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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즐거이 드린 백성들 (대상 2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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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의 분들과 웃는 얼굴로 인사합시다. “즐겁게 드리는 인생이 됩시다.”
인사가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웃었던 분들이 안색이 다 변한 것 같습니다.^^

  몇 년 전에 어느 교회의 임직자들이 임명받는 자리에 간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임직자들에게 권면하는 목사님께서 “치고 받는 일꾼이 되시기 바랍니다.”라고 하셔서 다들 깜짝 놀랐습니다. 안 그래도 교회가 종종 싸움을 잘한다고 하는데, 이거 닥치는 대로 치고 받으면 어떡하라고 치고받는 일꾼이 되라고 하시나하고 속으론 다들 불안한 마음이었습니다. 곧 권면하시는 목사님께서 설명을 해주셨습니다. 그런 치고받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 앞에 많이 바~치!고! 하나님 앞에 많이 복~ 받!는! 일꾼 되시길 바랍니다. 할렐루야!”
많이 바치고 많은 복을 받는 중직자가 되라는 말씀이셨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사실 부모로부터 많은 것을 받았습니다. 이웃으로부터도 많은 것을 받으며 살아갑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은 헤아리기도 어렵습니다. 이처럼 받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주는 것 손만 벌려서 받기만 하면 되니 말입니다. 

  그러나 나누는 것은 아무나 못합니다. 더 나아가서 하나님께 드리는 것, 하나님께 바치는 것도 아무나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먼저 바칠 마음이 있어야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바칠 마음! 이 마음이라는 것이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마음을 주시기도 하고, 성령께서 내 마음에 그러한 감동을 주시기도 합니다. 바칠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두 번째로 아무리 바치고 싶어도, 바칠 물질이 없으면 안 됩니다. 바칠 물질이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남의 것을 도둑질해서 바칠 수는 없지 않습니까? 바칠 마음이 있고, 바칠 물질이 있을 때 그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요, 또 그런 사람에게 기쁨이 더 큰 것입니다. 그래서 진정한 기쁨은 받는 기쁨보다 드리는 기쁨, 나누는 기쁨이 더 큰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선물 받을 때 기분이 좋지만, 내가 남에게 나눠줄 수 있다는 것, 내가 더더욱 하나님께 드릴 수 있다면 그 기쁨이 더 크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기뻐하는 모습입니다. 다윗이 성전건축을 준비하면서 자신의 예물을 드렸습니다. 또 방백들과 백성들이 예물을 드렸는데, 그것을 드리고 나니까 너무 좋아서 기뻐하는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드리고 나서 속상해합니다. ‘에휴~ 내가 제 정신이 아니었어. 등록금 내야 되는데 내가 지금 부흥강사한테 정신이 나갔었나봐.' 하고 드리고 나서 후회합니다. 그렇게 드린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그건 사기성이 있는 것입니다.
드리고 나서 한 없는 기쁨이 몰려오는 그런 성도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9절 말씀을 한 번 읽어보시겠습니다.
“백성이 자기의 즐거이 드림으로 기뻐하였으니 곧 저희가 성심으로 여호와께 즐거이 드림이며 다윗왕도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하니라”아멘.

말할 수 없는 기쁨입니다. 백성들도 자기의 물질을 즐거이 드림으로 기쁨이 넘칩니다. 저희가 성심을 다해서 하나님 앞에 즐겁게 드렸는데, 다윗왕도 기쁨을 이기지 못하더라는 것입니다. 뭘 팔아서 기쁜 건 봤지만 이렇게 드려서 기쁜 건 성경에 찾기 힘듭니다. 하나님 앞에 드리고 나니까 그렇게 기쁨이 넘치더라는 것입니다.

다윗에게는 한 가지 소원이 있었습니다. 나라를 안정시키고, 남북 왕조를 다 통일한 후의 그의 한 가지 소원은 하나님의 법궤를 저 텐트, 회막 안에 둘 수 없다는 것 이었습니다. 나도 이렇게 좋은 백향목 궁에 거하는데 어떻게 하나님의 법궤를 저런 회막 속에 방치해 둘 수 있느냐는 말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꼭 하나님을 위해서 성전을 짓는 것이 그의 소원이었습니다.
나단 선지자에게 고해서 하나님께 여쭤 보았더니 하나님께서 허락지 않으셨습니다. 왜 거절하셨을까요? 그는 너무나 많은 전쟁을 치뤘고 그의 손에는 피가 묻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의 아들을 통해서 그 일을 하게 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윗은 그래도 좋았습니다. 아들을 통해서 그 일을 할 수 있다니! 다윗은 아들이 건축하는데 부족함이 없도록 그 건축에 필요한 모든 재료와 물질을 그의 생애동안 다 준비해 놓았습니다. 하나님의 건축을 위해서 자신의 재물과 백성들이 예물을 드렸을 때 다윗의 마음에 큰 기쁨이 넘쳤다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을 읽어보면 1절부터 9절까지 ‘드리다’라는 말이 많이 반복됩니다. 오늘 3절에도 보니까 ‘드렸으니’라고 했습니다. 5절에도 보니 ‘여호와께 드리겠느냐’ 6절에 보니까 ‘즐거이 드리되’ 7절에 보니까 ‘철 10만 달란트를 드리고’ 8절에 보니까 ‘여호와의 전 곳간에 드렸더니.’ 9절에 보니까 ‘즐거이 드리므로’라고 했습니다.
이 ‘드린다’는 표현이 참 많이 나옵니다. 그런데 드리고 나서 기쁜 사람이 바로 다윗이었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하나님 앞에 즐거운 마음으로 드리라고 했습니다. 출애굽기에 보면 회막을 건축할 때에도 백성들이 와서 자원해서 예물을 드렸습니다. 그런데 거기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있었습니다. “즐거운 마음으로 드리지 않는 자의 예물은 받지 말것이며”즉, 자원하는 마음으로, 즐거운 마음으로, 자발적으로 드리는 예물만 받으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9:8 에 보니까 어떤 말이 있습니까? “너희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 하나님은 즐겨내는 자를 사랑하십니다.

어느 시골교회가 너무 낡았습니다. 비가 오면 비도 떨어지고, 바람이 불면 벽으로 바람이 숭숭 들어옵니다. 그들의 오랜 동안의 숙원이 성전을 새로 건축하는 것이었습니다. 시골인지라 생활들이 다 거기서 거기지 않습니까. 단 한사람 좀 여유 있는 분이 있다면, 방앗간을 운영하는 권사님이 조금 재물이 있었습니다. 어느 특별한 날을 정하고 기도회로 모였습니다. 성전 건축헌금 작정을 위한 기도회였습니다. 모여서 간절히 기도를 합니다. 이 권사님은 오질 않았습니다. 왜 안왔을까요? 가면 체면에 안할 수는 없고, 감기몸살이 있다고 핑계를 대면서 안 갔습니다. 기도회가 다 끝날 쯤 되니까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도 하고 권사가 안가서 체면도 있고 해서, ‘이젠 다 끝났겠지’하고 안심하고 어슬렁어슬렁 가서 문을 삐긋이 열고 들여다 보았답니다. 그런데 거기에 하필 약한 서까래가 하나 있던 것이 뚝 부러져가지고 이 권사님 머리를 한 대 쳐버리던 것입니다. 들어오다가 그냥 넙죽 뻗어버렸습니다. 그러면서 딱 깨달은 것이 있었습니다. ‘맞아서 깨달아지면 맞아야지. 딱 맞으니까 딱 깨달아지는 것이 ‘아이고 내가 벌 받는구나. 아이고 내가 잘못했지’였습니다. 그리고는 당장 기도가 바뀌는 것입니다. “하나님 제가 천 만원 헌금 하겠습니다!” 그 소리를 듣고 옆에서 열심히 기도하던 집사님의 소리가 바뀌었습니다. “주여 한 번만 더 내리쳐주옵소서.” 한 번 더 내리치면 이천만원이 나오지 않겠습니까?^^ 사람들은 왜 맞아야 정신을 차리는지 모르겠습니다. 자발적으로, 즐거운 마음으로 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오늘 성경에서 다윗과 이스라엘 방백들은 아주 즐거운 마음으로, 바치는 일도 즐겁지만 바치고 나니까 그 기쁨이 더 크더라는 것입니다. 우리 영신교회 교인들은 헌금드릴 때마다 기쁨이 넘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한 번 옆의 분들과 인사합시다. “즐겁게 바칩시다.” 그렇습니다. 정성을 다한 예물을 즐겁게 바쳐야합니다. 헌금 시간이 제일 즐거운 시간입니다. 왜입니까? 내 사랑을 물질로 고백하는 시간이니 참 좋은 시간입니다. ‘아이고 나는 헌금 시간만 없으면 교회 갈만한데 말이야’하는 분 혹시 계십니까? 헌금 시간 없으면 무슨 재미로 목사가 목회하겠습니까? 여러분께서 은혜 받고 헌금하는 모습 보니까 저도 즐겁고 하나님도 기쁘지 않으시겠습니까?

그러면 우리가 왜 즐겁게 드릴 수 있겠습니까?

첫째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드리는 예물이기 때문입니다.

성경 1절 말씀을 읽어보겠습니다.
“다윗 왕이 온 회중에게 이르되 내 아들 솔로몬이 홀로 하나님의 택하신 바 되었으나 아직 어리고 미숙하며 이 공사는 크도다 이 성전은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요 여호와 하나님을 위한 것이라” 아멘.

건축을 해야 되는데, 솔로몬은 아직 어립니다. 그런데 이 전은 큰 역사입니다. 거대한 건축입니다. 이 어린 아이가 감당하기 너무 힘들다는 것입니다. 더구나 ‘이 전은 사람을 위한 전이 아니요 하나님을 위한 전이라’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여기에 건축헌금이나 일반 헌금이나 드리는 목적이 있습니다. 헌금은 하나님을 위해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우리는 건축헌금을 드리는 것입니다.
왜입니까? 이 성전은 인간의 전이 아닙니다. 사람을 위한 성전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둘 거룩한 성전이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건물이라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드리는 예물은 기쁜 예물이고 영원히 빛나는 예물이고 기념이 될만한 예물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어떤 인간이나 단체를 위해서 기부 헌금을 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순수한 마음으로 했다고 해도 그것이 퇴색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어떤 대통령 입후보자를 위해서 내가 정치헌금을 했다고 칩시다. 어떤 단체를 위해서 헌금을 했다면 그것이 정말  아름답게 쓰이면 좋겠지요. 그러나 대통령들이 임기를 마치고 은퇴할 때 보면 보통 시끄럽지가 않습니다. 법정에 서기도 하고 감옥에 가기도 합니다. 그렇게 되고 나면, 내가 낸 헌금이 너무나 부끄럽기만 합니다. 내가 저런 사람을 위해 저런 헌금을 드렸단 말인지, 나는 나라와 민족을 위해 순수한 마음으로 드렸지만 안타깝기만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하나님의 성전을 위한 헌금은 영원히 퇴색되지 아니합니다. 어느 인간을 위한 헌금이 아닙니다. 목사도 목회하다가 또 하나님의 뜻이면 다른 곳으로 옮겨갈 수 있습니다. 장로님 권사님들도 평생 사시는 것은 아닙니다. 때가 되면 하나님의 나라로 돌아가고, 이 성전은 또 대를 이어서 우리의 후손들과 이 신길동 지역에 이사 오는 분들이 이 성전에 와서 예배를 드리고 말씀을 듣고 은혜를 받는 것입니다.

며칠 전, 기독교 방송의 ‘새롭게 하소서’간증프로그램을 듣다보니 그런 얘기가 나왔습니다. 자기는 어릴 때 교회가 있는 마을에 살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아무도 자기에게 교회에 가자는 말을 하는 사람이 없는 것입니다. 성장해서 서울에 와서 사는데 어느 날 너무 힘든 일을 당해 마음이 괴롭고 울적하고 눈물을 흘리며 집으로 걸어 오는데, 교회가 보이더랍니다. 어렸을 때 들었던 교회 종소리가 생각이 나고, 믿지는 않지만 교회에 들어가서 뭔가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싶은 심정이 생기더랍니다. 그래서 교회 문을 밀었더니 문이 스르르 열렸습니다. 그 문이 닫혀 있으면 어땠겠습니까? 사실 교회 문 닫아놓는 거 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우리 교회도 닫아놓을 때가 있지만 사실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지나가다 보면 믿지 않는 사람들도 교회에 들어가고 싶을 때가 있지 않겠습니까.
그가 문 열고 들어가 예배당에 혼자 앉아 있는데, 자기의 신세한탄이 나오면서 눈물이 핑 돌더랍니다. 그러다가 그것이 기도로 바뀌었답니다.
방송에 나오신 분은 그렇게 해서 교회를 처음 나가게 되었고, 너무나 슬픈 일을 당해서 멋모르고 그냥 들어갔다가 자기의 호소가 기도로 변하고, 믿는 신자가 되었다는 간증을 했습니다.

여러분, 이 예배당은 나를 위한 예배당이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을 위한, 그리고 이 예배당에 들어와서 변화되는 인생들을 위한 예배당입니다. 그들이 앞으로 주님을 위해서 하나님을 위해서 민족을 위해서 얼마나 큰 일을 감당할지 알 수 없는 일 입니다.

특별히 출애굽기 35장, 36장 이하에 보면, 모세의 시대에 회막을 건축하는데 필요한 기술자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브살렐과 오홀리압과 같은 기술자들이 있었습니다. 또 백성들이 많은 재물을 가지고 왔는데, 그 재물의 이름들이 하나씩 다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들의 헌신과 이름은 영원히 기념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성전은 인간을 위한 성전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위한 성전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드리는 성전이기 때문에 우리는 예물을 기쁘게 드릴 수 있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두 번째로 왜 즐겁게 예물을 드릴 수 있을까요?
하나님의 축복과 사랑에 대한 응답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성경 3절에 보니까 “성전을 위하여 예비한 이 모든 것 외에도 내 마음에 내 하나님의 전을 사모함으로 나의 사유의 금, 은으로 내 하나님의 전을 위하여 드렸노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모한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사랑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성전을 사모한다는 것은 곧 성전의 주인 되시는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의 응답이 바로 귀한 헌물이고 예물입니다.

또한 다윗은 하나님으로부터 많은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가 여기 드리는 예물들이 4절에 주욱 소개됩니다. 이것을 누가 계산해보니 미국의 제일가는 부자인 빌게이츠와 맞먹는 약 40조억에 이르는 돈이라고 합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많은 축복을 입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많은  전쟁을 치뤘고 그 전쟁을 통해서 많은 물질을 준비할 수 있었습니다. 다윗은 그것을 하나님의 성전건축을 위해서 다 드렸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 하나님께 다시 돌려드리는 것입니다. 받은 축복에 대한 감사요, 보답이었던 것입니다. 

오늘 성경 12절부터 14절을 보면,  “부와 귀가 주께로 말미암고 또 주는 만유의 주재가 되사 손에 권세와 능력이 있사오니 모든 자를 크게 하심과 강하게 하심이 주의 손에 있나이다. 우리 하나님이여, 이제 우리가 주께 감사하오며 주의 영화로운 이름을 찬양하나이다. 나와 나의 백성이 무엇이관대 이처럼 즐거운 마음으로 드릴 힘이 있었나이까 모든 것이 주께로 말미암았사오니 우리가 주의 손에서 받은 것으로 주께 드렸을 뿐이니이다.”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모두 주님이 내게 주신 것입니다. 다시 주님께 돌려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내게 주신 축복에 대한 감사가 바로 헌물이었다는 것입니다.

숨쉬는 공기와 생명, 쓰는 물건들과 재능, 건강까지도 모두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 올 때는 아무것도 없이 왔지만 하나님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부어 주셨습니다. 물론 어떤 사람은 넘치게 부어 주셨고, 어떤 사람은 좀 모자란 듯 부어 주셨지만 하나님이 주신 것을 가지고 생활하는 것, 이것이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그 축복에 대한 감사 그리고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고백이 바로 다윗과 백성들의 예물 이었다는 것입니다.

우리 헌물은 사랑의 표현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십니까? 그 사랑을 우리의 물질로 고백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받으셨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앞에 축복에 대한 감사를 물질로 고백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다윗의 시편을 보면 하나님에 대한 감사와 사랑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시편 18편 1절을 보면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다윗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직접적으로 고백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드리는 우리의 헌신이라면 아까운 것이 아닙니다. 즐겁게 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14장에 보면, 예수님이 십자를 앞에 놓고 계셨을 때, 문둥이 시몬의 집에서 마리아라 이름하는 여인이 자기가 결혼할 때 쓰려고 잘 준비해 놓은 인도산 나드향료 한 옥합을 가지고 와서 깨뜨려 예수님의 머리에 부어 드렸습니다. 예수님의 발에도 부어드리고 자기의 머리털로 씻겨 드렸다고 했습니다. 그 여인은 예수님께 받은 은혜가 너무 크기 때문에 자신을 깨뜨리는 감사를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감사의 표현이요, 사랑의 응답 인 것입니다. 자기 희생이 없이는 그 사랑을 고백할 수 없습니다.

성전에 어느 가난한 여인이 와서 동전 두 렙돈을 연보궤에 넣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여인의 연보를 보고 칭찬하셨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많은 가운데 작은 것을 드렸지만, 그 여인은 자신의 전 재산을 다 드렸다고 칭찬하셨습니다. 그 곳에는 그 여인의 희생과 생명과 헌신이 담겨있기에 그랬습니다.

어떤 가정이 주일에 교회 와서 온 가족이 예배드리고 집에 돌아가는 길이었습니다. 차안에서 이런 저런 교회이야기를 하게 되었습니다. 좀 비판적인 이야기를 하는 가정이었습니다. 다 큰 딸이 “성가대가 틀렸어 틀렸어. 그걸 찬양이라고 해. 장로님 기도는 뭐 그렇게 길어? 난 졸다 깨다 졸다 깨다 했어. 짧게 하면 안 되나?”하니 엄마는 “여보, 목사님 설교는 어떻고요, 지루해서 죽을 뻔 했어요. 그게 설교야 강론이야 논문이야 아휴 지겨워.”라고 합니다. 그러니 운전하던 아빠가 뭐라고 했는지 아십니까? “조용히 해! 100원내고 그만큼 들었으면 되지.”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께 받은 축복과 은혜를 생각하면 어떤 자세로 예물을 드려야 되겠습니까? 바로 즐겁게 드리는 예물은 축복과 사랑에 대한 응답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세 번째로 왜 다윗과 백성들은 즐거운 마음으로 예불을 드릴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주어진 기회에 최선을 다하는 마음 때문입니다.

마지막 26절부터 28절 까지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이새의 아들 다윗이 온 이스라엘의 왕이 되어 이스라엘을 치리한 날짜는 사십년이라 헤브론에서 칠년을 치리하였고 예루살렘에서 삼십 삼년을 치리하였더라 저가 나이 많아 늙도록 부하고 존귀하다가 죽으매 그 아들 솔로몬이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 아멘.
다윗은 영원히 살지 못했습니다. 오늘 공교롭게도 오늘 말씀 역대상 29장에는 다윗의 헌신과 죽음이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윗이 자기의 많은 예물을 드리고 방백들에게 예물을 드리게 한 것은 다윗이 임종하기 전과 그리 먼 시기가 아닙니다. 다윗은 자기에게 주어진 기회에 최선의 마음으로 예물을 드렸기 때문에 즐겁게 드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기회란 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일생의 기회란 한번 두 번 찾아오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도 50년 역사 속에 가장 큰 예배당을 건축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전에도 성전을 건축한 일이 있지만 지금같이 많은 물질과 큰 규모의 건축은 아니었습니다. 영신교회 역사에 자주 있는 기회는 아닙니다. 50년에 처음 있는 거대한 건축을 진행하고 있는것입니다. 여러분의 생애도 그렇습니다. 장로님 권사님께 남은 생애에 또 한번 건축하기는 어렵습니다. 이것이 우리 생애의 마지막 기회가 될지도 모릅니다. 기회란 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내게 주어진 헌신의 기회, 봉사할 기회, 사랑할 기회를 놓치면 안 됩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기회가 있을 때, 그 기회를 붙들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내가 뭔가 해야 될 일을 하지 못했을 때 마음에 부담이 됩니다. 내가 힘들고 어려울 지라도 내게 주어진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고 몸부림치는 분들을 보면, 저도 감동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저분은 저렇게 헌금할 환경이 안되는데...” 하는 마음이 있지만 생각한 이상으로 정성껏 힘을 다해 예물을 드리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처럼 즐거운 마음으로 드리고 힘을 다해 드리시기를 바랍니다. 그 기회를 놓치면 안됩니다.
제가 종종 드리는 말씀입니다만, 우리 교우들이 한달에 한번씩 강남 성심 병원에 가서 하자를 위로하고 찬양하면서 예배를 돕는데, 그곳에 갔더니 그 병원에 입원해 있다가 그곳에 오셔서 늘 기도하시며 병원 예배에 동참하는 나이 많은 집사님이 계십니다. 그 분이 우리 영신교회가 건축한다는 소식을 듣고 건축헌금을 주셨습니다. 어떤 분들은 지나가다가 봉투에 헌금을 넣어 가지고 와서 헌금 드리고 가시기도 합니다. 참 감사합니다. 자기가 섬기는 교회가 아닌데도 교회가 건축하는 것을 보니 그냥 못가겠다는 것입니다. 왜입니까? 그것이 그에게 축복의 기회인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이 아름다운  성전 건축에 동참하는 이 축복의 기회를 놓치지 말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윗은 이 축복의 기회에 참여한다는 기쁨 때문에, 즐거운 마음으로 예물을드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즐겁게 예물을 드릴 수 있었던 것은,
나그네 인생길에 할 수 있는 최선의 축복이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말씀 15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주 앞에서는 우리가 우리 열조와 다름이 없이 나그네와 우거한자라 세상에 있는 날이 그림자 같아서 머무름이 없나이다.” 아멘.
다윗은 자신이 나그네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나그네는 이 땅에 영원히 머무를 사람이 아니지 않습니까? 우리는 다 때가 되면 돌아갈 존재들입니다. 순례 길을 가는 나그네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이 땅에 살면서 주께로부터 받은 건강과 시간과 물질과 재능을 주님의 뜻대로 사용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이 땅에 올 때는 아무것도 없이 왔고 하나님이 필요한 것을 다 공급해 주셨습니다. 그것을 쓰다가 다 못쓰고 가면 끝나는 것입니다. 그것을 보람있고 가치있게 사용하실 수 있다면 우리 나그네 길이 더 보람있고 가치있는 길이 될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한 형제가 IMF를 당해서 한 고백입니다. IMF때 회사가 부도가 나서 많은 것을 잃어버렸답니다. 사업이 무너지고, 공장이 문을 닫고 별장도 남의 손에 넘어가고 빌딩도 사라져 버렸다고 합니다. 결국 다 넘어갔는데, 남은 것이라곤 성전건축 할 때 바쳤던 것만 남아있는 것을 깨달았다고 합니다. 내가 가진 것은 다 날아 갔는데, 하나님께 바친 것만 남아있더란 말입니다. 자기가 출석하는 교회에 자기가 헌금한 강단과 의자와 예배당의 벽이 남아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언젠가는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갈 분들인 것을 믿습니까? 우리는 나그네라는 것을 믿으셔야합니다. 바로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인생 말입니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이세상의 어떤 것도 내 것이 없습니다. 주님께서 잠시 내게 맡긴 것입니다. 우리는 다 주님께서 위탁하신 것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사용하다가 주님께서 오라하면 다 놓고 가야 되는 것입니다. 집을 몇 채 가지고 있다고 해도 내가 사는 것만 내가 쓰는 것입니다. 많은 재물이 있다고 해도 내가 쓴 것만  내 것인 것입니다. 보람 있고 가치 있는 일에 우리의 물질을 사용할 수 있다면 그것만이 남는 것입니다.

5~6년전, 미국에서 베스트셀러로 많이 읽힌 책이 있는데, 그 책의 제목이 ‘다 쓰고 죽자’입니다.
어떤 할머니가 130억의 재산을 가지고 있었는데, 절약하고 쓰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 할머니가 길을 지나가다가 영양실조로 쓰러져 뇌진탕으로 의식을 잃어버리고 식물인간이 되었습니다. 그 많은 재산은 누구의 손에 갈까요? 아무도 모릅니다.

우리는 ‘이 재물 재산, 자식에게 남겨주지’하고 쉽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자식들에게 남겨진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어떤 도둑에게 들어갈지, 사기꾼에게 돌아갈지 아무도 모릅니다.
내가 쓰고 있는 것만 내 것인 것입니다. 우리는 나그네 인생길을 걸어 갑니다. 이 짧은 인생길을 걸어가며 얼마나 보람 있고 빛나는 삶을 살 수 있을까? 그것이 우리의 고민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전을 건축 하는데에 우리의 물질을 드릴 수 있다면 그것은 바로 하늘의 보화를 쌓는 일이기에 가장 가치 있고 복된 일입니다.

오늘 예배를 마태복음 6장 19절~20절 말씀으로 마칩니다.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고 도적질을 하느니라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지 못하고 도적질도 못하느니라.” 아멘. (이 영 무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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