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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영생을 주는 노인대학 (눅 16:1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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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에는 ‘지옥이 과연 어떤 곳인가?’ 라는 것에 초점을 맞추었고 본문의 앞부분을 중심으로 말씀드렸다고 하면, 오늘은 그 외에 남는 문제들을 가지고 말씀드리려고 한다.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가장 기본적인 진리를 가르쳐 준다. 이 세상에서의 삶이 전부가 아니라 죽음 이후에는 영원한 삶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는 진리이다.

  나의 죽음 이후에는 천국과 지옥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천국과 지옥은 반드시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현대인을 이것을 거꾸로 생각한다. 이 세상의 삶이 영원할 것처럼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끝이 있다. 반대로 천국과 지옥은 없는 것처럼 생각하고 행동한다. 그러나 천국과 지옥은 실제로 존재하고 그 두 나라는 영원하다. 오늘 성경을 보라. 성경은 아무리 가진 것이 많고 화려했지만 그 부자의 이 세상의 삶을 단순한 한 구절로 표현한 반면(또 그렇게 고생하고 아픈 날들을 살았던 거지 나사로의 세상의 삶도 역시 단 몇 구절로 표현한 반면), 성경의 대부분은 그들이 영원토록 살아야 했던 천국과 지옥의 모습을 더 많이, 더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다는 것을 볼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는가? 이 세상의 삶은 잠깐 이지만 천국과 지옥의 삶은 영원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아무리 읽어봐도 이 부자가 왜 지옥에 갔는지, 그리고 거지 나사로는 왜 천국에 갔는지 정확하게 말씀하고 있지 않다. 우리는 여기에서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가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는 것보다 더 어렵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생각하면 안 된다. 부하게 살아가는 것은 죄가 아니다. 하나님은 자녀인 우리들이 이 세상에서 잘되고, 건강하고, 부자로 살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은 우리들이 결코 이 세상에서 가난하게 살면서 멸시와 고통 받는 것을 원하시는 분이 아니다.

  우리가 이 성경을 읽으면서 분명한 것은 이 부자는 다른 사람과 (특별히 고통 받고, 어렵고, 병들고, 먹을 것이 없는 이 나사로와 함께) 그의 부유함을 나누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것만은 분명하다. 

  우리가 오늘 성경을 대하면서 생각해야 되는 말씀은 오히려 예수님의 다른 말씀이다.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희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 또 예수님은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 (눅 12:13-21)을 통해서 ‘자신이 가진 여유 있는 돈을 자신의 안락함을 추구하는 데 사용하는 사람을 가리켜서 어리석다’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어리석은 부자의 말씀의 결론을 이렇게 내리셨다.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위하여 쌓아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치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 (눅 12:21)

  재물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을 두 가지로 요약한다면 다음과 같다.

  첫째, 우리의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는 것이요, 둘째,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한 사람이 되라는 것이다. 그러면 이것이 어떻게 가능할까? 우리는 어떻게 재물을 사용해야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는 것이요, 하나님에 대하여 부요한 사람이 될 수 있는가? 그것은 간단하다. 내가 하늘의 보화를 위해 하나님을 바라보면 된다. 그것을 통해서 나는 하나님 안에서 쉬고, 그 분 안에서 안전하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이다. 내가 가진 모든 돈이 하나님의 것이요, 따라서 돈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의 보화요, 보험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의 평안이요, 가진 물질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의 기쁨이요, 안전이라고 하는 것을 아는 사람이다.

  여러분이 가진 것 가운데서 하나님을 위해서, 다른 사람과 나누기 위해서 하나님께 드린다면 그것은 내가 돈이 나의 부요함과 나의 기쁨과 나의 안전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만이 나의 부요함이요, 기쁨이요, 나의 안전임을 입증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왜 넘치는 복을 주실까? 그것은 우리가 살기에 충분한 만큼 갖고 그 나머지는 영적, 육체적, 사회적 비극을 줄이는 모든 선한 일에 사용하기 위해서이다. 충분한 것은 우리를 위한 것이지만, 넘치는 것은 다른 사람을 위한 것이다. 우리는 존 파이퍼 목사님이 핏대를 올리며 한 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당신이 하나님의 은혜의 통로가 되기를 원한다면 금으로 만든 전선이 될 필요는 없다. 구리면 족하다.” 그런데 우리는 너무 많이 모으고, 너무 많이 치장하고, 너무 많이 사치하는데 문제가 있다. 우리는 우리를 금으로 만들려고 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의 통로가 되기 위해서는 구리만으로 족하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이 본문의 말씀은 우리에게 한 가지 중요한 사실에 대해서 말해준다. 이 세상에서의 현재의 삶이 우리의 미래의 삶을 결정한다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의 삶의 모습이 결국 우리가 있을 천국과 지옥의 모습을 결정한다. 이 세상에서의 우리의 모습은 우리가 앞으로 거하게 될 천국과 지옥과 그렇게 맞닿아 있다.

  오늘 부자는 아브라함을 향하여 불꽃가운데서 고통 받는 자신을 위하여 물 한방울을 달라고 하지만 그 부탁은 거절당한다. 지옥은 물 한 방울의 긍휼도 없는 곳이다.

  그의 첫 번째 간구가 이루어지지 않자 그는 두 번째 요구를 한다. 지금 내가 이렇게 고통 받고 있으니 지금 세상에서 살고 있는 내 형제들에게는 제발 이곳에 오지 않도록 나사로를 그들에게 파송해달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 역시 거부된다. 아브라함은 거부의 이유를 두 가지로 설명한다.

첫째는, 지금 그들에게는 모세와 선지자가 있으니 그들에게 들어야 한다. (성경과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에게서 천국과 지옥에 대해서 들어야 한다.)

둘째는, 그들이 모세와 선지자 (성경과 복음 전하는 자)를 통해서 듣지 않으면 비록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사람들이 그들에게 가서 복음을 전해도 듣지 않기 때문이다.

  지옥에 관한 책 중에서 압권은 래리 백스터 목사님의 “정말 지옥은 있습니다.”라는 책이다. 이 책은 30일 동안 지옥을 보고 온 것을 그래도 적었는데 그 책에 본문과 유사한 장면이 나온다.

  “우리는 다음 불가마가 있는 곳으로 오게 되었다. 첫 번째 크기와 같은 이 불가마 속에는 다른 해골의 형체가 있었다. 그것은 한 남자의 목소리였다. ‘주여 저에게 긍휼을 베푸소서.’ 그들이 말을 할 때 비로소 나는 그 영혼이 남자인지 여자인지 알 수 있었다.

  그는 흐느끼면서 말했다. ‘주님, 제가 너무 잘못했습니다. 저를 용서하옵소서. 이곳에서 저를 내보내 주소서. 저는 여러 해 동안이나 고통이 있는 이 곳에 있습니다. 간청하오니 저를 밖으로 나가게 해 주소서!’ 그가 호소하는 동안 그의 해골의 형체는 격렬한 느낌으로 흔들렸다. 나는 예수님을 쳐다보았고 그 분 역시 우는 것을 보았다. 그 분이 위로 쳐다보시면서 말씀하셨다. ‘나의 아버지여, 나의 아버지여, 긍휼을 베푸소서!’

  그 사람은 다시 말했다. ‘이제 저는 저의 죄 값을 충분히 치루지 않았습니까? 저는  죽은 지 40년이나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기록된바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네가 지은 죄의 대가를 치루고 네가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살아생전에 나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을 믿어 구원받느니라. 너는 진리를 믿지 않았다. 나의 백성이 너에게 천국에 이르는 길을 보여주기 위해서 너에게 갔을 때도 너는 그것을 거절했다. 너는 그들을 비웃었고 또 복음을 거절했다. 내가 너를 위해 죽기 까지 했어도, 너는 나를 조롱했고 너의 죄를 회개하지 않았다. 내 아버지께서 너를 구원하기 위해서 너에게 많은 기회를 주었지만 너는 거절했다. 만일 네가 그때 들었더라면...’ 예수님은 눈물을 흘리시며 말씀하셨다.

  ‘압니다. 주여 압니다!’ 그 남자는 부르짖었다. ‘하지만 지금은 회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너무 늦었다. 심판은 끝났느니라.’ ”   

  지옥에서 아무리 많은 날 동안 회개한다고 해도 소용이 없다. 우리에게 유용한 날은, 우리가 붙잡을 수 있는 날은 지금 내가 현재 살아가고 있는 이 시간일뿐이다.

  우리에게 소중한 것은 지금 현재의 시간이다. 지금은 복음을 들을 수 있는 기회의 시간이요, 천국을 붙잡을 수 있는 시간이다. 이 기회의 시간이 지나가 버린다면 우리는 영원한 지옥에서 영원한 후회와 고통의 시간을 보내야만 한다. 얼마나 소중한가? 지금의 시간은.

  그런 의미에서 노인대학은 가장 절실하고 필요한 선교적사명이 걸려있는 사역이다. 어쩌면 하나님은 이 노인대학을 통해서 복음에 대해서 다시 한번 들을 수 있는 기회를 주시는 것이다. 저는 허리가 꾸부정한 할머니의 모습에서, 계단을 잡고 힘겹게 올라오는 노인들의 모습 속에서, 한 시간 이상은 힘들다고 못 앉고 누워버리는 약함 속에서, 지난주에 왜 못 오셨냐고 물으면 감기 몸살이 나서 너무 힘들었다고 말하는 그 눈물 속에서, 아직도 우리에게 기회를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보게 된다. 이 기회가 지나가 버린다면 그들은 어디에서 이제 다시 복음을 듣게 될까? (어쩌면 “영원토록 아닙니다.”입니다.) 우리는 이것이 저들에게 복음을 들려줄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하고 영원한 생명을 말하고, 천국을 보여주고, 지옥의 비참함을 일깨우고, 예수님을 육신의 약함 속에서도 붙잡을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한다.

  우리는 그 영원한 생명을 위해 노래하고, 영원한 생명을 위해 춤추고, 영원한 생명을 주기 위해서 아침부터 땀을 흘리며 가스불과 씨름하고, 영원한 생명을 위해서 목사가 도라지 타령을 하는 법이다. 삶으로 굳어버린 그들의 영혼과 마음을 열고 한 줄기 생명과도 같은 복음의 물줄기를 그들에게 뿌리기 위해서 우리는 노인대학을 하고 있다. 노인대학은 영원한 생명을 주기 위해서 존재한다.

  그러므로 노인대학을 귀하게 여겨라. 노인대학이 교회의 사역에서 뒷방에 머무는 곳이 되지 않게 해야 한다. 이 사역은 교회에서 가장 절실한 사역이 되어야 한다. 그들이 복음에 대해서 어쩌면 마지막으로 들을 수 있는 기회이기 때문에 노인대학은 모든 사역보다 절실하고 진실하고 급박한 사역이 되어야 한다. 교사는 이 사명에 충실해야하고, 봉사자들은 그 섬김의 값어치를 알아야하고, 온 교회는 노인대학의 존재이유를 복음 안에서 바라보아야 한다.

  오늘 예수님은 아브라함의 입을 통해서 너무나 귀한 말씀을 해주신다. 예수님은 이 말씀을 통해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사람의 증언보다 이 유한한 세상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의 입술에 더 큰 능력이 있음을 말해 준다. 여러분의 복음 전파에 능력이 없다고요? 그러나 “이 세상에서 복음을 말하는 그 사람의 말을 듣지 않으면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나서 말한다고 해도 그 말을 듣지 않는다.”는 말씀을 명심하라.

  복음 전파하는 여러분의 입술을 과소평가하지 말라. 여러분이 전하는 복음은 죽은 나사로의 부활보다 더 큰 능력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말라.

  우리교회가 복음을 말할 때, 노인대학에서 복음을 전할 때, 나의 입술과 삶을 통해 복음을 증거 할 때 지옥에서 영원히 고통 받는 그 처참한 환상은 영원토록 지워질 것이다. (이 양 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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