서 방제가 가장 잘된 미국과 같은 이와 같은 나라에도 자연재해를 막을 수 없다는 것을 볼 때 우리는 정말 인간의 한계를 느끼게 됩니다. 너희는 내일 일을 자랑하지 말라 하루 동안에 무슨 일이 일어날는지 알지 못함이라고 우리는 수없이 배웠습니다. 하루아침에 사고로 물거품이 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어제까지 멀쩡했던 이가 오늘은 눈만 멀뚱멀뚱하며 눈물을 흘리고 있는 우리 인생의 모습을 봅니다. 정말 하나님의 자비가 필요합니다. 손끝하나 움직이지 못해서 정말 가슴아파하며 슬피우는 그의 모습을 보며 우리가 마음에 느낄 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어려운 성도를 볼 때마다 하나님의 자비가 진실로 필요하고 제게도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이 없으면 한 시간도 살아가기가 불가능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여기 있는 분들이 축복을 받았다는 것은 한시라도 하나님이 우리들에게서 눈을 떼시면 우리들에게 축복은 순식간에 사라진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는 것이 아닙니까? 사랑으로 인해 우리의 능력은 비로소 빛을 바라고 영광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집집마다 이런 시계가 있지요. 툭하고 올라가려다 떨어지고 툭하고 올라가려다 떨어지는 시계들이 있지요. 왜지요? 건전지가 떨어진 것입니다. 건전지를 새로 바꿔놓으면 툭툭툭 움직여서 마침내 시간을 맞춰가게 될 것입니다. 우리에게 사랑이 없으면 우리의 하는 일이 모두가 그렇습니다. 사랑이 없으면 모양은 그럴듯하나 내용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결국 힘이 없어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랑의 능력을 가지고 모든 일을 마무리 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잠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능력이 있고 사랑이 없다면 더 큰 피해를 끼칠 것입니다. 사랑의 능력이 없는 사람이 사람의 마음을 사는 능력이 있다면 이것은 매우 위험한 일입니다. 그것은 교만자체에 이르게 되고 멸망의 자리에 이르게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없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능력이 조금이라도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우리의 착각일 뿐입니다. 그것은 사단의 사주를 받은 교활한 인간으로 전락하게 되는 것이며 사단의 종으로 전락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단의 특징은 우리 스스로를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고 생각하게 하여 교만케 합니다. 스스로를 대범하고 그럴듯하게 생각하게하나 하나님의 은혜의 관점에서는 사단의 심정이 교만함과 교활함과 이간함과 관계를 깨뜨림으로 모든 사람의 관계를 불편하게 하는 것입니다. 또 하나님의 나라를 어지럽히게 하는 사단의 종노릇을 하게 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느헤미야서를 보면 예루살렘 성곽을 수축하는 느헤미야와 이스라엘 백성에게 산발랏과 도비야의 일당은 분명히 말합니다. “저희가 건축하는 성읍은 여우 한마리만 올라가도 무너지리라” 그들은 이와 같은 말로 사람들을 낙심시킵니다. 그들에게는 그에 대한 사랑은 전혀 없고 그들에 대해서 이와 같은 말로 그들을 낙심시켜 오히려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려는 것을 봅니다. 선지자 스마야는 부패되고 돈에 매수되어 느헤미야를 오히려 죽을 지경에 몰아넣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하나님의 말씀 따라 정도를 지킨 느헤미야에 의해서 무의로 돌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능력도 결국 빛을 발휘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이 없고 사람을 설득하거나 움직이는 능력이 주어지면 대부분 우리의 삶은 실패합니다.

우리는 그 어떤 모든 종류의 능력이 주어지기 전에 먼저 우리의 마음에 주님의 사랑이 함께 하기를 간구해야 합니다. 여러 능력이 주어지기 전에 주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있어야 그 능력이 빛을 발하고 그 능력이 정상적인 괘도를 발하게 됩니다. 내 마음에 사랑은 전혀 없는데 내게 어떤 능력만 주어지면 그것은 우리들에게 불필요한 탈이 되어 많은 사람을 다치게 하고 나 자신을 다치게 합니다. 현재 삶에서도 우리는 속히 사랑의 능력이 우리의 사람을 움직이는 그 어떤 인기나 능력보다 앞서게 우리 삶을 조절해야 합니다. 사랑이 우리의 말과 설득력과 언변능력을 넘어 우리 삶을 지배하게 한다는 것은 대단한 결단입니다. 내가 내 자신을 부인하지 않으면 사랑이 나에게 있어서 최우선적인 사항이 되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나를 부인해야만 사랑은 내 자신을 최우선적으로 지배하는 힘이 되는 것입니다. 말이라는 것은 공허합니다. 말이 아닌 우리의 삶으로 사랑을 이루어야 합니다.

두 번째는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찌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것도 아니요”라고 말씀합니다. 사랑은 그 어떤 영적인 능력보다 더 큰 힘과 능력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에게 있어서 사랑이란 호흡과 같은 존재의 필수적이며 우선적인 존재적 가치라는 것을 말합니다. 호흡을 제외하고 인생의 삶의 논의하는 것은 무의미합니다. 사랑을 제외하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능력과 믿음을 논하는 것은 무의미합니다. ‘저 사람 믿음은 좋은데 사랑이 부족해’ 이 말은 ‘저 사람은 믿음은 괜찮은데 사람이 영 일정하지 못하고 변덕스럽고 어떤 때는 좋았다 어떤 때는 바닥이고 종잡을 수 없어’ 하는 말이지만 사실 이 말은 틀린 말입니다. 저 사람 믿음은 좋은데 사랑이 없어가 아니라 저사람 믿음이 없어라는 말입니다. 저 사람 믿음은 좋은 것 같은데 마음에 맞지 않으면 모든 이에게 상처주고 상하게 하고 이 말은 오늘의 말씀에 따르면 믿음이 없다는 말입니다. 아무것도 아니라는 말입니다.

병이 나면 우리는 아무 일도 할 수 없습니다. 병이 나면 우리는 병 낫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는 것처럼 우리에게 사랑이 부족하면 모든 일을 다 그만두고 일단 우리 마음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가득하기를 위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은혜를 받으며 하나님께 기도하며 하나님의 은총을 간구하는 자리에 서야 합니다. 만약에 내 마음에 사랑이 부족한데도 불구하고 내가 작은 능력을 소지한다면 우리는 더 큰 사건만 일으키고 우리는 더 큰 어려움만 일으킬 것입니다.

사랑이라는 것은 선택적 요소가 아니라 바로 믿음의 출발점입니다. 사랑이 없이 어떤 영적인 일을 한다는 것은 출발선상에 서지 않고 뛰고 싶을 때 뛰어 결승선상에 들어가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경기진행자에게 쫓겨납니다. 여러분 일정한 경기 출발선이 있어서 모두가 거기서 엎드려 있다가 총소리와 더불어서 뛰어서 결승선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런데 갑자기 구경하고 있던 사람이 갑자기 레인에 뛰어 들어 결승선에 먼저 들어가려고 한다면 어떻게 하지요? 경기 진행자가 어떻게 합니까? 나가시오라고 합니다. 그래도 안 나가면 끌어냅니다. 우리 인생의 삶에는 바른 출발선상에 서고 바른 레인으로 돌아가 바른 종점에 도착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비로소 사랑이라는 출발선상에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우리는 하나님의 역사를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제가 오늘 우선적인 것과 종속적인 것에 대해서 말씀드립니다. 우리 삶에는 우선적인 것과 종속적인 것이 있습니다. 쉬운 말로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여러분들 아마 지금쯤은 아마 그 주기를 파악을 하셨을 것입니다. 제가 여름에 양복을 세 가지 가지고 주일마다 입습니다. 아직까지도 이것을 파악하지 못한 이들은 관찰력이 상당히 없는 것입니다. 제가 세 가지를 가지고 입는데 이 다음 주일에 어떤 색깔의 옷을 입고 있는지 여러분 이미 알고 계시지요? 제가 제일 먼저 이번주일에는 어떤 양복을 입을까 결정을 합니다. 그리고 나서 어떤 셔츠를 입을까 결정을 합니다. 그 다음에 어떤 넥타이를 맬까 결정을 합니다. 바로 우리들에게 먼저 우선적으로 결정되고 그 후는 종속적으로 결정됩니다. 양복의 색깔에 따라서 와이셔츠도 결정하고 그리고 넥타이도 결정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삶에는 우선적인 것과 우선적인 것에 종속적인 일이 있습니다. 우리의 삶에 있어서 믿음의 삶에 있어서 사랑은 종속적 요소가 아니라 우선적 요소입니다. 사랑이 있어야 비로소 다른 믿음의 요소와 다른 여러 가지 능력적인 요소들이 종속적으로 따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에 사랑이 없이 종속적인 요소들이 그저 휘젓고 다니게 된다면 이것은 우리들에게 큰 어지러움과 혼란만을 끼칠 뿐입니다. 우리 성도들에게 있어서 사랑이 있고 나서 믿음의 덕목들이 이루어져 가는 것입니다. 사랑도 기본적으로 안 되어 있는데 다른 능력이 있다면 각종 문제를 일으킵니다. 봉사와 헌신하다가 문제 일으키는 사람들이 대부분 이런 종류입니다. 사랑도 안돼 있는데 시작하니 처음에는 문제가 없다가 시간이 지나면 달라집니다. 내가 최고가 돼야 합니다. 내가 주관자가 되어야 합니다. 내 자신이 기분이 좋아야 합니다. 내가 좌장이 돼야 합니다. 내 자신이 박수 받아야 합니다. 내가 남을 좋아하게 해 주어야 하고 내가 다른 사람을 움직일 수 있게 해주는 이와 같은 사람이 돼야 하고 온 우주가 나 위주로 돌아가야 합니다. 기본적인 하나님의 사랑이 안 되어 있기 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야 다만 주님께서 원하시는 일 하다가 언제든지 주님의 기쁨 따라 내려오라 하면 내려가면 돼.’ 그때 우리 마음은 평안하고 기쁠 수 있습니다. 사랑이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결국 능력이 나아지면 마음이 오히려 분요롭고 문제가 발생합니다. 자신도 괴롭고, 다른 이들도 괴롭고, 교회도 괴롭고, 식구도 괴롭고, 자식도 괴롭고, 부모도 괴롭고 모두가 괴롭습니다. 여러분 자식 괴롭히는 부모가 얼마나 많습니까? 부모 괴롭히는 자식이 얼마나 많습니까? 남편 괴롭히는 아내가 얼마나 많아요? 아내 괴롭히는 남편이 얼마나 많습니까? 식구 괴롭히는 식구들이 얼마나 많아요? 성도 괴롭히는 성도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내 주변 사람 괴롭히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리고 자신은 그것조차 모르거나 알아도 인정하지 않고 끝까지 자신이 옳다고 고집하고 싶어 합니다.

우리들의 삶 가운데 사랑조차 돼 있지 않는데 우리가 무슨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예언하는 능력과 비밀을 알아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은 사랑이란 인간이 가질 수 있는 하나님의 능력과 은사를 능가하는 기초적인 발판이 된다는 것입니다. 발판 밑에서 쑥 빠지면 우리는 저 아래로 추락하는 것입니다. 능력은 일거에 거두어 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랑은 한순간에 거두어지지 않습니다. 사랑의 특성은 영원합니다. 사랑은 변함이 없는 것입니다. 능력은 시간이 지나면 달라져요. 우리의 지능은 순식간이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사랑은 한순간에 거두어 질 수가 없습니다. 영원합니다.

여러분 영화 보신 적 있으십니까? 우리 교회 성도들은 목사가 영화를 좋아하니까 영화를 좋아하셔야 합니다. 여러분 영화 중에서 ‘봄날은 간다’라는 영화를 보신 적 있으십니까? 그 영화를 보면 마지막에 유지태라는 배우가 이영애라는 배우에게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사랑이 변하니?” 여러분 혹시 그 대사 기억하세요? 사랑이 변하니? 이렇게 물어봅니다. 사랑은 변하는 것이 아니에요. 왜 사랑이 변하지 않는데 사람이 변했을까요?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이겠죠. 사랑은 변하지 않는 것입니다. 사랑했다고 착각했기 때문이죠. 늘 말씀드리지만 사랑과 거래는 다릅니다. 사랑은 억울한 게 없습니다. 사랑은 섭섭한 게 없습니다. 사랑은 손해본 게 없습니다. 거래는 억울한 게 있습니다. 손해보는 게 있습니다. 섭섭한 게 있습니다. 사랑은 주고 끝나는 것입니다. 사랑은 주고 끝나고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줄 수 있는 것 만해도 감사한 것입니다. 내게 줄 수 있는 기회를 주신 것 만해도 감사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랑은 섭섭한 것도 억울한 것도 없고 사랑은 언제나 감사하고 기쁘고 영원한 것입니다. 거래는 내가 무엇인가 주었으니 내가 받아야 하는데 못 받았으니 섭섭하고 억울하고 가슴 아픈 것입니다. 우리는 사랑을 하는 것이지 거래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미운 사람도 없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감사할 뿐입니다. 우리는 그러니 영원히 가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은사와 능력을 원하지만 우리 주님은 우리에게 사랑을 원하셨습니다. 사랑이 원하면 능력도 은사도 결국은 자신을 위한 이기적인 것이 될 뿐입니다. 산을 옮길 만한 믿음이 있어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말씀은 결국 사랑이 없는 것은 진실한 믿음이 아니라 우리의 열심이요 믿음이 있다는 착각의 껍데기뿐이라는 것을 말씀합니다. 사랑이 없으면 우리의 믿음은 나를 위한 하나의 도구에 불과합니다. 사랑이 없는데 믿음이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마치 내 목적을 성취하기 위한 도구처럼 전락해 버리는 것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하나님은 나를 위한 도구요 그리고 우리의 능력은 하나님과 상관없는 인간의 일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것을 원할 리가 없습니다. 이제 우리는 사랑이 없는 신앙의 껍데기는 버려야 합니다.

세 번째로 3절을 보니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찌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랑은 그 어떤 선행을 행하는 것보다 더 큰 은혜와 능력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선행을 행하면 자신이 사랑이 있다고 착각을 합니다. 선행이라는 것은 내 만족을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판별이 무엇일까요? 내가 좋고 내 상태가 좋을 때가 아니라 내 마음이 안되어 있고 내가 마음이 상하고 내가 배제된다 할지라도 그것이 하나님의 일이기 때문에 좋아야 진정한 사랑이 되는 것이고 진정한 선행이 되는 것입니다. 사랑이 없는 상태에 따라 행해지는 선행이라는 것은 주님의 일이 아니라 자신의 일일 뿐입니다. 우리는 내 만족을 위해 살지 말고 주님의 만족을 위해 살아야 하는데 결국 그것은 사랑하는 삶입니다.

사랑은 의지에 매우 민감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꼭 사랑을 감정 선상에서 이해합니다. 그러나 사랑은 감정을 능가하는 것입니다. ‘좋다, 나쁘다 마음에 든다, 싫다’라는 감정 선상이 사랑이 아닙니다. 여러분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마음을 아프게 했습니다. 예수님은 기적을 이렇게 행했는데 비난받았습니다. 호산나 다윗의 자손 예수여 옷을 깔고 종려나무 가지를 휘두르며 그들은 예수님을 환호했지만 곧 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폭도로 변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감정적으로는 그들이 좋을 리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리스도의 의지로 볼 때 그들은 너무 불쌍한 존재였습니다. 자신들의 죄를 알지 못하는 어리석은 자들이었습니다. 주님은 그들을 용서했습니다. ‘아버지여 저희들이 자기의 죄를 알지 못하나이다. 자기들의 죄를 알지 못하나이다. 저들을 용서하소서. 다 이루었다.’ 주님께서는 그들을 용서하시고 그들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그들을 용서하셔서 죄를 사하시고 다 이루셨던 것입니다. 이것은 마음이 일어나는 순간적인 감정이 아니라 영적인 의지인 것입니다. 사랑은 그저 내 마음속에 탁탁 일어나는 순간적인 감정이 아닙니다. 흘러가는 감정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내 마음속에 영적인 의지를 가지고 하나님의 원하심을 따라서 내가 그것을 이루어 가는 하나님의 영적인 의지의 역사라는 것을 우리는 보게 됩니다. 참음과 깊은 생각과 배려가 포함된 것입니다. 이것은 내 자신의 솔직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 솔직한 믿음의 백성의 모습입니다.

선행을 베풀 때 우선 할 것은 이것이 나를 위한 것인가 주님과 그 백성을 위한 것인가 분별해야 합니다. 나는 없어져도 돼야 합니다. 내 마음이 상해도 돼야 합니다. 주님과 그 백성이 주가 돼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기뻐야 합니다. 언제나 내가 부인되는 순간 우리는 사랑을 이루고 주님의 뜻을 이루고 수행하는 것입니다. 늘 말씀드리지만 감정을 이기지 못하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주님의 일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하는 일마다 지금은 잘 하는 것 같지만 나중에 더 큰 문제가 될 것입니다. 선행을 베풀 때 항상 우리는 이것이 사랑에서 나오는 진정한, 대가가 없어도 기쁜 것이 되어야 합니다.

사랑과 거래는 대가를 바람과 대가를 바라지 않음과의 차이입니다. 사랑은 대가에 대해서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거래는 대가에 대해서 예민합니다. 사랑은 억울한 것도 없고 섭섭한 것도 없고 손해보는 것도 없고 늘 감사한 일만 있습니다. 거래는 억울하고 섭섭하고 그리고 손해보는 것도 많고, 대가는 어디든지 마음속에 상심하는 것이 생깁니다. 저는 우리 사랑하는 성도님들이 주님께서 우리들에게 거래하라고 말하지 않고 대가없는 사랑을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은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입니다.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은 가장 불쌍한 사람입니다. 마음에 기쁨이 없고 감사가 없습니다. 흡족함이 없습니다. 늘 섭섭하고 늘 억울하고 늘 받지 못해서 늘 마음속에 손해를 보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자 우리 옆에 있는 사람에게 인사 한번 합시다. 옆 사람에게 고백합니다. ‘당신을 진심으로 사랑합니다.’ 자 우리 옆에 사람한테 한번 얘기합시다. ‘당신 무슨 일을 해도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다시 한번, ‘다시 한번 당신 마음대로 사십시오. 그래도 내가 사랑합니다.’ 갑자기 왜 또 이상해집니까? 사랑은 다 이해하는 것입니다. 자, 다시 ‘당신 살고 싶은 대로 살아도 내가 사랑하겠습니다.’ 갑자기 이상해지는 것 같아요. 자 다시 ‘당신 살고 싶은 대로 살아도 사랑하겠습니다.’ 여러분 그 말이 상대방을 꽁꽁 묶어두는 것입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사랑이라는 것은 모든 것을 끝까지 참고 믿고 바라고 견디는 것입니다.

우리가 정말 사랑하면 마음이 애틋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상대에 대해서 정말 애틋한 사랑으로 무엇이든지 주고 싶어지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4장 8절을 보면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잠언 10장 12절을 보면 ‘사랑은 모든 허물을 가리우느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사랑은 모든 허물을 가리우느니라’ 다른 사람의 죄가 보이고 다른 사람의 허물이 보이면 내 마음에 사랑이 없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죄가 보이고 다른 사람의 허물이 보이면 내 마음에 사랑이 없는 것입니다. 옆에 있는 사람의 죄와 허물이 보입니까? 옆에 사람의 죄가 보입니까? 옆의 사람의 허물과 죄가 보이면 내 마음의 사랑이 부족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랑하면 옆 사람의 허물이 안 보입니다. 허물이 안보이고 죄가 안 보이고 그저 그냥 좋은 것입니다. 자 우리 서로 한번 얘기해보세요. ‘나는 그저 당신이 좋아요.’ 여러분 생각하세요. 사랑하면 다 좋은 것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많은 것을 우리 안에 자연히 채우게 됩니다. 중요한 것은 채우는 것만 아니고 우리 자신을 비우는 것으로 인해 자연과 함께 순화되고 주님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주님의 겸손과 관용과 용서와 사랑이란 곳 자신을 비움입니다. 미움을 비우고 분노를 비우고 어리석은 판단과 그 근거를 비우고 오직 주님이 주신 사랑의 심정만을 남겨서 그 사랑으로 이 세상을, 이 세상 살아가는 사람을, 이 세상일들을 판단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행복하지 못하는 것은 우리가 많은 것을 알지 못하고 내 안에 채우지 못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많은 것을 비우지 못해서 우리는 행복하지 못한 것입니다.

저는 오늘 이 자리에 오신 많은 성도님들이 목사인 제 설교를 들으며 판단하고 비판하기 위해서 이 자리에 있다고 믿지 않습니다. 어떤 대결 구도 속에서 내가 이기나 네가 이기나 한번 해보자 하는 마음으로 저는 설교하고 있지 않습니다. 물론 어떤 특별한 집회인 경우에 영적인 대결구도가 있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보통 하나님 앞에 예배드릴 때 그렇게 마음먹지 않습니다. 대부분 우리 성도님들은 하나님께 예배드리러 나온 것입니다. 그 중에서 목사의 설교를 듣고 은혜 받기 위해서 경청한다고 저는 믿고 있습니다. 이것이 사랑의 마음입니다. 목사는 성도를 위해 사랑으로 설교를 준비했고 성도목사의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한다라고 생각해서 사랑으로 받아들인다고 믿습니다. 적어도 이런 사랑과 신뢰가 있기에 매주 비슷한 말씀을 드리는 것 같지만 새로운 고민에 빠지고 심령을 쥐어짜는 부담 속에 마다않고 기쁜 일로 여겨 그 일 진행하고 있습니다. 우리 성도들은 설교를 들으면서도 대결구도가 아니라 사랑의 권면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에 순한 심령으로 마치 그 꼴을 먹는 양이 되어 기쁨으로 흡수하리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따라서 합시다. ‘피차간에 사랑이 없으면 이 세상은 지옥으로 변합니다.’ 피차간의 사랑이 없으면 이 세상을 지옥으로 변하는 것입니다. 사랑하지 않으면 믿지 못하고 믿지 못하면 의심하게 되고 의심이 생기게 되면 분노와 질투와 시기와 미움이 자신의 마음과 눈을 찌르고 우리는 어리석은 자가 되어 사단의 준동에 우리 자신을 맡겨 그의 도구가 되고 사단의 일을 하는 불쌍한 처지로 전락하다 멸망하게 됩니다.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그야말로 이를 악물고라도 마지막으로 사랑의 끈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내 마음에 사랑이 지배하지 않고 분노가 지배한다면 나는 속히 나 자신의 삶을 다 내려놓고 하나님 앞에 회개합니다. 사단과의 고리를 끊어야 합니다. 왜 우리가 예수 믿는 왕 같은 제사장이요, 하나님이 백성인데 우리의 심령과 삶을 사단의 종노릇하는데 내려놓아 종처럼 끌려 다니며 멸망의 자리에 이르겠습니까? 사랑은 마음대로 흘러가는 대로 흘러가는 감정 선상의 것이 아니라 의지의 면이 대부분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감정은 순간에 흘러가는 것이지만 영적인 의지는 영원한 우리를 세우는 책임과 결과에 대한 영원한 결실을 우리에게 누리게 하는 것입니다. 일순간에 우리를 맡기는 어리석음이 아니라 주님의 영원한 계명에 우리를 맡기는 지혜롭고 위대한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두 가지 중에 한 가지 선택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느냐 사단의 자녀가 되느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하여 주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드러나는 모양으로 우리 이웃을 우리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다른 인간적인 궤변이 여기 필요 없습니다. 무조건적으로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 부패한 인간이 얼마나 사랑하기 어려우면 원수를 사랑하라 오른뺨 때리면 왼 뺨을 대라 오리를 가고자 하면 십리를 가라 겉옷 달라하면 속옷까지 주라라고 말씀하겠습니까? 이 어려운 관문을 넘어야 우리는 사랑할 수 있기에 우리 인간들은 그만큼 사랑하기 어렵기에 이와 같은 어려운 난제들을 우리에게 놓고 그것을 풀어야 결국 너희는 사랑할 수 있다고 우리들에게 사랑을 요구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반드시 이 관문을 넘어 승리해야 합니다. 우리 사람들 화내고 성질내는 것은 기독교적인 사랑의 관점에서 보면 너무 초라하고 누추한 것입니다. 자신을 향한 통곡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사랑 대신에 성냄과 누추한 인간의 감정이 앞선다면 우리는 회개의 발 빠른 행보를 이루어야 합니다. 우리 마음에 사랑의 심정이 일어날 때까지 회개의 기도의 자리에 굽은 무릎과 허리를 펴지 말아야 합니다.

지난여름에 우리 의료선교단이 필리핀에 선교를 하러 갔는데 첫째 날 어려운 일을 당한 것 같습니다. 무장 강도들이 한 두명이 아니라 떼거지로 와서 그 긴 총을 사람들에게 겨누고 심지어는 목에 겨누고 가방을 뺏고 돈도 뺏고 여러 가지 기물들도 다 뺏어서 가지고 간 것입니다. 뺏긴 것도 뺏긴 것이지만 얼마나 마음속에 두려움이 들었겠습니까? 생전 우리는 총을 직접 몸에 겨누고 하는 경험은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 소식을 듣고 분노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 영혼들이 너무나 가엾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자기들을 돕기 위해서 갔는데 자신을 돕기 위해서 온 것을 번연히 알고 있으면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돈 몇 푼 그것이 너무나 마음속에 욕심이 나서 정말 사람들이 할 수 없는 그와 같은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을 볼 때 너무 그 영혼들이 가엾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기도하고 있습니다. 언젠가 그 심령들이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돌아와 그 뒤에 복음의 앞줄에 설게 될 것을 믿습니다. 너무나 가엾고 불쌍합니다. 자기들의 일을 모르는 것 같아요. 아버지여 저들은 자기의 일을 알지 못합니다라는 기도 그대로입니다. 반드시 그들이 변화받아 하나님 앞에 스스로 자복하고 회개하고 돌아와 그들이 복음을 전하는 가장 앞줄에 설 줄로 믿습니다. 우리는 가고 또 가게 될 것입니다.

지난 시절 미워하고 시기하고 질투하고 남 잘되는 것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내 마음에 안 들면 모두를 불편케 했던 제 자신을 회개합니다. 내 자신의 무능과 게으름과 그리고 내 자신의 어려움을 오히려 인정하지 않고 다른 사람을 비난함으로 숨으려고 했던 어리석음과 죄악을 회개합니다. 내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에 싫어하고 분노하며 마치 내가 하나님과 같이 되어 남을 판단하고 내가 다른 사람보다 낫다고 생각했던 때가 분명히 많이 있었습니다. 모든 것이 내 기준이 되었고 생각이 내 헛된 상상과 부패된 지식과 어리석음에 근거해 남을 판단하고 힘으로 쳤던 모든 것을 회개합니다. 하나님과 성도들 앞에 용서를 구합니다. 이제 더욱 우리는 사랑하며 죄악을 단호히 내 마음속에 끊어내기를 소원하며 하나님의 백성으로 사랑으로 살기를 소원합니다. 우리 모든 성도들은 이제 새로운 마음으로 또 하루를 시작하며 우리 마음에 사랑이 녹아져 있고 우리말에 사랑이 녹아져 있고 우리 행동에 사랑이 내어 비치는 성도들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사람이요, 하나님의 사랑의 역사를 이루는 성도인 것을 하나님과 만인들이 알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최 종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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