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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랑② - 사랑은 무례히 행치 않습니다 (고전 1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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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지난주에 주님께서 허락하신 우리 마음에 있는 사랑은 사람들이 끼치는 감동이나 능력과 선행을 능가하는 힘과 역사라는 것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정말 이 세상에 살아가는 삶의 원칙과 행동 수칙이 주님이 우리에게 허락하신 사랑이라면 우리는 세상에서 화를 낼 필요도 없고 분을 품을 필요도 없고 성을 낼 까닭도 없다 생각합니다. 다툼과 미움과 질시와 고통과 눈물도 우리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일이라 생각이 듭니다. 아마 서로 아끼고 위로하고 살기에도 우리의 삶의 시간은 너무 짧다라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은혜받기로 결심하는 경우도 있고 살아가면서 시험받기로 결심하는 경우도 있는 것을 봅니다. 은혜받기로 결심하면 모든 것이 다 은혜로운 것을 봅니다. 귀에 거치는 소리도 없고 눈에 거치는 일도 없고 모든 것이 다 좋고 기쁘고 감사하고 소망에 찬 것을 봅니다. ‘짜증나는 것도 피곤해서 그래’ ‘아직 덜 성숙해서 그렇지’ ‘환자니까 그래’ 하고 생각하며 넘어갈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시험받기로 결심하며 산다면 모든 것이 다 우울하고 시험에 들게 됩니다. 이런 때 우리는 속히 영적인 회복을 이루어야 합니다. 그저 모든 것이 마음에 들지 않고 모든 것이 눈에 거슬리고 모든 것이 귀에 걸리고 모든 것이 마음에 갈등과 분란의 요소로 작용하는 때입니다. 다른 사람은 문제가 없는데 실제로 짜증나고 문제가 있는 것은 나 자신이라는 것입니다. 몸이 아프면 괜히 짜증이 나듯이 우리 마음도 병들면 괜히 짜증이 나고 내 문제를 투사시켜 사람들을 괴롭히며 못살게 굴면서 살게 되는 것입니다. 자신이 짜증을 내면서 오히려 다른 사람들에게 ‘왜 괜히 이렇게 만드느냐’ 하고 생각을 합니다. 그동안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너무 많이 괴롭혀 왔고 또 다른 사람에게 너무 무례하게 지낸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한번 해봅니다.

환자의 특징은 자신을 환자라고 생각하지 않는데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자신이 환자임을 인정하여서 치료받기에 전력을 한다면 그는 속히 회복할 수 있고 자신을 돌이킬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에 자신이 환자인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그 병은 점점 더 중해지고 나중에는 치유의 시기를 놓치게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보통 내 자신이 육신이나 마음의 병이 들었다고 생각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 자신이 사람을 만나거나 아니면 다른 일을 하는 것보다 치료와 치유에 힘을 기울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모든 일을 이룬 후에 다른 사람들에게 기쁨과 즐거움을 줄 수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내가 성령충만한가 하는 것을 시험하기 위해서 내 옆에 있는 사람이 훌륭해 보이는가 내 옆에 있는 사람이 내게 도움을 주는 분인가라는 것을 한번 생각해 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내 옆에 계신 분이 정말 존경스럽고 훌륭해 보이고 내게 도움을 주는 분으로 여겨진다면 우리는 성령충만한 것입니다. 그런데 내 옆에 있는 사람이 아무래도 나보다 못하고 부족하고 내가 좀 나은 것 같다라고 생각되면 우리는 그 시간 성령충만과는 거리가 먼 생활에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렇게 우리는 우리의 삶을 살아가면서 우리 인생의 여러 면모 중에 특별히 사랑의 면모 중에 “무례히 행치 않고”라는 오늘 본문 5절의 말씀을 잠깐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사랑의 여러 가지 면모에 대해서 고린도전서 13장은 말씀하고 있는데 우리는 그 가운데 사랑은 무례히 행치 않는다. 무례하게 행치 않는다라는 것을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첫째 우리가 생각하는 것은 사랑은 무례히 행치 않는다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주변의 사람들을 보면 너무 무례한 사람이 많습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을 보면 사랑은 무례하게 행치 않는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성품은 우리들에게 무례하게 살도록 우리들을 만들지 않으셨습니다. 우리의 죄악된 성품이 우리를 무례하게 말하게 하고, 우리를 무례하게 행동하게 하고, 우리로 무례하게 모든 일에 사람에게 상처주고 일을 망가뜨리고 하나님의 뜻을 어그러뜨리게 하는 것을 봅니다.

그러면 도대체 어떤 것이 무례함일까요?
하나님의 뜻을 생각함 없이 항상 다른 사람을 배려함 없이 그저 자기 생각과 세계 속에서 자신이 모든 우주의 핵심이 되어야 하는 이와 같은 어리석은 사고인 것입니다. 내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은 다릅니다. 하나님이 세워주기 전에 벌써 내가 여기서 중심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하면 그 순간부터 우리에게 무례한 생각과 행동이 나오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그 백성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내 자신이 주장하고 가르쳐야 하며 내 말에 다른 사람이 따라야한다고 생각하면 이것은 이미 무례한 지경에 와있는 것입니다. 무례함의 특징은 자신을 무례하다고 생각하지 않고 자신이 마치 하나님의 사자라도 된 것같이 방자한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유다를 침공한 앗수르의 산헤립왕의 신하 랍사게는 유다 백성에게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보내지 않았으면 내가 너희에게 왔겠느냐.” 그리고 히스기야 왕과 유다백성을 이간시켜서 유다를 멸망시키려 하는 것을 봅니다. 매우 무례하고 방자한 일을 행하는 것을 봅니다. 마치 자신이 하나님의 사자인양 이와 같이 거짓행위를 하는 것을 봅니다.

그런데 왜 우리가 무례해지는 것일까요? 영적으로 상태가 좋지 않기 때문입니다. 영적으로 상태가 좋다면 우리는 절대 무례할 수가 없습니다. 겸손한 사람이 어떻게 무례한 행동을 할 수 있겠습니까? 겸손한 사람이 어떻게 무례한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영적인 교만과 판단이 무딘 상태입니다. 하나님과 사람 앞에 교만한 상태입니다. 교만은 멸망의 선봉입니다. 다른 사람과 자신이 하나님 앞에 이루어야 될 모든 일들을 분별하며 이루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자신의 행위는 옳고 다른 사람은 언제나 틀렸다고 비난하고 공격하는 영적 판단의 무딘 상태를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가룟 유다는 나드 옥합을 깨어 향유를 부어 예수님의 발에 붓고 머리털로 그 예수님의 발을 씻는 마리아를 비난했습니다. 그 향유를 팔아서 300데나리온에 값을 받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었으면 좋지 않겠느냐라고 비난을 합니다. 그러면 자신의 것을 내어 놓을 생각을 해야지 자신의 것을 내어놓지 않고 오히려 주님께 헌신하는 다른 사람을 비난하는 모습, 그러나 그 마음에는 실제는 그 돈에 대한 탐냄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내 욕심 때문에 내 탐욕 때문에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비난하고 이와 같이 힐난하는 경우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적인 열등감이나 그 열등감이 과시욕으로 투사될 때 우리는 무례한 행동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든지 열등감이 있습니다. 누구든지 마음의 상처가 있는 것입니다. 세상 살면서 상처가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늘 이리저리 생채기를 내면서 자라 삶의 깊은 흉터가 남아있는 상처들이 우리들에게 있습니다. 우리는 그와 같은 상처들을 치유받는 것입니다. 예배를 드리면서도 하나님께 찬송하고 기도하고 말씀을 받고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면서도 우리는 우리의 상처를 치유받는 것입니다. 사람과의 대화 속에 하나님께 기도하며 봉사와 헌신을 이루며 우리 자신을 치유받는 것입니다. 이 치유받음이 없으면 우리는 그 상처 때문에 나 자신을 괴롭히고 다른 사람을 괴롭히는 극한의 상태에 빠지게 됩니다. 내 열등감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무례하게 행하고 그것이 과시욕으로 드러나 다른 사람에게 나를 휘두른 이와 같은 모습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자랑하지 않아도 될 것을 자랑하며 남에게 나타내기 위해서 남을 비난하고 공격하지 않아도 될 터인데 그와 같은 행동을 하는 것을 우리는 보게 되는 것입니다. 더욱이 우리가 무례하게 행하는 것은 사단에게 휘둘려 있는 영적인 혼미의 상태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도 모르게 사단에게 종노릇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경우 영적 일관성도 없고 또 자기자신이 우주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도대체 이런 경우에는 믿음과 사랑이 설자리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모두가 양면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소극적인 사람도 적극적인 면이 있고 늘 부정적인 생각을 하는 사람도 긍정적인 면이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이런 면 저런 면 다 양면적으로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극단을 달리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변화무쌍합니다. 이것을 우리는 사람의 말로 표현하면 ‘변덕스럽다’라고 이야기하기도 하고 또는 ‘인격의 파탄이 이루어졌다’라고 이야기도 합니다. 정말 우리 인격이 파탄될 만큼 변화무쌍하게 우리의 삶에 말과 생각과 행동을 이루는 것을 보게 됩니다. 자기 위주의 사고 자아위주의 사고 주님을 삶의 지렛대로 삼자는 사고의 결과입니다. 이런 무례함으로 결국 그 피해를 누가 받습니까? 그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피해를 받는 것입니다. 가장 가까운 가족들이 피해를 받습니다. 그리고 성도들이 피해를 받고, 주변사람들이 피해를 받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하나님의 교회가 피해를 받습니다. 그리고 결국은 자기 자신이 가장 큰 피해의 대상자가 됩니다. 결국 인격에 파탄이 이루어지게 되고 마침내 하나님께서 그를 손대어 그를 치유하시고 고칠 수밖에 없는 상태에 있다면 이것은 큰 문제인 것입니다.

여러분 언제나 이런 말씀드렸지요. 여러분 한번 따라해 봅시다. ‘하나님의 손으로 우리를 축복하게 합시다’ 우리가 늘 하나님께 헌신하고 늘 겸손하게 지내고 늘 하나님의 은혜로 살면 하나님의 손으로 우리를 축복하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손은 작아서 하나님께 적게 드리고 하나님의 큰 손으로 우리를 축복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의 그 큰 손으로 축복하게 하지 못하고 오히려 우리가 하나님의 손으로 우리를 치시게 한다면 그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일입니까?

저는 지금도 어리석지만 지금보다 더 어리석은 때가 있었습니다. 무엇인가 하면 제가 목사로서 성도들에게 늘 무엇인가 도와준다고 생각하던 이런 어리석은 때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제가 그것을 깨닫는 때가 있었습니다. 제가 성도들에게 무엇인가를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성도들이 목사를 돕고, 제가 성도를 세워드리는 것이 아니라 성도가 목사를 세워서 목사를 양육하고 만들어간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정말 그 사실을 깨달으니 성도들의 사랑이 애틋해지고 더욱더 감사하며 그 마음속이 진실한 애정과 진실한 사랑의 마음이 더욱더 깊어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성도들이 목사를 가르쳐 오히려 하나님의 일을 하게 한다는 것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목사가 성도들을 돕는 게 아니라 성도가 목사를 돕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나서부터 얼마나 마음에 기쁨과 감사와 은혜가 넘치는지 마음속에 하나님께 늘 감사하는 마음과 성도들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우리가 어리석었을 때 내가 남에게 도움을 주고 내가 남보다 우수하고 그리고 내가 남에게 무엇인가 우월하다는 생각에 빠지게 됩니다. 내가 남을 가르쳐야 되고 다른 사람이 내 말대로 움직여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어느 날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순간 그것이 역전이 됩니다. 다른 사람에게 감사하고 내가 늘 배워야 하고 존경스럽고 부족한 나를 이렇게 대해주는 것만 해도 감사하다는 마음이 들지요. 물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고 하나님의 은혜는 겸손한 곳으로 흐른다고 수없이 말씀드렸습니다. 결국 우리가 무례하다는 것은 내 자신을 잊고 하나님 자신을 잊고 그리고 마음대로 사단의 손에 이끌려져 다니는 어리석은 일입니다. 정말 우리 주변에 보면 무례한 경우가 너무 많습니다. 무엇인가 휘두르는 경우가 너무 많은 것을 봅니다. 생각없이 말하고 하고 싶은 말 다하고 하고 싶은 대로 행동하고 그리고 자기 자신에 대해서 후련해하는 이와 같은 경우를 봅니다. 후련해 하지도 못하고 마음속에 갈등만 더 증폭될 뿐이지요.

두 번째, 우리가 생각하는 것은 무례히 행치 않으려면 우리는 어떤 각오와 행동을 이루어야 합니까?
나는 하나님의 것이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내 마음대로 생각하고 행동할 수 없다는 하나님의 주권을 생각해야합니다. 악한 사람과 선한 사람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악한 사람은 다른 사람 어떻게 되도 내가 기뻐야 합니다. 선한 사람은 내가 어떻게 되도 다른 사람이 기뻐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 마음에 일어나는 생각을 다 내뱉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 상하더라도 내 마음을 정화시켜 거치고 거쳐 마침내 정화된 말과 행동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나는 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에 내 마음대로 말하고 행동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우리는 함부로 말하고 함부로 행동할 수 없는 것입니다. 나 때문에 하나님이 평가받기 때문입니다. 항상 나 때문에 하나님이 평가 받기 때문입니다. 항상 하나님이 무엇을 기뻐하실까하는 생각을 하고 살아갑니다. 영적으로 깨어있고 민감해서 내가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는지 유익을 주는지 구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무례한 사람은 내가 다른 사람에게 유익을 주는지 피해를 주는지 구별조차 못합니다.

내가 늘 내 기분에 맞고 내 마음 원하는 대로 해야 편안하다 하면 이것은 빨간불입니다. 이기적인 마음으로 결국 마지막 자기 마음까지도 상합니다. 세상의 다른 어떤 사람과 상황은 도저히 내 마음을 마음대로 채워줄 수 없습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세요. 이제 벌써 여름이 곁을 스치는 것 같습니다. 이제 조금 있으면 가을이 올 것입니다. 여러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긴팔 옷 준비하기 귀찮으니까 가을 오지 않게 해주세요.’ 그렇게 기도합니까? ‘겨울은 싫어요. 여름만 있게 해주세요’라고 기도합니까? 우리는 여름 지나면 당연히 가을 온다고 생각하고 가을 지나면 겨울 온다고 생각합니다. 더운 나라도 봄, 여름, 가을, 겨울 나름대로 있습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자연에 우리는 자연히 순응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내가 원해도 원치 않아도 계절은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 변화됩니다. 나는 하나님의 섭리를 거역하고 살 수 없습니다. 내가 아무리 여름옷 입고 겨울 지내겠다라고 해도 안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깨달아 알고 이제는 나는 거기에 따라야 되겠다고 마음에 결정을 합니다. 왜 계절의 섭리에는 결정하고 계절의 섭리에는 따르는데 왜 하나님의 섭리는 못합니까? 자연은 하나님의 섭리를 나타낸 가장 중요한 투사체인데 왜 자연은 따르면서 하나님의 은혜에 섭리에는 따르지 못합니까? 결국 우리는 계절을 바꿀 수 없습니다. 내가 계절에 맞추어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바꿀 수는 없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섭리가운데 내 마음을 순복시키고 내가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 주의 역사를 이루는 것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뜻을 끌어내려 내 뜻에 맞추는 것이 아니라 내 뜻을 어떻게 해서든지 하나님 앞에 맞춰가는 것입니다. 내 마음을 시원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시원하게 해드리는 것이고, 그 하나님을 시원하게 해드리기 위해서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시원하게 하는 것입니다. 내 주변에 있는 사람이 상처받고 마음 괴롭고 눈물 흘리고 어렵다면 벌써 그것은 우리 마음에 하나님의 뜻을 이룸이 아닌 것입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우리 삶 가운데 무례히 행해서는 안됩니다. 사랑은 무례히 행치 않습니다. 성도는 무례해서는 안됩니다. 성도들 중에 무례한 사람이 있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나 때문에 마음이 평안하고 평안을 줄 수 있어야 합니다. 내가 늘 다른 사람에게 ‘무익한 종이다’ 하는 겸손한 마음을 가져야 됩니다. 내가 늘 ‘다른 사람에게 유익과 도움을 주고 있어’ 생각하면 이것도 빨간 신호입니다. 결국 우리는 늘 내가 부족하다 생각할 때 이때가 내가 남을 돕고 있는 것입니다.

무례히 행치 아니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한번 따라해 봅시다. ‘마음관리, 말관리, 행동관리’ 여러분 다른 사람에게 무례한 사람으로 나타나고 싶지 않잖아요. 그런데 무례히 행동할 때가 있지 않습니까?

첫째 마음을 관리해야 합니다.
내 마음이 주님의 천국이 돼야 합니다. 지금은 주님이 내 마음에 평안과 기쁨과 한없는 감사를 주시는 구나라고 느껴야 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것은 평안이에요. 어떤 경우에도 평안이 깨지면 하나님이 주신 것이 아니라 사단이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것은 평안입니다. ‘샬롬’ 하고 인사를 하지요. “평안이 있으라. 평안하십시오. 평안 합시다.” 우리는 서로에게 인사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마음은 평안한 것입니다. 평안이 깨지면 하나님의 은혜는 사라진 상태인 것입니다. 자, 우리 옆에 있는 사람한테 한번 물러봅시다. 평안하세요? 다시 한번 물어보세요. 평안합니까? 평안하지 않으면 지금 사단이 지배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음이 평안하고 자유롭고 내 옆에 있는 사람을 축복해주고 싶어야 합니다. 그리고 누구든지 축복해주고 싶어야 합니다. 미운 사람 있거나 질투하거나 시기하는 마음이 있다면 이것은 내 마음이 사단에게 지배받고 있다고 분명히 확신해야 합니다. 그리고 속히 그곳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내 마음이 주님이 주시는 천국을 이루고 주님의 은혜의 꽃밭이 돼야 합니다.

둘째로 언어관리를 해야 합니다. 말의 관리 언제나 그 말에 감사가 넘치고 세움이 넘치고 감격과 감동이 넘칩니다.
기회를 다른 사람에게 제공합니다. 여러분 다른 것은 다 잊어버려도 이건 꼭 기억하셔야 합니다. 내 기쁨으로 다른 사람을 기쁘게 해주려는 것보다 우선 되는 것이 있습니다. 내 가진 것으로 다른 사람을 기쁘게 해주는 것보다 우선되는 것이 있어야 됩니다. 그게 무엇인줄 아세요? 다른 사람의 기쁨으로 내 마음으로 기쁘게 할 수 있을 때 나는 진정한 행복자가 됩니다. 다른 사람의 기쁨으로 내 마음이 기쁠 수 있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의 것으로 내가 마음에 기쁠 수 있을 때 우리는 진정으로 기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내가 기쁨을 가지고 다른 사람에게 다 나눠줘야 해.’ 이것은 매우 이기적이고 자아도취적인 생각인 것입니다.
우리는 우는 자들과 함께 울되 웃는 자들과도 함께 웃을 수 있어야 합니다. 어려운자들과 함께 마음으로 다 행하여 낮추되 잘되는 사람을 진정으로 축복하고 그것 때문에 기쁠 수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세상에 진정한 인격은 다른 사람의 기쁨을 내 기쁨으로 삼을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샛째로 행동의 관리를 해야 합니다.
벌써 영적으로 다른 사람의 마음이 내 눈과 마음에 와 닿지 않고 행동하면 그때는 실수하는 것밖에 없습니다. 여러분 실수할 때, 실수를 만회하려고 자꾸 무엇을 덧붙이면 더 큰 실수만 됩니다. 정말 실수했을 때는 모든 것을 중단하고 하나님 앞에 회개하며 깊은 묵상과 침잠 속에 내 자신이 하나님 앞에 은혜를 회복하고 그 다음에 말하고 행동하셔야 합니다.

우리 실수할 때 자꾸 그 실수를 만회하려고 이러저러하게 또 덧붙이면 더 어려워지는지 아십니까? 간단하게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제가 늘 설교하지 않습니까? 목사의 입을 떠난 설교말씀은 하나님의 은혜의 말씀이 되어서 성도의 마음에 각각 박히기 때문에 그것은 성령께서 역사하시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목사된 입장으로서 성령께서 역사하시니 설교를 준비할 필요도 없고 그저 마음대로 지내다 아무 말이나 뱉으면 그것이 설교가 되겠지 성령이 역사하겠지 이렇게 생각할 수는 없잖아요? 목사는 또 마음대로 열심히 또 노력을 해야 되고 애를 써서 또 하나님 앞에 좋은 말씀을 준비하는 것이 또 성령충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어떤 때는 설교하다가 좀 정말 잘 안 되고 정말 설교가 잘 못한다라고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 때에 설교가 잘 안되고 잘 못한다 생각할 때 그것을 만회하려고 자꾸 덧붙이게 되면 어떤 결과가 나타나는지 압니까? 설교도 잘 못하고 길게 해요. 그런데 오늘 설교를 못한다고 설교를 짧게 하면 ‘설교는 잘 못하지만 그래도 짧게는 했다’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둘 중에 하나라도 좀 나아야 되지 않겠습니까? 설교는 못했지만 그래도 짧게 했다가 더 낫지 않겠습니까? 설교도 잘 못하면서 길게 한다. 굉장히 심각한 것입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세요. 우리의 삶 가운데 무엇인가 실수를 한다고 생각할 때 우리는 모든 것을 빨리 중단해야 합니다. 실수를 만회하기 위해서 뭔가를 덧붙이면 그 순간 실수가 계속 확장되어 가고 계속 넓어져 가는 것입니다. ‘아, 내가 무엇인가 무례히 행하고 있고 실수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즉시 침잠해야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해야 합니다. 우리가 인간적인 삶에서 뭔가 잘못하는 것은 일단 하나님과의 영적인 관계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내 마음이 겸손하지 못하고 내 마음에 갈등이 있고 내 마음속에 평안이 없다는 것은 내가 영적으로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람들 성품이나 모든 행동도 무엇인가 문제가 있는 것은 우선 영적인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깊은 것 같아요? 아니에요. 관계가 올바르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내가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그 하나님의 은혜를 나타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럼 마지막 세 번째 입니다. 무례함을 당했을 때 우리는 어떻게 대체해야 하는가? 사실 우리 주변에 보면 많은 무례 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때 무례함을 당하면 마음에 상처를 받고 우리는 너무너무 마음이 괴로워지게 됩니다.
무례함을 당할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되죠? 상대를 환자로 인정하고 긍휼히 여기고 마음이 상하지 않도록 내 마음이 상하지 않도록 행복을 잃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행복은 우리 스스로가 지켜나가야 합니다. 어차피 세상은 알곡과 가라지가 함께 존속하고 있습니다. 밤에 사단이 와서 몰래 가라지를 뿌린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어쩔 수 없이 알곡과 가라지가 함께 있습니다. 그렇다면 무릇 지킬 만한 것보다 우리 마음을 지켜서 내가 어떤 경우에도 내 마음을 상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의 선한 사역을 중단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실은 결국 문제를 일으키고 마음을 상하게 하여 하나님의 일을 그만두게 하려고 사단이 역사하는 것입니다. 결국 교회일도 사람사이의 문제로 어렵게 되지 않습니까? 내 마음을 지키되 피곤하여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끝까지 마음을 지켜야 합니다. 선교하시다가 어려움을 겪었다고요? 끝까지 하셔야 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면 그 어려움을 극복하는 또 다른 하나님의 축복이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내 마음에 선한 의지를 더욱더 강화해야 합니다. 인간의 악한 면을 이해하고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님을 생각하며 위로받고 삶의 길을 표표히 가야 합니다. 사람 때문에 우리 스스로 실망하고 어떤 일을 그만 두면 그것은 사단이 목표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바라봐야 합니다.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으면 우리는 사람에게 실망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불행해집니다. 하나님은 자비와 은혜와 행복을 우리에게 주시는데 그 행복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무례함을 당할 때 정말 우리가 평안이 깨지고 우리 마음속에 정말 여러 가지 사단이 주는 생각이 우리 마음에 기쁨을 앗아갈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평상심을 유지하고 마음의 평강을 유지할 수 있도록 애써야 합니다. 우리는 스스로 내 자신의 무례함을 돌아보는 기회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저는 요즘 생각합니다. 우리 삶의 시간이 너무 짧은 것 같습니다. 여러분 아마 제 나이를 아시는 분들도 계시는데 모르시는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모르시는 분이 계시면 제가 만으로 47세이고, 한국 나이로 48세입니다. 제가 요즘 고민하는 게 뭐냐 하면 제가 요즘 장로님들하고 대화가 됩니다. 제가 전에는 장로님들하고 대화가 도무지 안 되었습니다. 세대 차이가 너무 나서 대화가 안 되는데 요즘은 대화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어떻게 대화가 이렇게 소통될까? 하고 생각했더니 제가 이미 이렇게 나이를 먹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여러분 제가 젊은 목사입니까? 나이든 목사입니까? 이런 말이 제게 위로가 되는 때가 벌써 됐습니다. 속으로 젊은 목사네 하면 그 말이 큰 위로가 되더라니까요. 저의 교회에 대다수 많은 교인이 저보다 나이가 더 적습니다. 저희 교회에는 저보다 나이 많은 교인이 그렇게 많지 않으십니다. 이전에 제가 이렇게 나이가 먹게 되리라고 전혀 생각을 못했어요. 전에는 40대 후반 쯤 되는 남자분을 보면 굉장히 나이가 많이 먹은 줄 알았는데 제가 그런 사람이 됐습니다. 장로님들하고 대화하면 전에는 재미가 하나도 없었는데 요새는 재미있어요. 들을만하고, 이렇게 됐구나 하는 생각을 합니다. 언제 이렇게 됐을까? 우리의 삶은 너무 짧습니다. 아끼고 사랑하고 애틋해하게 살기도 바빠요. 자 우리 따라서 합시다. ‘아끼고, 사랑하고, 애틋하게 살기에도 우리의 삶은 짧습니다.’ 쓸데없는 일에 삶과 생각을 소모하고 피곤하게 살아서는 안돼요. 나에게 일단 내 마음에 내 몸에 내 생각에 피곤하게 생각된다 하면 그 생각을 버리세요. ‘나 이렇게 피곤하게 살 삶의 여유가 없어.’ ‘나는 행복하게 살기에도 내 삶이 짧아. 나 갈등하고 살기에 내 삶의 길이가 너무 짧아.’라고 생각하고 여러분 피곤한 것은 잊어버리세요. 삶의 본질이 아닌 지엽적인 문제에 우리 삶을 소비하고 소모해서는 안됩니다. 정말 중요한 것 아니면 스쳐지나가고 잊어버리세요. 그리고 정말 본질적인 것에 우리 힘을 집중해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집에 먼지 있다고 자다가 일어나서 그 먼지 닦고 잡니까? 아까 깜빡하고 그릇 두개 안 씻고 왔는데 밖에서 그 생각나서 급히 집에 뛰어 들어가서 그릇 두개 씻고 나와야 마음이 편하세요? 여러분 그렇지 않아요. 본질이 아닌 지엽적인 문제는 잠시 부족해도 놔두고 나오는 것입니다.

요새 제가 전하고 많이 달라진 것 같습니다. 여러분 절 보면 좀 깔끔한 사람 같죠? 아주 조소하는 눈빛을 제가 역력히 볼 수 있는데, 제가 그래도 깔끔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제가 요새 많이 달라진 거 같습니다. 지난주에도 심방을 했습니다. 초청을 해주시고 식사를 대접해주셔서 여러분들과 같이 식사를 했습니다. 식사를 하는데 무슨 찌개 같은데 벌레가 빠져 있었습니다. 다른 사람 못 봤어요. 그래서 제가 얼른 숟가락으로 퍼서 종이로 가려놓고 계속 먹었습니다. 자주 그래요. 전에 같았으면 안 그랬던 것 같습니다. 사람 불러서 여기 왜 벌레가 빠져있냐? 바꿔 달라. 그러면 미안하다 얘기하고 한참 이런 광경이 벌어지잖아요. 또 그러면 초청한 분이 얼마나 민망하시겠습니까. 어떻게 목사님 여기에 벌레가 빠져있네요. 사람들이 야단을 치고 그러지 않습니까? 요새는 그러고 싶지 않더라고요. 그냥 떠내고 먹으면 됩니다. 무슨 생각이 드는가 하면 ‘너나 나나 그냥 같이 살자.’ 그런 생각이 듭니다. 너나 나나 같은 세상의 미물로서 그저 같이 살아가고 있는데 네가 더 깨끗하고 내가 더 깨끗하고 이런 거 없지 않느냐 그냥 같이 이렇게 지내자. 그런 생각이 들어요. 벌레나 나나 하나님의 만드신 만물 중에 똑같은 하나인데 그런 생각이 들어서 그냥 떠내고 먹습니다. 남들이 보면 혹시 또 괜히 뭔가 불편해 할까봐 그렇게 합니다. 그래도 마음이 조금 커진 것이겠지요? 작은 일에 그렇게 신경 쓰고 싶지 않더라고요. 정말 인생 그렇게 한가한 거 같지 않습니다. 시간이 별로 없는 거 같아요.

요즘은 제가 그럴 일이 없겠지만 제가 체중을 10kg 정도 뺐습니다. 그때는 아무래도 음식조절을 해야 좀 되지 않습니까? 평상시보다 조금 적게 먹고 하니까 음식이 있으면 그 가운데서 몇 개 맛있는 것 골라먹고 먹는 거 참 맛있다 이렇게 생각하고 지냈습니다. 그중에서 맛없는 음식 몇 개 먹고 모든 음식은 다 맛없어 이렇게 살지는 않잖아요. 우리 삶에 여러 가지 잡다한 많은 일이 있을 때 슬픔, 행복, 고통, 아픔, 눈물, 즐거움 그 가운데 우리는 너무 삶의 시간이 짧습니다. 언제 한탄하고 고통하고 괴로워하고 비통해하고 우리는 갈등하고 고민하고 남 미워하고 시기하고 질투하고 비난하고 공격하고 그것 때문에 마음상하고 언제 그렇게 살겠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정말 기쁨과 은혜로 내게 있어서 주어진 최소한의 시간을 본질에 집중하여 기쁨으로 살아가다 주님 부르시면 갈 때 가는 것이 우리 삶이 아닌가를 생각해봅니다.

어떻게 우리가 내일의 삶을 보장하겠습니까? 요즘은 죽음을 준비해야 한다라는 생각이 듭니다. 유서도 써놔야 됩니다. 여러분 유서도 하나 다 써놓으셔야 합니다. 언제 우리가 하나님 앞에 불려갈지 알아요? 우리는 내일을 기약하지 못합니다. 저는 요즘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책상도 정리해놓고, 자료도 정리해놓고 모든 것을 정리해서 언제 불러도 그저 깨끗하게 정돈한 생태에서 그저 부담 없이 가자.’ 하나님 부르실 때 ‘서랍정리도 안 해놓고요, 자료정리도 안 해놓고요, 제가 도저히 아직 정돈이 안됐습니다. 잠깐만 기다려 주십시오.’ 이럴 수가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준비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이제 준비해야 될 삶의 때가 오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우리가 어리석게도 엉뚱한 일에 신경쓰고 마음이나 상하고 이렇게 살기엔 우리의 삶은 너무 어리석은 것 같아요.

그 다음에 우리에게 어떤 평가가 있을까? 정말 길거리에서 만나면 저기서 보는데 저 사람 만나지 말아야지 딴 길로 돌아가는 사람 되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세상 떠나도 그 자손들에게 ‘당신의 어머님 아버님 정말 훌륭한 분들이었어. 정말 생각할 때마다 마음에 감동이 돼.’ 하는 말을 들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어떻게 당신 어머니 아버지 같은 분에게 당신 같은 사람이 났는가?’ 이런 생각 들으면 안되잖아요.

저는 이 모든 것을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아주 세속적인 말이지만 우리의 마음을 비움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나의 화려한 것, 나의 우승한 것, 금욕까지 가지고 내 마음 가운데 휘두르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을 비우는 것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늘 갈등 속에서 살고 늘 섭섭해 하게 됩니다. 늘 갈등 속에서 살고 늘 마음이 불편하고 늘 평안하지 못합니다. 사실 다른 사람을 불행하게 하는 사람은 자신이 가장 불행한 사람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무례한 사람은 자신에게 행복하지 못한 사람이에요. 무례하게 행하는데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하지 못하는데 자신이 행복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사랑과 삶과 하나님의 뜻에 대한 희망적인 마음을 품고 살아야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기대하고 사람을 기대하고 살아야 합니다. 사람 기대할 것 없지요. 그렇지만 그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기대하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좋은 점 나쁜 점 있지만 좋은 점 몇 가지 추려서 그것 가지고 그 사람 활용하고 그 사람 같이 대하고 그 사람 같이 동역하고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내게는 전혀 관대하며 다른 사람에게는 완벽을 요구하는 것 이것이 다른 사람을 공격하는 다른 사람에게 무례히 행하는 일중에 하나가 아닌가? 또한 생각합니다. 이제 우리는 행복해지기 위해서 노력해야 합니다. 우리는 스스로 행복해지려고 노력하지 않으면 우리의 삶의 시간은 너무나 짧고 그 짧은 시간을 너무 괴롭게 살다가 가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저는 목사로서 제가 가장 행복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생각해보세요. 제가 행복한 목사가 아니라면 어떻게 행복한 말씀을 드리겠습니까? 여러분 주일마다 오는데 ‘여러분 인생은 괴로운 것입니다.’ 이렇게 10번만 계속해보세요. 그러면 여러분 나가서 ‘인생은 괴로운 것이야.’ 여러분들은 그렇게 똑같이 생각한다니까요.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은혜와 평강과 기쁨을 가지고 이 세상을 살아야 합니다. 세상에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이 많습니까? 저는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는 생각은 우리 성도들은 세상에서 많은 고통들 가운데 살아가고 있다라고 생각합니다. ‘세상에서 죄나 짓고 일주일 마다 나와서 예배드리네’ 이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정말 세상에서 고통당하며 어렵게 고생하며 힘들어하는 치유받고 위로받고 격려받아야 하는 영혼들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가뜩이나 세상 고통스럽고 괴로운데 교회까지 와서 늘 고통스러운 말씀까지 들으면 우리는 어떻게 어디에서 위로를 받고 마음 붙이고 살겠습니까. 우리 자신이 행복하지 않으면 다른 사람에게 행복을 끼칠 수가 없습니다. 내 손에 행복이 묻어있지 않은데 어떻게 다른 사람에게 악수하는데 행복을 묻혀줄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는 우리 스스로 행복해지기 위하여 우리 마음에 모든 일들을 정돈해야 됩니다. 내 마음을 비우고 행복으로 채우며 평안으로 채우며 은혜로 채우며 사랑으로 채워야 됩니다. 그리고 무례히 행치 않는 것입니다. 무례히 행치 않으면 우리는 마음에 하나님의 기쁨이 생기고 그리고 우리가 무례히 행함에 대해서도 마음을 다져 상처받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로 회복을 하고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게 되면 그때 우리의 행복은 지켜지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도 주님을 사랑하는 귀한 성도님들의 마음에 하나님의 은혜로 가득 차 주의 역사를 이루는 귀한 성도들 되어 무례히 행치 않고 하나님의 은혜대로 아름다운 사랑으로 행하는 성도님들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최 종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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